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연과의 갈등과 요서 지방 진출
1. 후연과의 갈등과 요서 지방 진출
광개토왕의 즉위를 전후하여 북중국 지방의 정치상황은 급변하였다. 전진(前秦)을 이탈한 모용수가 384년에 후연을 건국하고, 386년에 중산(中山: 하북성 석가장)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제 요서, 요동 지방의 지배권은 전진에서 후연으로 바뀌었다. 한편 북방의 산서성(山西省)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선비족 탁발규는 386년에 나라를 세워 위왕을 자칭하고 서서히 후연을 압박해 왔다. 398년 탁발규는 북위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에 정했다.
후연은 395년 참합피(參合陂: 내몽고자치구 오란찰포)에서 북위에게 참패하고, 397년에는 수도 중산(中山)이 함락되었다. 후연은 북위에 밀려 북중국에서의 지배권을 점차 상실해가는 상황이 되었다. 모용수가 사망하자, 396년에 모용보(慕容寶)라는 인물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후연은 국력이 쇠약해져 수도 중산을 포기하고 용성(龍城: 요령성 조양)으로 옮겨야 했다. 후연의 세력 중심은 요서 지방을 중심으로 축소되었다. 이어서 후연에서 권력 교체가 있었다. 398년에 모용성(慕容盛), 401년에 모용희(慕容熙)가 그 뒤를 이었다. 이렇듯 후연은 북위에 의해 세력이 위축되는 한편 내부적으로도 권력자가 자주 교체되어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후연의 상황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를 요약하면 갈등과 대립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라의 갈등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는 상황을 살펴보자.
1) 광개토왕의 즉위와 후연과의 갈등
광개토왕의 즉위를 전후한 시기, 후연의 상황을 알아보자. 요서 지방에서는 전진과 모용씨 간의 갈등이 나타났다. 그 배경은 전진의 몰락이었다.주 001 종래 이 지역을 장악했던 전진은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고구려는 전진으로부터 372년에 순도(順道), 377년에는 전진에 조공하는 등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 따라서 양국의 국경에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진의 몰락과 함께 요서 및 요동 지방에서 후연에 의한 권력 교체라는 상황 변화가 나타났다. 전진의 장수였던 모용수가 384년 후연을 건국하면서 전진과 충돌하게 되었고, 요서 지방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후연은 전진의 패배에 발 빠르게 대응해 요서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후연은 전진이 장악하고 있던 유주(幽州: 북경, 행정 중심지는 계성) 및 평주(平州: 요령성 조양, 행정 중심지는 용성) 지역을 공격하였다. 385년 2월, 후연은 요서 지방을 장악하고 대방왕 모용좌(慕容佐)를 용성에 주둔시켰다. 요서 지방을 장악한 모용씨는 계속하여 요동 지방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림2 | 광개토왕 시기의 고구려와 후연
고구려는 전진의 몰락 그리고 요서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진과 후연 간의 갈등관계를 면밀하게 주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요서 지방에서 발생한 권력 교체 상황을 틈타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이 사실에 대해 『삼국사기』는 “[385년 여름 6월에 고국양]왕은 4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후연왕 모용수는 대방왕 [모용]좌로 하여금 용성을 지키게 한 바 있었다. [모용]좌는 고구려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구원토록 하였으나 우리(고구려) 군대가 쳐부수고는 마침내 요동군, 현도군을 함락하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붙잡아 돌아왔다”라고 기록하였다.
