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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중기 지방통치제의 구조와 발전 과정

1. 중기 지방통치제의 구조와 발전 과정

1) 3세기 말 4세기 초 고구려의 상황과 지방관 파견
(1) 당시 고구려의 상황
고구려 초기에는 계루부와 4나부의 지배자들이 함께 합의하여 국정을 운영해갔다. 그 기본원리는 고구려 말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초기와 중기 이후의 국정운영방식은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귀족들의 성향도 변화되었다.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구축되면서 귀족들도 관등제에 따라 국왕 아래 개별적으로 편제되었다. 과거 독자적 지배권을 가졌던 대가들은 국왕의 신하로서 관료적 성격의 귀족으로 변화되었다. 이들 중에는 중앙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소속 나부를 떠나 계루부 안의 방위부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계루부의 인원은 확대되었고 귀족들의 집결지인 왕경은 정치권력과 부의 중심지가 되었다(林起煥, 1995). 반면 3세기 말에 나부들은 통합력과 독립성을 상실했고 나부민의 분화도 진행되었다. 이후 나부는 몇 개의 친족집단으로 분열된 후 다시 가문별로 나눠졌다.
4세기 이후 부는 왕경(王京) 안 지역 구분인 방위부와 전국 구분의 부만 존재하게 되었다. 왕권이 더욱 강화되고 집권적 통치체제가 구축되면서 제도와 사상면에서 귀족과 왕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 반자치적인 정치집단들에 대한 다원적이고 간접적인 통치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운영방식으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다. 4세기 초에 중앙집권적 영역지배체제의 기본틀이 완성되었다. 미천왕(美川王)의 활발한 정복활동의 성과는 왕권 강화와 집권체제 구축에 원동력이 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西安平)을 확보한 다음 낙랑과 대방 등 한군현(漢郡縣)을 한반도 안에서 완전히 축출했다.주 001
각주 00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본기 미천왕 12년 8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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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조(後趙)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말갈계 종족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모용씨(慕容氏) 세력을 성공적으로 견제하였다.주 002
각주 002)
『진서(晉書)』 권106 전기(傳記) 후조석륵(後趙石勒) 건평 1년조; 『양서(梁書)』 권54 동이열전 고구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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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군사활동의 성공에 따라 국제적 위상이 강화되고 수취 기반이 확대되었다. 영토 확장과 생산력 증대로 국력이 성장했고, 문화적 측면 등 여러 방면에서의 발전을 제도적으로 반영한 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에 지방 지배방식도 그에 걸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2) 거점 중심 지방 지배체제의 성립
3세기 후반경 고구려 중앙정부에서는 전국의 요충지에 왕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을 보내 직접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지방통치방식도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뀐 것이다. 지방관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부터 파견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태수’와 ‘재’라는 지방관이 나온다. 서천왕(西川王) 19년 4월, 왕이 신성에 갔을 때 해곡태수(海谷太守)가 와서 고래 눈을 바쳤다. 미천왕이 된 을불이 봉상왕의 핍박을 받아 숨어 다니면서 소금장수를 하던 시절에 사수촌(思收村) 노파에게 도둑으로 무고를 당해 관청에 끌려갔고, 압록재(鴨淥宰)가 그에게 태형(笞刑)을 내렸다. 이들이 고구려 사료에 등장하는 최초의 지방관이다.
이 이전에 태조왕(太祖王) 55년에 붉은 표범(朱豹)을 바쳤던 ‘동해곡수(東海谷守)’가 있다. ‘동해곡’과 해곡태수의 ‘해곡’은 같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태조왕 때에는 아직 직접 통치를 하던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동해곡수는 고구려의 지방관이 아닌 동해곡 지역의 유력자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2세기에 이미 ‘수’라는 지방관을 파견했고 동해곡수가 그 예라고 보는 것이다(최희수, 2013). 이 경우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이 건국 후 1세기까지는 ‘수’를 파견하는 1단계 조직이었고, 2세기~4세기에는 태수-재의 2단계 조직이었으며, 5세기~6세기에는 수사-태수-재의 3단계 조직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발전 과정과 동해안 일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시기에 이미 옥저 지역에 고구려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천왕이 행차했던 신성(新城)은 고구려의 동북 변경지역에 새로 구축한 진성(鎭城)이라고 보고 있다. 서천왕이 신성에 갔을 때 해곡태수가 와서 고래 눈을 바쳤으므로, 해곡은 동해안 일대 어느 지역이었을 것이다. 압록재는 압록강 근처 어느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관할지역은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국상(國相)이었던 을파소(乙巴素)의 출신지인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과 가까운 곳으로 5나부 안에 속하는 지역이다. 즉 3세기 말 4세기 초에는 5나부 지역도 촌(村)으로 분리되었고, 지방관인 재가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3세기 말 고구려에 재와 태수라는 지방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다른 예도 있다. 봉상왕(烽上王) 때 활동했던 고노자(高奴子)는 재와 태수를 모두 역임했다. 봉상왕 2년 8월에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는 신성재(新城宰)로 재직 중이었다. 이때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해왔고 봉상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했다. 왕이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가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와 곧 적군에 붙잡힐 상황이 되었는데, 고노자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와 왕을 맞이하고, 모용외군과 싸워 물리쳤다. 그러자 왕이 기뻐하며 고노자에게 대형 관등과 함께 곡림을 식읍으로 내려주었다. 3년 뒤 8월,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와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릉을 파헤치려 했는데, 일하는 자가 갑자기 죽고 광 안에서 음악소리가 나니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재차 닥친 위기를 겨우 모면한 봉상왕은 강한 모용씨 군대가 누차 고구려를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을지 군신들에게 하문했다. 그러자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현명하고 용감하다며 고노자를 중용하라고 진언했다. 왕이 이에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다. 고노자는 지역민을 선정으로 다스려 위엄과 명성이 국내외에 떨쳐졌고, 그 때문에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고노자가 재와 태수를 역임한 신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눠져 있다. 봉상왕 2년의 신성은 동북 지역, 5년의 신성은 서북 지역에 있던 성이라고 달리 보는 설(김영하, 1985, 임기환, 1995, 여호규, 1995b, 최희수, 2013)과 두 기사의 신성이 모두 말기까지 고구려의 서북방 요충(要衝)이었던 신성[고이산성(高爾山城)에 비정]이라고 보는 설(김현숙, 1997)로 나눠져 있다. 전자는 모용외의 군사를 피해 신성으로 가려했는데, 모용외가 쳐들어오는 방향인 서북쪽으로 피신할 리가 없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모용외가 쳐들어왔을 때 봉상왕이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와 있다가 상황이 급박해지자 신성으로 피신해 들어가려 했을 수도 있으므로, 고노자가 재로 있다가 태수로 된 곳 모두 서북 신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서로 멀지 않은 시기, 동일 인물에 대한 기사를 수록하면서 서북 변경과 동북 변경에 있는 성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같은 이름으로 표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점에 기반한 것이다.
