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1. 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

1. 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

1) 낙랑군·대방군에 관한 기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낙랑군, 대방군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각기 교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삼국의 역사와 호흡을 함께했던 것이다. 관련 사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낙랑군
(36년) 낙랑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타산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_ 『삼국사기』 신라 유리이사금 13년
(304년, 백제 분서)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_ 『삼국사기』 백제 분서왕 7년
(313년)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_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 14년
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_ 『삼국유사』 낙랑국

대방군
(286년)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_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 원년
(300년)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 _ 『삼국사기』 신라 기림이사금 3년
(314년) 남쪽에 있는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_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 15년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을 두었다. _ 『삼국유사』 남대방  
위 사료를 보면, 낙랑, 낙랑군, 낙랑국 그리고 대방, 대방군, 대방국이라는 명칭으로 각기 기록하여 학계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낙랑군·대방군의 사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낙랑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32년에 발생한 사건, 즉 고구려 대무신왕대 낙랑왕 최리의 항복을 받는 과정에서 최리의 딸 이른바 낙랑공주와 고구려 호동왕자 간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남편(호동)을 위해 자기 나라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였고, 그 결과 나라를 잃게 했던 가련한 여인(낙랑공주)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146년 고구려 태조왕이 압록강 하류에 소재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거기에 있던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가족을 포로로 잡아간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 존재한 낙랑군과 낙랑군 속현인 대방현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분서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백제와 낙랑의 관계를 연상해 볼 수도 있다.
대방군은 공손씨가 낙랑군의 남쪽 지역에 설치하였다. 대방군은 위·진 왕조와 한반도 주변 여러 세력에 대한 관리와 중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왜국과 중원 왕조 사이에 중개 역할을 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대방군 지역에 대한 위·진 왕조의 행정적인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은 일부 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대방군의 유지와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대방군이 설치된 이후 공손씨와 위·진 왕조의 강력한 행정지배를 받았던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진서』 지리지에는 대방군의 인구수가 낙랑군과 비교할 때 무려 1,200호가 많은 것으로 기록하였다.주 003
각주 003)
이에 비해 낙랑군은 6개의 속현(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으로 구성되었으며, 3,700호의 규모였다.
닫기
당시 대방군의 규모가 낙랑군보다 큰 상태였음을 말해준다. 이를 통해 3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 중·북부 지역은 대방군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방군에 대한 한국 측 기록은 백제 책계왕이 대방왕의 딸인 보과라는 여인과 결혼했다고 기록한 『삼국사기』가 있다. 이 기록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대방과의 관계를 놓고 대립, 갈등하였으므로 중간에 끼어 명맥을 유지해 나가야 했던 대방 사람들의 애환도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는 북대방과 남대방이 있었다고 하여 두 개의 대방이 존재하였 다고 기록하였다.주 004
각주 004)
그중에 위나라 시기(공손씨)에 처음으로 설치된 것을 남대방군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북대방에 대해서는 본래 죽담성이라고 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일연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닫기
 