고구려군은 385년에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략해 포로 1만 명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고구려가 요동·현도 지역을 전격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자. 고구려의 공격이 후연의 용성 점령 4개월여 만에 단행되었기 때문에 후연 측에서 요동 지방을 정비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후연이 고구려로부터 요동군·현도군 지역을 되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후 요동 지방은 상당 부분 후연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양국 간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 하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요동 지방을 수복한 후연은 이 지역을 행정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평주자사(平州刺史)의 치소를 평곽(平郭)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그동안 정치·군사의 핵심이었던 요동군의 중심지가 요양(遼陽: 요령성 요양)에서 요동 지방의 남쪽에 소재한 평곽(平郭: 요령성 개주)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압박을 대비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하지만 후연은 요동 지방을 정치적·행정적인 측면에서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주 002
각주 002)

후연의 정치적 불안정은 또 다른 파동으로 나타났다.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지역에 살던 수많은 유랑민이 정치적으로 안정된 고구려로 이주해갔던 것이다. 그러자 후연에서는 급히 현지에 요동태수를 임명하여 유랑민을 불러들이도록 했다.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언제 어떻게 확보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표적으로 385년의 사건 이후부터로 파악하는 견해(武田幸男, 1989; 공석구, 2012)와 광개토왕 이후부터로 파악하는 견해(여호규, 2005; 이성제, 2013) 등이 있다. 이는 요동 지방을 장악하게 된 시기와 완전히 장악한 시기라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이 영락 5년(395년) 패려(稗麗) 공격을 종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 력성, 북풍, 오비□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왕성으로] 귀환하였다”라고 하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패려는 시라무렌하 유역의 거란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요동 지방은 광개토왕 이전 시기에 이미 상당 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된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하였다. 서쪽에서 가중되는 북위의 압박은 후연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제 후연은 전성기를 지나 점차 쇠퇴해가고 있었다. 내부의 정정(政情) 불안과 북위의 압박이라는 정치적 상황은 후연에게 동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조성하도록 유도하였다. 396년 4월, 후연왕 모용보는 광개토왕을 ‘평주목 봉요동대방이국왕(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으로 임명하였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왕으로서뿐만 아니라 요동 지방의 정치적 지배권까지도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요동 지방이 고구려에 귀속된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상황을 놓고서 당시 후연의 대외정책이 서방 및 남방 정책에 치중하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398년 8월, 모용보가 시해당하고 그 뒤를 이어 모용성이 후연의 새로운 왕으로 등장하였다. 북위의 압박은 모용성 시기에도 이어졌다. 이 시기 후연의 영역은 대체로 산해관(山海關)의 동쪽 지방에서부터 대릉하 유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축소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광개토왕은 요서와 요동 지방의 상황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400년 정월, 후연에 축하사절을 파견하였다. 고구려는 새로 등장한 모용성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이면으로는 고구려가 후연의 전략을 살펴 대응방안을 강구하고, 나아가 요동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종전처럼 계속 인정받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때 광개토왕의 사신이 모용성에게 의례적인 축하인사만 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구려의 요구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모용성의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서 짐작할 수 있다. 2월에 모용성은 광개토왕의 무례함을 구실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모용성의 고구려 공격은 위축된 국내의 정치상황을 타개하려는 고민에서 단행되었을 것이다. 서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와의 관계는 위축되었고, 이제는 서방으로의 진출이 막히는 상항이 되었다. 이와 같은 힘의 변화는 후연의 내부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399년, 요서태수 이랑(李朗)과 연군태수 고호(高湖)가 이탈하여 북위에 항복해갔다. 400년 1월, 모용성은 대사면을 단행하고 황제 칭호를 버리고 서민들의 지도자라는 의미가 있는 ‘서인대왕(庶人大王)’이라고 자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고구려 축하사절이 도착한 것이다. 모용성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림3 | 고이산성(평면도)

그림3 | 고이산성(성안의 고구려시대 유물)
- 고이산성은 둘레 4km가량으로, 평지보다 70~140m가량 솟아 있는 산등성이를 따라 포곡식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은 토축, 석축, 토석혼축 등 계속 보수한 것으로 나타나 고구려의 요충지로서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공방전을 연상케 한다. 나중에는 고구려군과 수·당군의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후인 670년에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 고이산성은 둘레 4km가량으로, 평지보다 70~140m가량 솟아 있는 산등성이를 따라 포곡식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은 토축, 석축, 토석혼축 등 계속 보수한 것으로 나타나 고구려의 요충지로서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공방전을 연상케 한다. 나중에는 고구려군과 수·당군의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후인 670년에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모용성이 직접 참가하고, 모용희를 선봉으로 내세운 3만 명의 후연 군대는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략하고 700여 리에 달하는 영토를 개척하는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진서(晉書)』는 5,000여 호에 달하는 고구려 포로를 요서군 지역으로 옮겼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후연이 공략한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이란 지명을 통하여 고구려 영역의 범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신성의 위치는 오늘날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에 있는 고이산성(古爾山城)에 해당한다. 남소성은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하는데, 철배산성(鐵背山城: 요령성 무순)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용성은 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다. 취약한 권력관계는 결국 내분으로 나타나 살해되고 말았다. 401년, 16세에 불과했던 모용희가 후연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광개토왕은 모용희가 즉위하자 후연을 대대적으로 공략하였다. 모용성 때에는 축하사절이라도 보냈는데, 그동안 요서 지방의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광개토왕은 402년 숙군성(宿軍城), 404년 연군(燕郡) 등을 공격하였다. 