1. 고구려의 불교 수용
1. 고구려의 불교 수용
1) 불교의 전래
고구려 중기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되는 시기로서 다양한 제도가 도입·정비되었다. 전통적인 신앙을 넘어 고등종교로서 전래·수용된 불교는 태학, 율령 등 유교적인 제도와 더불어 중국에서 도입되었다.
고구려의 불교는 삼국 중 그 연원이 오래되고 신라도 고구려를 통해 전래되었던 것으로 볼 때, 신라와 비교하여 그 융성 정도가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서(周書)』 고려조에 “불법을 공경하여 믿는다(敬信佛法)”는 기록을 보더라도 고구려에서 불교가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상정할 수 있다.
고구려로의 불교 전래와 관련해서는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前秦)에서의 전래가 공식적인 첫 기록이지만, 그 이전부터 불교와 접촉했음을 알려주는 다양한 기록이 보인다.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晉) 고승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년)과 고려 도인(高麗道人)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실을 통해 볼 때 소수림왕대인 372년보다 이전에 불교가 민간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소수림왕대의 공식적인 전래 이전에 이미 사회 일각에서 불교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백, 1954). 사문을 도인(道人)으로 칭하면서 도교의 도사(道士)와 구별하는 것은 남조불교의 특징인데(신종원, 1992), 고구려의 도인에게 글을 보냈던 지둔도림은 격의불교(格義佛敎)를 대표하는 인물로 고구려 초기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김상현, 2005; 김두진, 2011). 한편, 고구려에는 일찍이 북방불교가 왕실 중심으로 전래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전연(前燕) 왕실에서 불교가 성행하였고, 모용씨(慕容氏)가 침입하였을 때에 고구려에 불교가 알려졌다는 것이다(이용범, 1973; 박윤선, 2004). 혹은 미천왕대 후조(後趙)와의 교류를 통해서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된 바 있고(전호태, 2000; 표영관, 2008), 낙랑・대방 지역을 통해 고구려에 불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도 있다. 특히 357년경으로 편년되는 안악3호분의 천장벽화에 대형 연꽃이 그려져 있는데, 불교와 상관성이 있는 요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여러 정황을 본다면 적어도 4세기 중엽에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문헌기록상으로는 소수림왕 2~5년(372~375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소수림왕 2년에 전진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소수림왕 4년(374년)에 아도(阿道)가 오고, 5년(375년)에 순도와 아도를 초문사와 이불란사에 둔 것을 ‘해동불법의 시초’로 삼고 있다. 『삼국유사』 흥법편 순도조려조에도 고구려 불교 전래에 대해서 「승전」과 고려본기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해동고승전』에서도 불교 전래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은 거의 동일한 편인데, 다만 순도와 아도의 출자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순도의 출자를 진(秦), 동진(東晉) 등으로 기록하고 있고, 아도는 위(魏)에서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순도에 대해서는 전진출자설이 유력하고, 아도는 동진에서 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이기백, 1954).
고구려는 순도와 아도에게 각기 다른 사찰을 지어 거주하게 하였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는 이들의 국적이 다른 까닭에 불교 의례를 행하는 것도 각기 차이가 있어서 별도 사찰을 지어 머물게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초문사(肖門寺)가 본래 성문사(省門寺)였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통해 볼 때 관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명칭이 와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불란사의 명칭은 토어 내지는 외국어의 음역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후일 각각 흥국, 흥복으로 개칭되는 사찰명을 통해서도 전자는 국가와의 관계가, 후자는 기복적인 성격이 드러나고 있어 처음부터 그 출발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김복순, 2011). 특히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함께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보낸 것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를 두고 고구려 초전불교가 공인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두진, 2011).
불교가 도입될 즈음의 고구려와 전진의 관계를 보면, 고국원왕대에(370년) 모용평이 고구려로 피난해 오자 고국원왕은 즉각 모용평을 잡아서 전진으로 보냈다. 고국원왕이 모용선비 세력에게 원한이 있었던 전진 왕 부견에게 모용평을 보낸 것을 보면 전진과 고구려는 당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해인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소수림왕이 즉위하자 전진의 부견이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는 부견이 고구려에 대해 보답을 한 차원이기도 하고, 신왕의 즉위와 관련한 외교적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부견은 불교를 신봉하였고, 특히 중국 불교 교단을 새로 확립하여 그 수장의 지위에 올라있던 도안(道安, 314~385년)을 지극히 존숭하기도 하였다. 부견이 사절과 함께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함으로써 고구려도 별다른 저항 없이 불교를 순조롭게 받아들였다. 이는 아마 중앙집권화가 무르익는 소수림왕대에 전래되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고, 고구려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어 퍼져 있었으므로 큰 반발이 없었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일부 자료에서는 고구려에 불도를 전래한 인물을 담시(曇始)로 기록하고 있다. 『고승전(高僧傳)』, 『위서(魏書)』, 『법원주림(法苑珠林)』, 『북산록(北山錄)』 등과 최치원이 지은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에 이러한 인식이 나타난다. 특히 최치원의 경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순도의 불교 전래가 고구려 측 전승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었고, 또한 중국 문헌에 비교적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국 측 전승 기록에 의존해 이와 같은 인식을 보였을 개연성이 높다. 즉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삼국유사』 흥법편 초반부에는 순도의 불교 초전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중국 측 사료에는 대부분 불교의 초전자를 담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민간으로의 전래와 왕실로의 전래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최광식, 1991), 불교의 전래와 전개에 대해 차이가 있는 기록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도 필요할 것이다.
