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제와의 갈등
3. 백제와의 갈등
광개토왕 시기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에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양 기록을 비교해서 보면, 발생연대, 사건 내용 등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첫째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광개토왕 4년(395년) 기록을 마지막으로 하여 그 이후에 백제 관련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광개토왕릉비〉는 양국 관계를 396년 이후부터 기록하였다. 따라서 전반적인 백제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12세기경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414년에 기록된 〈광개토왕릉비〉 기록을 서로 비교할 때, 『삼국사기』가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엄밀한 사료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는 개인의 영웅담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과장과 왜곡의 가능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광개토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양국 관계는 갈등관계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평양성에서 죽임을 당한 이후부터이다. 광개토왕 시기 예성강,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양국의 대립과 갈등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광개토왕은 당면한 적이었던 백제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으며,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먼저, 광개토왕이 즉위하기 이전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371년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양국은 심각한 갈등관계로 접어들었다. 당시의 관련 기록을 비교해 보면 양측의 입장이 잘 나타난다. 고구려는 이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사건이라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승리한 백제 측에서는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주 014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국가 비상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소수림왕이 뒤를 이었다. 소수림왕은 먼저 국가에 닥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내적으로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였다. 소수림왕 초기에 시행된 불교 도입, 교육기관인 태학의 설립, 국가의 통치기반인 율령의 반포 등이 그것이다. 소수림왕은 국가의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백제 공략을 추진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소수림왕의 대외관계 기록을 살펴보면 전진(前秦) 2회, 백제 3회로 나타난다. 여기서 전진과의 관계는 화친을 목적으로 한 사절 파견 기사인 것에 비해, 백제와의 관계는 모두 전쟁 관련 기사로 일관되어 있다. 소수림왕은 375년 수곡성(水谷城: 황해도 신계) 공략, 376년 백제 북방 공략, 377년 백제 침공을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의 대외정책 의도가 짐작된다. 소수림왕은 전진과의 화해를 추진하여 국력 소모를 줄이고, 모든 역량을 백제 공격에 집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을 살해한 백제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에 이어 백제 공략을 계속 추진하고자 했다. 고국양왕은 386년 백제를 공략하였다. 하지만 고국양왕 즉위 초기에는 백제 공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당시 요동 지방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종래 고구려는 요동 지방을 지배해오던 전진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백제를 적극적으로 공략하였다. 그런데 384년, 요동 지방의 주인이 전진에서 후연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구려가 이 틈을 타 요동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면서 힘이 분산되었다.
고구려의 공격에 대한 백제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377년 백제 근구수왕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략하고, 386년 진사왕이 관방(關防)을 설치했으며, 389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략했다. 390년에는 달솔 진가모(眞嘉謨)가 이끄는 백제군에 의해 고구려 도곤성(都坤城)주 015이 함락되었다. 양국의 접경지역은 386년에 백제 측에서 청목령(靑木嶺)을 중심으로 관방을 설치했다는 기록주 016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학계는 청목령의 위치를 개성 지역으로 비정한다. 대체로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위치하며 마식령산맥의 서남단에 해당한다. 예성강 이남인 개성 지역이 백제의 주요 거점이었고, 대체로 예성강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양국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391년에 광개토왕이 즉위하였다. 광개토왕 시기의 백제 관계를 검토하는 핵심적인 자료로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그런데 양 기록을 비교해 보면 연대, 사건 내용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주 017 따라서 양국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기록에 나타난 차이를 염두에 두고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양국 관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두 기록을 함께 제시한다(표1, 표2).
표1 | 『삼국사기』의 백제 관련 기록
| 구분 | 기록 내용 | |
| 392년 | 고구려본기 | - 5월 광개토왕 즉위. - 7월 백제를 공략하여 10개 성을 빼앗음. -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킴. |
| 백제본기 | - 7월 광개토왕의 4만 명 병사가 공격함. 백제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전쟁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를 못함. 석현성 등 10개 성이 함락됨. 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을 빼앗김. - 10월 고구려에 관미성을 빼앗김. | |
| 393년 | 고구려본기 | - 8월 남쪽 국경을 침범해 온 백제를 막았음. |
| 백제본기 | - 8월 진무가 이끄는 1만 명의 백제군이 석현성 등 5개 성을 탈환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공격했으나 실패. | |
| 394년 | 고구려본기 | - 7월 백제가 침입하니 광개토왕이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격파함. - 8월 백제 방어를 위해 국경 남쪽에 7개 성 축조. |
| 백제본기 | - 7월 수곡성 아래에서 고구려와 싸우다 패배하였음. | |
| 395년 | 고구려본기 | - 8월 패수전투에서 승리하고 8,000명을 포로로 잡았음. |
| 백제본기 | - 8월 진무가 이끄는 백제군이 패수전투에서 광개토왕의 7,000명 군대에게 패배, 8,000명 사상. - 11월 패수전투의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아신왕의 7,000명 병사가 청목령까지 진격했다가 철군. | |
| 398년 | 백제본기 | - 고구려 공격을 위해 한산 북책까지 갔다가 철수. |
| 399년 | 백제본기 | -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 징집. |
표2 | 〈광개토왕릉비〉의 백제 관련 기록
| 구분 | 기록 내용 |
| 영락 6년(396년) | 광개토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제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개선하였다. |
| 영락 9년(399년) |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
| 영락 10년(400년) |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국도)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백제와 왜가 크게 무너졌다 …. |
| 영락 14년(404년) |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 연선(連船) … 광개토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서로 맞부딪히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이와 같은 자료상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서, 〈광개토왕릉비〉 기록을 중심으로 『삼국사기』 기록을 대조해가며 양국 관계를 추정해보자. 『삼국사기』를 보면 392년 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백제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전쟁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맞서 싸우지를 못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백제의 석현성(石峴城)을 포함한 10여 성과 한강 이북의 많은 마을을 점령하였다. 나아가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까지 함락하였다.주 018 고구려는 이 공격으로 그동안 백제가 구축해 놓은 방어망을 돌파하였다.