2) 낙랑군·대방군의 해체
4세기에 들어와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게 되었다. 먼저 낙랑군의 멸망을 알아보자.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략하여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삼국사기』 미천왕 14년).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 낙랑군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를 낙랑군 멸망으로 이해하고 있다.주 005
각주 005)
『자치통감』을 보면 이해 낙랑군과 관련하여 또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미천왕과 여러 해 동안 갈등관계에 있던 장통이란 인물이 부하 왕준의 건의를 받아들여 1,000여 호를 이끌고 313년 요서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곳에는 모용외라는 인물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장통 일행이 옮겨오자 낙랑군을 설치해주고 왕준을 낙랑태수로 임명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다. 이와 같은 문헌기록을 종합해보면,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 호를 포로로 잡아가자, 장통을 대표자로 하여 이 지역에 남아있던 잔존 세력이 1,000여 호를 이끌고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닫기
즉, 평양 지역에 존재해오던 낙랑군이 고구려와의 세력 다툼 끝에 패하여 스스로 요서 지방으로 옮겨갔다고 파악한다.주 006
각주 006)
옮겨간 주체는 장통과 왕준이 이끄는 1,000여 호에 달하는 대규모 낙랑 주민이었다. 장통과 왕준은 공식적인 관직도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낙랑 주민의 대표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낙랑군을 설치한 주체는 모용외이다. 당시 모용외는 공식적으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요서 지방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선비족의 지도자였다.
닫기
이 상황을 교치(僑置)주 007
각주 007)
위·진·남북조시기에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유로 유이민이 발생한 경우, 예전의 행정구역을 새로운 장소에 옮겨 설치한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설치된 행정구역을 교군(僑郡), 교현(僑縣)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 동진 왕조가 성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이 상황을 교치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라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낙랑군 문제를 볼 때 요서 지방으로의 이주 상황을 교치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낙랑군의 멸망과 이주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닫기
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주 008
각주 008)
이와 같은 견해는 일찍이 안정복(「낙랑고」, 『동사강목』), 한진서(「사군사실」, 『해동역사』) 등 조선 후기 실학자에게서 나타났다. 천관우(1989)는 이러한 관점에서 낙랑군의 이주 상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고, 이는 학계에서 통설로(천관우, 1989; 이성규, 2005)로서 인정받고 있다.
닫기
옮겨간 낙랑군은 이후 중원 지역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없어지고 말았다.주 009
각주 009)
『진서』 지리지는 평양 지역의 낙랑군과 요서 지역의 낙랑군을 혼재하여 기록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역사서인 『위서』 지형지는 평양 지역의 낙랑군에 대한 설명이 없고, 요서 지방 그리고 하북성 지방에 소재한 낙랑군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역사서에 나타난 상황을 정리하면, 이주해 간 낙랑군의 이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낙랑군은 이후 중국사의 변천 과정에서 몇 차례 서쪽 지역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세력이 점차 위축되다가, 마지막에는 마을 단위 정도의 미약한 세력으로 존재하다가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졌다(공석구, 2019).
닫기
그림1 | 낙랑군의 추이
대방군의 멸망에 대하여 알아보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미천왕이 314년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공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낙랑군이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그 다음해에 대방군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는 대방군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학계는 이 기록을 대방군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있다.주 010
각주 010)
대방태수를 비롯한 대방군 관련 관직이 중국 측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그래서 대방군의 경우도 낙랑군이 그랬던 것처럼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닫기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대방군은 낙랑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원의 서쪽 지역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소멸되고 말았다(공석구, 2020).

  • 각주 003)
    이에 비해 낙랑군은 6개의 속현(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으로 구성되었으며, 3,700호의 규모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그중에 위나라 시기(공손씨)에 처음으로 설치된 것을 남대방군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북대방에 대해서는 본래 죽담성이라고 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일연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자치통감』을 보면 이해 낙랑군과 관련하여 또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미천왕과 여러 해 동안 갈등관계에 있던 장통이란 인물이 부하 왕준의 건의를 받아들여 1,000여 호를 이끌고 313년 요서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곳에는 모용외라는 인물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장통 일행이 옮겨오자 낙랑군을 설치해주고 왕준을 낙랑태수로 임명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다. 이와 같은 문헌기록을 종합해보면,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 호를 포로로 잡아가자, 장통을 대표자로 하여 이 지역에 남아있던 잔존 세력이 1,000여 호를 이끌고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옮겨간 주체는 장통과 왕준이 이끄는 1,000여 호에 달하는 대규모 낙랑 주민이었다. 장통과 왕준은 공식적인 관직도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낙랑 주민의 대표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낙랑군을 설치한 주체는 모용외이다. 당시 모용외는 공식적으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요서 지방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선비족의 지도자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위·진·남북조시기에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유로 유이민이 발생한 경우, 예전의 행정구역을 새로운 장소에 옮겨 설치한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설치된 행정구역을 교군(僑郡), 교현(僑縣)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 동진 왕조가 성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이 상황을 교치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라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낙랑군 문제를 볼 때 요서 지방으로의 이주 상황을 교치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낙랑군의 멸망과 이주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이와 같은 견해는 일찍이 안정복(「낙랑고」, 『동사강목』), 한진서(「사군사실」, 『해동역사』) 등 조선 후기 실학자에게서 나타났다. 천관우(1989)는 이러한 관점에서 낙랑군의 이주 상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고, 이는 학계에서 통설로(천관우, 1989; 이성규, 2005)로서 인정받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진서』 지리지는 평양 지역의 낙랑군과 요서 지역의 낙랑군을 혼재하여 기록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역사서인 『위서』 지형지는 평양 지역의 낙랑군에 대한 설명이 없고, 요서 지방 그리고 하북성 지방에 소재한 낙랑군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역사서에 나타난 상황을 정리하면, 이주해 간 낙랑군의 이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낙랑군은 이후 중국사의 변천 과정에서 몇 차례 서쪽 지역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세력이 점차 위축되다가, 마지막에는 마을 단위 정도의 미약한 세력으로 존재하다가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졌다(공석구, 2019). 바로가기
  • 각주 010)
    대방태수를 비롯한 대방군 관련 관직이 중국 측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그래서 대방군의 경우도 낙랑군이 그랬던 것처럼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1. 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 자료번호 : gt.d_0003_002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