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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요동 지역의 정세와 고구려의 진출 과정

1. 요동 지역의 정세와 고구려의 진출 과정

후한(後漢)시기 요동군은 낙랑군(樂浪郡)의 배후기지로서 역할을 수행(權五重, 1992)하는 한편, 고구려를 상대한 현도군을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국내성(國內城)에 도읍한 고구려는 이들을 상대하며 국가적 성장을 이루어 나갔다. 4세기 초,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을 차지하고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이 무렵 혼란에 빠져 있던 요동의 정세도 고구려의 진출에 기회가 되었다.
한편, 서진(西晉)은 요동·요서 지역에 평주(平州)를 설치하고 평주자사(平州刺史)·동이교위(東夷校尉)에게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던 서진의 통제력은 내분과 5호(胡)의 반란이 이어지면서 붕괴하였고, 요동 지역의 정세도 급변하였다. 309년 요동태수 방본(龐本)이 동이교위 이진(李臻)을 주살한 뒤 제거되는 혼란이 일어났고, 새로 평주자사·동이교위가 된 최비(崔毖)는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이 틈을 타고 세력을 키워 혼란에 빠진 요동 지역의 질서를 회복한 세력이 모용선비(慕容鮮卑)였다.
모용선비가 점차 강성해지자, 최비는 고구려·우문부(宇文部)·단부(段部) 등 주변세력들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정벌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319년 최비는 고구려로 망명하였고, 모용외(慕容廆)가 아들 인(仁)을 요동에 두어 관부(官府), 시가지와 마을이 평온해졌다는 『자치통감(資治通鑑)』 기록은 모용선비가 요동을 확보했음을 알려준다. 이로써 고구려는 모용선비와 직접 대치하게 되었다(田中俊明, 1997).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311년(미천왕 12년) 서안평(西安平)주 003
각주 003)
현재 요령성 단동시의 동쪽으로, 애하(靉河)가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곳의 하중도에 위치한 애하점촌토성(靉河尖村土城)이 그 현성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安平樂未央’ 명문의 와당이 출토되었다. 동서 약 500m, 남북 약 500m의 방형 판축 성벽이었다. 서안평현을 확보한 고구려는 이곳을 하나의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고구려 기와가 흩어진 채 발견되었고 ‘안평성’ 명문의 토기도 나왔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도 안평성이라는 언급이 보인다(東潮·田中俊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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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또한 현도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가, 335년에는 제3현도군 군치와 인접한 곳에 신성을 쌓았다. 요동반도의 동쪽, 현재의 무순(撫順)·단동(丹東)까지 확보한 고구려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요동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요동 공략에 나서는 한편, 동수(冬壽)·봉추(封抽) 등의 망명자를 받아들인 것은 모용선비를 자극하였다.주 004
각주 004)
이러한 양국 관계를 이용하여, 후조는 군량을 고구려에 운반해두고 모용부를 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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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후조(後趙)와의 연결을 꾀하기 위해 330년과 332년에 사절을 보냈던 것도 그러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양평과 평곽(平郭)주 005
각주 005)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는 “평곽성은 지금 건안성(建安城)이라 부른다, 나라의 서쪽에 있다. 본래 한의 평곽현이다”라고 하였다. 요령성 개주의 현성 아래층에서 한대 고성이 발견되어 이곳을 평곽현으로 보고 있다(東潮·田中俊明,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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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시켜 고구려의 서진을 가로막았고, 그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은 연왕(燕王)을 칭하고 339년 신성을 공격하여 고구려를 위협하였고, 모용각(慕容恪)을 평곽에 두었다. 모용각이 평곽을 진수하며 여러 차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는 기록(『자치통감』 권96)은 모용씨가 요양에 더하여 현재의 개주(蓋州)를 요동의 새로운 거점으로 운용했음을 보여준다(李成制, 2012).
