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구려의 남방정책과 신라의 움직임
3. 고구려의 남방정책과 신라의 움직임
412년 겨울, 광개토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 거련(巨連)이 19세에 즉위하였으니, 제20대 장수왕(長壽王)이다. 장수왕은 79년을 재위하고 98세이던 491년에 죽었으므로 ‘오래 살았다’는 뜻의 장수라는 시호를 얻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앞 시기의 고구려왕들과 달리 즉위한 이듬해(413년)를 원년(元年)으로 표시하였는데,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장수왕도 광개토왕처럼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장수왕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삼국사기』에 실린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북위(北魏) 및 송(宋)과의 교류 기사이고 남쪽 방면의 백제·신라 관련 기록은 매우 적다. 이는 장수왕이 재위한 5세기에 고구려의 남방 영토가 가장 많이 팽창한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 것일 뿐더러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군사적 관계가 매우 복잡다단하게 전개된 실상과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장수왕이 즉위하던 무렵,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 계승을 좌우할 정도로 신라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왕, 신라의 나물왕-실성왕으로 이어지며 더욱 깊어진 두 나라 사이의 정치·외교·군사적 유대의 결과이지만, 장수왕 즉위 초 신라에서 눌지왕의 즉위에 얽힌 일화는 당시 한반도 내의 국제정세를 잘 나타내 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02년에 즉위한 실성이사금은 “3월에 왜국과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고 한다. 실성은 “나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그의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 몰래 이르길 ‘눌지(訥祗)를 보거든 죽이라’ 하고, 마침내 눌지를 (고구려로) 가라고 명령해서 도중에 만나게 하였는데,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와 정신이 맑고 우아하여 군자다운 모습이 있는지라 마침내 ‘그대의 국왕이 나에게 그대를 해치라 하였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 없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눌지가 그것을 원망하더니 돌아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실성왕과 마찬가지로 눌지왕도 고구려의 도움을 얻어 즉위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삼국사기』에는 실성이사금이 412년에 나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눌지마립간이 즉위한 다음해인 418년에 복호가 나마(奈麻) (박)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는 눌지왕 3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눌지의 아우 보해(寶海)를 초청했다가 억류하자 삽라군 태수 김제상(金堤上)이 변장하고 가서 함께 도망쳐왔다고 적혀 있다. 어디에도 눌지가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는 기록은 없으나 눌지왕의 즉위 과정을 실성왕의 즉위 과정에 비추어 보면, 실성왕 초기에 눌지가 고구려에 볼모로 갔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실성왕이 처음에는 눌지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가 나중에 복호로 교체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림2 경주 호우총 출토 주발
한편, 1946년 경주 호우총(壺衧塚: 노서동140호분) 발굴조사에서 그릇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주발(周鉢)이 출토되었다. 을묘년은 광개토왕이 죽고 3년 뒤인 415년에 해당하므로, 호우(壺杅)는 광개토왕을 기념해 만든 청동그릇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금동관, 금귀고리, 금팔찌, 금·은반지, 유리구슬목걸이, 은제허리띠, 용고리자루큰칼, 말갖춤, 흑칠가면 등 최고급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5세기 초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인물 또는 그 후손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우총에서 출토된 토기는 6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어서 호우 제작 연대와 다르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누군가 조상에게서 호우를 물려받아 쓰다가 무덤에 부장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424년 봄 2월 신라 사신의 고구려 예방은 거의 조공에 가까운 정치적 의미를 띠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5세기 초엽인 427년에 고구려는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압록강 유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이다. 천도 이유에 대해서는 바야흐로 중국에서 북위가 강성해지고 있어 서방 진출이 쉽지 않고 오히려 국내성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 평양은 고조선부터 낙랑군까지 중심지였기에 기반시설과 유능한 인력이 풍부하다는 점, 압록강 유역보다 대동강 유역의 자연환경이 농업·교통 등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점, 국내성 지역의 인구 및 시설 밀도가 너무 높아져 도시 발전에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 도읍을 옮김으로써 기존 5부 중심의 사회질서를 약화시키고 국왕 중심의 새로운 국가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점,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왕실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최대화하고 왕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점, 남쪽으로 백제를 누르고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에 유리하다는 점 등을 흔히 꼽는다(서영대, 1981; 임기환, 2007; 문은순, 2008; 장종진, 2011; 권순홍, 2019).