특히 연군 공격은 후연의 중심부를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후연이 반격해왔다. 405년 1월, 모용희는 왕비와 함께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해왔다. 하지만 모용희의 왕비에 대한 그릇된 사랑이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요동성을 함락시키려는 상황에서 왕비와 함께 성을 넘겠다는 모용희의 주장에 군대가 머뭇거리자 대처할 시간을 얻은 고구려가 성을 굳게 방비하게 되었고, 결국 요동성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406년 2월에는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해왔다.주 003 모용희는 애당초 거란을 공격했으나, 거란의 병력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퇴각하려고 하자 왕비가 반대하였다. 모용희는 도중에 공격 목표를 변경하여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후연군은 거란 지역을 우회해서 고구려로 진군해왔다. 그러다 보니 3,000리에 달하는 머나먼 길을 행군해야만 했다. 장거리 행군을 하려다 보니, 치중병(輜重兵)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경병(輕兵)으로 이동하였다. 한겨울 날씨에 3개월가량의 기나긴 행군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구려 목저성까지 도달하여 고구려와 전투가 벌어졌다. 한겨울의 추위와 원정의 피곤함에 사기가 떨어진 상태이다 보니 후연군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 전쟁은 애초부터 후연이 이길 수 없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모용희에 의한 고구려 공략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407년, 모용희의 왕비가 사망하였다. 모용희는 왕비의 장례식을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로 거대하게 치렀다. 이 틈을 타고 풍발(馮跋)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였다. 모용희가 반란군에 잡혀 처형되니,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모용희는 용등원(龍騰苑)주 004을 비롯한 많은 궁실을 조영하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궁핍하게 했다. 아울러 거란, 고구려 등에 대한 무리한 대외원정으로 국력을 낭비하여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이로써 모용씨가 세운 후연 정권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2) 광개토왕의 요서 지방 진출
400년 2월, 모용성이 이끄는 후연군에 의해 신성, 남소성이 함락되자, 광개토왕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는 결국 고구려가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시작은 402년 5월에 단행된 숙군성 공략이다. 숙군성은 후연의 고위 관직인 평주자사가 주둔하고 있던 정치·군사적 요충지였다.주 005 이 상황을 『자치통감』은 “[402년 5월에] 고구려가 숙군(宿軍)을 공격하니,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라고 기록하였다. 숙군이란 지명을 통해 고구려군의 작전반경이 어느 지역까지 미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숙군의 위치는 어느 곳일까? 학계는 요령성 북진(北鎭)에 해당하는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북진은 요하의 서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군대는 국경 역할을 해오던 요하를 건너가 후연의 군사·행정적 중심지를 공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군은 어떤 교통로를 따라 진군해 숙군성을 공격했을까? 당시의 대표적인 교통로는 조양(朝陽)-의현(義縣)-대릉하(大陵河)-북진(北鎭)-흑산(黑山)-신민(新民)-요하(遼河)-심양(瀋陽)을 연결하는 길이다. 이 길은 중원 세력과 고구려를 비롯한 동쪽 이민족이 교류하는 대표적인 교통로였다. 그랬기 때문에 중원 세력이 요서 지방에서 고구려를 공격하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특히 수·당의 고구려 침입 시에 주 공격로가 되었다. 고구려는 역으로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후연을 공략하였다. 광개토왕이 파견한 대규모의 고구려군은 신성이 위치한 무순을 지나 현도군이 위치한 심양으로 나아간다. 그런 다음 요하를 건너 요령성 신민에 도착한다. 이 지역은 한 이래로 군현 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 전략적인 요충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신민에서 서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후한시기 요동속국 영역에 해당하는 흑산-북진에 이르는 교통로를 따라 진군해갔다.
고구려는 요서 지방 진출을 다시 감행하였다. 숙군성 공격 2년 후인 404년에 후연의 연군(燕郡)을 공략한 것이다. 이 상황을 『진서』는 “고구려가 연군을 공략하여 100여 명을 살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주 006
연군이란 지명을 통해 광개토왕의 작전반경이 어느 곳까지 미쳤는지 추적해 볼 수 있다. 연군의 위치는 어느 곳일까?주 007 『신당서(新唐書)』는 연군의 위치에 대하여 후연의 왕성인 용성에서 동쪽으로 18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였다. 학계는 이를 근거로 요령성 의현(義縣)으로 파악하고 있다. 의현은 대릉하의 서쪽에 위치한다. 일찍이 선비족 모용외(慕容廆)가 세력을 형성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404년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진군하여 대릉하까지 건너가 후연의 연군을 공략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 공격으로 고구려는 후연의 왕성까지 압박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후연왕 모용희가 405년 직접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해왔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림4 | 광개토왕 군대의 요서 지방 진출
한편, 〈광개토왕릉비〉 영락 17년(407년) 기사를 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① 17년 정미(丁未)에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였다. … 광개토왕의 군대가 사방에서 맞붙어 싸워 [□□병사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②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②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위 기록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완전한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개략적인 내용은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 군대가 □□를 공격하여 모조리 죽였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비문이 파손되어 고구려의 공략대상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학계에서는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상당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후연과의 전쟁(천관우, 1979 외), 백제와의 전쟁(박시형, 1966 외), 후연 및 백제와의 전쟁(강재광, 2009 외)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각자의 입장을 바탕으로 하여 상대 주장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에 따른 논리적 보완이 이루어졌다. 후연전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사료 ①을 중시한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남김없이 처참하게 죽여버렸다’, ‘노획한 갑옷 1만여 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물자’ 등의 문구로 보아 도저히 백제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백제전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사료 ②를 중시한다. 기록에 나오는 사구성(沙溝城)이 백제가 축조한 사구성(沙口城)과 유사하고 루성(婁城)은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 기사 및 수묘인 연호 기사에 기록된 백제 지명에 ‘루’자가 들어가는 명칭이 많아 백제전설을 방증한다고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논리적 공방을 모두 수용하여 ①은 후연전, ②는 백제전이라고 해석하는 절충적인 견해까지 나타났다.