학계에서 고노자에 주목하는 이유는 사실 신성의 위치 문제보다는 다른 데 있다. 즉 고노자가 역임한 재와 태수가 상하통속관계에 있는 지방관이라고 보는 견해(임기환, 1995, 여호규, 1995b)와 규모나 중요성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상하관계가 아니라 각각의 관할지역을 지배했던 별개의 지방관이었다고 보는 견해(김현숙, 1997)로 나눠져 있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의 구조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전자는 3세기 말에 이미 지방통치조직이 태수-재의 2단계 중층 구조였다고 보는 것이고, 후자는 지방통치단위가 모두 병렬적인 단층 구조였다고 보는 것이다. 재와 태수가 상하관계이자 통속관계였다고 본 근거는 고노자가 신성재일 때는 소형이었고, 태수가 되었을 때에는 대형이었다는 점에 있다. 관등이 더 높고 신성재를 역임한 후 추천을 받아 신성태수가 되었으므로 재와 태수가 상하관계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노자는 대형으로 승급하고 3년 뒤에 태수가 되었다. 그 사이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대형이면서 신성재로 있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재=소형, 태수=대형이라는 공식이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고노자가 왕을 보호한 공으로 곡림을 식읍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곡림은 그가 모용외의 군대를 물리친 곳이다. 이는 승리의 대가로 그 전투 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던 명림답부(明臨答夫)나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의 경우와 유사하다. 이것은 국초(國初)에 대가(大加)들이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정복지 일부의 수취권을 인정받았던 전통이 잔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나부체제 해체기에 나부 귀족들이 중앙귀족으로 된 후에도 한동안 출신 나부를 식읍으로 보장받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고노자와 유사한 지방관으로 〈모두루묘지〉에 나오는 염모(冉牟)가 있다. 〈모두루묘지〉에는 그의 조상이 추모왕(鄒牟王)을 따라 북부여에서 내려왔으며 대대로 ‘관은(官恩)’을 받아 관직을 가졌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3세기 후반이나 4세기 전반경 모종의 반란사건을 진압하여 명망이 높았던 염모가 북부여에 침공해 온 모용선비(慕容鮮卑)를 물리침으로써 모두루 집안을 중흥시킨 중시조(中始祖) 격의 인물이 되었다.주 003
각주 003)
염모가 공을 세운 시점에 대해 학계에서는 모용황(慕容皝)이 부여를 침공한 346년경이었다고 보고 있다(武田幸男, 1981; 盧泰敦, 1996; 최희수, 2012). 단 필자는 진(晉) 태강(太康) 6년(285)에 부여가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받아 국가 존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부 잔여 세력이 고구려의 도움으로 북옥저(北沃沮)로 가서 동부여(東扶餘)를 건설했는데, 이 무렵 부여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모용선비(慕容鮮卑)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수차례 일어났고, 그중 어느 전투에서 염모가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1997). 이렇게 본 이유는 첫째, 염모가 모두루 가문의 중시조 격이었으므로 모두루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몇 대 위에 염모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346년보다 앞 시기에 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 둘째, ‘북부여대형염모’라고 되어 있어 파견된 지방관의 면모가 뚜렷하지 않아 4세기 중반경 인물로 보기에 적합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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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염모는 “북부여대형염모(北夫餘大兄冉牟)”라 하여 관직명이 나와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염모가 북부여의 일부 지역을 통치하긴 했지만, 그 이후의 지방관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 조상이 추모왕과 함께 북부여에서 왔다는 점을 묘지의 첫머리에서부터 강조하고 있으므로, 염모가 북부여에 파견된 이유도 그곳 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고가 많이 작용한 듯 보이기도 한다. 모용선비를 물리친 공으로 북부여 지역 일부를 염모에게 ‘고향땅’이라 하여 식읍처럼 하사했다면 염모도 고노자와 유사한 성격의 지방관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신개척지에 파견된 지방관이면서 식읍주(食邑主)의 성격도 가졌으므로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시원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전대(前代)의 잔재인 식읍주 같은 성격도 보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지방관을 파견한 것이 3세기 말부터이므로 고노자는 해곡태수와 함께 매우 이른 시기에 임명된 지방관이었다. 태수와 재가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고 당시 지방통치조직이 2단계 구조였다면, 재가 관할하는 행정단위 몇 개를 합친 지역을 태수가 지배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역과 지역주민에 대해 상당히 많이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역 지배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과연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보내 직접 통치를 실시하는 초창기부터 이런 수준의 통치가 가능했을까 하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3세기 말 4세기 초에 기존의 5나부 지역과 옥저가 있던 동해안의 어느 곡 지역, 그리고 서북 변경지역을 통치했던 지방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압록재와 해곡태수는 방위명부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재지세력인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나부 지역은 고구려의 중심부였고 또 동해안 일대는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의 주요 기반이었으므로 지방관이 우선적으로 파견될 가능성이 큰 곳이다. 즉 3세기 말 4세기 초에는 고구려의 중심부나 변경의 전략요충지, 그 외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부터 먼저 지방관을 파견했다. 전체 영역을 균질적으로 편제한 가운데 일시에 전면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지방관 파견을 실시하면서 바로 하위 지방통치단위 몇 개를 묶어 상위의 지방관을 설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단계 조직체계를 갖춘 지방지배는 거점 중심의 지배가 아닌 영역 지배가 이루어져야 실현 가능했다.
초창기에 파견된 지방관들은 각 지역 중심지와 군사요충지를 치소로 삼고 재지지배층을 하위 관인으로 삼아 주변 지역을 다스려 나갔다. 처음부터 지역과 주민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치밀하게 통치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지방 지배는 전 영역의 주민과 토지를 전면적으로 파악한 위에서 조직적으로 통치했다기보다는 일정한 단위 지역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통치하는 형태였다. 이런 점에서 지방관 파견 초창기인 3세기 말 4세기 초까지의 지방 지배는 거점지배(據點支配) 또는 거점(據點) 중심 지방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김현숙, 1997).
거점지배는 전략요충지에 구축된 성(城)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태수, 그보다 중요도가 낮은 지역에는 재를 파견하여 통치했다. 이때 지방관이 거주하는 치소성(治所城)은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정되었다. 대외정복과 영역 확장이 간도(幹道)를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를 따라 산성이 설치되었고, 지방 지배도 역시 이 교통로를 중심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여호규, 1995b). 거점지배 단계에서의 지역 지배는 주요 간선교통로의 거점 성을 중심으로 그와 연결된 지선 지역에 대한 개괄적인 파악만 가능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거점지배 단계의 지방관도 고대의 일반적인 지방관이 그러했듯이 군사지휘자이자 재판관이자 행정관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담당했다. 고노자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평소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시에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는 것이 지방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직무는 조세 수취였다. 태수나 재는 재지지배층을 하위 관인으로 활용해 수취나 역역동원 등 제반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할지역 내 전체 주민 수나 토지 보유 상황 등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에서 개개인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재지지배층에게 지역별로 할당된 양만큼 책임지고 거두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시기 조세제 관련 자료가 전혀 없으므로 이런 정도의 추정만 할 뿐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이상과 같은 성격의 거점지배는 3세기 후반부터 시행되기 시작해서 4세기 이후 본격화되었다. 고구려는 4세기부터 정복활동을 통해 영토가 크게 확장됨으로써 지방관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관할구역을 축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처럼 지방관의 수가 늘어나게 되자 4세기 중·후반경에는 단위지역별 거점지배를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행정단위가 증가함으로써 지방관들의 관할구역이 서로 겹치게 되었고, 다수의 단위지역들이 각각 중앙과 연결되는 체제를 더이상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대된 영토와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통치제도를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2) 고국원왕과 소수림왕대 고구려의 상황과 지방통치제도의 정비
(1) 고국원왕대의 위기 상황과 소수림왕대 제도개혁
개별 지방행정단위들이 각각 중앙과 직접 연결되는 거점지배는 영역이 확대되면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다. 지역단위가 늘어나게 되면 지방관의 관할구역이 겹쳐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병렬적 성격의 통치단위 사이에 명령체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방어체계상에 심각한 모순도 발생하게 된다. 지방통치조직과 군사조직이 일체화되어 있던 시기였으므로 지방통치제의 모순이 국방상의 문제를 불러오는 것이다. 고국원왕대에 바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고국원왕 12년(342년)에 전연왕(前燕王) 모용황(慕容皝)의 군대가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고구려 왕도를 목표로 군사를 출정시켰다. 이에 고구려 조정에서는 작전회의를 열었다. 요동에서 고구려로 침공해오는 적군들이 통상적으로 선택했던 대로 주력군은 넓고 평탄한 길인 북도로, 소규모 부대는 좁고 험난한 남도로 진격해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에 따라 북도에 대군을 보내고 소규모 부대가 남도를 막도록 했다. 전연의 군대 역시 작전회의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험준한 남도로 주력부대를 보냈다.
