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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국원왕대 전연과의 상쟁

2. 고국원왕대 전연과의 상쟁

미천왕을 이은 고국원왕은 40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어느 고구려왕보다도 대외관계에서 큰 압박을 받았고, 백제와의 전투 과정에서 서거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재위 초기 고국원왕은 부왕 미천왕이 확장한 세력권의 안정화를 위해 남쪽으로는 334년에 평양성(平壤城) 증축, 서북쪽으로는 335년에 신성(新城) 신축 등의 조치를 취했고, 342년에는 환도성(丸都城)을 고쳐 쌓고 국내성(國內城)을 쌓는 등 국가 경영의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대외관계에서도 충돌 대신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336년에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고, 339년에 신성까지 쳐들어온 전연 모용황(慕容皝)에게는 화해를 요청해 돌려보냈으며, 이듬해 340년에는 세자를 모용황에게 보내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전연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후조와 연계하여 전연의 압박을 극복하려고도 하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후조의 석호(石虎)는 338년에 전연을 공략할 목적으로 조복(趙伏)에게 청주(靑州) 군사로 해도(海島)를 지키게 하고 배 300척으로 곡식 30만 곡을 고구려로 운송하도록 한 일이 있다. 이 무렵 고구려와 후조는 전연 공략에 공동의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이정빈, 2016). 하지만 구체적 성과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전연이 중원 공략의 선결 과제로 배후의 고구려를 제압하기로 결정하고 시작한 342년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해 모후(母后)가 포로가 되고, 부왕의 시신을 빼앗겼으며, 자신은 홀로 피신하는 치욕을 겪었다. 북쪽 방향에서 고구려 수도 집안으로 들어오는 ‘북도’를 방어하던 고구려군이 전연군을 물리쳐 전쟁의 확대를 막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치통감』 진기(晉紀)에는 모용한이 고구려를 먼저 치고 우문부를 멸망시킨 뒤에 중원을 도모하는 게 마땅하며, 평평하고 넓은 북도(北道)는 고구려에서 대군을 동원해 방어할 테니 험하고 좁은 남도(南道)로 정예병을 보내 공략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 모용황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도 같은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결국 전연은 중원 정복을 위해 배후의 고구려를 먼저 제압하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고구려가 방어에 치중할 것이 자명한 넓고 평평한 ‘북도’로는 소규모 병력만 보내고, 험하고 좁아 방심하고 있을 ‘남도’로 정예병을 보내 곧바로 국도로 육박하려는 것이었다.
남도와 북도가 어느 길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여호규, 1995), 최근에 각각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요동에서 집안에 이르는 지역의 성곽 분포 등을 고려해 혼하(渾河)–소자하(蘇子河)–부이강(富爾江)–신개하(新開河)–집안(集安) 노선을 북도로, 요동성에서 태자하(太子河)를 따라 환인(桓仁)에 이르고, 여기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노선을 남도로 본 견해가 있다(정원철, 2017).
