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성시기의 도성
1. 국내성시기의 도성
1) 국내성 지역의 자연지리와 생태환경
국내성 지역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남부에 있는 집안시이다. 압록강 중류 북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심지의 좌표는 북위 41° 7′ 13″, 동경 126° 10′ 41″ 일대이다. 북쪽으로 통화시(通化市)와 연접하고, 서쪽으로는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으로는 북한 자강도의 위원군·초산군·만포시를 마주보고 있다.
집안 지역의 중심부는 압록강의 흐름을 따라 동북쪽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길쭉하게 형성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분지의 길이는 약 16km이며, 폭은 가장 넓은 곳을 기준으로 약 2.5km가량이다. 일부 산줄기로 인해 전체 분지는 다시 세 개의 소분지로 구분된다. 북쪽 압록강 상류의 하해방(下解放) 지역, 하류의 마선구(麻線溝) 지역, 그리고 가장 넓은 중앙 분지로 나눌 수 있다(여호규, 2019).

그림1 | 집안 지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 유적
집안분지 안쪽은 사계절이 분명한 반대륙성 반해양성 계절풍기후를 가지고 있다. 북쪽의 노령산맥(老嶺山脈)이 거대한 자연 병풍 역할을 하여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한편, 서남쪽에서는 압록강을 따라 따뜻하고 습윤한 해양성기류가 통한다.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에 비교적 뚜렷한 기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노령산맥 남쪽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난한 집안분지 지역을 ‘동북 지방의 작은 강남(東北小江南)’이라 부르기도 한다.
2019년 자료에 따르면, 집안 지역의 연강수량은 800~1,000mm, 연 평균기온은 약 10℃(연누적온도 3,650℃), 무상일수(無霜日數)는 150일 전후, 연평균풍속은 1.6m/s이다. 길림성 전체에서 연평균기온이 가장 높고, 연강수량과 무상일수가 가장 많고, 바람은 가장 적다(집안시 인민정부 홈페이지, 2019). 그런데 1980년대 초 자료를 참조하면, 당시 집안 지역의 연평균기온은 6.3℃, 1월 평균기온은 -14.8~-15.9℃이며, 7월 평균기온은 23.2℃였다고 한다. 연강수량은 900~1,000mm, 무상일수는 140~160일이었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두 자료를 비교하면, 현재의 연평균기온은 불과 수십 년 전에 비해 크게 상승한 편이다.
고구려사에서 국내(國內)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이다. 이에 따르면 유리왕 21년(2년) 봄에 하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발생하여 설지(薛支)라는 인물이 돼지를 잡아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설지는 돼지를 쫓는 도중 ‘국내 위나암(國內 尉那巖)’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이 살기 좋은 지역임을 깨닫고 유리왕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습니다.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키우기 알맞고, 또 순록·사슴·물고기·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단지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리왕이 같은 해 가을 9월에 직접 국내 지역을 방문하여 지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유리왕 22년(3년)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유리왕대 기록에 등장하는 ‘국내 위나암’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리고 유리왕대에 국내 지역으로 천도를 감행했다는 기록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설지가 유리왕에게 보고한 내용을 지금의 집안 지역 자연환경과 비교해 보면 묘사 자체는 비교적 잘 대응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산수가 깊고 험하다는 것은 집안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노령산맥의 산줄기와 이 지역을 관통하여 흐르는 압록강의 존재와 대응한다. 순록과 사슴은 주로 산과 숲에 사는 동물이고, 물고기와 자라는 하천에서 얻을 수 있는 어자원이므로, 이 역시 앞서 묘사한 자연환경 조건과 부합한다. 오곡을 키우기 알맞다는 것은 농사에 적합한 토지가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하상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는 집안 지역의 환경 조건과 잘 맞는다. 집안 지역이 온난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농작에 유리한 점이다. 이처럼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유리왕대 천도 기사는 사실성 문제와 별개로, 당대 고구려인들이 인식한 집안 지역의 지리 정보와 이미지를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환도성과 국내성의 규모와 형태
집안 지역에는 두 개의 고구려 성 유적이 존재한다. 하나는 산성자산(山城子山)에 자리하고 있는 산성자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집안 시가지 중심부에 남아 있는 집안 평지성이다. 산성자산성과 집안 평지성과의 거리는 약 3km 정도이다.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산성자산성을 고구려 때의 환도성, 집안 평지성을 국내성으로 이해하는 데 이견이 없다.