허를 찔린 고구려는 북도 방면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남도에서는 참패했다. 이에 따라 전연군이 파죽지세로 수도로 쳐들어와 국내성 전체를 크게 파괴했고, 이곳의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다시 힘을 회복하여 전연을 침공할 것을 염려하여 선왕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수레에 싣고 갔고, 왕의 어머니까지 포로로 잡아갔다. 고국원왕으로서는 부왕의 시신을 돌려받고 왕모를 생환시키기 위해 굴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연이 주는 작위도 받고 조공사신도 보내는 등 외교적 굴욕을 감수하고서야 다음해에 겨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연은 고구려의 재기와 침공을 두려워하여 왕모는 풀어주지 않고 13년 동안이나 인질로 잡아 두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요동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애썼던 전연이 고국원왕 40년(370년)에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했다. 고구려는 도망 온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을 전진에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주 004
각주 004)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 11월조; 13년 2월조; 25년 12월조; 40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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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서변은 한동안 안정되었지만, 그 대신 서진정책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박성봉, 1979). 고구려는 이후 영역 확대의 주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백제와 대방의 옛 땅인 황해도 지역을 두고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국원왕이 백제병의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주 005
각주 005)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1년 10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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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전쟁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인해 고구려는 한동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로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국원왕대의 거듭된 실패는 단순히 전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사회 변화에 따라 나부체제가 해체된 이후 전반적인 면에서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 정비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새로운 상황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영토 확장 과정에서 동예, 옥저, 말갈계와 거란족 일부 집단, 요동 지역에서 들어온 유이민, 낙랑과 대방 지역민 등 복잡하고 다양한 구성원들이 내부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아직 서로에 대해 배타적이고 분리적인 인식과 태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3세기 중엽 이전에는 5나부의 지배층만이 전투를 직접 수행했던 것과 달리 이제 일반민도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면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원고구려민과 외부에서 여러 원인으로 들어와 고구려민이 된 사람들이 섞여 있는 상태였으므로 전쟁에서 통합된 힘을 강력하게 발휘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년 기사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고국원왕이 이끄는 병력 가운데 태반은 의병(疑兵)이니 사납고 날쌘 것은 오직 적기(赤旗)뿐이므로 먼저 그것을 깨뜨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부분이 주목된다. 여기에서 적기는 원래부터의 고구려민들로 구성된 철갑기병 중심의 중앙군이고, 의병은 각지의 지방민으로 구성된 군대였을 것이다. 의병은 훈련 기간도 부족하고 무장도 미비했으며,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복속민이란 관념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근초고왕의 발언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고국원왕대 군사적 실패의 원인은 내부 구성원이 확대되고 복잡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도나 의식적인 측면에서 그런 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즉 3세기 중엽까지는 5나부의 결집된 힘으로 대외정복전쟁을 수행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고국원왕대에 와서는 이전의 집단예민(集團隸民)과 새로운 편입민까지 군에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같은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배타성이 아직 해소되지 않아 단결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또한 군사조직도 정연하게 구축되어 있지 않아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전연전에서의 참패와 고국원왕의 서거는 결국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두 사건 모두 국가의 존립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기였으므로, 고국원왕 전사 후 집권세력은 국왕이나 귀족 측 모두 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또 확대된 영토와 주민을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통치제 정비가 긴요하다고 인식했다. 당시는 군사방어체계가 곧 지방통치조직이었으므로 전연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한 것은 바로 거점지배의 한계가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체제 개편과 개혁이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급한 부분은 방어체계의 재정비였다.
소수림왕은 지배층이 모두 변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가운데 즉위하였다. 따라서 그는 비교적 순조롭게 구체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새로운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372년에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설립한 것은 바로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불교 도입과 태학 설립은 고구려인의 융합과 신흥세력의 등장을 뒷받침해 주면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 확립에 필요한 사상적・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정치체제의 정비는 373년 율령 반포로 완성되었다. 율령법에 의거한 지배체제는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국가체제를 기본으로 했으며, 신분제는 양천제(良賤制), 토지 소유는 국유제, 군제(軍制)는 징병제를 특징으로 했다(井上光貞, 1974).
율령의 제정과 반포로 고구려는 비로소 성문법시대로 돌입했다. 다원적인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종합했다. 형법, 관등과 관직제, 조세제 및 제사, 상장(喪葬), 학(學), 악(樂), 의복(衣服)에 이르기까지 정치운영과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법을 성문화함으로써 일정한 기준과 원리하에 국정이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의 구성원들이 모두 율령에 의거해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단기간에 고구려민으로 안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노중국, 1979; 강봉룡, 1992). 이에 따라 원고구려인과 다양한 신규 편입민 사이의 상호 배타적인 면이 보다 완화될 수 있었다.
요컨대 나부체제 해체 이후 진행된 정치・사회적 변화를 수용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준거틀을 마련하고 이를 율령으로 법제화함으로써 변화된 사회 상황과 제도 사이의 괴리를 없앴다. 이로써 국가의 발전 방향이 명확하게 제시되었고, 체계적인 국가운영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대 이룩한 고구려의 급속한 발전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2) 2단계 권역지배로의 발전
흔히 전연과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패한 원인으로 적군의 침공로를 오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북도와 남도 중심의 수도방어체계가 미비했다는 점과 지역별 연계가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도 주된 요인으로 들 수 있다. 국왕의 전사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온 370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제군이 평양성으로 곧바로 공격해올 수 있었던 것도 방어체계가 적절하게 가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시행된 단위지역별 거점지배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이다, 거점지배체제에서는 통치단위가 증가하여 지방관의 관할구역이 서로 접하게 되거나 중복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조세 수취와 주민 관리 등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적의 침입 시 방어와 반격을 해야 할 때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서 효과적인 대응이 어렵다. 지방통치제 및 방어체계의 정비가 시급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고국원왕대와 소수림왕대에 지방제 재편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모두루묘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묘지명에 의하면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대형(□□大兄)과 자□대형(慈□大兄)은 ‘북도(北道)’의 성민(城民)과 곡민(谷民)을 통치하던 지방관이었다. 모두루가 광개토왕 서거 당시 수사로서 북부여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할아버지는 대체로 4세기 중엽, 그 아버지는 4세기 중・후반경에 그 지역의 지방관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관은(官恩)’에 의해 임명되었다. ‘관은’이란 용어는 묘지의 주인공인 모두루가 살았던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국왕의 명령을 받아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이지, 북부여 지역에 대해 가문 대대로 보유해 온 세습적 권리에 따라 관직을 승계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북도’는 고구려의 국내성과 부여의 수도를 연결하는 교통로였다. 북도는 모두루 가문과 관련이 깊었던 북부여 지역으로 하나의 지방통치단위는 아니었다. 따라서 북도의 성민과 곡민은 개별 단위지역의 주민이 아닌, 교통로 주변에 있던 복수의 성과 곡의 주민들이었다.