담시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오래되었으나 그에 의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불교가 전해져 불교 본연의 면목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영태, 1986; 김영태, 1990). 또한 초전불교가 격의불교였다면, 담시는 이에서 벗어난 새로운 불교 경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순도와 아도 이후 변화된 중국의 불교 경향을 고구려에 전해서 불교 전래자로 기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상현, 2007). 아울러 담시가 고구려에 불경과 율장을 가지고 와서 구복적인 성격의 불교가 아닌 본의불교로서의 내용을 고구려에 알렸기에 사상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내왕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김복순, 2011). 한편 담시가 북조불교를 전했을 것으로 보면서 광개토왕대 요동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승려라고 파악하기도 하며(남무희, 2011), 반대로 담시가 중국 남방불교신앙과 연결되었던 점에서 공인불교신앙의 모습으로 여기기도 한다(김두진, 2011). 전체적으로 보면 불교가 수용, 확산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문헌기록상 차이가 있는 부분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 순도조려조에 고구려 불교를 흥하게 한 인물이 나열된 세주를 보면, 고구려 불교사의 전개와 관련해 순도(順道)-법심(法深)-의연(義淵)-담엄(曇嚴)을 기록하면서 ‘승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승전’을 『해동고승전』이라고 본다면, 『해동고승전』에는 순도(順道)-망명(亡名)-의연(義淵)-담시(曇始)의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때 법심과 망명이 동일인이고, 담엄과 담시도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남무희, 2011). 그런데 『해동고승전』에도 법심과 담엄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여타 기록에도 이들 두 승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해동고승전』에서의 순도·망명·담시 등은 고구려 불교 전래 및 수용 시기의 인물이고, 의연은 6세기 중반 이후 평원왕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망명은 동진의 고승 지둔과 서신 교류를 하던 고구려 도인으로서 소수림왕대 이전 이미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바, 순도보다 앞선 시기에 활동하였던 인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망명(亡名)은 이름이었다기보다는 이름이 실전된 고구려 도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담시는 광개토왕대에 요동으로 와서 활동한 승려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삼국유사』 세주의 순도-법심-의연-담엄의 순서가 시간 순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해동고승전』의 기록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승려인 법심과 망명, 담엄과 담시가 동일인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2) 불교의 성격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이 종교이다. 고등종교로서의 불교는 보통 한국고대사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성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에서 불교의 공식 전래를 소수림왕대로 기록한 이유는 당시 이루어졌던 체제정비의 일환으로 국가 차원에서 강조하려 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고구려 초기불교의 성격은 외교적이고 시책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신종원, 2006).
소수림왕대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면서 수도인 국내성 지역에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창건됐고, 순도, 아도 등과 같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현재 국내성 지역에서 사찰로 보이는 유적을 확인하기는 매우 힘들다. 과거 동대자유지가 초문사, 집안역 남쪽에 위치한 석주 건물지를 이불란사로 추정하기도 하였지만(문명대, 1998), 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동대자유지는 출토유물로 볼 때 소수림왕 이후 비교적 늦은 시기 고구려 유적으로 보이고, 집안역 인근 석주건물지도 사찰로 보기 어렵다. 현재까지 국내성 인근에서 사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된 바가 없어서, 국내성 내부의 기와들이 확인되는 유적 가운데 초문사와 이불란사 유적이 존재하였을 개연성이 있다(정호섭, 2018).
고구려가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은 대체로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치·외교적인 의도에서 발현된 것으로, 고구려 서쪽의 안정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이유로는 당시 북조불교의 호국사상이 필요하였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각 정치집단별로 전해내려온 다양한 재래신앙이 고구려인의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였기에 국가공동체의식을 새롭게 강화할 필요에서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체계이면서 국왕 중심의 호국불교인 북조불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이기백, 1954).