산성자산성은 계곡을 품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산성이다. 동쪽·북쪽·서쪽이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능선을 활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총길이는 6,947m이며, 성문은 서쪽에 1개, 동쪽·남쪽·북쪽에 각각 2개씩 총 7개가 확인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정문은 지대가 낮아 전방이 개방되어 있는 남쪽 방향에 조성되어 있다.
산성자산성 정문 앞으로는 동북쪽에서 흘러내려온 통구하(通溝河)가 방향을 크게 틀어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 물길은 집안 시가지에 자리한 집안 평지성 서쪽 성벽의 옆을 지나 압록강 본류와 합류한다. 산성자산성의 동남쪽 산기슭에 조성된 충적지에는 대규모 고분군이 펼쳐져 있는데, 바로 집안 지역 주요 고구려고분군 중 하나인 산성하고분군이다.

그림2 | 환도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자산성과 주변 지형
집안 평지성은 돌로 쌓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의 성이다. 인구가 밀집한 시가지 내에 존재하는 유적이므로 훼손 정도가 심한 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찍은 성벽 사진과 2000년대 이후 같은 곳을 촬영한 사진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80년에 수행되었던 조사에 따르면, 집안 평지성의 전체 규모는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로 전체 둘레 2,686m였다(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그런데 2003년에 이루어진 재조사에서는 유실된 동벽과 남벽을 제외하고 서벽은 702m, 북벽은 730m로 측정되었다. 성벽의 형태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모서리가 둥글게 축조된 부분도 있어서 기준점의 차이로 인한 오차로 이해할 수 있다. 성의 전체 규모는 대체로 둘레 2.7km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되며, 성문은 2003년 조사 당시 동문과 남문은 각각 2개씩, 북문은 4개, 서문은 1개였던 것으로 보고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그림3 |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집안 평지성과 주변 지형
3) 환도성과 국내성의 위치 비정을 둘러싼 논쟁
국내성과 환도성은 역사서에서 여러 차례 확인되는 고구려의 왕성이다.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 명확한 인식이 확립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의 영역은 대동강 이남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698년 건국한 발해가 집안 지역을 판도에 넣기는 하였으나 독자적인 역사서를 남기지 못한 채 멸망하였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옛 왕도였던 졸본이나 국내성 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가 거의 망실되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조차도 고구려 때의 국내성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영역 안에 있을 것이나,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림4 | 국내성 서벽의 형태 비교(1937~1940년 무렵)
- (동북아역사재단, 2009,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1-도성과 성곽』)
- (동북아역사재단, 2009,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1-도성과 성곽』)

그림4 | 국내성 서벽의 형태 비교(2004년)
- (동북아역사재단, 2009,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1-도성과 성곽』)
- (동북아역사재단, 2009,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1-도성과 성곽』)
국내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압록강 하류 일대에서 국내성을 찾는 시각이 형성되었다.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 유소(柳韶)열전에 따르면, 유소가 처음 북쪽 국경에 관방을 설치하였다고 설명하면서 그 위치를 “서쪽 해변의 옛 국내성계로부터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서술하였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국내성의 위치를 평안도 의주로 비정하는 내용이 실렸다. 또 조선 후기에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보면 의주 건너편에 있는 금나라의 유적인 구련성(九連城)을 국내성지로 파악하는 인식도 확인된다.
이처럼 국내성의 위치를 압록강 하구에서 찾게 된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실려 있는 “안시성은 옛날 안촌홀이다–혹은 환도성이라고도 이른다”는 구절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시성과 환도성은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의 지명이었으나 김부식은 이를 혼동하여 양자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신당서(新唐書)』에서 마자수(馬訾水: 압록수)의 흐름을 설명하는 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신당서』에서는 마자수가 백산(백두산)에서 나와 국내성 서쪽을 지나 다시 서남쪽의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기술하였다. 이를 보고 국내성과 안시가 인접한 지역이라 오해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신당서』에 등장하는 안시라는 지명은 안평(安平: 서안평, 지금의 丹東)의 오류이기도 하다(武田幸男, 1989).