즉 모두루의 조와 부는 거점지배 단계의 지방관이 아니었다. 성과 곡은 당시 고구려의 지방지배단위였다. 따라서 성민과 곡민을 지배했다는 것은 이들이 복수의 지방통치단위를 관할한 지방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를 통해 4세기 중・후반경에는 재(宰)가 지배하는 지역 몇 개를 포괄한 비교적 넓은 범위를 태수가 관할하는 형태로 지방지배단위를 상하 2단계로 조직했고, 지방관들은 관할지역의 성민과 곡민을 파악해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점적인 지배에서 면적인 지배로 전환했고, 단위지역 중심의 지방조직에서 중층적인 조직으로 재편한 것이다. 거점지배가 단위지역과 단위지역이 교통로를 따라 이어지는 식의 점과 선 형태로 이루어지는 지배였다면, 그보다 발전한 다음 단계의 지배는 하위 단위 지방관이 통치하는 복수의 단위지역을 상위 지방관이 통치하는 면적인 지배였다. 이런 점에서 이를 ‘거점지배’와 구분하여 ‘영역지배’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노태돈, 1996). 하지만 ‘영역지배’란 용어는 특정 시기, 특정한 성격의 지배방식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일반적인 용어이므로 일정 권역을 나누어 그 안에 있는 다수의 행정단위를 총괄 지배했다는 의미에서 ‘권역지배(圈域支配)’란 용어가 제시되었다(김현숙, 1997). 권역지배는 영역지배와 기본 성격은 같지만 일정 지역을 권역별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을 특정하는 용어다.
권역지배로의 재편작업은 고국원왕대에 시작되었다. 지방제 정비의 필요성을 느낀 고국원왕이 먼저 주요 전략요충지부터 재편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대상이 된 곳은 부여 지역이었다. 집안(集安)과 길림(吉林)을 잇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조밀하게 배치된 크고 작은 성들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점, 길림 주변의 동단산(東丹山)유적을 비롯한 여러 유적들이 모두 이른 시기에 속하는 유적이라는 점(陳大爲, 1989)을 통해 부여로의 진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부여는 건국시기도 빨랐고 통치체제도 발전한 나라였기 때문에 지방통치제 역시 선진적이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부여를 차지한 후 기존 지방조직을 활용해 단기간 내에 체제 정비를 할 수 있었다. 건국신화에서 시조 주몽의 부여출자설을 표방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부여 지역 확보는 초기 이래 고구려의 최대 관심사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안정적인 지배를 위해 지방제를 재편할 때에도 다른 어느 곳보다 우선적으로 정비를 시도했다.
그런데 지방제 재편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소수림왕과 귀족들은 이로 인해 기존 체제의 문제점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율령제를 도입하고 지방제를 비롯한 통치체제 전반에 대한 정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런 배경 아래 거점지배에서 권역지배로의 개편작업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거점지배와 권역지배의 차이는 무엇일까? 〈광개토왕비〉를 통해 5세기 전반 무렵 지역민에 대한 파악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비에는 성과 그 하위 단위인 촌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수묘인은 촌이 아닌 성 단위에서 차출했으므로 중앙정부의 행정권은 성까지만 미쳤던 것 같다. 하지만 촌의 숫자도 기록해 놓았으므로 지역 상황을 촌 단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묘인 차출 내역을 보면 처음부터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나누어 비율에 따라 정해진 숫자만큼 차출했다. 이는 옛 백제 지역 자연촌의 가호(家戶) 수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국연을 많이 차출한 곳과 간연을 많이 차출한 곳이 있어 국연과 간연 차출 과정에서 지역 상황을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대에 많은 역부(役夫)를 동원해서 여러 성을 동시에 축성하고 평양에 다수 사찰을 조성한 것도 지역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비록 광개토왕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율령제 도입과 호적제 시행으로 주민을 더욱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수림왕대 체제 정비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거점지배에서 권역지배체제로의 전환으로 인해 광개토왕대에 체계적인 수묘인 차출과 대규모 역역 동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바를 정리하면 소수림왕대에는 거점지배에서 권역지배로 전환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지역 지배가 가능해짐으로써, 지방민 파악과 통치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거점지배 단계에서는 지역별 연계가 되지 않았고, 지방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도 있어 전체 가호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 어렵고, 주민에 대한 개별 지배도 불가능했지만 권역지배 단계에서는 주민을 보다 세밀하게 파악했으며 조세 수취와 병력 동원도 조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권역지배 단계에는 모든 주민을 호적에 등재하고 보편적인 법률에 따라 통치했으므로 보다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영역 지배가 가능했다. 그러나 광개토왕 즉위 후 계속된 대규모 대외정복활동으로 인해 2단계 지배체제 역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과 늘어난 민에 대한 효율적 지배를 위해 지방 지배체제의 변화가 또 필요하게 된 것이다.
 
3) 광개토왕대 지방통치제도의 발전
(1) 지방통치제의 재편 배경
광개토왕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諡號) 그대로 사방으로 영역을 넓히는 한편, 지역 재편과 지방제도의 정비, 사상체계의 재구축 등을 통해 백성의 안정을 도모했다. 광개토왕대 영역 확장의 내용과 그 과정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비문〉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광개토왕은 즉위 직후 바로 시라무렌강 유역에 있던 거란족을 정벌한 후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역성(力城), 북풍(北豊) 등을 거쳐 국경 지역을 돌아보고 전렵을 하면서 돌아왔다. 이를 통해 385년 이후 어느 시기에 요동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으며, 그에 따라 요동 지역을 완전히 병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대에 고구려 서변은 요하(遼河)까지 이르렀고, 이 선은 이후 고구려 서변의 가장 중요한 기본 국경선이자 전략지역으로 멸망기까지 유지되었다.
광개토왕대 동북 변경에는 ‘백신(帛愼)’으로 기록되어 있는 세력과 동부여가 있었다. 백신은 당시 고구려에 예속된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바쳐오던 영고탑(寧古塔) 주변에 있던 말갈계 종족이라 보고 있다(김현숙, 1992). 동부여는 285년 모용선비의 침략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북부여의 왕족 일부가 고구려의 인도 아래 북옥저 지역으로 도망 와서 건국한 나라이다(김현숙, 2000). 당시 고구려는 서변과 남변으로의 진출에 열중하고 있었고 동부 지역에는 적대적인 강대세력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동부여와 말갈계 세력이 고구려의 주의 소홀을 틈타 세력 강화에 주력하자, 그런 상황을 눈치 챈 광개토왕은 응징에 나서 그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조공 관계를 강화했다.
요동 지역을 완점한 이후 광개토왕은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했다.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의 세력 팽창에 백제가 가야, 왜와 연합하여 공동 대처하는 가운데, 고립된 신라가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함으로써 고구려-신라, 백제-가야-왜의 구도로 국제관계가 재편되는 과정과 고구려의 남방정책 등 당시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 변화를 잘 보여준다. 396년 백제 침공으로 고구려는 58성 700촌을 차지했고, 한강을 건너 백제의 왕성에 육박해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아냈다. 〈광개토왕비〉 병신년(丙申年)의 전과(戰果)는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여러 해에 걸친 대백제전의 성과를 종합 정리한 것이다(武田幸男, 1978, 1979).
그런데 학계에서는 병신년의 전투지역과 이때 확보한 58성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이를 크게 나누면, 예성강 이하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이르는 범위 내였으리라 보는 설(李丙燾, 1976; 盧重國, 1986; 김현숙, 1989)과 상당수의 성이 남한강 상류 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설(李道學, 1988; 徐榮一, 1991; 임기환, 1995)로 양분되어 있다. 전자는 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한수 이북의 부락들이 모두 무너졌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辰斯王) 8년(392년) 7월조 기사와 58성 가운데 ‘미추성(彌鄒城)’이 인천, ‘아단성(阿旦城)’이 서울의 아차산성이었다고 보는 데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이 전투의 최대 목적이 소백산맥 이남으로의 진출 통로 확보에 있었다고 보고, 비문에 나오는 아단성을 을아단성(乙阿旦城, 단양 온달산성에 비정)으로 본다.