마침내 모용황은 342년 “손쉬운 상대인 우문부와 달리 고구려는 늘 틈을 엿보고 있어 중원 진출에 앞서 반드시 제압해야 할 상대”라는 모용한의 건의에 따라 5만 5,000여명의 병력을 동원, 고구려를 급습하였다(『자치통감』 권97). 이때 모용황은 ‘평탄하고 넓은’ 북도(北道)로 주력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4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좁고 험한’ 남도(南道)로 침입해 와 고구려의 허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하였다.주 006
각주 006)
이 경로에 대한 기존 견해는 다양한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요양에서 태자하(太子河) 산간로를 거슬러오는 경로를 남도, 혼하를 거쳐 소자하(蘇子河) 연안로로 이어지는 경로를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今西春秋, 1935; 田中俊明, 1997; 임기환, 1998). 둘째 혼하를 거슬러오다가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점에서 소자하로 빠져 집안에 이르는 길을 남도, 합류점에서 혼하 상류로 계속 직진하다가 통화(通化)에서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 집안에 이르는 길을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箭內亙, 1913; 손영종, 1989; 여호규, 1995; 공석구, 2007). 셋째 혼하에서 소자하로 들어와서 신빈현(新賓縣) 왕청문진(旺淸門鎭)에서 남도와 북도의 경로가 갈라진다는 견해이다(王綿厚·李健才, 1990).
이러한 ‘남·북도’가 어느 구간을 가리키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노선은 전연이 고구려로 진군하려 할 때의 남·북도라는 것이지, 결코 고구려의 남·북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노선이 곧 왕도 집안을 중심으로 뻗어있던 고구려의 간선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교전이 이 두 노선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양국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자치통감』 등의 관련 사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남·북도의 경로를 고구려 영내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전연의 침공은 신성을 확보한 뒤에 전개된 것으로 보아야 하나, 사료상 그러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 늦어도 고구려 영내에 들어서기 이전의 어느 지점에서 군을 나누었다고 보인다. 전연의 작전은 고구려가 두 경로에 대한 비중을 달리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고구려의 본대를 피해 허를 찌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고구려 영내 깊숙한 곳까지 전군이 함께 진군한다는 것은 어느 곳이든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작전의 의도와 다르게 된다.
양국이 북도를 주 경로라고 본 것은 이 노선이 전연과 고구려를 잇는 통상적인 교통로임을 시사한다. 양평에서 신성을 거쳐 혼하를 지나 소자하로 들어가는 길이며 과거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해 올 때 이용한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 아래, 양측이 잘 알고 있었던 또 하나의 통로를 그 남쪽에서 찾는다면 태자하를 따라 이어지는 경로가 남도가 되는 것이다(田中俊明, 1997; 임기환, 1998).
한편, 『진서(晉書)』·『위서(魏書)』에는 남도와 북도 대신 ‘南陜’과 ‘北置’가 보이는데, 이를 특정한 지점으로 보고 남·북도로 들어가는 기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자치통감』 권97 胡三省注). 그러나 지형상의 특징을 언급한 『자치통감』 문장의 원뜻과는 일치하지 않는 설명이다(王綿厚·李健才,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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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을 북도로 보낸 고구려군은 모용황군을 상대하지 못하고 목저성(木底城)주 007
각주 007)