그런데 고구려가 국가 혹은 왕실 차원에서 불교 전래와 수용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근래에는 불교가 왕권 정당화 내지는 중앙집권화의 이론장치로 역할을 했다거나, 평양 지역의 중국계 집단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등 불교의 정치적 기능을 강조한 기존 견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개진되기도 하였다. 고구려 불교 전래 및 수용 문제와 관련해 왕권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음을 비판하고, 이른바 국가적 공인 이전 사전(私傳)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강조하기도 한다(최광식, 2007). 나아가 고구려의 불교 수용은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 민과 지배세력 다수의 공감을 전제로 한 새로운 종교 내지는 문화의 수입이지, 왕권강화 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조우연, 2011). 즉, 고구려의 불교는 국가 혹은 왕실 차원에서 전래, 수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전진 사이에는 고구려가 모용평을 보낸 370년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외교사절 파견이 확인되지 않고, 370년에 고구려 사절이 전진에 파견된 것으로 보더라도 그때 불교 전래에 대한 요청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70년에 고구려가 모용평을 전진에 보낸 것은 모용선비에 대한 과거부터의 원한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점차 부상하고 있던 전진 세력에 대한 외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관련해서 대체로 왕권강화나 중앙집권화의 이론체계로서의 성격에 주목하여 온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고구려 불교 전래에 있어 국가나 왕실이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고등종교로서의 불교를 통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정비할 필요성에서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결과론적 해석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와 같이 불교 전래와 수용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4세기~5세기 고구려의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당시 고구려에서 불교, 율령, 태학 등 여러 제도가 도입된 점을 보면, 이러한 것들이 결국 중앙집권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고구려에서 국가 통치에 불교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진의 부견이 불교를 국가 통치의 방편으로 보호하였다는 사실과 연결해볼 때 충분히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국양왕 9년 불법구복에 대한 숭신을 하교(下敎)하고, 광개토왕대에 평양에 9사(九寺)를 창건하는 등 고구려 불교는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국양왕 9년의 하교에 대해서는 불교의 공인으로 보기도 하지만(최광식, 1991), 대체로 고국양왕대의 불교 확산과 관련이 있다. 이후 광개토왕대에는 천도를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평양에 9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였다(서영대, 1981). 광개토왕대에 평양에 9사가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기에 광개토왕대부터 평양에 9사가 창건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신동하, 1988), 장수왕대 이후에 모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정선여, 2007). 이것은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평양 천도와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완성도 광개토왕에서 장수왕까지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9사가 창건된 것은 평양을 불사로 둘러싸여 부처의 보호를 받는 왕도로 인식하였던 것이며, 9사는 중앙과 8방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조경철, 2008). 결국 평양의 9사 창건은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의 숭신을 권장하는 측면뿐 아니라, 국내성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백제의 침입과 관련하여 불교의 호국적 역할을 기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서영대, 1981; 신동하, 1988). 현재까지 고구려시기 평양 지역의 사찰로는 청암리사지,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낙랑동사 등이 있다. 이 중 청암리사지는 문자왕대에 창건된 금강사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정릉사는 북위의 능원제를 수용한 고구려 능원제와 관련하여 창건한 사찰로 보인다(정호섭, 2011).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도 평양 9사의 실체는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과 함께, 문맥상 ‘九寺’를 ‘아홉 관청(혹은 관사)’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전개와 더 자연스럽게 맞물린다는 의견도 있다(조우연, 2011). ‘寺’의 실체와 관련해, 한대(漢代) 이래로 9경(九卿)의 관서를 ‘寺’라 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낙랑 지역에 새롭게 관청(九寺)을 창설한 것은 본격적인 평양 천도를 위한 중앙관료기관 창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광개토왕 2년 가을 8월조에는 “평양에 9사를 창건하였다(創九寺於平壤)”로 되어 있다. 만약 9개의 관청이라면 ‘創’이라는 글자보다는 ‘立’ 혹은 ‘置’ 등이 어울리는 표현이다. 대체로 『삼국사기』 용례를 살펴볼 때 ‘創’은 주로 사찰 건립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정호섭, 2018). 이러한 점을 보면 현재의 기록 이외에 다른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 한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일반적이다.
불교는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래신앙도 포섭하는 포용성이 강한 신앙체계였다. 또 왕즉불사상, 즉 ‘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민을 통합하는 데 적합하였다. 불교의 수용과 지방으로의 확산은 왕실과 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였다. 왕즉불사상은, 왕은 부처와 같으므로 부처를 받들듯이 국왕을 받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하였고, 점차 다양한 집단으로 하여금 배타성을 버리고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게 하였다. 고구려에서 불교의 수용과 확산은 고구려 민을 국왕 중심으로 결집시키고 지역별로 나타나는 분립적 성격을 극복하여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놓아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노중국,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