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396년 후연과의 책봉・조공 관계 성립과 그 의미
3. 396년 후연과의 책봉・조공 관계 성립과 그 의미
395년 무렵 요동 지역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는 이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근거 자료가 되는 것이 『양서(梁書)』 고구려전이다. 즉 “(모용)수가 죽고, 아들 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安)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대방 2국왕에 봉하였다. [이에] 안이 비로소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의 관을 두었다. 이후 [고구려는] 요동군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은 모용보가 광개토왕을 책봉한 내용으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후연이 인정한 조치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 기록이 전해의 〈광개토왕비〉 영락 5년조 내용과 함께 고구려가 요하 이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책봉은 모용보가 396년 4월에 즉위했다는 『자치통감』 기록으로 보아, 그의 즉위에 즈음하여 이루어진 책봉이라 보인다(井上直樹, 2012). 이 기록은 385년 요동을 둘러싸고 양국이 교전한 이래, 처음 등장하는 교섭 기록이며 후연이 고구려왕을 책봉하였음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자료라고 여겨진다.
많은 연구들이 이때의 책봉은 후연이 일방적으로 행한 것으로 고구려가 조공사절을 보냈는가의 여부와 상관 없다고 보고 있다. 모용보의 즉위는 후연이 북위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던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수반한 책봉도 이러한 불리한 정세와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책봉을 후연의 일방적 행위였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선 지적해야 할 문제는 중국 왕조가 일방적으로 책봉을 행한 경우에 상대국의 의향과 관계없이 이루어지곤 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왕조의 개국(開國) 시기에 한정되어 나타나며, 왕조의 성립을 기념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행해진다는 점이다(金鍾完, 1995). 이에 반해 모용보의 즉위는 부황 모용수의 뒤를 이은 것으로 신왕조의 개국에 해당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책봉을 행한 경우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모용보가 즉위하면서 행한 책봉이기에 고구려의 의사와 무관했다는 견해도 수긍하기 어렵다. 당시 후연이 처한 상황으로 보아, 모용보는 즉위를 자축하고 기념할 계제가 아니었다. 반격에 나선 북위의 대군을 상대하며 내부 안정을 꾀해야 하는 등 대내외적 위기가 그 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즉위에 수반해서 행해진 조치는 그 대책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주 012
그러므로 모용보가 광개토왕을 책봉한 조치는 위기의 국면에서 나온 대책의 하나로 책봉을 내세운 대고구려외교라고 볼 수 있다. 후연은 북위라는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 동방의 안정이 필요했고, 대고구려외교로서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후연이 고구려왕을 책봉하고 관계 개선을 기대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모용보가 광개토왕을 책봉했다는 것은, 후연이 385년 이래의 적대관계 대신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랐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광개토왕이 후연의 책봉을 인정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즉 후연의 의도에 고구려가 화답하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의 개선은 무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관건이 되는 광개토왕의 의향과 무관하게 후연이 일방적으로 책봉했다고 보기 어렵다(李成制, 2012).
그 근거는 『양서』의 기록 속에서 확인된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반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봉 기사에 이어 광개토왕이 이때에 비로소 장사·사마·참군의 관(官)을 두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는 장사·사마·참군의 관원, 즉 막료를 두게 되었다는 것으로, 막부의 개설을 의미한다(金翰奎, 1997). 이때의 막부는 후연이 책봉으로 수여한 ‘도독모주제군사(都督某州諸軍事)’, ‘모장군(某將軍)’의 자격으로 열게 되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후연의 책봉을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면 관계 개선이라는 새로운 양국 관계에 대해 고구려의 입장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었을까. 후연의 입장이 책봉호 수여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에 짝하는 고구려의 행동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책봉・조공관계’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책봉과 조공이 짝해야만 제도적 외교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방적인 견사와 선언에 불과하였다(金翰奎, 1999). 그러므로 후연의 책봉에 짝을 이루는 고구려의 사절 파견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위 기록은 책봉과 조공을 통해 양국 간에 책봉・조공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한편, 양국 관계의 개선이 과연 후연에게만 필요했던 것일까. 양국의 적대적 관계가 부담스럽기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 백제와의 공방전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여 준다.주 013
각주 013)

