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대내 정비와 백제·후연 관계
3.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대내 정비와 백제·후연 관계
형제 관계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재위 시기는 과거 단순한 군사적 확장정책을 바꾸어 주요 역량을 내치와 경제발전에 두고 실력을 키웠다거나(孫玉良, 1985), 부왕인 고국원왕이 전연에 대해 표면상 신하를 칭하면서도 ‘와신상담’하며 국력 회복을 진행한 것을 계승하여 소수림왕이 대학 설립과 율령 반포, 불교 수용 등을 추진했으며, 이를 통해 고국양왕 전기에 요동의 ‘강족(强族)’이 되었다(張國慶, 1989)는 설명이 있다.
특히 중원 북부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다는 주장도 있는데(孫玉良, 1985), 고구려가 수동적으로 유민의 내투를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전연의 멸망 등으로 인한 중원의 혼란상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취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371년은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한 뒤로서 7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서북 방면 진출을 막아선 세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재위 2년째인 372년에 전진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보내자 회답사를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설정했다. 이어 불교를 수용하고, 대학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내치를 우선하는 조치를 취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소수림왕이 다른 국가, 세력과 충돌한 것은 375년 7월에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376년 11월에 백제의 북쪽지역을 침범한 것이었다. 백제는 맞받아서 377년 10월 3만 병력으로 평양성을 공격했고, 11월에는 고구려가 반격했다. 전투의 양상에 대한 내용 없이 서로 침범했다는 기록이 전부이지만 고구려가 공략한 백제의 수곡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관계 기사를 통해 현재의 황해북도 신계군으로 비정되어(이병도, 1977) 평양에서 멀지 않은 점, 백제군이 3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공격한 점 등을 보면 대동강 이남, 예성강 상류까지 백제가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수년 전인 369년에 고국원왕이 강화도와 마주보고 있는 황해남도 배천 인근에서 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던 것과 비교해 고구려의 세력이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가 축소되었던 것이다.
고국양왕 재위 3년인 386년 8월에도 백제를 공격했는데, 389년 9월에 백제가 고구려 남쪽을 침략해 부락을 약탈했다거나 390년 9월에는 백제가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를 보내 도압성(都押城)을 함락하고 200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는 기록을 종합할 때 백제가 우세한 양상에서 양국의 대결이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상쟁이 이어지고 있는 과정에서 신라가 전진에 사신을 두 차례 보낸 일이 고구려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주장(李丙燾, 1959)은 고구려의 외교술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자치통감』에는 태원(太元) 2년인 377년 봄에 고구려와 신라, 서남이(西南夷)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내물왕 26년인 381년에 위두(衛頭)를 전진에 사신으로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했으며, 『태평어람(太平御覽)』 사이부(四夷部)에는 『진서(秦書)』를 인용해 건원(建元) 18년인 382년에 신라 국왕 누한(樓寒)이 부견에게 위두를 보내 미녀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삼국사기』의 위두 파견 기사와 1년 차이가 있는데, 『자치통감』에는 381년 2월에 동이(東夷)와 서역(西域)의 62국이 전진에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태평어람』에서 전하는 위두의 조공과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381년 또는 382년에 신라가 전진에 사신을 보낸 것은 내물왕계의 왕권 확립이라는 신라 자체의 필요성에 따른 조치라는 의견(조범환, 2017)도 있는데, 377년의 첫 번째 사신 파견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새롭게 북중국의 패자로 떠오른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는데 동방의 유력한 존재로서 세력을 과시하는 방편으로 주변 세력 내지 국가를 관할하고 있다는 자의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라를 일종의 부용 세력으로 간주하는 고구려의 이런 외교술은 앞에서 언급한 미천왕이 330년에 후조 석륵에게 숙신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알려진 호시를 바친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459년 남조인 송(宋)에 사신을 보낼 때 숙신 사신을 동행시키거나, 호시와 석노(石砮)를 바치는 방식과도 매우 유사하다. 