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북연 및 남연과의 우호관계 추진
2. 북연 및 남연과의 우호관계 추진
407년, 후연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였다. 후연왕 모용희가 반란을 일으킨 풍발 세력에 의해 피살되고 모용운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북연 정권의 시작이다. 고구려계인 모용운은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409년에는 실권자인 풍발이 집권하였다. 고구려와 북연은 고구려가 우월한 입장에서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한편 남연은 모용씨 일파인 모용덕(慕容德)이 일으킨 정권이다. 고구려는 산동 지방에서 성립된 남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음에서는 광개토왕이 새로 등장한 북연, 남연과 맺은 대외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1) 북연과의 관계
407년, 요서 지방에서 권력 교체가 단행되었다. 고구려 계통인 모용운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모용운주 008은 국호를 대연(大燕)이라고 칭했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를 북연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용운은 본래 종족적으로 고구려계였다. 『진서(晉書)』를 보면 고운(高雲)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주 009 『삼국사기』도 고운의 할아버지는 고화(高和)이며,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간 무리라고 기록하였다. 모용운은 즉위하자 본래의 성씨인 고(高)로 바꿨다.
후연과의 치열한 투쟁 끝에 요동 지방을 확보한 고구려는 요서 지방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추진하였다. 그것은 모용운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내세워 고운이라고 개명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408년 3월, 광개토왕은 고운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는] 같은 고씨 종족이다’라고 하며 서로 간에 우의를 다짐하고자 했다. 그가 본래 고구려계였다는 사실은 광개토왕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의 생전 이름은 고담덕(高談德)이 아니었던가? 이와 같은 광개토왕의 호의에 호응하여 고운은 관료 이발(李拔)을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양국 간에 우호관계가 성립된 또 다른 배경은 당시 국제정세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고운은 북위가 압박하는 상황에서 고구려와의 충돌을 원치 않았다. 고구려도 이미 요동 지방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리한 충돌을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의 대외적 관심이 백제, 왜와의 갈등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운은 내부의 정치적 안정과 권력 장악이 당면한 과제였다. 고운 정권은 가중되는 북위의 압박에 점차 위축되었다. 북연의 영토는 후연에 비해서 상당 부분 축소된 상태였다. 실권을 장악하지 못한 고운은 집권 2년 만에 내부 반란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409년, 풍발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그는 즉위하면서 국호를 연(燕)이라고 하였다. 또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동진, 유연, 거란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추진하였다. 410년, 풍발은 살해된 고운을 무덤에 안장하고 사당을 세워주었다. 고구려를 의식한 조처였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 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주 010
고구려는 이미 요동 지방을 확보한 상태였다. 북연에 대해서는 우월한 입장에서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형성하였다. 중원에서는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가 등장하였지만, 고구려의 요동 지방 지배는 계속되었다. 양국은 요하를 경계로 하여 국경을 형성하였다. 이후 요동 지방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 영토로서 존속되었다.
2) 남연과의 관계
남연주 011은 후연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나라를 세운 모용덕은 전연왕 모용황의 막내아들이며 후연왕 모용수의 동생이다. 업성(鄴城)을 지키고 있다가 후연왕 모용수가 죽자 산동반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398년, 모용덕은 활대에서 연왕(燕王)을 자칭하였다가 남쪽으로 근거지를 옮겨 광고(廣固: 산동성 청주)에서 400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405년부터는 모용초(慕容超)가 다스리다가 410년 동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광개토왕은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외교관계를 추진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서 『태평어람(太平御覽)』은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하나는 『삼십국춘추(三十國春秋)』주 012를 인용하여 “[406년] 고구려가 천리마(千里馬), 곰가죽(生羆皮), 장니(障泥)를 헌상했는데, [남연왕] 모용초가 크게 기뻐하여 물소(水牛)와 앵무새(能言鳥)를 [고구려에] 보답으로 보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주 013를 인용하여 “[408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왔는데, 빠른 속도로 소식을 전 하는 능력이 있는 천리인(千里人) 10명과 천리마 1필을 가져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광개토왕의 외교 노력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치상황 극복과 관련이 있다. 모용초의 재위 기간(405년 8월~ 409년 8월)은 모용희가 후연왕으로 재위하던 기간(401년 9월~ 407년 9월)에 해당한다. 광개토왕과 모용희는 극심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402년 숙군성 공략, 404년 연군을 공략하여 요서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모용희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을 공격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우군의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또한 408년은 후연이 멸망하고 모용운의 북연 정권이 들어선 직후에 해당한다. 광개토왕은 남연뿐만 아니라 북연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가 보낸 선물은 남연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고 빠른 소식을 주고받자는 의미에서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된다. 이로 볼 때 광개토왕은 산동 지방을 배경으로 건국한 남연과의 우호관계를 추진하여, 이를 배경으로 주변에 있는 북연, 백제, 북위 등 여러 나라를 견제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