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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미천왕대 대외관계의 동향

1. 미천왕대 대외관계의 동향

3세기 중반 동천왕대에 위(魏)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고구려는 전쟁 없이 수십 년을 거치며 점차 강성해졌다. 4세기 전반 미천왕대에 들어와서는 중원 왕조가 사분오열하여 동쪽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상황을 활용해 요동에서 대규모 군사활동을 전개하여 영역을 확보해 갔다(秦升陽, 2003).
302년 9월, 재위 3년째에 이른 미천왕은 3만 병력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쳤다. 8,000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으로 옮기는 전과를 올리며 고구려의 서북 방면 진출을 공식화했으며, 311년에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315년에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한다. 서안평을 공략한 뒤인 313년에는 낙랑군을 쳐서 남녀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듬해 9월에는 대방군을 치는 등 남부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패전 기록이 없어 미천왕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공략은 순간순간의 대처라기보다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을 제압하여 낙랑군, 대방군과 요동의 교통로를 단절시킴으로써 양 지역의 연계를 우선적으로 차단하고(공석구, 1998), 이어 고구려와 갈등관계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확보해 나가는 치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근거로 고구려 을불리(乙弗利)와 대결하였는데, 낙랑 출신인 왕준(王遵)의 설득으로 백성 천여 가와 함께 모용외(慕容廆)에게 귀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두 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미천왕 재위 시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 등 중원 세력을 등에 업고 남쪽에서 고구려를 위협하던 세력이었으며, 미천왕이 현도군 공격 이전에 먼저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략한 것은 서북쪽의 현도군 공략을 계획한 입장에서 배후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한 전형적인 전략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313~314년 고구려의 낙랑군·대방군 점령도 전연의 모용외가 장통과 연계하여 한반도 서부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선제공격적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된다. 이는 고구려의 최종 목표가 낙랑군·대방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을 점령한 직후 현도군을 공파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고구려는 현도군·요동군 등 요동 진출을 최종 목표로 삼아 대외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여호규, 2009).
낙랑 출신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모용외에게 귀속한 것으로 사실상 한반도 내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낙랑군은 소멸되었으며, 그 여파는 낙랑군보다 남쪽인 현재의 황해도 지역에 있던 대방군에게 미치게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책계왕(責稽王) 원년이자 고구려 서천왕 17년인 286년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했고, 대방은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책계왕이 대방의 왕녀(王女)를 부인으로 삼고 대방군을 구원하기 위한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가 원망하였다고 한다. 또 같은 책 신라본기에는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3년인 300년에 낙랑과 대방이 신라에 귀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3세기 말에 고구려와 낙랑, 대방의 충돌이 상당히 빈번했고, 고구려의 압박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두 군은 때로는 백제에, 때로는 신라에 기대며 세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사서(史書)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옛날 응신천황(應神天皇) 때 백제 아지왕(阿智王)이, 대방 사람들이 재예(才藝)가 있는데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신을 보내 그들을 불러달라고 청했다’고 했다. 기록의 신뢰 문제가 있어 내용과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놓여 있으며 두 나라의 성장 속에서 압박을 받은 대방군의 처지가 이와 같은 전설로 남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낙랑 출신 왕준이 장통을 설득해 요동으로 옮겨간 것도 단순히 313년 미천왕의 공략을 막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이처럼 30여 년 이상 계속된 고구려의 공세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315년 현도군 공략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313년 진(晉)나라 현도태수 배무(裵武)의 사망과 그 동생 및 아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한 일과 연결해 볼 수 있다(공석구, 1998). 