이미 숙신은 그 후 예라는 읍루(挹婁), 물길(勿吉)로 대체되어 소멸된 것으로 기록된 뒤임에도 고구려 사신과 동행했다는 숙신 사신이 등장한 것은 그 실체가 무엇이든 고구려가 동북방 이민족의 상징으로서 중국에 널리 알려진 숙신이라는 존재를 활용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존재감을 인식시키려 했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서북 방면과 남부 방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소수림왕대와 고국양왕대의 차이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소수림왕대에는 서북 방면의 요동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소수림왕이 즉위한 371년에는 전연이 이미 멸망하여 요동 지역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전진의 세력으로 들어갔고, 후연이 건국한 384년은 곧 소수림왕의 마지막 재위년도였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에는 380년에 부견의 사촌인 부락(苻洛)이 모반을 꾀해 오환(烏桓), 선비(鮮卑)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에게도 원병을 청했는데 모두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진에 대한 고구려의 우호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모용수(慕容垂)가 후연을 건국한 해인 384년에 즉위한 고국양왕은 후연이 화북지방을 평정한 385년에 요동 공략에 나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차지하고 남녀 1만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385년] 여름 6월에 왕이 병력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慕容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좌가 아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아군이 이를 쳐서 패배시키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고구려가 동원한 군사의 수가 4만 명이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국원왕은 5만 명의 정예병을 북도 방어에 투입했는데, 이 수는 당시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 병력이었을 것이다. 1~2세기 전쟁에서 5,000명에서 1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의 병력 규모는 3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2만 명으로 증가하였고(여호규, 1998), 전연과의 전투에서 5만 명으로 증가한 뒤 일정 기간 동안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예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정원철, 2017).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400년 경자년에 신라를 구원할 때와 407년 정미년에 대상이 불분명한 곳을 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서 5만 명이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475년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일 때 동원한 병력이 3만 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국양왕이 동원한 4만 명 역시 당시로서는 최대에 가까운 병력이었을 것이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요동을 공략한 것은 건국 직후인 후연의 세력을 확실히 견제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후연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전투의 결론을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라고 하여 고구려군은 승리한 뒤 바로 철수한 것처럼 기록했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같은 해 10월 또는 11월에 “[후]연의 모용농(慕容農)이 병력을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요동·현도 두 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처음에 유주와 기주의 유민이 많이 투항해 오므로 모용농이 범양(范陽)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어루만지게 하였다”라고 하여 수개월 동안 고구려가 요동과 현도 두군을 영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기록을 유의해 보면 4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목적은 단순히 일시적 승리가 아니라 요동군과 현도군 지역을 차지하겠다는 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한편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패퇴시키고, 한편으로는 유민들을 이주시키고 어루만져 지배를 공고히하려는 후연의 계책에 따라 최종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수림왕대와 고국양왕대에는 백제와 반복되는 전투를 벌였다. 그 이유는 첫째, 두 왕의 부왕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서거한 사실로 미루어 이를 보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백제가 근초고왕에서 근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이한 시점이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둘째, 전통적인 해석과 같이 ‘북수남진(北守南進)’이라는 관점에서 서북 방면에서 전연의 멸망으로 일시적인 공백이 발생하였지만 곧 후연이 들어섰고, 후연 세력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공략의 방향을 틀었다고도 볼 수 있다.
두 가지 이유 모두 상당한 설득력을 갖지만 고구려의 대외관계 자체가 백제 공략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연과의 관계 역시 중시했다는 근거로 고국양왕의 뒤를 이은 광개토왕이 후연 세력을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해 나간 것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의 후연 공략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소수림왕대와 고국양왕대부터 이어져온 대외관계의 모색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소수림왕 8년인 378년 9월에 거란(契丹)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킨 일과 고국양왕 9년인 391년 봄에 신라에 우호관계를 타진하고 내물왕이 이에 호응하여 조카 실성(實聖)을 보내온 것도 의미가 있다. 두 왕의 뒤를 이은 광개토왕이 395년에 거란의 일파인 비려(稗麗)를 공략한 것과 396년에 왜인의 침입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진 신라의 요청에 따라 5만 명의 원군을 보낸 이유가 소수림왕 때 거란 침입과 고국양왕 때 신라와의 우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