보다 진전된 연구는 조선 후기 치밀한 문헌고증을 중시하였던 실학자들이 수행하였다.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환도의 위치를 추정하며 강계·이산 등의 강 북쪽 지역일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한진서(韓鎭書)는 『해동역사속(海東歷史續)』에서 국내성은 만포진의 강 건너편, 환도는 초산부 강 건너편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국내성은 초산부 강 건너, 환도는 만포보의 강 건너에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국내성의 위치를 압록강 하구에서 찾았던 과거에 비해 실상에 크게 근접한 것이었다. 다만 현지답사를 결여한 문헌고증에 치중한 연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증명’의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1906년에는 환도성·국내성의 위치 탐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집안 지역의 판석령(板石嶺)이라는 곳에서 관구검(毌丘儉)이 세운 기공비의 깨진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관구검은 3세기 중엽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하였던 인물이고, 판석령은 집안 지역에서 서쪽에 있는 교통로의 산능선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물적 증거의 발견을 통해 환도성이 집안 지역에 존재하는 성의 이름이라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일본 학자 도리이 류조오는 관구검 기공비의 깨진 조각이 발견된 곳과 인접한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으로 지목하였다. 현재의 통설과 일치하는 구체적 비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그는 국내성은 집안 지역이 아닌 다른 곳이라 생각하였다. 바로 요령성 환인 지역에 위치한 오녀산성(五女山城)이었다. 『삼국사기』 유리왕조에 보이는 ‘국내 위나암’이라는 표현을 중시하여 ‘국내성=위나암성=오녀산성’이라 이해한 것이다(鳥居龍藏, 1914). 다만 오녀산성=위나암성설을 도리이가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이 견해는 이미 조선시대 학자들이 제시한 바 있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공민왕 19년(1370년) 이성계가 펼친 군사활동을 서술하며, 그 배경이 된 우라산성(亏羅山城)에 대해 주석을 달았다. 이때 『여사제강(麗史提綱)』(1667년)을 편찬한 유계(兪棨)의 견해를 인용하며, 이곳이 옛날 위나암성인 듯하다고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환도성과 국내성이라는 명칭은 동일 지역에 대한 이칭일 뿐이며, 모두 집안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白鳥庫吉, 1914). 그간 환도성과 국내성을 아예 다른 별개의 지역으로 보아왔던 통념을 깨고, 두 성을 한 지역에서 찾는 인식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한편, 세키노 다다시는 많은 고구려 유적이 산재해 있는 집안분지 전체를 고구려 왕도인 국내성으로 파악하였다. 환도성은 이곳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별개의 장소를 가리키는 지명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세키노는 평양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고구려인들은 평상시에는 평지에 있는 성에 머물며 생활을 하다가 변란이 일어나면 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는 고유의 도성방어체제를 운용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산성자산성과 집안 평지성을 왕도인 국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로 파악하였다(關野貞, 1914).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국 학계의 발굴조사가 이어지고,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환도성과 국내성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차차 정리되었다. 이제 집안 지역 내에 있는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으로, 집안 평지성을 국내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중·일 학계에서 공히 안정적인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4) ‘산성-평지성’ 모델과 환도성·국내성의 축조 시기 문제
세키노가 제기한 ‘산성-평지성 조합’ 모델은 고구려 도성체제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해되었고, 고구려 존속 시기 내내 관철되었다고 여겨졌다. 이에 고구려 도성 연구는 산성과 그에 대응하는 평지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합되었는지 그 실상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환인 지역에서는 산성인 오녀산성과 평지에 조성된 토성인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의 조합, 혹은 오녀산성과 나합성(喇合城)의 조합이 주목되었다. 집안 지역에서는 산성자산성과 집안 평지성, 그리고 평양 지역에서는 대성산성과 안학궁, 혹은 대성산성과 청암동토성의 조합이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림5 | 국내성 남쪽 성벽의 단면도(양시은, 2014, 원도는 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 1층. 교란층 2층. 황갈색사질점토층(토축) 3층. 황색사질점토층 4층. 황색사질점토층 5층. 갈색사질점토층 6층. 사질력석층
A. 1차 건축(고구려) B. 2차 건축(고구려) C. 민국시기 건축(근대)
- 1층. 교란층 2층. 황갈색사질점토층(토축) 3층. 황색사질점토층 4층. 황색사질점토층 5층. 갈색사질점토층 6층. 사질력석층
A. 1차 건축(고구려) B. 2차 건축(고구려) C. 민국시기 건축(근대)
하지만 근래에는 이러한 모델의 적용에 대해 도식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권순홍, 2016; 기경량, 2017a). 이는 그간 집안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성과를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국내성 성벽은 1975~1977년 중국 학자들이 시굴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돌로 쌓은 성벽 하단에서 토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에 조사자들은 이 자리에는 본래 한대(漢代) 토성이 있었는데, 나중에 고구려인들이 돌로 증축하여 재활용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국내성지가 본래 현도군 고구려현의 치소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集安县文物保管所, 1984).