①의 내용은 이 사건에 대한 보다 많은 단서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나 남김없이 처참하게 죽여버렸다고 하는 ‘참살탕진(斬煞蕩盡)’이란 문구에서 적개심에 가득 찬 분노를 표출하는 고구려군의 무자비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참살탕진’ 문구는 영락 17년 기사의 공략대상을 지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 문구를 근거로 해석하자면, 공략대상은 고구려의 천하관에 포함되지 않는 적대세력이다.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표현방식을 비교, 정리해보면 고구려의 속민(屬民)에 포함되는 세력은 누구나 용서와 자비의 대상이었다. 앞서 영락 6년 기사에 고구려가 속민인 ‘백제왕의 항복을 받고 은혜를 베풀어 그동안의 죄를 용서한다’라고 기록되었음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①의 내용은 백제의 경우와 달리 고구려의 자비로움, 은혜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락 17년 기사의 공격대상은 백제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광개토왕릉비〉 영락 17년 기사는 후연을 대상으로 한 전쟁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광개토왕릉비〉가 제작된 시기는 광개토왕이 서거한 412년 10월부터 매장되는 414년 9월 29일 이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 왕실에서 수집된 정보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광개토왕릉비〉 문구가 작성되었다. 이때 북연은 마지막 후연왕인 모용희 살해를 주도한 풍발이 집권한 상황이었다. 모용씨 계통인 후연과 풍발이 이끄는 북연은 종족적 계통이나 왕통 상에서 서로 관계가 없다. 종전에 북연의 입장을 고려하여 후연과의 전쟁을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일부 견해도 있지만, 이는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고구려의 정치적 위상은 북위의 압력에 점차 쇠퇴해가는 북연을 주도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요컨대, 〈광개토왕릉비〉 영락 17년 기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숙군성 공략 기사와 연군 공략 기사를 압축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공석구, 2012). 사실 5만 명에 달하는 보병과 기병이 동원된 고구려군의 규모로 볼 때 대규모 전쟁이었음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군의 공격대상으로 언뜻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은 숙군성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숙군성 공략 기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숙군성은 후연의 평주자사가 주둔하던 곳이다. 평주자사는 당시 고구려를 비롯한 동쪽의 이민족세력을 대비하기 위해 군사 및 행정 업무를 총괄한 관직이다. 따라서 숙군성에는 전쟁 상황을 대비하여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고 그에 상응하는 군수물자가 비축되었다고 예상해 볼 수 있다. ‘갑옷 1만여 벌을 노획했다’는 내용은 당시 고구려군에게 참살당한 숙군성에 있던 중무장한 후연군의 대규모 병력을 상상케 한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요서 지방 공략은 후연을 직접 자극하게 되었다. 후연의 왕성이 위치한 용성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거리까지 고구려군이 접근하게 된 것이다. 후연왕 모용희는 거세게 반발하였다.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을 공략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고구려의 요동성, 목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는 광개토왕에 의한 강력한 요동 지방 진출정책이 완료되었음을 말해준다. 이후 광개토왕은 후연에 보다 우월한 입장이 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국 관계가 이어졌다.
요동 지방을 확보한 이후 고구려는 크게 성장하였다. 요동 지방의 높은 사회·문화적 역량을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지방에서 나오는 다양한 물자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얼마 후 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발판이 되었다. 요동 지방을 확보한 이후 고구려인들은 강력한 자부심을 대내외적으로 표출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자신들의 자부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광개토왕의] 무훈이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오곡이 풍성하게 잘 익었다. _ 〈광개토왕릉비〉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 사방이 알고 있다. _ 〈모두루묘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 사방이 알고 있다. _ 〈모두루묘지〉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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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언제 어떻게 확보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표적으로 385년의 사건 이후부터로 파악하는 견해(武田幸男, 1989; 공석구, 2012)와 광개토왕 이후부터로 파악하는 견해(여호규, 2005; 이성제, 2013) 등이 있다. 이는 요동 지방을 장악하게 된 시기와 완전히 장악한 시기라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이 영락 5년(395년) 패려(稗麗) 공격을 종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 력성, 북풍, 오비□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왕성으로] 귀환하였다”라고 하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패려는 시라무렌하 유역의 거란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요동 지방은 광개토왕 이전 시기에 이미 상당 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된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