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려·후연의 관계와 영락 5년조 기사의 이해
2. 고구려·후연의 관계와 영락 5년조 기사의 이해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확보하게 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이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입장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영락 5년(395년) 이전에 요동 지역을 장악했다고 보는 견해이고(徐榮洙, 1981; 武田幸男, 1989; 田中俊明, 1996; 공석구, 2003; 篠原啓方, 2005; 井上直樹, 2012; 임기환, 2013), 다른 하나는 400년 혹은 402년 이후가 되어서야 그것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여호규, 2005; 李成制, 2012). 그런데 이들 견해는 모두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영락 5년조 기사와 『양서(梁書)』 고구려전의 광개토왕 책봉 기사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 점에서 여러 논의의 특징과 한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 두 자료가 어떤 성격의 기사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고구려가 요동을 확보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구려가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연군(燕郡)을 공략했던 일을 두고, 그 영역이 요하 이서에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양국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범위가 서쪽으로는 요하 이서까지 이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동쪽의 범주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닐까? 407년 광개토왕과 북연왕 고운(高雲)이 우호관계를 맺기 전까지 양국의 공방전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400년에는 후연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반도 전역을 고구려가 손에 넣었다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점거 혹은 진출이지, 지배권을 연상시키는 확보라고는 볼 수 없다. 즉 고구려가 요동을 확보하고 지배권을 굳히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407년 무렵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 살핀 고구려와 여러 세력 간의 각축 양상을 보면, 385년 요동군·현도군 공략으로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곧 이은 후연의 반격으로 물러나야 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팽팽하던 균형을 깨고 후연을 압도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 고구려가 요동을 확보하였는지와 관련하여, 판단의 주요한 잣대 하나를 둘 수 있겠다. 즉 385년 이후 양국 관계의 추이를 놓고 힘의 우위가 어느 쪽에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후연은 요동군·현도군을 회복한 뒤, 양평에 요동태수를 두고 평주자사를 용성에서 평곽으로 옮겼다(『자치통감』 권106). 이것은 평주의 치소를 요서에 두고 요동군·현도군을 관장하던 과거와 달리, 요하 이동으로 평주자사를 전진 배치했음을 알려준다. 예상되는 고구려의 진출에 맞서 이 지역을 지켜내려는 적극적인 조치였던 셈이다. 이러한 모습은 후연이 요동군·현도군 회복의 임무를 달성한 모용농을 복귀시키지 않고 용성을 거점으로 ‘유평이주북적(幽·平二州·北狄)’을 도독(都督)케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에게 후연의 동북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井上直樹, 2012). 모용농이 ‘도독유평이주북적제군사’ 하게 됨에 따라, 평주자사 모용좌는 그 예하에 배속되었다. 평곽의 평주자사는 ‘도독유평이주북적제군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고구려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李成制, 2012).
이 조치가 의미하는 바는 과거 고구려와 전연 간의 공방전을 상기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전연 건국의 토대를 놓은 모용외가 요동을 차지한 뒤 요동성과 평곽을 진수하게 되자,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가로막혔고, 그 뒤를 이은 모용황에게는 왕도 국내성을 함락당하는 커다란 피해를 입은 바 있었다. 이러한 전대의 경험을 살려 후연은 평주자사와 요동태수를 전진 배치하는 군사력 강화의 조치로써 고구려를 상대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고국원왕대 입은 피해의 기억이 남아 있었을 고구려가 느낀 위협 정도는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李成制, 2012).
그러던 모용농은 389년 정월 모용융(慕容隆)으로 교체되었다. 그가 후연을 둘러싼 정세를 이유로 서남 방면으로의 전출을 요청하였고, 모용수가 허락했던 것이다(『자치통감』 권107). 이때의 교체로 후연의 동방정책에 변화가 있었다거나 고구려의 적극적인 공세가 가능했다고 보기도 한다(井上直樹, 2012). 모용융의 역량이 그 형인 농에 미치지 못해,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고구려의 서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갈(遼碣) 지역이 안정되었다는 언급으로 보아, 모용융의 재임 기간(389~395년) 중, 요서·요동지방에는 별다른 정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인다. 모용농이 세운 규범을 이어받아 더 체계화했다(因農舊規 脩而廣之)는 평가로 보더라도, 용성을 중심으로 평곽과 양평 두 방향에서 고구려를 상대한다는 전략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모용융이 도독제군사한 관할범위에는 평주가 들어 있어, 고구려를 상대하는 책임도 승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李成制, 2012).
한편, 모용농과 모용융을 이곳에 보냈다는 사실은 당시 후연이 요동을 비롯한 동북방 지역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둘은 후연에서 모용수의 뒤를 이어 난세를 헤쳐 나갈 재목으로 지목될 정도의 인물이었다(『자치통감』 권108). 더욱이 모용농이 전출을 요청하면서 이유로 삼았던 서남 지역의 불안정처럼 후연을 둘러싼 정세는 여전히 불투명하였다. 후연은 쓰임새가 적지 않았을 상황임에도 이들을 보내 요서·요동 지역의 영유를 확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李成制, 2012).