계획에 따라 모용황은 직접 정예병력 4만 명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왔고,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에게 병력 1만 5,000명을 주어 북도로 보냈다. 모용한의 언급처럼 고구려는 정예병력 5만을 보내 북도를 방어하게 하고, 고국원왕은 약한 병력으로 남도를 방어하였다. 남도에서는 고구려가 연달아 패했고, 전연의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목을 베며 기세를 올려 고구려의 국도인 환도성에 입성했다. 고국원왕은 혼자 단웅곡(斷熊谷)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도에서는 고구려의 정예병력이 왕우가 이끄는 전연군을 격파하고 왕우도 전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모용황은 고국원왕을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렸다. 『자치통감』에는 전연의 장사 한수가 “고구려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은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들어가 숨어 엎드려 있습니다.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남은 불씨를 거둘 것이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머니를 인질로 잡아 돌아가서 스스로 몸을 묶고 항복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기를 청하옵니다. 은덕과 신뢰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한 것을 모용황이 받아들여 고구려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미천왕의 시신과 모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 남녀 5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궁실이 불타고 환도성이 허물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한수의 노림수대로 고국원왕은 전연에 대해 부왕의 시신과 모후의 송환을 위한 유화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343년에 왕의 동생을 보내 신하라 칭하며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쳐 부왕의 시신을 돌려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345년 10월에 전연에서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남소성(南蘇城)을 치고 수비병을 둔 데 대해서도 별다른 대응이 없어 갈등을 최소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모후가 여전히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349년에는 338년에 전연 내부의 반란 과정에서 후조와 내응했다가 고구려로 망명해 온 송황(宋晃)을 전연으로 보냈으며, 355년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쳐 모후의 송환을 이끌어냈다. 전연은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征東大將軍營州刺史樂浪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해 전연이 구축한 질서 속에 고구려가 편입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342년부터 책봉이 있는 355년까지 10여 년간 고구려는 전연에 철저히 복속하고 있었으며 미천왕대부터 계속되어온 요동 진출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단순히 전연과의 관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그 후로 쇠(釗)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으나, 원수들에게 길이 막혀 혼자 힘으로는 도착하지 못하였다”라는 짧은 기록이 있는데, 환도성이 함락된 이후 고국원왕은 전연의 서북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선비 탁발부의 대국(代國)과 연계를 꾀하는 조치에 나섰던 것이다.
지리적 위치상 전연을 거쳐야 대국에 이를 수 있는데 전연에 가로막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전연의 배후에 우호 세력을 만들어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고구려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천왕이 후조에 호시를 바친 일과 고국원왕이 동진에 사신을 보낸 일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어느 국가나 당연히 취할 수밖에 없는 외교전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연의 배후 세력과 연계하고자 한 의도나 전연에 대한 고구려의 태도는 370년에 전진(前秦)의 왕맹(王猛)이 전연을 정벌하고, 전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도망쳐오자 사로잡아 전진으로 보낸 조치에서도 알 수 있다.
전연에 패하고 요동 진출의 뜻을 실현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삼국사기』에는 355년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다가 14년 뒤인 369년에 병력 2만을 동원해 백제를 공략했다가 치양(雉壤)에서 패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2년 뒤인 371년에 평양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과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서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369년의 백제 공략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기록이 없어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342년 국도 함락 이후 부왕의 시신과 모후의 송환이 끝나는 355년까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고구려는 전연에 복속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고구려의 위축된 상황을 주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4세기 초반 고구려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 독자성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민과 그 남쪽에서 세력을 키우던 백제였을 것이라는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369년 치양 공격을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에서 싸웠다”, 375년 수곡성(水谷城) 공격을 “백제 수곡성을 공격했다”고 서술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성강 하류의 치양이나 중류의 수곡성 일대가 백제 영역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313~31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대동강-재령강 유역을 점령한 사실을 상기하면, 370~380년대에 양국은 재령강-예성강의 분수령인 멸악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접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규, 2012).
치양성이 현재 황해남도 배천군으로 비정되고 있어(이병도, 1977), 한강 하구 근처까지 고구려군이 진출한 결과가 된다. 그런데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한 것이므로 369년 이전에 백제가 옛 대방군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371년에 백제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던 것과 연결해 보면 현재의 황해남·북도 일원에 백제가 대규모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거점을 확보했다는 결론이 된다.