도읍을 옮기는 것은 나라의 기반질서를 바꾸는 것이므로 매우 긴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사람들의 지역적 토착성과 집단성이 강하고 교통·건설장비·기술력이 부족했던 고대사회에서 근거지를 바꾸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392년 광개토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으며, 장수왕이 그 유지를 받들어 시행한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 천도의 의의를 고조선의 정통성 계승 및 한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낙랑·대방 지역에서의 문화변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하지만(박성봉, 2002), 정복지역을 구분하여 직접지배와 간접지배라는 이중지배방식으로 통치하던 방식을 직접통치방식으로 일원화하는 계기로 보기도 한다(이동훈, 2019). 그리고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이 낳은 가장 큰 성과로서 고구려사 발전과 특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노태돈, 2020).
그런데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이제까지 고구려에 예속하던 신라 사회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갑자기 신라가 고구려의 적국인 백제와 우호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43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요청하니 따랐다”는 기록과 434년 “봄 2월에 백제왕이 좋은 말 2필을 보내고,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내오니,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밝은 구슬로 백제에 보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신라왕은 눌지마립간이다. 백제왕이 신라에 보낸 좋은 말 2필과 흰 매는 모두 군사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자, 위기를 느낀 백제·신라 두 나라가 433년에 동맹을 결성했다고 보고, 이를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부르기도 한다(노중국, 1981; 김병주, 1984; 양기석, 2013). 그러나 450년 가을에 고구려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 강원 삼척)에서 사냥하다가 신라 군사의 공격을 받고 죽은 사건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기록, 대개 5세기 중・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고구려비〉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형제국가로 표현하고 신라 땅에서 병사를 모았다고 한 대목, 신라에 고구려 정예군사 1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8년(464년)조의 기록 등은 모두 433년보다 뒤에 일어난 일이기에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일본서기』 기록은 비록 천황중심사관(황국사관)의 영향으로 왜곡된 부분이 상당하여 기록 이면에 숨은 사실을 알아내기 쉽지 않지만, 한때 고구려 군사가 신라 땅에 주둔했다는 사실, 신라가 이웃 나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 세력을 몰아냈다는 사실 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일이 왜의 유라쿠(雄略) 재위기간인 5세기 중엽에 일어났다면, 433년 백제 비유왕(毗有王)과 신라 눌지왕 사이의 화친을 동맹(또는 연합)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워진다(정운용, 1996; 박진숙, 2000; 정재윤, 2001; 유우창, 2006).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일본서기』 기록의 편년이 부정확한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연대를 신라가 백제에 지원군을 파견한 455년 이전으로 조정하거나 여러 해에 걸쳐 일어난 일을 한꺼번에 적어놓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김현구 외, 2002; 김현숙, 2005; 박경철, 2007; 장창은, 2008). 그리하여 신라가 433년에 백제와 특별한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이후에도 한동안은 고구려의 강성한 군사력 때문에 백제와 적극적인 군사연합활동을 벌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한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전쟁 기록은 454년부터 나타난다. 그해 가을 7월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에 모두 실려 있다. 신라본기에는 이듬해인 455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자 신라왕(눌지마립간)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가을 9월에 백제에서 비유왕이 죽고 맏아들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한 직후인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전쟁 기록이 없고, 신라본기에만 실려 있다. 이에 나제동맹이 455년에 개시되었다는 견해(정운용, 1996), 그보다 늦은 475년경에 시작되었다는 견해(유우창, 2009; 김병곤, 2011) 등이 제기되었다. 그만큼 5세기 중엽에는 이미 예전처럼 고구려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상황이 아니었으며(정운용, 1989),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관계에는 모호한 측면이 다분하였던 것이다.
458년 가을 8월에 신라에서 눌지마립간이 죽고 자비마립간이 즉위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468년 봄 2월에 말갈 군사 1만 명을 보내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고 한다. 469년 가을 8월에는 백제 개로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으며,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을 설치했다고 한다. 백제와 신라의 왕이 모두 바뀌었으나 고구려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남방 진출 의지와 추진력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백제와 신라의 군사연합은 계속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