이러한 모습은 385년 이후 396년까지 후연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양상과 대조적인 것이다. 고구려가 직면해 있던 현안 가운데 백제와의 대결이 보다 시급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井上直樹, 2012). 이 점에서 고구려는 요동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백제의 위협에 상대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광개토왕이 후연의 책봉을 수용하여 책봉・조공 관계를 성립시켰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李成制, 2012). 이와 관련하여 책봉에 앞서 고구려가 조공사절을 후연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공석구, 2003; 여호규, 2006).386년 백제가 청목령에서 서해안까지 관방시설을 설치하였고,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듬해 9월 관미령에서 백제군이 말갈에 패하였다. 389년 9월 백제가 고구려 남변을 공격해왔고, 이듬해 6월에는 도곤성이 백제군에 함락되었다. 391년에는 말갈이 백제 도현성을 함락하였다. 392년 고구려는 4만 명의 군대로 석현 등 10성을 함락하고 10월에는 관미성을 빼앗았다. 393년 백제가 관미성 수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394년 7월 백제가 수곡성에서 고구려군과 교전하였다. 395년 패수에서 양군이 교전하여 고구려가 승리하였고, 11월 패수에서 또 다시 백제가 패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성립된 양국 관계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일까. 많은 연구가 이때의 책봉으로 후연은 고구려가 요하 이동의 지역을 차지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본다. 모용보의 즉위에 따른 수작(受爵)에 의해 광개토왕은 후연의 외신(外臣)이 되어 그 책봉체제 아래 편입되었고, 요동·대방이국왕으로서 요하 이동 일대에 군립하는 것이 인정되었다(武田幸男, 1989)는 것이다. 즉 이 견해에 따르면 양국이 다투었던 요동 지역은 이미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있었고, 후연의 책봉은 이를 추인(追認)하는 조치였다. 후연이 책봉호로 수여한 ‘요동대방이국왕(遼東·帶方二國王)’·‘평주목(平州牧)’은 고구려의 요동 영유를 인정하는 관작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서』에 보이는 책봉호가 고구려의 요동 영유를 인정하는 관작인지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우선 관련 기사는 후연이 고구려왕에게 수여한 책봉호 전부라고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독모주제군사(都督某州諸軍事)’·‘모장군(某將軍)’의 관과 장군호가 기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중국 남북조시대 주자사(州刺史)는 장군직을 겸령(兼領)함과 동시에 사지절(使持節)·지절(持節)·가절(假節) 혹은 도독제군사·감군(監軍)·도독군사(都督軍事) 등의 가호(加號)를 갖게 되었다. 이 가운데 사지절 등은 장군이 군주로부터 독자적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의미한다. 도독제군사 등은 장군이 독자적 권한으로 통감(統監)할 수 있는 군사지구를 규정한다(金鍾完, 1995; 金翰奎, 1997). 그리고 이러한 지절·도독은 책봉을 통해 인접 국가의 군주에게도 수여되었다. 여기에서 책봉에는 독자적 통치권이 인정됨과 동시에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관할범위가 명시되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도독모주제군사’는 지배권이 행사되는 지배범위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책봉호의 중요한 요소였다. 후연이 396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인정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도독제군사’의 내용으로 수여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양서』 기록에 이 부분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후연이 고구려왕에게 수여한 책봉의 내용 전부가 아니라 일부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서』 고구려전의 광개토왕 책봉 기사는 후연 모용보가 수여한 책봉호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한 불완전한 기록이다. 그러면 원래의 책봉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이 기사에는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등이 생략되어 있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金翰奎, 1997). 즉 396년 책봉은 355년 전연의 황제 모용준이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수여한 책봉을 전제로 한 가관(加官)이나 진작(進爵)하게 될 때 앞서 받은 관작이 생략된 경우에 해당한다. 396년의 책봉에서 추가된 것(가관)이 평주목(平州牧)이며, 종래의 고구려왕에서 요동·대방 2국왕으로 왕호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책봉으로 후연은 광개토왕을 정동대장군에 임명하고 도독제군사로서 ‘영주’의 군사지휘권·민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관할권은 355년의 책봉에서 이미 보이는 것으로, 광개토왕대의 변화된 정세를 반영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면 그동안 고구려의 요동 영유와 관련있다고 보아왔던 ‘평주목’의 ‘평주’가 도독제군사에 관할구역으로 명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도독제군사의 권한과 범위로 보아서 평주에 대한 고구려왕의 지배권은 군사적 권한 없이 주목으로서의 민정권만 수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396년 이전 언제인가 요하 이동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후연의 책봉이 이를 인정하는 조치였다면, 그 책봉에는 평주를 도독제군사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내용이 책봉 내용에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에서 이때의 책봉을 근거로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곤란해 보인다. 달리 말하면 396년의 책봉은 고구려의 요동 영유를 인정하는 조치가 아니라 다른 내용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후연 모용보가 광개토왕에게 수여한 책봉호에 가관된 평주목은 어떤 사정에서 나온 것일까.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모용융·모용회는 평주를 도독제군사하였다. 다만 이때의 평주가 후연이 설정한 원래의 관할범위 모두였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그 까닭은 광개토왕의 책봉호 가운데 평주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후연의 책봉이 355년 전연의 책봉을 승계하는 한편 평주목을 가관했다는 것은 이전의 고구려와 다르게 변모한 광개토왕대의 성장을 감안한 조치였을 것이다. 비록 일시적인 점거로 그쳤지만, 385년 고구려가 요동·현도 2군을 차지했던 것처럼, 평주 관내 요하 이동의 영역이 고구려에 속했던 적도 있었다. 이로 보아 후연 모용보가 광개토왕에게 평주목을 포함한 책봉호를 수여했다는 것은 평주의 영역,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주 관내 요하 이동 지역을 후연과 고구려가 분점(分占)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앞에서 살핀 영락 5년조의 기사는 이러한 분점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실례가 된다(李成制, 2012).
