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4세기 대외관계의 특징과 의미
4. 4세기 대외관계의 특징과 의미
4세기에 서북 방면과 남부 방면에서 각 세력과 충돌하며 부침을 겪은 고구려 대외관계의 경과에 대해서는 연구자 간 큰 이견이 없다. 전연의 침입로였던 고구려의 남도와 북도에 대한 의견 차이 등이 있긴 하지만, 지명의 비정이나 사료 해석 자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양상에서 이 시기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여호규는 4세기 고구려사를 성공에 이은 좌절 또는 서진(西進) 실패에 따른 남진(南進)으로의 선회로 설명하며 대외적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소수림왕대에 내부체제를 정비하고, 광개토왕·장수왕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대외적인 재도약을 이룩했다는 이해의 한계를 지적했다. 즉, “이러한 통설에 따른다면 4세기와 5세기 이후 고구려의 대외정책은 단절적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고, 급변하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설명할 수도 없다. 더욱이 중국 대륙의 분열상황이라는 새로운 국제환경은 단순히 고구려에게 대외팽창의 기회를 제공한 외적 요인으로만 이해되거나, 심지어 고구려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 간주되기도 하였다”(여호규, 2000)고 비판했다. 4세기 고구려 대외관계를 바라보는 데서 통설이 갖는 한계를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즉 4세기 고구려 대외관계의 특성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시간 안으로 매몰될 것이 아니라 3세기 이전과 5세기 이후의 대외관계를 큰 틀에서 조망해야 하는데, 4세기 안의 유동적인 움직임만을 대상으로 특정한 결론을 이끌어내려 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5세기 초까지 고구려가 중원 왕조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결심, 자기 이익에 따라 자주적으로 대외관계를 조정하였고 어떤 책봉체제 안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손영종, 2000)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외교관계의 속성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사료 해석 자체도 자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런 지적을 전제하면서 통설의 한계를 고려할 때 검토해야 할 두 지점이 있다. 하나는 전연과의 갈등 과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사람들과 고구려 발전의 관계 여부이다. 338년에 고구려에 망명했다가 349년에 전연으로 송환되어 이름을 송활(宋活)로 바꾸고 활동을 이어간 송황(宋晃)의 출신과 이력을 바탕으로 소수림왕대의 율령 반포가 망명한 전연 관료의 영향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기동, 1996)이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원 북부 유주와 기주의 유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다는 주장도 있는데(孫玉良, 1985), 소수림왕·고국양왕대의 각종 제도 정비 등과 연계되는 문제로서 유의해야 하지만, 고구려 내부의 지향을 과소평가하거나 특정 인물의 역할이 과대평가되지 않도록 검토해야 한다. 고려시대 과거제 도입과 귀화인 쌍기(雙冀)의 역할을 대비해 볼 필요도 있다.
둘째는 ‘북수남진’, ‘서수남진(西守南進)’이라 하여 고구려 대외관계의 향방을 지나치게 획일화하여 보는 관점이다.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의 단순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고구려 대외관계의 지향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시기에 따라 남쪽이 막혔을 때도 서북쪽이 막혔을 때도 있었지만, 고구려사 전체를 놓고 보면 고구려는 모든 방향에서 신축이 있었고, 팽창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세력과 관계를 가졌다.
4세기 전반에 서북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현도군을 축출하고 선비 모용부와 접하여 70여 년 갈등관계를 가졌고 그 후 20여 년간은 백제와도 갈등을 겪었지만, 이것은 조성된 대내외 정세를 돌파하기 위한 고구려 나름의 모색과 그 결과이지 어느 한쪽을 선택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4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고구려의 성장과 팽창에 따른 자연스러운 관계 대상의 확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선진체제를 수용하고 정비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다각적 외교술의 활용, 확장된 영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통치하기 위해 정비한 간선망과 성곽 배치 등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때 효과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