후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선으로 요동을 진수하고 있던 만큼, 고구려가 틈을 노릴 수 있는 기회는 적었다. 반면 후연으로 보아서는 이들의 장기간 진수가 필요할 만큼 동북방의 정세가 유동적이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395년 5월 후연이 거국적으로 북위 공격군을 편성하면서도(『자치통감』 권108) 용성의 모용융과 그 휘하 병력을 제외했던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李成制, 2012).
그런데 이처럼 평곽을 전진기지로 삼아 고구려의 진출을 가로막았던 후연의 동방정책은 머지않아 위기에 봉착하였다. 무엇보다도 참합파(參合陂)의 패전주 009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대군을 편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했다는 사실은 북위를 단번에 멸할 수 있다고 여겼던 후연에게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모용융과 휘하 병력이 용성을 떠나 북위 공격군에 편성된 것은 396년 1월의 일이다(『자치통감』 권108). 아껴두었던 용성의 병력과 모용융까지 동원할 정도로 후연이 참합파에서 입은 피해는 상당했고, 그런 만큼 설욕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처럼 모용융과 휘하 병력이 용성에서 빠져나감으로써 후연의 전력에 변화가 생겼다. 이 점에서 고구려가 서진하기에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지만, 후연은 북위 공격군의 편성에 따른 공백을 메우는 조치를 병행하여 그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모용융을 대신하게 된 이는 모용회(慕容會)였다. 모용수가 태자 모용보에게 후사로 삼으라고 유언으로 남길 정도로 중임(重任)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모용회는 ‘녹유대사(錄留臺事)・영유주자사(領幽州刺史)’ 내지 ‘북정대장군(征北大將軍)・유평이주목(幽·平二州牧)’의 직으로 용성을 진수하였다(『자치통감』 권108). 전임자의 임무를 대신하게 된 만큼, 그가 맡았던 권한을 이어받았다고 본다면 요동·현도 2군을 포함한 평주도 그가 관할했다고 여겨진다.
북위와의 전쟁에서 후연은 결국 패배하지만, 이때의 공격은 꽤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북위왕 탁발규(拓跋珪)가 도주할 마음까지 먹을 정도로 후연군의 공세는 매세운 것이었다. 그러던 전세에 변화를 준 것은 갑작스러운 모용수의 죽음이었다. 후연군은 모용수의 죽음을 감추고 수도인 중산(中山)으로 귀환하여 발상(發喪)하였고, 396년 4월 모용보(慕容寶)가 즉위하였다.
같은 해 8월, 북위는 대군을 보내 후연 공격에 나서 중산을 압박하였다. 40만 명을 동원했다는 북위의 공세에 후연은 하북(河北)의 여러 성을 잃고 중산(中山)·업(鄴)·신도(信都) 세 곳만 겨우 보존하는 형편이었다(『자치통감』 권108). 그런 가운데, 397년 2월에는 후연 내부에서 모용보를 살해하고 모용린(慕容麟)을 옹립하려는 반란이 일어났고, 3월 모용보는 용성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용성을 지키고 있던 모용회는 이 기회를 틈타 반란을 시도하였고(『자치통감』 권109), 모용보는 북위에 빼앗긴 하북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키는 등 무리를 거듭하다가 결국 398년 시해당하고 만다(『자치통감』 권110).
이처럼 396년 모용보의 즉위를 전후하여 후연은 북위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야 했고, 안으로는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후연이 더이상 고구려와의 군사적 대치관계를 유지하기 곤란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양국이 적대관계를 뒤로 하고, 후연의 광개토왕 책봉이라는 책봉・조공 관계를 맺게 된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모용보대에 후연이 하북을 잃고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급속히 쇠락해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두고 396년 무렵의 정세를 재단하는 것은 온당한 판단이라 보기 어렵다. 모용보가 모용회를 후계로 삼지 않아 그의 모반을 불러왔고 중산을 고수하지 않고 포기하여 민심을 수습할 기회를 놓치는 등의 실책이 없었다면, 전쟁의 승패는 오히려 뒤바뀔 수 있었다는 평가(臺灣三軍大學, 1972)가 이를 말해 준다. 요서·요동에 대한 후연의 지배력은 적어도 396년 무렵까지 변함이 없이 강고하게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후연의 쇠락을 근거로 고구려의 서진이 이 시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400년 이후 양국의 공방전과 경로를 살피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광개토왕비〉 영락 5년조 기사를 살펴보자.
영락 5년 을미(乙未)에 왕은 패려(稗麗)가 귀복(歸服)하지 않은 까닭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우마와 양떼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후성(候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와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뒤에 돌아왔다.