그런데 양국의 책봉・조공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400년 2월에 후연이 다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재개된 공방전은 다음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7년여 동안 다섯 차례나 이어졌다.
① (400년) 봄 정월 고구려왕 안이 후연을 섬기는 데 예를 소홀히 하니 …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직접 군사 3만을 이끌고 기습하였다. 표기장군(驃騎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장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 2곳을 함락하여 70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의] 5천여 호를 옮겨 갔다. _ 『자치통감』 권111
② (402년) 5월 … 고구려가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후연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_ 『자치통감』 권112
③ (404년) 이때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燕郡)에 쳐들어와 백여 명을 살략하였다. _ 『진서』 권124
④ (405년) [후연왕] 모용희가 고구려를 정벌하며 왕후 부씨(符氏)를 따르게 했다. 충차(衝車)와 땅굴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희가 말하기를 적의 성을 함락할 것을 기다려 내가 왕후와 함께 연(輦)을 타고 들어갈 것이니, 장사들은 먼저 입성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틈을 타 성안에서 방어를 재정비하니 후연군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할 수 없었다. 때마침 비와 눈이 많이 내려, 사졸이 많이 죽었다. 모용희는 결국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_ 『진서』 권124
⑤ (405년) 12월 후연왕 모용희가 거란(契丹)을 기습하였다. … 의회(義熙) 2년(406년) 봄 정월 후연왕 희가 형북(陘北)에 이르러 거란의 무리[가 많음]를 두렵게 여겨 귀환하고자 하였으나 부씨가 따르지 않았다. 무신일 치중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병력으로 고구려를 기습하였다. … 2월 … 후연군이 3,000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 중 지치거나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다.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_ 『자치통감』 권114
② (402년) 5월 … 고구려가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후연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_ 『자치통감』 권112
③ (404년) 이때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燕郡)에 쳐들어와 백여 명을 살략하였다. _ 『진서』 권124
④ (405년) [후연왕] 모용희가 고구려를 정벌하며 왕후 부씨(符氏)를 따르게 했다. 충차(衝車)와 땅굴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희가 말하기를 적의 성을 함락할 것을 기다려 내가 왕후와 함께 연(輦)을 타고 들어갈 것이니, 장사들은 먼저 입성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틈을 타 성안에서 방어를 재정비하니 후연군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할 수 없었다. 때마침 비와 눈이 많이 내려, 사졸이 많이 죽었다. 모용희는 결국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_ 『진서』 권124
⑤ (405년) 12월 후연왕 모용희가 거란(契丹)을 기습하였다. … 의회(義熙) 2년(406년) 봄 정월 후연왕 희가 형북(陘北)에 이르러 거란의 무리[가 많음]를 두렵게 여겨 귀환하고자 하였으나 부씨가 따르지 않았다. 무신일 치중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병력으로 고구려를 기습하였다. … 2월 … 후연군이 3,000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 중 지치거나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다.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_ 『자치통감』 권114
후연군의 공격으로 신성·남소성이 함락되고 5,000여 호의 고구려인이 끌려갔으며, 406년에는 목저성이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405년의 공방전은 후연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해왔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요동 지역의 최대 거점인 요동성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자치통감』에는 400년 3월 “양평령(襄平令) 단등(段登) 등이 반란을 꾀하였다가 주살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이 해당 시점 양평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보면 아직 요동의 수부는 후연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여호규, 2005). 반면 반란 주모자가 요동태수가 아닌 양평령이라는 점에서 이 사료가 과연 요동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까라는 의문도 가능하다(임기환, 2013).