369년은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하기 1년 전으로 전연의 세력이 위축되어 가던 때이므로 고구려로서는 요동의 상황을 민감하게 보고 있었을 것이다. 전진에 밀린 전연 세력이 고구려 방향으로 밀려온다면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고, 반대로 전연의 멸망을 계기로 요동으로 진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국원왕이 백제와 전투를 벌인 치양 이북, 평양 이남의 황해남도 안악, 신천, 봉산 일대는 옛 낙랑과 대방의 군현이 있었던 곳으로 전연과 고구려의 세력 관계와 변화 추이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동의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고구려로서는 남쪽의 옛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오는 백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이런 조건에서 고국원왕이 군대 2만을 거느리고 한강 하구 근처까지 내려온 것은 백제와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여 굴복시키겠다는 의도라기보다 황해남·북도 일대 중국계 주민집단이 전진의 부상과 전연의 쇠퇴라는 요동의 세력 변화를 틈타 고구려의 지배에서 이탈하는 것을 단속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옛 낙랑군·대방군 주민집단의 동향을 백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백제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지한 이후의 지배방식에 대해서는 다소간 차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낙랑군과 대방군 주민들이 중원 왕조와의 유대의식이 강하다는 특성 등을 고려하여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다고 본다. 낙랑·대방 지역이 중국 세력의 군현 지배를 수백 년 동안 받아온 곳이라는 점, 당대의 중원문화를 시차 없이 수용해 강한 문화적 자의식을 가진 광범위한 한화(漢化)된 지배층의 존재, 고구려 입장에서 대중국 관계 등 활용 가능성이 높으나 기존 귀족 세력의 견제로 지배층으로 편제하기 어려웠던 사정 등을 그런 가능성의 이유로 제시한 견해(임기환, 1995)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구려는 333년 전연의 내분 시에 모용인 측에 가담했다가 336년 곽충(郭充)과 함께 망명한 안악3호분의 동수(冬壽)와 같은 중국계 망명객들을 안치하고, 이들을 보호, 통제하면서 자신의 지배체제를 안착화시켜 나갔다고 생각된다(여호규, 2009). 중국계 망명객들 입장에서도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많은 낙랑, 대방 지역에서 고구려의 비호 아래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국원왕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상쟁에서 낙랑·대방을 둘러싼 백제와의 상쟁으로 옮겨 갔다고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제를 선제공격하게 된 원인을 당시 국제정세와 연결해 살펴보면 국가 운영의 방향이 남진으로 바뀌어 백제와 충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고국원왕의 죽음이 백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남부 방면의 갈등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국원왕대 고구려 대외관계의 핵심은 미천왕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전연이었으며, 전연에게 패배하여 초래된 안팎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극복하는 것이 342년 국도 함락 이래 고국원왕의 최종 목표였다고 보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고국원왕대의 축성 기록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국원왕은 재위 4년째인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고, 이듬해인 335년에는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전연이 환도성을 함락한 다음 해인 343년 7월에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고 이 성이 현재의 평양인 고려시대 서경의 목멱산에 있다는 『삼국사기』의 설명을 볼 때 평양 인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근에 구체적으로 대동강변 의암동 토성을 동황성으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기경량, 2020).
고국원왕은 전연과 주변 세력의 동향 속에서 나름의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며, 전연의 침입이 있었던 바로 그해인 342년에는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으며, 8월에 환도성으로 옮기는 등의 조치도 취했다. 고고학적으로도 고국원왕대에 해당하는 4세기 중엽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된 성곽유적이 고구려 경역 내에 상당히 분포하고 있어 기록되지 않은 축성작업도 상당히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청원(淸原)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과 유하(柳河) 나통산성(羅通山城), 요하 중류 동쪽의 서풍(西豊)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과 철철령(鐵嶺)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을 그런 사례로 보기도 한다(박세이, 2014).
3세기 말에서 4세기를 고구려 산성 분기의 제2기로 보고 이 시기에 쌓은 주요 산성으로 집안의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輾水湖山城), 성장립자산성(城牆砬子山城), 와방구산성(瓦房溝山城),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 태자성(太子城), 삼송산성(杉松山城), 오룡산성(五龍山城), 고대산산성(高臺山山城),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을 예로 든 견해(정원철, 2017)는 각 연구자의 산성 축성 연대를 검증하고 산성의 구조상 발전양상과 축성기법을 상세히 검토한 뒤의 결론으로 의미가 크다. 주로 수도인 국내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제어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고구려가 미천왕대 이래 전연을 비롯한 요동, 요서 및 중원의 세력 동향에 상당히 밝았으며,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대응책을 마련해 나간 실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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