그림6 | 국내성 내 제2소학교에서 출토된 ‘갑술’명와당(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그림7 | 국내성 내 구역 구분과 권운문와당 출토 현황(여호규, 2012)
그런데 2000~2003년 재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기존과 다른 이해가 도출되었다. 재발굴과정에서는 토성으로 여겨지는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고, 성돌 내부의 다짐층에서 고구려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아래쪽의 토축 부분과 위쪽의 석축 부분이 동일한 고구려시기의 것임이 확인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1970년대 조사에서 한대의 토성이라 생각했던 부분은 실제로는 토성이 아니라 고구려가 성벽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성토층을 오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실제로 연천의 호로고루나 당포성 등 발굴이 이루어진 또 다른 고구려 성에서도 석축 성벽 아래 토축 성토부가 확인된 바 있다(양시은, 2014).
문제는 국내성의 축조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 간 뚜렷하게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 자료만 놓고 보자면 4세기 이전의 것은 확인하기 어렵다. 2003년 조사된 국내성 중심부의 체육장 지점의 가장 아래 문화층에서는 권운문와당과 동진시기(317~420년)에 제작된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또 이곳 외에도 국내성 내부 곳곳에서 명문을 새긴 권운문와당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갑술(甲戌, 314년), 태령(太寧) 4년(326년) 등 대개 4세기 초부터 중반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문헌기록상에 ‘국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유리왕대이지만, ‘국내성’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국원왕 12년(342년)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는 내용이 최초이다. 여기에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자료의 상한이 4세기대라는 점을 감안하여 현존하는 국내성 성벽의 축조 연대를 342년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양시은, 2013). 이와 달리 국내성 내부에 4세기 초에 해당하는 고급 건축재가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4세기 초 이전에 이미 국내성지가 조영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4).
문헌기록을 근거 삼아 보다 이른 시기인 3세기 중반으로 축조 연도를 특정하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천왕 21년(247년)에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피폐해지자 “평양성을 새로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평양성을 국내성으로 이해하고 국내성의 초축 시기를 247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심광주, 2005). 이처럼 국내성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3세기 중반~4세기 중반 정도의 시간적 범위가 상정되고 있다.
한편, 환도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자산성은 2001~2003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성내에서는 ‘궁전지’라고 불리는 건축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궁전지유적은 산성 내부의 동북쪽 경사면에 있다. 남북 95.5m, 동서 86.5m 규모이며, 3단의 대지가 조성되고 4열 11기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발굴 결과 궁전지유적에서는 5개의 층위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 제3층과 제4층이 고구려문화층으로 파악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기와편과 귀면문와당, 연화문와당, 인동문와당 등이 출토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그런데 이들 와당의 제작 연대는 비교적 늦은 편이다. 환도성 궁전지에서 출토된 구획선이 없는 연화문와당은 5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김희찬, 2005). 와당유물만으로 환도성 내 궁전지유적의 연대를 추정한다면 5세기 이전으로 끌어올리기 어렵다. 출토유물만으로 판단한다면 환도성의 연대는 3세기 중반~4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상정되는 국내성보다도 늦게 된다.
다만 문헌기록을 보면 환도성은 오히려 국내성보다 그 존재가 명확하게 확인된다. 『삼국사기』에서는 태조왕 90년(142년)에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고, 산상왕 2년(198년)에는 “환도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산상왕 13년(209년)에는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에 올라 도읍을 도륙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관구검의 침입은 244년의 일이다. 3세기 중엽 환도성의 존재가 중국 측 문헌기록에 의해 교차 검증이 되므로, 출토된 고고유물의 연대와는 괴리가 발생한다. 이처럼 문헌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대가 불일치하는 현상은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이에 환도성이 전쟁을 통해 여러 차례 대규모 파괴가 이루어져 개축이 되었다는 점과 2000년대 조사가 성 내부 일부 지점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양시은, 2013). 이는 차후 산성자산성에 대한 면밀한 추가 조사를 통해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앞서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환도성과 국내성의 초축 시기 및 사용 시기가 꼭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고구려 도성이 언제나 산성과 평지성의 조합으로 운영되었다는 통설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국내 지역 도성의 공간 구성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 지역으로 천도를 한 직후에는 마선구 지역을 평상시 거점으로 이용하였고, 환도성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군사방어성으로 기능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 근거는 마선구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 사이의 충적대지에 조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졸본에 있는 평상시 거점인 고려묘자촌(高麗墓子村) 일대의 지형과 유사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른 시기에 조영된 계장적석묘(階墻積石墓)가 이 일대에 많이 분포한다는 점이다. 이 견해에서는 특히 마선구 지역에서 발견된 건강(建疆)유적을 고구려 당시의 주거유적으로 주목한다(여호규, 2005; 강현숙, 2015; 여호규, 2019).