문제는 405년의 요동성 공방전이 있었다고 하여 고구려가 요동 전역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은가 하는 점이다. 400년 신성·남소성을 함락한 후연군이 5,000여 호를 끌고 갔다는 것은 후연군의 공세로 혼하 상류를 넘어 소자하 일대의 고구려 영내까지 피해가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후연의 목저성 공략은 이러한 양상이 적어도 406년까지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405년의 요동성 공방전 기록도 고구려가 요동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신성·남소성을 함락한 후연군이 400년 이후에도 이 지역을 유지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후연군이 신성·남소성을 공략했다는 점에서 평곽이나 양평이 후연의 수중에 있었다거나, 고구려군이 숙군성(宿軍城)과 연군(燕郡)을 공격했다고 하여 그 출발지를 요동성으로 보아도 좋은가 하는 점이다. 숙군성은 현재의 요령성 북진시(北鎭市) 일대(箭內亙, 1913; 孫進己·馮永謙, 1989), 연군은 의현(義縣)(松井等, 1913; 王綿厚·李健才, 1990)이라는 요하 서편 지역이었다. 이 점에서 요하 이서 지역을 고구려가 공격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동을 장악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의 출격로가 요동성이나 평곽을 반드시 경유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실례가 406년 후연의 목저성 공략이다. 405년 12월 후연 모용희는 거란 공격에 나섰다가 그 무리가 많음을 알고 목표를 바꿔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하였다. 거란의 거주지가 대략 시라무렌하(西拉木倫河)와 노합하(老哈河) 합류 지역이라고 보면, 모용희의 후연군은 요서 북부 지역으로부터 고구려 영내 깊숙이까지 들어왔던 셈이 된다. 3,000여 리의 장거리를 치중도 없이 행군했다는 점에서 무모한 작전임에 틀림없지만, 여기에서 궁금한 점은 어떤 경로를 이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영락 5년조의 정벌 대상이었던 패려(稗麗)는 거란의 일부로, 광개토왕은 요하 상류를 거치는 경로를 통해 원정에 나섰다. 그렇다면 이 경로를 경유하여 숙군성과 의현 공격도 가능하고, 역으로 후연의 군사작전도 가능한 것이다(임기환, 2013). 양국은 최전선에서의 직공 대신 거란 방면으로의 우회로를 택해 상대 진영의 배후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실제로 645년 당이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 이세적(李世勣)은 요하 상류를 건너 무순(撫順)의 현도성(玄菟城)을 급습하였는데, 이때 당군이 이용한 경로가 바로 요하 상류로 우회하는 노선이었다.주 014
이렇게 볼 때 400~406년 양국의 공방전 기록을 통해 거란 방면을 경유한 구체적인 경로를 규명하는 것도 앞으로의 연구과제일 것이다. 아울러 408년 광개토왕이 북연왕 고운에게 사절을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운은 고구려 유민으로 공을 세워 모용보의 양자가 되었던 이로, 바로 전해 모용희가 시해되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런 그에게 광개토왕이 우호의 뜻을 보냈고, 북연이 응하면서 양국이 우호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간의 이해였다. 하지만 어떻게 적대관계였던 양국이 우호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살핀 바가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단서가 되는 것은 원문의 ‘敍宗族’일텐데 ‘종족의 예를 베풀어’(李丙燾, 1983)라고 풀어서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 고운은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모용의 성을 버리고 본래의 고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씨를 회복한 고운을 광개토왕이 종족에 올려주었다는 것은, 그를 고씨 왕가의 계보에 넣어준 것을 뜻한다고 보인다. 고운이 답례의 사절을 보냈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던 것이다.
광개토왕의 사절 파견은 모용희가 죽고 고운이 즉위했던 후연 측의 동향을 고구려가 주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井上直樹, 2012). 그가 성씨를 회복했다는 정보에 따라 광개토왕은 그를 왕가의 계보 안에 넣어주는 조치로서 우호 의사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고구려가 고운의 북연에 대해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남방의 백제를 상대하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후연과의 공방전이 곤혹스러운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후연의 공세를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기보다는 백제전선과 연동하여 힘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후연은 요동성·목저성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전략적 판단보다는 즉흥적이고 무모하다 싶은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어느 면으로 보나 상대하기 곤란한 적수였던 것이다. 광개토왕이 고운의 즉위에 관심을 보이고 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으려 했던 연유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북연왕 고운의 즉위를 계기로 한 적극적인 외교의 결과, 고구려는 서쪽의 북연과 우호할 수 있었고 이후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일단락되었고, 요동 지역은 고구려의 서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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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386년 백제가 청목령에서 서해안까지 관방시설을 설치하였고,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듬해 9월 관미령에서 백제군이 말갈에 패하였다. 389년 9월 백제가 고구려 남변을 공격해왔고, 이듬해 6월에는 도곤성이 백제군에 함락되었다. 391년에는 말갈이 백제 도현성을 함락하였다. 392년 고구려는 4만 명의 군대로 석현 등 10성을 함락하고 10월에는 관미성을 빼앗았다. 393년 백제가 관미성 수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394년 7월 백제가 수곡성에서 고구려군과 교전하였다. 395년 패수에서 양군이 교전하여 고구려가 승리하였고, 11월 패수에서 또 다시 백제가 패하였다.
- 각주 014)
- 각주 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