즉 현도군의 불안정한 내부 상황을 파악한 고구려가 본격적인 공략에 앞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제압하고 현도군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고구려는 요동 진출에서 분기를 이루는 이 사건 이후에 요서와 요동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선비족 모용부(慕容部)와 충돌하게 된다. 319년에는 진의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가 고구려,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와 연계하여 모용부를 치자고 제안했는데, 고구려는 여기에 호응해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棘城)을 공격했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지키면서 우문부에게만 소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했다고 하는데,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와 모용부의 모의를 의심해 철수하게 된다. 모용외의 기만책이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철수에 이어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요동을 지키게 하자 예전과 같이 평온해졌다고 하면서도, 고구려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통을 보내 습격해 여노를 사로잡고 1,000여 가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뒤이어 미천왕이 자주 병력을 보내 요동을 침략했고, 전연에서 맞받아 싸우다 화해했다는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극성 공략에서 고구려가 물러선 이후에도 극성과 그리 멀지 않은 하성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하성의 고구려군이 장통에게 패해 극성으로 끌려간 이후에도 계속 요동을 침략했다는 점에서 요동 진출을 위한 고구려의 시도는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양서』 고구려전에 서진(西晉) 영가(永嘉)의 난 때 창려(昌黎)의 대극성(大棘城)을 근거로 삼고 있던 모용외가 고구려왕 을불리의 침범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 점에서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요동을 꾸준히 공략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낙랑군과 대방군의 제압 목적이 사실상 현도군 공략과 요동 점유에 있었다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모용인의 항전에 막혀 비록 패배했지만 320년에도 병력을 요동으로 보내 모용부를 공략한 점도 고구려가 줄기차게 요동을 차지하여 전연에 대항하려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도전에 대해 전연은 319년 모용인을 요동에 파견하여 원활한 지방 지배를 도모하고, 321년에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을 요동과 평곽(平郭)에 주둔시켜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같은 해 모용외가 동진으로부터 ‘사지절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 거기장군 평주목 요동군공(師持節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郡公)’이라는 봉작을 제수받아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았는데(여호규, 2000), 고구려의 요동 진출 기세가 꺾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공교롭게 『삼국사기』에는 320년 요동 공략 패배 기사 이후 10년간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 이유는 모용씨의 성장이라는 대외적 요소 외에도 대내적으로 고구려가 313, 314년에 직접 지배하에 둔 낙랑, 대방 경영에 관심을 가지면서 국력을 한곳으로 집중하지 못한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박세이, 2014).
10년의 공백을 지나 330년이 되자 중원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하던 후조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호시(楛矢)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시는 중국에 ‘성천자(聖天子)’가 나타나면 동북방 이종족의 대표인 숙신(肅愼)이 조공하며 바친다는 상징성이 아주 큰 물품이다. 고구려로서는 전연의 요동 지배가 공고화되는 상황과 이를 타개할 방책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 와중에 전연의 배후라 할 수 있는 중원지방에서 석륵이 세력을 확대하며 패권을 차지해 가자 석륵과 연계하여 전연을 양쪽에서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호시라는 물품을 통해 동북방 이종족을 관할하는 세력으로서 고구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후조와 우호관계를 맺어 전연 세력을 묶어두고자 한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또 332년 고구려 사신이 우문부의 사신과 함께 석륵의 환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전연과 대립하던 우문부와도 연결을 꾀하였다고 추정된다. 반면 전연은 331년 9월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북벌을 청하는 등 후조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여호규, 2000).
고구려의 움직임은 전연, 후조, 동진, 우문부 등 당시 요동과 요서를 둘러싼 각 세력의 역관계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며 대처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우선 후조와 전연의 갈등이 주목된다. 후조는 320년을 전후하여 화북 일대를 대부분 장악하고 323년 모용외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제안하지만, 모용외는 이를 거절하고 후조 사신을 동진으로 보냈으며, 325년에 후조가 전연과 대립하던 우문부에게 관작을 주고 전연을 공격하게 했으나 오히려 역공을 받아 왕성까지 함락당하였다(여호규, 2000).
후조와 전연이 확실히 적대적이라는 점을 확인한 고구려가 후조 석륵이 330년 9월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후조에 사신을 보내 호시를 바친 것이다. ‘합종연횡’이라 표현할 수 있는 이런 고구려의 움직임은 미천왕을 이은 고국원왕대에도 계속되어 336년과 342년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타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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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천왕대 대외관계의 동향 자료번호 : gt.d_0004_001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