이 기사는 395년에 광개토왕이 거란족의 일부인 패려를 정벌하고 양평도 등의 경로를 거쳐 귀환하면서 영토를 순수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양평도의 ‘양평’은 진대 이래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양평도는 양평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로를 가리킨다(여호규, 2005).주 010 그러면 광개토왕이 귀환길에 역성·북풍 등을 경유하게 되는 양평도는 어디일까? 이 경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당시 고구려의 요동 지역 지배의 양상을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였으며, 후성·역성·북풍은 현도군과 요동군의 속현이었던 곳이다. 역성이 어디인가는 알 수 없지만, 후성은 심양시(瀋陽市) 노성구(魯城區) 고궁(古宮) 고성지가 유력하다(田中俊明, 1997). 북풍은 3세기 위(魏)의 요동군 속현이었으며, 240년에는 문현(汶縣)·북풍(北豐縣) 유민이 산동(山東)반도로 이주한 일이 있어서(『삼국지』 위서)에서 요동반도 서부로 본다(武田幸男, 1989). 이 점에서 광개토왕이 이들 지역을 경유하여 귀환했다는 것은 이 무렵 고구려가 요하 이동 지역 모두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근거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경유지를 근거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우선 양평도는 중국 내지 및 요서에서 양평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고구려 왕도나 경내에서 양평에 이르는 어느 경로를 가리킬 것이다(임기환, 2013).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장수왕 26년(436년) 고구려가 영입해온 북연왕(北燕王)을 평곽에 두었다가 북풍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있다. 당시 북위가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고, 또 그가 고구려의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상황으로 보아, 요하 가까이의 평곽에서 옮겼던 지역은 요동 내지일 가능성이 높다(임기환, 1998; 李成制, 2012).주 011
각주 011)

역성은 후연의 요동군에 소속된 현이었다(『晉書』 권14, “遼東國. 襄平〈東夷校尉所居〉·汶·居就·樂就·安市·西安平·新昌·力城”). 역성의 소재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다른 속현의 위치를 감안하여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문현은 현재의 해성시(海城市) 기목한성(析木漢城), 거취현은 요양시(遼陽市) 동남(東南) 양갑촌(亮甲村) 동안(東岸)의 고성, 안시현은 영구시(營口市) 영수구한성(英守溝漢城), 서안평은 단동시(丹東市)의 애하첨고성지(靉河尖古城址), 신창은 요양 남쪽의 안산(鞍山) 남부 양유하(楊柳河) 구보촌(舊堡村) 부근의 고유지(古遺址)로 비정된다(孫進己·馮永謙, 1989). 위치를 알 수 없는 낙취현을 제외하면, 양평 이하의 속현 모두가 요양 남쪽에 소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성의 위치도 대략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李成制, 2012).
이렇게 보면 광개토왕은 요동반도 중부 일대를 거쳐 귀환한 것으로, 그 경로 자체만으로는 요동 전역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즉 이 기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李成制, 2012; 임기환, 2013).
그러면 어째서 광개토왕은 요동반도 중부지역을 경유하는 경로로 귀환했던 것일까. 이 기록의 의미에 대해 처음 지적한 연구는 전연대부터 요동 경영의 중심이었던 양평과 평곽이 광개토왕의 경유지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고구려가 아직 요동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李成制, 2012). 즉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라는 문장은 왕의 행렬이 양평을 경유하지 않고 그 중간 지점 어딘가로 들어와 동쪽의 후성으로 나아간 것을 의미하며, 북풍에서 조금만 서진하면 닿았을 평곽이 경유지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입장에서 양평이 고구려의 영역이 아니었다면 양평도로 표현할 이유가 없으며, 평곽을 거치지 않았던 것은 고구려 입장에서는 그 지정학적 가치가 후연과 다를 수 있기에 이를 후연이 평곽을 차지하고 있었던 증거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임기환, 2013).
양평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돌려놓더라도, 왕의 순행로에 평곽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앞서의 지리 조건으로 보아 북풍은 평곽으로 나아가는 경로상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더욱이 평곽은 전연 이래 고구려의 서진을 가로막은 적의 거점이었다. 확보한 영토를 시찰하고 돌아온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이 이런 곳을 빼놓고 정치·군사전략면에서 비중이 덜한 지역을 거쳐 귀환한 연유에 대해 더 고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각주 009)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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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역성은 후연의 요동군에 소속된 현이었다(『晉書』 권14, “遼東國. 襄平〈東夷校尉所居〉·汶·居就·樂就·安市·西安平·新昌·力城”). 역성의 소재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다른 속현의 위치를 감안하여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문현은 현재의 해성시(海城市) 기목한성(析木漢城), 거취현은 요양시(遼陽市) 동남(東南) 양갑촌(亮甲村) 동안(東岸)의 고성, 안시현은 영구시(營口市) 영수구한성(英守溝漢城), 서안평은 단동시(丹東市)의 애하첨고성지(靉河尖古城址), 신창은 요양 남쪽의 안산(鞍山) 남부 양유하(楊柳河) 구보촌(舊堡村) 부근의 고유지(古遺址)로 비정된다(孫進己·馮永謙, 1989). 위치를 알 수 없는 낙취현을 제외하면, 양평 이하의 속현 모두가 요양 남쪽에 소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성의 위치도 대략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李成制,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