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국원왕의 남진정책과 시련
1. 고국원왕의 남진정책과 시련
331년 봄, 고구려의 미천왕이 죽자 아들인 태자 사유(斯由)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이 무렵 고구려의 북서쪽 몽골고원과 서쪽 요하 유역에서는 선비족(鮮卑族)의 모용부(慕容部)가 한창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333년에 선비대선우로 즉위한 모용황(慕容皝)은 337년경 스스로를 연왕(燕王)이라고 부르며 동진의 승인까지 얻게 되자 모용부의 나라 연(燕, 前燕)과 고구려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339년에 전연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해 신성(新城)에까지 육박했다가 고국원왕의 맹세를 듣고 퇴각했으며, 이듬해인 340년에 고구려의 세자가 전연의 조회에 신하로서 참석하였다. 그러나 342년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기며 전쟁에 대비하자, 전연이 곧바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전연의 군대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환도성까지 함락시킨 뒤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 미천왕의 시신, 그리고 남녀 5만여 명을 인질로 잡아 돌아갔다. 이에 고국원왕은 343년 봄에 아우를 전연으로 보내 신하를 칭하면서 조회에 참석하고 진기한 물건 1,000여 점을 바쳤다고 한다. 348년에 전연왕 모용황이 죽고 아들 모용준(慕容儁)이 즉위하자 이듬해에 고국원왕은 전연의 동이호군(東夷護軍)이었다가 죄를 짓고 고구려에 망명해 있던 송황(宋晃)을 전연에 보냈으며, 355년 겨울에는 전연에 인질과 조공을 바치니 모용준이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돌려보내면서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임명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전연에 관한 기록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를 제압한 전연은 중국 화북지역으로 진출하여 352년에 후조(後趙)를 멸망시키고 서쪽의 전진(前秦)과 함께 그 영역을 나눠가졌다. 이로써 전연은 요동·요서 지역과 하북·하남·산동·산서 지역을 장악한 대제국이 되었으며, 370년 전진에게 병합될 때까지 요동 지역을 호령하게 된다.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현안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된 355년경부터 남쪽의 옛 낙랑·대방 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이인철, 2000). 이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창 성장하고 있던 백제와의 군사적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군대와 백제 군대가 369년 가을에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격돌하였다. 고국원왕이 직접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영역인 치양(雉壤) 일대를 공격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원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다가 치양에서 졌다고 간단히 기재되어 있으나, 같은 책 백제본기에는 조금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침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급히 쳐서 깨뜨리고 5,000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다. 치양은 지금의 황해도 배천(白川)이다.
369년경 고구려의 남방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관련 기록이 전혀 없고 유적 조사성과도 아직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군을 공격해 소멸시키고 이듬해에는 대방군까지 소멸시켰다는 통설에 비추어보면 4세기 초엽 고구려 영토가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황해도 봉산 지역에 치소를 두었던 대방군의 경우, 4세기 후엽까지 전축분(塼築墳)이 지속적으로 조영된 점에 주목하여 314년 이후에도 고구려가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그 지역에 거주해온 옛 군현 지배층과 중국계 망명인들이 상당히 독립적인 세력을 한동안 유지했다고 보기도 하지만(岡崎敬, 1964; 공석구, 1998), 학계 통설은 대방군 소멸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계 작호를 사용한 토착세력 및 망명인들이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예속적 정치세력이었다는 것이다(임기환, 2004; 김미경, 2007; 안정준, 2016). 그렇다면 369년경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 경계는 지금의 황해도 봉산(사리원)과 연안(배천) 사이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자연지형에 주목하면 서흥-평산-해주로 이어지는 멸악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은 고구려 영토, 남쪽은 백제 영토였을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백제사 연구자 중에는 4세기 중엽 백제의 북방 영토를 지금의 예성강까지라고 추정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8월조의 “사신을 마한에 보내 천도하였음을 알리고 드디어 강역(疆域)을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한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까지 가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에 주목하고, 북쪽의 패하라는 지명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즉, 패하는 지금의 예성강을 가리킨다는 지명 고증(이병도, 1976; 노중국, 2018)을 기반으로 그것이 백제 시조 온조왕본기에 실린 이유는 백제 역사상 북쪽 영토의 최대 판도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패하를 대동강으로 보는 견해(도수희, 1980)와 임진강으로 보는 견해(酒井改藏, 1970)도 있으나, 통설은 예성강이라는 견해이다.