『위서』·『진서』에는 남도로 들어온 전연군이 목저성에서 고구려군과 교전했음을 전한다. 이 기록의 위치에 대한 이해는 이 전역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기재한 『자치통감』에도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남·북도의 경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도에서의 교전지라는 점에서 목저성은 남도에 있었다. 또한 남소성과 함께 신성도(新城道)로 연결되고 있었다는 점이 그 위치에 대한 기본 정보가 된다. 647년 당군이 신성도를 거쳐 남소성과 목저성을 차례로 공격하였으며, 667년 당군이 신성을 거쳐 남소성·목저성·창암성(蒼巖城)을 떨어뜨리고 천남생(泉男生)군과 합류했던 것이다. 한편, 신빈현 목기진(木奇鎭)이 명대의 요충지였고, 목저와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곳에 목저성이 있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어왔다. 여기에 남협(南陜)을 남도의 기점으로 해석하고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지점이 그곳에 해당한다고 여겨, 목기진 일대의 여러 성곽 중 하나라고 본 견해도 있다(여호규, 1995). 이들은 이를 전제로 삼아 소자하 연안로를 남도의 구간으로 본다. 그러나 남도를 태자하 노선이라고 보면, 목저성은 육도하(六道河) 상류와 혼강(渾江) 유역 사이에 있어야 한다. 또한 신성-남소성-목저성-창암성-국내성의 경로상에 놓여 있다는 조건에도 부합해야 한다.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이 태자하 상류에서 육도하 상류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구로성(舊老城)은 이도하(二道河)를 통해 소자하 상류로 이어지는 경로에 있다는 점에서 후보지가 될만하다(田中俊明, 1997; 임기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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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크게 패하였고, 왕도마저 함락당하였다. 전연군은 고구려 도성을 파괴하고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비롯, 남녀 5만여 구를 포로로 잡아 퇴각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전연에 대해 열세에 놓이게 되었고, 요동 진출은 중단되었다. 그런 만큼 342년 전역(戰役)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당시 정세와 이후 양국 관계를 살피는 데 긴요하다. 우선 전연의 전략적 목표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 제압과 함께 부여(夫餘)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할 의도가 있었다(여호규, 1995)고 보기도 하나, 북도로 침입한 전연의 병력은 1만 5,000명으로 이 목표를 감당하기에 부족한 규모였다. 연왕 모용황과 모용한·모용패(慕容覇) 등의 제장이 이끌었던 남도군에 비해 북도의 장수는 장사(長史) 왕우(王寓) 한 사람만 보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전연군의 최우선 목표는 고구려를 제압하는 데 있었고, 부여 문제는 논외의 일이었다.
고구려 공격을 계획할 때 전연의 여러 장수들은 북도로의 진군을 바랐으나, 모용한은 고구려도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 북도를 중시하고 남도를 가볍게 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전연과 고구려 모두 북도가 평탄한 경로여서 대군이 통과하기에 적합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田中俊明, 1997). 이러한 상식을 깼다는 점에서 전연이 구사한 전술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임기환, 1998).
북도로 보낸 병력은 남도로의 공격을 감추기 위한 양동작전의 일환이었고, 그 임무는 북도로 올라올 고구려군을 상대하여 정예군의 남도 진출을 조력하는 데 있었다. 모용한은 혹시 북도군의 작전에 차질이 빚어지더라도 남도군이 고구려의 왕도를 무너뜨린 뒤라서, 복심이 제거된 사지가 꼼짝할 수 없듯이 고구려의 저항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이성제, 2008).
또 하나, 고구려군이 북도에서 거둔 승리가 이 전역의 결과를 어떻게 이끌었는가 하는 점이다. 종래의 연구는 이 문제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용한의 기대와 달리, 전연의 북도군이 전멸하면서 전황은 유동적으로 변하였다. “고구려를 평정하여 … 배후에 대한 걱정을 없앤 뒤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란 모용한의 언급으로 보아, 왕이 직접 나선 이 전역에서 전연이 기대한 바는 고구려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있었다. 그렇지만 북도군의 전멸로 인해 모용황은 고구려를 궁지에 몰아넣고서도 회유해야 했고, 고국원왕의 무반응에 급기야 회군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북도에서의 전투는 전연 측에게 눈앞에 둔 승리를 포기하게 만들었고, 고구려는 패망의 기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이성제, 2008).