고구려는 58성 획득 후 불과 4년 뒤 왜와 가야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구원 요청에 따라 보기(步騎) 5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따라서 이 대군의 이동 경로가 곧 병신년에 확보한 지역이었다고 보는 견해(이도학, 1988)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비문대로라면 58성을 정복한 이후에도 아신왕이 저항하자, 광개토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백제 왕성을 공격했다고 보는 것이 순조롭다. 그리고 400년의 출병은 분명 신라의 구원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396년에 미리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교통로를 확보해 두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결과론적 해석이다.
경자년(400년)의 병력 이동 경로에 대해서도 평양-수안-신계-화천-춘천-원주-충주-단양-죽령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는지(李道學, 1988), 평양이나 집안 국내성에서 동해로 진출해 함흥 부근에서 해로를 이용, 동해안으로 남하해서 부산 부근에서 기습공격을 했는지(李鍾學, 1996), 아니면 이 두 길로 동시에 내려왔는지 논란이 되고 있다. 춘천,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교통로는 당시 신라 지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므로 고구려나 신라 어느 쪽이 이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는지 여부가 문제시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 지역은 이전부터 예(濊)의 활동범위였으므로, 어느 시기엔가 예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었을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鄭雲龍, 1989). 그렇다면 남한강 상류 유역의 확보와 병신년의 작전지역을 반드시 연결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지역에서 공방을 계속하다가 병신년 광개토왕의 친정(親征)을 계기로 일단 한강 이북 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리고 광개토왕 18년(408년) 7월에 국동(國東) 6성을 구 축하고 이곳에 평양 지역의 민호를 옮겨 본격적으로 영역 지배에 들어갔다.주 006
각주 006)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8년(408) 7월조,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18년 8월조, “王南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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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 6성은 백제 수도의 동북쪽에서 백제를 견제하면서 신라로 통하는 내륙교통로를 관장할 수 있는 전략요충지에 축조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소백산맥을 넘어 남쪽까지 영역을 넓혔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오늘날의 예안, 봉화, 순흥, 부석, 임하, 안덕, 영덕, 진보, 청송, 영덕, 청하, 울진 등이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뒤에 신라땅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신라 나물왕(奈勿王)이 원군 파병을 요청한 대가로 고구려에 이 지역을 넘겨주었다가 뒤에 되찾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현숙, 2002). 물론 고구려 세력이 진출하자 자진해서 고구려로 넘어간 지역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4세기 후반 당시 이곳은 신라 영토였으나 재지수장을 통한 간접통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재지세력의 의지에 따라 지역의 향방이 많이 좌우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 요인이 상호 작용한 결과 소백산맥 이남 지역에 고구려 고지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군현이란 명칭의 사용 여부는 몰라도 고구려가 실제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일시적으로라도 지배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통해 광개토왕대에는 영역 범위가 서로 요하(遼河), 동으로 연해주(沿海州), 북으로 송화강(松花江), 남으로 한수(漢水) 이북 지역까지 늘어났고, 경자년 출병 이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풍기-순흥-봉화-임하-청하-영덕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확대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처럼 영역이 급격히 확대되고 인구 역시 급증했기 때문에 편입민의 편제와 안정적 통치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영역과 주민의 확대도 지방통치체제의 변화를 초래하는 요소 중 하나다. 광개토왕대가 되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수사’라는 명칭의 지방관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시기 지방제의 변화나 수준, 내용을 살필 때 수사는 가장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2) 수사의 신설과 3단계 지방통치제의 구축
수사는 문헌사료에 나오지 않는 지방관이다. 5세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금석문 자료인 〈모두루묘지〉에 모두루가 “영북부여수사(令北扶餘守事)”였다고 나오고, 〈충주고구려비〉에 “고모루성수사야□(古牟婁城守事耶□)”가 나온다. 모두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인연으로 은교(恩敎)를 입어 북부여에 파견되었으므로 세습적인 면이 있는 듯 적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왕명을 받고 파견된 지방관이었다(武田幸男, 1981). 북부여 지역은 고국원왕대부터 권역지배체제로 재편될 정도로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던 고구려의 주요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고모루성은 〈광개토왕비〉에도 나오는 성으로 396년에 고구려에 편입되어 국연 2가와 간연 8가의 수묘인을 내기도 했다. 고모루성의 위치는 영락(永樂) 6년(396년)의 작전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비정되고 있다. 작전 범위가 인천에서 충주 일대까지였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고모루성이 남한강 유역에 있다고 보았다(이도학, 1988). 그러나 한강 이북 지역이었다고 보는 경우에는 경기만 일대에서 서울의 강북 지역 및 강원도 서부에 이르는 범위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1996). 또 예성강 중・하류, 임진강 중・하류, 한강 하류-서해안 일대 및 북한강 수계를 포괄하는 지역이 작전범위였다고 보는 경우 북한강 수계로 비정했다(여호규, 2012a).
396년에 고모루성과 함께 공취(攻取)된 58성 700촌 가운데 수묘인을 낸 곳은 36개 지역이었다. 이 가운데 31개 지역은 성으로 표기되어 있고 다섯 지역은 집단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36개 지역에는 미추성을 비롯하여 한강 하류 유역의 성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전략요충지로서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경제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백제 영토였을 때에도 지방통치조직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36개 지역도 대소에 따라 상하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고모루성은 비중이 큰 상급 행정단위였을 것이다.
수사는 5세기 고구려 지방통치제 연구에서 가장 주목되는 존재이다. 수사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당시 지방통치조직의 구조를 달리 보기 때문이다.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수(태수)-재의 구조였던 지방제가, 5세기에도 동일한 수사(수, 태수)-재의 2단계 구조였다고 보는 설(林起煥, 1995; 여호규, 1995b)과 이전에는 태수-재의 2단계였다가, 5세기에 와서 복수의 태수-재의 관할구역을 묶은 광역을 수사가 통치하는 수사-태수-재의 3단계 구조로 발전했다고 보는 설로 나눠져 있다(김현숙, 1996; 최희수, 2012; 백미선, 2013).
2단계 구조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3세기 말부터 200여 년간 지방지배체제에 발전이 거의 없었던 것이 된다. 고구려는 4세기~5세기에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5세기에는 3세기보다 민호(民戶)가 3배로 증가하고 최대 판도를 이루어 말 그대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주 007
각주 007)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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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지방관이 처음으로 파견된 3세기 말과 이 시기의 지방통치조직이 같은 구조였다고 보는 것은 사회 발전과 영역의 확장, 구성원의 증대에 따라 지방통치제도가 필연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했거나, 고구려 사회를 지나치게 정체적으로 본 것이다.