패하를 예성강에 비정하는 주요 근거는 황해도 평산 지역을 지나는 예성강의 이름이 한때 패강(浿江)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황해도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산천(山川)조에는 예성강을 ‘저탄(猪灘)’이라고도 하고 ‘패강’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하대에 예성강의 평산 일대에는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된 적이 있으며, 예성강 주변과 그 서쪽 지역에 패강도(浿江道)와 패서도(浿西道)가 설치된 적도 있다. 그런데 패강이라는 이름은 신라 하대부터 사용되었으며, 패하(浿河)·패수(浿水)와 같은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이 저마다 달라서 실제 위치가 달랐거나 그 위치가 시대 및 영역 변화에 따라 바뀌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동강의 지류인 재령강·서흥강·황주천 등에 주목하기도 한다(김기섭, 2000). 더욱이 예성강은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유입되는 강이기 때문에 백제의 북쪽 영토 한계선으로 삼기에는 방향이 잘 들어맞지 않는 문제점도 있다.
이처럼 4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중엽에 두 나라의 영토가 맞닿았다는 사실은 369년 치양전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371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3만 대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지키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달 23일에 죽었으며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을 황해도 재령군의 장수산성 인근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채희국, 1982; 손영종, 1990) 근거가 분명하지 않으며, 대개 청암리토성·낙랑토성·의암동토성 등 대동강 유역의 토성에 주목한다(민덕식, 1989; 김지희, 2016; 기경량, 2017; 임기환, 2018; 권순홍, 2019).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지점이 2년 만에 예성강 유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120km 이상 이동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남방 영토 경계가 백제의 공세에 밀려 북쪽으로 대폭 후퇴하였음을 시사한다.
고국원왕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즉위한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은 372년 여름 6월에 전진(前秦)에서 불교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불경을 받아들이고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373년에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하는 등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375년 가을 7월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는데, 흔히 황해도 신계군 다율면에 비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남쪽으로 흐르는 예성강의 최상류지역이지만, 대동강의 지류로서 서쪽으로 흐르는 황주천의 최상류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황해도 동북부 지역이 백제 영토였다는 뜻인데, 377년 겨울에 백제 근구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이 무렵 고구려 영토가 북쪽으로 후퇴하여 백제와의 경계가 대동강 유역에서 가까웠음을 시사한다.
4세기 중엽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 지점을 유추하는 데 중요한 실물자료로서 황해도 황주 지역에서 출토된 백제토기가 주목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완형 굽다리접시(高杯)를 비롯해 황해도 황주의 토성리(土城里)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약 30개체분의 토기를 소장하고 있는데(소장품 등록번호 1008호), 그중 2점은 고구려토기편이고, 나머지는 굽다리접시(3점)·뚜껑(3점)·시루(3점)·계란모양토기(3점)·항아리(15점)·소반(1점) 등 한강 유역의 생활유적에서 흔히 출토되는 전형적인 백제토기이다. 제작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4세기 중엽에서 후엽에 걸치는 시기로 추정한다(최종택, 1990; 1998). 토기는 소지하고 이동할 수 있는 물품이기에 그 의미를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4세기 중·후엽의 백제토기가 대동강 하류 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한때 백제가 대동강 부근, 황해도 일대에서 주둔하며 군사활동을 벌였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결국 고국원왕이 추진한 남진정책은 백제의 저항과 반격에 부딪혀 소득이 크지 않았으며, 오히려 371년 백제의 공격을 맞아 고국원왕이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큰 시련을 초래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가 종종 대동강 유역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옛 대방군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