이듬해 고국원왕은 왕제(王弟)를 보내 신하를 칭하고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돌려받았다. 반면 전연은 345년 남소성(南蘇城)주 008
각주 008)
남소성은 남소수(南蘇水)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가 남소수였으므로 남소성은 소자하 연안에 위치하였다. 그 구체적 위치로는 무순현 장당향(章黨鄕) 고려영자촌(高麗營子村)의 철배산성(鐵背山城), 철령(鐵嶺)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 신빈현 상협하진(上夾河鎭) 오룡산성(五龍山城), 신빈 영릉진(永陵鎭) 구로성(舊老城)이 거론되고 있다. 앞의 두 견해는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의 “남소성이 … 잡성(雜城) 북쪽 70리 산 위에 있다”는 기록에서 ‘잡성’과 ‘북쪽’을 ‘신성·동북’이나, ‘신성의 북쪽’으로 교감하고, 이를 근거로 남소성의 위치를 살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다만 신성의 북쪽이라면 남·북도의 경로에서 벗어나게 되어 최진보산성으로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철배산성설은 “남소성은 남협의 동쪽에 있다”는 호삼성주(『자치통감』 권97)를 입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나, 호주의 이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남·북도에 대해 지형상의 특징을 언급한 『자치통감』 문장의 원뜻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철배산에서 조사된 산성은 4,612.5m 둘레 복곽식(複廓式)산성으로, 후금(後金) 누르하치가 대대적으로 개축한 계번성(界藩城)이다. 고구려 성벽은 그 동위성(東衛城)의 동벽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곳에 고구려산성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계번성 자체를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신성과 목저성 사이의 구간에 있었다는 점에서 고이산성과 구로성(고검지산성) 사이에 위치하여 소자하 연안로의 출입을 틀어막고 있는 오룡산성이 남소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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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빼앗아 병력을 배치하며,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이어나갔다.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대신 선왕의 시신과 왕모를 인질로 삼아 고구려를 구속하겠다는 전연의 새로운 방책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모용각(慕容恪)이 길림(吉林) 지역에서 서쪽으로 옮겨와 있던 부여를 공략하였다. 이러한 군사행동은 시종일관 모용각이 지휘했다는 점에서 일련의 작전이었고, 북부여에서 전연군을 저지했다는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기록으로 보아 길림 지역까지 공략 대상이 되었다. 전연의 목적은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부여까지 차지하려는 데 있었다(武田幸男, 1989; 여호규, 1995).
349년 석호(石虎)의 죽음으로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전연은 본격적인 중원 진출을 시도하여 352년 후조를 멸하고 화북을 차지하였다. 황제를 칭한 모용준(慕容儁)은 이듬해 수도를 요서의 용성(龍城)에서 중원의 계(薊)로 옮겼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355년 볼모를 보내고 조공하며 왕모를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고국원왕을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고구려왕에 봉한다는 전연의 책봉이 이어졌다(『진서(晉書)』 110). 고구려로서는 군사적 열세에 대한 타협이자 왕모를 데려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전연의 입장에서는 남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고구려라는 배후 위협을 덜 필요가 있었다(徐榮洙, 1981). 양국은 책봉・조공 관계를 맺어 불안정한 관계를 정리했던 것이다.
이때의 책봉・조공 관계에 대해 일회성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했다고 보기도 하나(全海宗, 1966; 江畑武, 1968; 徐榮洙, 1981), 이때 성립한 양국 관계를 통해 고구려는 전연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매듭지을 수 있었다(여호규, 200). 왕모를 인질로 삼은 전연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다. 남소성 공략과 뒤이은 부여 침공은 전연의 전략이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책봉・조공 관계의 성립으로 고구려는 전연의 군사적 위협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전연이 멸망하는 370년까지 대립이나 군사적 충돌을 보여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여호규, 2000).
전진(前秦)이 전연을 무너뜨리고 화북 일대를 장악하자, 요동태수 한조(韓稠)는 전진에 항복하였다. 요동 지역의 전연 세력도 전진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전연의 망명자 모용평(慕容評)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진에 넘기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양국의 우호는 전진의 부견(苻堅)이 비수(肥水)전역에서 동진(東晉)에 대패하여 붕괴하는 383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비수전역의 결과 전진이 급격히 쇠락하자, 부견에게 투항해 있던 모용수(慕容垂)는 384년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후연은 과거 전연의 영역을 회복하여, 이듬해 2월에는 요서의 용성을 수복하고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를 주둔시켰다(『자치통감』 권105). 한편, 고구려의 요동 진출도 재개되었다. 고국양왕은 385년 6월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요동군과 현도군을 떨어뜨리고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요동 지역은 고구려의 차지가 된 듯했지만, 11월 모용농(慕容農)이 이끈 후연군의 반격으로 고구려는 요동을 잃고 말았다. 385년 요동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양국의 쟁탈전은 후연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요동 지역을 차지한 후연은 모용좌를 용성에서 평곽으로 전진 배치하였다. 용성에는 모용농을 두어 ‘도독유평이주북적제군사(都督幽·平二州·北狄諸軍事)’하게 함으로써 요동의 모용좌를 후방에서 지원하였다(『자치통감』 권106; 李成制, 2012).