수사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방관이다.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점에 주목해서 이를 지방관 명칭이라 보지 않고 단어 의미 그대로 성을 수호한다고 보거나(武田幸男, 1981), 지역 제반의 일을 다스린다는 뜻의 일반명사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노태돈, 1999). 중국 사서에서 어렵게 수사라는 단어를 찾아내기도 했다. 『진서(晉書)』 열전 양왕융(梁王肜), 산도(山濤), 조왕륜전(趙王倫傳)에 “◯◯장군 독업성수사(◯◯將軍督鄴城守事)”, 『위서(魏書)』 열전 유연전(劉淵傳)에 “보국장군 도독북성수사(輔國將軍都督北城守事)”가 나오는 것을 찾았는데(백미선, 2013), 이때의 수사는 지방관명이 아닌 ‘수제군사(守諸軍事)’로 쓰인 것으로 보았다(嚴耕望, 1961). ‘영북부여수사’라는 구절에서 ‘영(令)’을 ‘하여금 ~하게 하다’로 쓰였다고 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제안도 나왔다(백미선, 2103). 이렇게 보면 ‘광개토왕이 모두루를 교견(敎遣)하여 북부여 지역을 수사(守事)하게 했다’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영북부여수사’만 있다면 이 견해도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고모루성수사가 있기 때문에 이 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수사는 지방관 명칭이 분명하다. 다른 나라에서 보이지 않고,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두 건의 자료에 명확하게 지방관명으로 나오는 수사를 부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지 않던 수사라는 지방관 명칭을 고구려에서만 사용했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북부여수사에 ‘영(令)’이 붙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해 ‘영북부여수사’가 태왕의 명령으로 북부여 방면을 지키는 일을(守事) 맡았음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주보돈, 2003). 광역 지방관으로 파견된 모두루 자체가 아직은 지역 연고권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왕에의 충성을 강조하여 ‘영(令)’을 붙였다고 보고, 이런 점에서 ‘영북부여수사’를 과도기적인 지방관명이었다고 본 것이다. 모두루는 광개토왕대에 ‘영북부여수사’로 파견되었고, 고모루성수사는 5세기 중반 장수왕대에 활동했던 것을 볼 때 타당성이 있는 견해라고 본다. 그리고 ‘영북부여수사’라는 명칭은 아직 완전한 지방관명이라 볼 수 없다며, 수사가 처음으로 파견된 시기를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재위 후반기였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백미선, 2013). 이 두 견해는 광개토왕대 고구려 지방통치제도의 발전 과정을 ‘영북부여수사’가 보여준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수사가 파견된 옛 부여 지역과 옛 백제 영역이었던 한강 유역은 모두 정치・경제적으로 선진지역으로서 지방통치조직이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충주고구려비〉에 의하면, 장수왕대에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에 이르렀을 때 고모루성수사가 동행했다. 우벌성은 당시 남진 경영을 위한 중심기지였던 남한강 상류 유역의 충주 지역에 있었다. 5세기 후반에는 한강 유역 전체가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 권37 지리지4에는 이 일대에 대략 16~18개의 군(郡)과 30~40개의 현(縣)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551년에 백제와 신라가 연합작전을 벌여 이 지역을 탈취해 갔을 때,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 신라는 한강 상류의 “죽령이외고현이내(竹嶺以外高峴以內)”에 있는 10군을 차지했다.
이로 보아 시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개별 행정단위의 수는 크게 변동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5세기 말경에도 한강 유역에 16개 이상의 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강 하류 지역과 남한강 상류 일대에 각각 태수급과 재급 지방관이 다수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충주 지역에서 발생한 모종의 군사작전에 한강 이북 지역에 있는 고모루성수사가 고추가 공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는 고모루성수사는 충주 지역의 태수나 재급 지방관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태수-재급 행정단위를 다수 포괄하는 광역의 지방관이었기 때문에 우벌성으로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모루성수사의 성격이 이렇다면 영북부여수사도 북부여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지방관이었을 것이다. 사실 관직명 자체에 그런 성격이 더 잘 반영된 것은 영북부여수사 쪽이다. 영북부여수사는 ‘북부여성의 수사’가 아니라 ‘북부여 지역을 관할하는 수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모루성수사도 광역의 지역을 관장하는 지방관이지만 치소 성의 이름에 따라 관직을 칭했으므로, ‘북부여성수사’라 하더라도 그 성격을 달리 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북부여성수사’가 아니라 ‘영북부여수사’로 기록된 것은 그 관직명 자체가 보다 광역적인 범위를 상정시킨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처럼 수사가 다수의 태수-재급 행정단위를 포괄한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고 볼 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위 사료에 의하면 수사는 대사자(大使者)와 대형(大兄) 관등을 소지했다. 유일하게 관등과 관직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3세기 말의 지방관인 태수 고노자의 관등도 대형이었다. 수사가 곧 태수였다고 보는 설의 근거는 바로 이 관등의 대응관계에 있다. 7세기 고구려 관등조직을 보여주는 『한원(翰苑)』 소인(所引) 『고려기』에는 대사자가 제6위, 대형이 제7위 관등으로 나온다. 따라서 북부여수사인 모두루는 대사자로서 고노자보다 상위 관등을 갖고 있었지만 고모루성수사는 같은 대형이었으므로, 수사-태수를 상하관계의 지방관이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사와 태수의 관등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 실마리는 고노자가 소형에서 대형으로 승급했으나 여전히 재였다가, 3년 뒤 대형인 채로 태수로 승진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고노자의 경우를 통해 태수=대형, 재=소형이란 식으로 관직과 관등이 반드시 1:1로 대응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예는 후기에도 확인할 수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 권170 제왕부(帝王部) 내원(來遠) 정관(定款) 19년조에는 당 태종이 안시성(安市城)을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15만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갔던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의 각각 위두대형(位頭大兄)과 대형(大兄)으로 나온다. 또 〈고자묘지(高慈墓誌)〉에는 그의 조부인 고량(高量)이 책성도독(柵城都督)이었는데,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상(大相)이었다고 나온다. 대상이란 관직명은 찾을 수 없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고구려 관등으로 ‘대상’이 나오고,주 008
각주 008)
『일본서기(日本書紀)』 천지기(天智紀) 10년 정월, “高麗遣上部大相可婁等進調”; 천무기(天武紀) 8년 2월, “高麗遣上部大相桓父 下部大相師需婁等朝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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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직관지에도 ‘종대상(從大相)’이 나온다. 관등에 붙은 ‘상(相)’이 ‘사자(使者)’의 다른 표기라고 보는 설(武田幸男, 1978, 林起煥, 1995)에 따르면 대상이 곧 대사자였다. 그렇다면 책성도독 고량은 위두대형과 대사자 두 관등을 함께 가졌다고 보아야 하므로 관등에 대한 현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욕살의 관등에 대해서는 고연수와 고량이 모두 위두대형이었으므로 『책부원구』에 나오는 고혜진의 관등인 대형도 위두대형의 오기로 보고 위두대형급이 욕살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林起煥, 1995). 하지만 이것은 불분명한 자료에 근거한 추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형 이상이면 욕살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사나 태수도 동일한 경우라 볼 수 있다. 7세기에 위두대형과 대형이 모두 욕살에 취임할 수 있었다면, 5세기에도 대형 이상이면 태수나 수사에 취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하의 지방관이라 해서 반드시 관등에서 격차가 나야 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김현숙, 1997).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 지방관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재, 태수, 〈모두루묘지〉와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수사, 『한원』에 나오는 욕살, 처려근지(處閭近支), 가라달(可邏達), 루초(婁肖)가 있다. 이 중 수사는 5세기 고구려인이 직접 새긴 석비에 나오고, 욕살 등은 타국인의 기록이지만 고구려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실제 사용된 관직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태수와 재는 중국식 관직명이므로 실제 사용되었는지, 후대에 그에 해당하는 중국 관직명으로 바꾸어 기록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후자였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게 단정할 수만은 없다. 5세기 금석문에 나오는 수사가 6세기 후반 이후 기록에 나오는 욕살, 처려근지, 가라달, 루초보다 더 중국풍이 강한 관직명인 것을 보면, 오히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로 3세기 말 4세기 초에 태수, 재란 관직명을 사용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태수, 재를 사용하다가 후대에 들어와 고구려 고유의 명칭으로 바꾸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태수란 관직을 모방해서 수사라 썼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 군현과 빈번하게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낙랑군과 대방군 축출 이후 조성된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고분에도 태수가 나오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태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군의 지방관인 태수는 군수(郡守) 또는 수(守)로 칭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수사로 칭해진 적은 없었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수사가 곧 태수라거나 태수 대신 수사라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수사는 다수의 군급과 현급 행정단위를 포괄한 지역을 총괄했던 최상위 지방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사가 중하위 행정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지역 통치에 대해 직접 명령권을 행사했던 것 같지는 않다. 