그러나 마선구 일대를 도읍지로 보기에는 고고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환도성과의 거리도 멀며, 졸본에서 국내 지역으로 도읍을 옮겼음에도 훨씬 넓은 평원을 두고 굳이 좁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노태돈, 2012; 임기환 2015). 현재로서는 국내 지역의 초기 중심 주거지가 국내성이 자리하고 있는 지금의 집안 시가지 일대였을 것이라 보는 시각이 보다 일반적이다.
문헌기록을 보면 고국천왕 13년(191년)부터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의 방위명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고구려 왕도는 5부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내성 내부의 간선도로망 형태를 근거로 5부의 형태를 추정하기도 한다. 현재 국내성 내부에는 횡으로 2개의 간선도로가 있고, 종으로 3개의 간선도로가 있어 양자가 교차하며 총 12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이 중 중앙에 위치한 6구역과 7구역이 입지상 주목되었다. 고구려 당시에는 6구역과 7구역이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구역이었고, 이곳에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이곳이 곧 5부의 중심인 중부이고, 이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부가 배치되었다고 본 것이다(임기환, 2003; 여호규, 2012).
이와 달리 성벽 바깥에서 5부의 구역을 찾는 경우도 있다. 국내성 내부에 5부 세력이 모두 거주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다는 점을 들어, 중부만 국내성 안쪽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고, 나머지 4부가 성 바깥에 있었다고 보거나(정호섭, 2015), 5부는 전체 왕도 권역에 걸쳐 존재하였고, 국내성과 환도성은 왕성인 중부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조영광, 2016). 국내성 성벽의 존재에 구애받지 않고, 집안분지 내에서 자연하천 등의 지형에 따라 5부가 분포·구분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기경량, 2018).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근래 발굴성과에 따르면 국내성 초축 시기는 3세기 중반~4세기 중반으로 상정되고 있다. 이는 5부의 구분을 국내성 안에서 획정하려는 견해에 새로운 고민을 부여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아직 국내성이 축조되기 전인 고국천왕대부터 이미 5개의 방위명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성 성벽이 축조되기 전 시기에는 집안분지의 넓은 공간에 걸쳐 방위명부가 분포하고 있었고, 국내성이 축조된 이후에는 성벽 안쪽으로 재편성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임기환, 2015).
집안분지 내에서 5개의 방위명부가 어떻게 배치·구성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자별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다만 집안분지 내에 있는 소하천들을 기준으로 지역을 구분하는 방법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왕의 장지명을 이용하여 왕호를 붙이곤 하였는데, 동천왕(동양왕)·중천왕(중양왕)·서천왕(서양왕)·미천왕(호양왕)·고국천왕·고국원왕 등이 이에 해당하는 사례이다. 이 중 동천은 집안분지 가장 동쪽 임강총 부근을 지나는 소하천, 중천은 우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국내성 남쪽에서 동남향으로 방향을 꺾어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소하천, 서천은 환도성을 지나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통구하, 미천은 마선하(麻線河)로 각각 비정할 수 있다(정호섭, 2011; 조법종, 2013; 임기환, 2015). 이에 이러한 소하천들을 기준으로 삼아 5부의 경계가 나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임기환, 2015; 기경량 2018).
한편, 고구려 왕도 외곽에 왕도의 방어나 배후생산기지, 인구수용처 등의 용도로 왕기(王畿) 영역이 설정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 제시된 범위는 대략 지금의 집안시 전역과 통화현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조영광, 2016). 다만 왕기와 관련된 문헌기록은 매우 미비하다. 고국천왕 13년(191년) 좌가려(左可慮) 등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도를 공격하자, 왕이 ‘기내(畿內)’의 병력을 동원하여 평정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 정도가 전부이다. 왕기의 존재 여부와 구체적 형태는 앞으로 연구가 더 축적되어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8 | 1910년대 집안 지역의 지형(朝鮮總督府, 1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