서진의 붕괴와 같은 중원의 정세 변화는 동북 끝에 위치한 요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진을 대신하여 선비모용부의 전연이 요동을 차지하였고, 전진과 후연이 그 뒤를 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이들 세력과의 관계에 따라 중단과 재개의 국면을 오갔다. 서진의 몰락부터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확보하기까지, 고구려의 요동 진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사의 전개 과정, 특히 요동 지역을 차지한 여러 세력의 부침과 지역 지배 양상 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이다.
고구려가 신성을 쌓아 요동 진출의 거점으로 삼은 뒤,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서진과 그 후속 세력은 한대 이래 요동의 중심지인 양평과 함께 평곽을 거점으로 삼아 고구려를 상대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양평과 평곽을 진수케 하였고, 385년 고구려를 몰아내고 요동을 탈환한 후연이 요동태수를 두고 모용좌를 평곽에 배치했던 조치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양상으로 보아 344년 전연의 국내성 함락이나 385년 고구려의 요동 확보는 세력권 간의 일시적 신축이었고, 요동을 둘러싼 쟁탈전은 신성에서 혼하 하류를 거쳐 양평에 이르는 축선과 태자하를 지나 평곽에 이르는 노선상에서 탄력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광개토왕의 요동 확보 과정은 이러한 공방전의 지리적 범주를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 각주 003)
    현재 요령성 단동시의 동쪽으로, 애하(靉河)가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곳의 하중도에 위치한 애하점촌토성(靉河尖村土城)이 그 현성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安平樂未央’ 명문의 와당이 출토되었다. 동서 약 500m, 남북 약 500m의 방형 판축 성벽이었다. 서안평현을 확보한 고구려는 이곳을 하나의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고구려 기와가 흩어진 채 발견되었고 ‘안평성’ 명문의 토기도 나왔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도 안평성이라는 언급이 보인다(東潮·田中俊明). 바로가기
  • 각주 004)
    이러한 양국 관계를 이용하여, 후조는 군량을 고구려에 운반해두고 모용부를 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는 “평곽성은 지금 건안성(建安城)이라 부른다, 나라의 서쪽에 있다. 본래 한의 평곽현이다”라고 하였다. 요령성 개주의 현성 아래층에서 한대 고성이 발견되어 이곳을 평곽현으로 보고 있다(東潮·田中俊明, 1995). 바로가기
  • 각주 006)
    이 경로에 대한 기존 견해는 다양한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요양에서 태자하(太子河) 산간로를 거슬러오는 경로를 남도, 혼하를 거쳐 소자하(蘇子河) 연안로로 이어지는 경로를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今西春秋, 1935; 田中俊明, 1997; 임기환, 1998). 둘째 혼하를 거슬러오다가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점에서 소자하로 빠져 집안에 이르는 길을 남도, 합류점에서 혼하 상류로 계속 직진하다가 통화(通化)에서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 집안에 이르는 길을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箭內亙, 1913; 손영종, 1989; 여호규, 1995; 공석구, 2007). 셋째 혼하에서 소자하로 들어와서 신빈현(新賓縣) 왕청문진(旺淸門鎭)에서 남도와 북도의 경로가 갈라진다는 견해이다(王綿厚·李健才, 1990).
    이러한 ‘남·북도’가 어느 구간을 가리키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노선은 전연이 고구려로 진군하려 할 때의 남·북도라는 것이지, 결코 고구려의 남·북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노선이 곧 왕도 집안을 중심으로 뻗어있던 고구려의 간선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교전이 이 두 노선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양국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자치통감』 등의 관련 사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남·북도의 경로를 고구려 영내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전연의 침공은 신성을 확보한 뒤에 전개된 것으로 보아야 하나, 사료상 그러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 늦어도 고구려 영내에 들어서기 이전의 어느 지점에서 군을 나누었다고 보인다. 전연의 작전은 고구려가 두 경로에 대한 비중을 달리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고구려의 본대를 피해 허를 찌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고구려 영내 깊숙한 곳까지 전군이 함께 진군한다는 것은 어느 곳이든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작전의 의도와 다르게 된다.