고모루성수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수사는 군의 범위를 넘어 광역적인 군사활동이나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의 동원, 지역 특산물의 수합 같은 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서』 권100 열전 88 고구려전에는 정시중(正始中)에 위(魏) 세종(世宗)을 만난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물길(勿吉)과 백제 때문에 부여의 황금과 섭라(涉羅)의 옥(珂)을 바치지 못한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조세 수취와 다른 예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지역특산물 중에는 재나 태수의 관할권을 넘는 광역적인 범위에서 수합과 진상이 이루어지는 것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기 통치단위 가운데 가장 핵심이 중간급인 처려근지의 관할지역이었던 것처럼, 중기에도 실질적인 지방통치는 태수 관할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사와 태수는 평상시에는 각자 관할지역을 통치하되 군 단위를 넘어서는 광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업무만 수사가 책임지고 수행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광역 안에 복수의 수사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현재 확인되는 수사는 옛 부여 지역을 다스렸던 영북부여수사와 한강 유역 일대를 관장했던 고모루성수사뿐이다. 하지만 5세기 고구려의 영역범위와 지역의 정치·경제적 비중과 규모를 관련지어 고려해 볼 때, 요동 지역, 두만강 유역, 압록강 유역, 대동강 유역 등에도 수사가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지역을 광역으로 편제하고 수사를 임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여 지역에 먼저 수사를 보낸 다음에, 다른 지역도 점차 광역권을 설정하고 수사를 파견하는 작업이 추진되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비〉에는 ‘관군(官軍)’과 ‘왕당(王幢)’이 나온다. 이는 귀족들의 사적 병력이 국가의 공적 군사조직으로 모두 흡수되었다는 것과 소수림왕 이후 재편된 군사조직의 일면을 보여준다. 신라 구원전에 동원된 보병과 기병 5만 명에는 왕도 수비군과 기타 주요 국경지역 병력을 제외하고 왕경의 일반민과 지방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4세기 이후에는 일시적 약탈이 아니라 영토와 인민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인원과 물자를 동원해 총력전을 치렀다. 따라서 귀족만 특권적 전사로 명예롭게 전투를 하고 하호들은 보급을 맡았던 초기와 달리 개병제(皆兵制)를 실시했다. 개병제하에서는 지방조직을 통해 지역민을 차출해 전투부대를 편성했다. 전국적인 규모로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통치단위를 광역으로 묶어 신속하고 원활하게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광개토왕대에 전국을 몇 개의 주요 중심 광역별로 나누고 상위 지방관인 수사를 설정하여 영역지배의 효율성을 도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요컨대 정복전쟁을 빈번하게 수행하고 영토가 급격하게 팽창했던 광개토왕대에 광역을 총괄하는 최상층 지방관인 수사를 설정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병력과 물자가 효과적으로 조달되어야 하므로, 태수의 관할권을 넘어서는 범위에서 이를 담당할 지방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태수-재 위에 설정된 상위 지방관인 수사는 광역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군사활동이나 물자 동원, 지역특산물 수합 등을 담당했다. 수사와 태수는 평상시에는 각자의 관할지역을 통치하고 군 단위를 넘는 광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업무만 수사가 책임지고 주관했다. 요동 지역, 북부여 지역, 압록강 유역, 대동강 유역, 두만강 유역, 동해안 지역, 한강 유역 등이 각각 광역으로 묶여졌으나 지역에 따라 시차가 있었다. 장수왕대에 한강 유역 전체를 광역으로 편제함으로써 전국의 주요 지역을 광역으로 편제하고 수사를 파견하는 작업이 완성되었다.
 
4) 평양 천도와 지방통치조직의 변화
고구려 지방통치제는 장수왕(長壽王) 때 다시 조정되었다. 평양 천도는 지방제 발전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라의 중심이 옮겨졌으므로 방어체계를 재편하고 지방통치단위들과 왕도(王都)의 연계선도 재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수왕대에는 광개토왕대에 구축된 수사-태수-재의 3단계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쪽으로 확장한 한강 유역에 수사를 더 설정했다. 그러면서 균형 잡힌 지역 지배와 정치세력의 효율적 편제 및 통제를 위해 별도(別都)를 설치하고 영역지배의 정밀화를 도모했다. 지역기층세력에 대한 파악과 지배는 장수왕대에 이르러 한층 정밀해졌다.
별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북한 학계에서는 4세기에 졸본, 환도, 평양, 남평양 등 여러 개의 별도가 있었다고 보았다(손영종, 1990). 하지만 근거 자료에 대한 인식차이가 커서 수용하기 힘든 면이 있다. 남한 학계에서는 “其外 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했다는 『주서(周書)』 권49 고구려조 기사와 “復有國內城漢城 竝其都會之所其國中呼爲三京” 했다는 『수서(隋書)』 권81 고구려조 기사에 따라 별도인 국내성, 한성, 평양성을 3경이라 했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임기환, 2003; 최희수, 2012; 여호규, 2020). 하지만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지위가 하락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 지역을 비롯해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황해도 신원(新院), 서울, 충청도 충주 등도 3경은 아니지만 어느 시기에 별도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견해도 있다(김현숙, 1997).
별도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평양 천도 이전에 이미 평양 일대에 왕궁, 관청, 귀족들과 백성들의 거주지역 등이 계획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427년 이전에 별도 설치 및 지방통치단위의 재편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1997). 다만 국내성(集安) 지역이 별도로 정식 운영된 것은 천도 이후부터로 보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임기환, 2003; 최희수, 2012). 그러나 한성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어 있다. 황해도 신원군 일대의 도시유적과 장수산성이 한성유적이라고 인정하는 상태에서 북한의 고고학적 조사결과에 따라 4세기 초부터 이 유적들이 건설되기 시작해 4세기 말에는 큰 규모의 도시로 성장한 것으로 보는 설(임기환, 2003)이 있고, 6세기 초 안장왕 때 설치된 것으로 보는 설(최희수, 2012)도 있다.
별도의 설치 목적에 대해서도 다르게 보고 있다. 국내성의 경우 고구려 수도로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고 말기까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한 지역이었으므로, 평양 천도 이후 자연스럽게 부도(副都)가 되었을 것이라 보는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성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존재한다. 4세기부터 고구려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낙랑군·대방군의 호족세력이나 중국계 망명인들을 편제하기 위해 한성을 설치했다고 보는 것은 같다. 하지만 그것을 지배층의 저변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임기환, 2003), 오히려 낙랑계・대방계인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신흥정치세력을 특별행정구역화한 별도를 통해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지배세력의 통제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최희수, 2012).
또 최근에는 이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한성 별도의 설치를 보는 견해도 제출되었다. 한성 별도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 전체를 석권한 475년 이후 본격적으로 조영되었고, 중부 지역에서 수취한 각종 물자를 평양까지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한 중간집하장으로 출발했다고 보는 설(여호규, 2020)이 그것이다. 이 설의 경우 한성 별도는 한강 수로와 서해 해로를 활용해 중부지역에 대한 지방 지배를 시행하기 위해 건설했는데, 집하되는 물자가 증대함에 따라 평양이나 국내성에 버금가는 도회지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요컨대 한성 별도의 설치 목적을 정치적인 면에서 보는 시각과 경제적 측면에서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별도의 구조에 대해서는 국내성과 한성 모두 수도인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5부가 존재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 5부의 하부행정조직으로는 이방제(里坊制)가 있었을 것을 상정할 수 있는데, 평양의 안학궁성 남쪽과 한 성인 신원의 도시유적에서는 이방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반면 국내성에서는 아직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임기환, 2003).