    양국이 북도를 주 경로라고 본 것은 이 노선이 전연과 고구려를 잇는 통상적인 교통로임을 시사한다. 양평에서 신성을 거쳐 혼하를 지나 소자하로 들어가는 길이며 과거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해 올 때 이용한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 아래, 양측이 잘 알고 있었던 또 하나의 통로를 그 남쪽에서 찾는다면 태자하를 따라 이어지는 경로가 남도가 되는 것이다(田中俊明, 1997; 임기환, 1998).
    한편, 『진서(晉書)』·『위서(魏書)』에는 남도와 북도 대신 ‘南陜’과 ‘北置’가 보이는데, 이를 특정한 지점으로 보고 남·북도로 들어가는 기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자치통감』 권97 胡三省注). 그러나 지형상의 특징을 언급한 『자치통감』 문장의 원뜻과는 일치하지 않는 설명이다(王綿厚·李健才, 1988). 바로가기
  • 각주 007)
    『위서』·『진서』에는 남도로 들어온 전연군이 목저성에서 고구려군과 교전했음을 전한다. 이 기록의 위치에 대한 이해는 이 전역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기재한 『자치통감』에도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남·북도의 경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도에서의 교전지라는 점에서 목저성은 남도에 있었다. 또한 남소성과 함께 신성도(新城道)로 연결되고 있었다는 점이 그 위치에 대한 기본 정보가 된다. 647년 당군이 신성도를 거쳐 남소성과 목저성을 차례로 공격하였으며, 667년 당군이 신성을 거쳐 남소성·목저성·창암성(蒼巖城)을 떨어뜨리고 천남생(泉男生)군과 합류했던 것이다. 한편, 신빈현 목기진(木奇鎭)이 명대의 요충지였고, 목저와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곳에 목저성이 있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어왔다. 여기에 남협(南陜)을 남도의 기점으로 해석하고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지점이 그곳에 해당한다고 여겨, 목기진 일대의 여러 성곽 중 하나라고 본 견해도 있다(여호규, 1995). 이들은 이를 전제로 삼아 소자하 연안로를 남도의 구간으로 본다. 그러나 남도를 태자하 노선이라고 보면, 목저성은 육도하(六道河) 상류와 혼강(渾江) 유역 사이에 있어야 한다. 또한 신성-남소성-목저성-창암성-국내성의 경로상에 놓여 있다는 조건에도 부합해야 한다.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이 태자하 상류에서 육도하 상류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구로성(舊老城)은 이도하(二道河)를 통해 소자하 상류로 이어지는 경로에 있다는 점에서 후보지가 될만하다(田中俊明, 1997; 임기환, 1998). 바로가기
  • 각주 008)
    남소성은 남소수(南蘇水)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가 남소수였으므로 남소성은 소자하 연안에 위치하였다. 그 구체적 위치로는 무순현 장당향(章黨鄕) 고려영자촌(高麗營子村)의 철배산성(鐵背山城), 철령(鐵嶺)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 신빈현 상협하진(上夾河鎭) 오룡산성(五龍山城), 신빈 영릉진(永陵鎭) 구로성(舊老城)이 거론되고 있다. 앞의 두 견해는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의 “남소성이 … 잡성(雜城) 북쪽 70리 산 위에 있다”는 기록에서 ‘잡성’과 ‘북쪽’을 ‘신성·동북’이나, ‘신성의 북쪽’으로 교감하고, 이를 근거로 남소성의 위치를 살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다만 신성의 북쪽이라면 남·북도의 경로에서 벗어나게 되어 최진보산성으로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철배산성설은 “남소성은 남협의 동쪽에 있다”는 호삼성주(『자치통감』 권97)를 입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나, 호주의 이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남·북도에 대해 지형상의 특징을 언급한 『자치통감』 문장의 원뜻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철배산에서 조사된 산성은 4,612.5m 둘레 복곽식(複廓式)산성으로, 후금(後金) 누르하치가 대대적으로 개축한 계번성(界藩城)이다. 고구려 성벽은 그 동위성(東衛城)의 동벽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곳에 고구려산성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계번성 자체를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신성과 목저성 사이의 구간에 있었다는 점에서 고이산성과 구로성(고검지산성) 사이에 위치하여 소자하 연안로의 출입을 틀어막고 있는 오룡산성이 남소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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