앞에서 고구려 중기의 지방관으로 수사, 태수, 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았는데, 그럼 별도에는 어떤 지방관이 피견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5세기대에 한성이 별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면 평양 지역 일대를 통솔하던 덕흥리고분의 주인공인 진(鎭)이 보유했던 중리도독(中裏都督) 급에 해당하는 지방관이 국내성과 한성 등 별도를 통괄했을 것이라고 본 설이 있다(임기환, 2003).
후기의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을 도독에 비정한 만큼 도독은 지방관으로 볼 수 있지만, 중리는 내리(內裏)·금리(禁裏)와 같은 뜻으로 국왕에 직속하는 측근세력의 성격을 갖는 내부(內府)의 관직이었다(武田幸男, 1978). 별도의 지방관으로 중리도독을 주목한 것은 광개토왕대 평양 지역에 막부제가 실시되었다고 보는 입장에서 국왕의 측근세력이란 성격을 가진 지방관이란 존재를 상정한 것인데, 내부의 관직과 지방관명이 합칭되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5세기 대에 3경인 평양성과 국내성, 한성도 광역을 관할하는 최상위 지방관인 수사가 통할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편, 5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군현제를 실시했는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명실상부하게 정연한 주군현제를 실시했다고 보았다(리승혁, 1987). 다만 군현제의 완성 시기를 두고 5세기 초 이전(리승혁, 1987)으로 보는 설과 4세기 중・말엽(손영종, 1990)으로 보는 설로 나눠져 있다.
반면, 남한 학계에서는 군현제 실시 여부를 두고 여러 견해가 있다. 먼저 군현제 실시를 인정하는 측에서는 주(州)-군(郡)-현(縣)의 조직체계를 갖추었으나 행정단위의 명칭은 그대로 성이라 했다고 보거나(盧重國, 1979), 일시적으로나마 군현이란 명칭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林起煥, 1995). 〈모두루묘지〉에 나오는 ‘차국군(此國郡)’(제5행)과 ‘차군(此郡)’(제6행)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5세기부터 군제(郡制)가 시행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노태돈, 1996). 물론 주나 군이 확인된다고 해서 중국식 군현제나 주현제와 동일한 체제였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이 지방통치단위이지만 그것을 주, 군 등으로 명명하여 지방을 편제했다고 본 것이다. 이 경우 5세기 전후에 시행되던 군제가 6세기 후반에 소멸되었다고 보았고, 군제의 세부내용이나 6세기~7세기 지방제와의 관련성 등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았다. 군현제 관련 사료가 적지 않게 남아 있는 만큼, 완전한 군현제는 아니어도 그 원리를 활용해 통치조직을 정비하거나 각 행정단위를 조정했을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김현숙, 2005). 이 경우 군이란 용어를 중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소멸한 뒤 그 잔영이 부분적으로 남은 것으로 이해했다.
군현제 실시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근래에도 계속되고 있다. 5세기 군제의 시행을 율령제도 수용과 연관지어 살핀 연구성과가 나왔다(홍승우, 200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안장왕, 평원왕 때의 시조묘 행차와 권농관련 기사에 주읍(州邑), 주군(州郡), 군읍(郡邑)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과, 지리지의 한주, 삭주, 명주에 속한 주, 군, 현과 소경들이 모두 고구려의 군, 현 또는 성, 홀 등이었음을 근거로, 평양 천도 이전의 정복지역에는 성 중심 지배가, 이후의 정복지역에 대해서는 군현적 지배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연구에서 좀 더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졌다(崔熙洙, 2012). 이 경우 그 지역 범위는 고구려 영역의 서북, 북, 동북면에는 성 중심, 한성 이남의 남쪽으로는 군현 중심으로 지방 통치를 한 것으로 보았다. 안원왕과 평원왕 때에는 평양성 이북의 졸본에 이르는 지역에도 주군을 두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와 『한원』 『고려기』, 덕흥리고분 묵서명, 〈모두루묘지〉, 〈고구려 유민 묘지명〉 등 군현제 관련 근거로 사용된 모든 자료를 재검토하여, 군현제 시행의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반박한 글이 나왔다(정호섭, 2019). 고구려의 주군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하고, 남아있는 사료도 고구려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고, 금석문에서도 고구려 주군현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방관의 명칭도 군현제, 주현제 등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양상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모습이고,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고지(故地)’에 기록된 군현도 『구당서』나 『신당서』의 60주현이라는 기록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고구려의 영역화 정황은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명칭 자체를 고구려 당시의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한원』 『고려기』의 기록은 중기의 군(郡) 흔적이 남아있는 사료로 볼 수 있지만, 군을 언급한 직접적인 사료로 볼 수 없고, 말약이나 군두는 무관직이므로 이 기록만으로 지방행정단위로서 군의 실재성을 인정할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한편, 광개토왕대와 장수왕대가 되면 넓어진 영토 안에 다양한 성격의 구성원이 많이 들어와 다종족국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띄게 된다. 따라서 이때 생활방식이나 지역의 생산물과 산업형태 등에서 다른 지역의 일반 고구려민과 성격이 다른 특수집단도 고구려민에 편입되었다. 후기 사료에 많이 등장하는 말갈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존재 양상에 맞게 특수부대로 활용하는 등 다른 일반 민과는 달리 특수지배했다고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김현숙, 1992). 이들이 고구려에 편입된 시기는 지역별・집단별로 차이가 나지만, 명실상부하게 고구려민으로서 살고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장수왕대부터였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고구려인으로서 이들의 활동은 고구려 후기 사료에 본격적으로 나오므로, 이들에 대한 지배방식은 후기 지방통치제 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외 특수 지역, 특수한 존재에 대한 통치의 또 다른 예로 낙랑과 대방 고지에 대한 지배가 있는데, 이 문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각주 00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본기 미천왕 12년 8월조. 바로가기
  • 각주 002)
    『진서(晉書)』 권106 전기(傳記) 후조석륵(後趙石勒) 건평 1년조; 『양서(梁書)』 권54 동이열전 고구려조. 바로가기
  • 각주 003)
    염모가 공을 세운 시점에 대해 학계에서는 모용황(慕容皝)이 부여를 침공한 346년경이었다고 보고 있다(武田幸男, 1981; 盧泰敦, 1996; 최희수, 2012). 단 필자는 진(晉) 태강(太康) 6년(285)에 부여가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받아 국가 존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부 잔여 세력이 고구려의 도움으로 북옥저(北沃沮)로 가서 동부여(東扶餘)를 건설했는데, 이 무렵 부여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모용선비(慕容鮮卑)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수차례 일어났고, 그중 어느 전투에서 염모가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1997). 이렇게 본 이유는 첫째, 염모가 모두루 가문의 중시조 격이었으므로 모두루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몇 대 위에 염모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346년보다 앞 시기에 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 둘째, ‘북부여대형염모’라고 되어 있어 파견된 지방관의 면모가 뚜렷하지 않아 4세기 중반경 인물로 보기에 적합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 11월조; 13년 2월조; 25년 12월조; 40년조. 바로가기
  • 각주 005)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1년 10월조. 바로가기
  • 각주 006)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8년(408) 7월조,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18년 8월조, “王南巡.” 바로가기
  • 각주 007)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전. 바로가기
  • 각주 008)
    『일본서기(日本書紀)』 천지기(天智紀) 10년 정월, “高麗遣上部大相可婁等進調”; 천무기(天武紀) 8년 2월, “高麗遣上部大相桓父 下部大相師需婁等朝貢.”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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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기 지방통치제의 구조와 발전 과정 자료번호 : gt.d_0003_002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