고구려 공격에 대하여 백제는 크게 반발하였다. 백제는 393년 관미성 수복을 위한 공격, 394년 고구려 공격, 395년 패수전투 등 여러 차례의 반격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백제가 시도한 공격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 『삼국사기』에 나타난 광개토왕 시기의 백제 관계를 요약해보면 군사적 우위는 이미 고구려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삼국사기』 내용과 비교하여 〈광개토왕릉비〉 내용을 보면 백제 관련 사건 모두가 396년(영락 6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의 여러 차례(392~395년)에 걸친 고구려 공격 사실을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 기사에 일괄하여 서술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록을 인용해 보자.
(영락 6년): 백제와 신라는 우리[고구려]의 속국이었던 관계로 그동안 조공해왔다. 그런데 신묘년(391년) 이후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래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그런데 [영락] 6년 병신년에 [광개토]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대군이 백제의 국경 이남에 도착하여 일팔성 … 등을 공격해 빼앗고 백제 도성을 핍박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고구려에 불복해 감히 맞서 싸웠다. [광개토]왕은 격노해 병사를 거느리고 아리수(阿利水: 한강)를 건너 압박하니 백제군은 왕성으로 도망해 갔다. 이에 백제 왕성을 포위하였다. 위급해진 백제왕은 1,000명의 남녀와 세포(細布: 곱고 가늘게 짠 삼베) 1,000필을 헌납하고 왕 앞에 꿇어 앉아 스스로 “앞으로 영원토록 [광개토왕의] 노객(奴客)주 019이 되겠다”라고 서약하였다. 그러자 [광개토]왕은 은혜를 베풀어 지금까지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이후에도 [고구려에] 정성을 바쳐 순종할 것임을 문서로 남겼다. [광개토왕은] 이번 작전에서 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차지했으며,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 등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돌려 도성으로 귀환했다.주 020
이 기록은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으로 유명한 사건이다. 〈광개토왕릉비〉의 대외정벌 기록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의 집중 공략대상이 백제였음을 추정케 한다. 이 사건을 요약하면, 백제가 왜와 연합을 도모하자 광개토왕이 몸소 백제를 공격하여 58개 성과 700개 촌락을 격파하고 마침내 한강 남쪽에 있던 백제 왕성을 포위하니 아신왕이 항복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58성 700촌에 대해서는 그 지명을 일일이 비정하기 어렵다. 단지 그중 미추성은 미추홀로, 오늘날 인천 지역으로 비정한다. 58성 700촌 지역은 대체로 한강을 비롯하여 북한강, 남한강 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수로를 따라서 백제를 공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의 수로라면 예성강, 임진강 등을 생각하게 된다.
고구려는 예성강, 임진강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을 공략했던 것인데, 내려왔던 길은 대체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예성강 하류로 내려와 황해로 나와서 강화도 부근을 지나서 한강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고구려군이 북한강, 남한강을 따라 백제 왕성(한성)으로 진격해왔을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의 군사작전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의 작전반경이 한강 이북 지역, 나아가서는 남한강, 북한강 유역까지 더욱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쨌든 이 전쟁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로 기록되었다. 고구려군이 백제 도성을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며 “앞으로 영원토록 [광개토왕의] 노객이 되겠다”라고 맹세까지 하였다. 동시에 백제는 “왜와 [앞으로] 화통하지 않겠다”라는 서약까지 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아신왕의 동생과 10여 명의 대신을 인질로 잡아서 돌아갔다고 한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사료라는 관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릉비〉가 광개토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훈적비로서 일부 과장된 진실이 있음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 기록과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자. 백제본기를 보면, 392년 광개토왕은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 석현성을 비롯한 1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백제 진사왕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강 이북의 여러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비해 고구려본기를 보면, 392년 광개토왕은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양 기록은 같은 해 발생한 사건이다. 같은 사건을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는 석현성을 비롯한 10성이 함락당한 사실을, 고구려는 백제 관미성 함락 사실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것이 과연 동일한 사건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관미성은 곧이어 백제본기에도 등장한다. 광개토왕에 의해 관미성이 함락되자 393년에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백제 아신왕이 말하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요충지인데 지금 고구려 소유가 되었으니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라 하면서 좌장 진무(眞武)에게 1만의 군사를 보내 관미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실패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그렇게 중요시하던 관미성은 어디일까? 『삼국사기』는 관미성의 특징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성의 사방이 절벽처럼 험준하고 바닷물로 둘러싸인 곳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관미성이 섬이나 해안가에 위치함을 설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 강화도, 예성강 하구, 임진강 ~ 한강 하구, 오두산성(烏頭山城)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오두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나 조사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는 않은 상태이다.
관미성 함락 이후 양국은 다시 충돌하였다. 394년 “백제가 쳐들어옴에 [광개토]왕은 날랜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역습하여 격파시키니 남은 적들이 밤중에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백제 측의 반격이 있었다. 395년에 백제 아신왕은 좌장 진무에게 고구려를 정벌토록 하였다. 이 전투에 대하여 “광개토왕은 친히 병사 7,000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예성강)가에 진을 치고 항거하니, 백제군이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000명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 간의 전투에 나타난 충돌지점을 분석해보면 국경선을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광개토왕 시기 양국 간의 충돌지점을 『삼국사기』에서 뽑아보면 석현성, 관미성, 수곡성, 패수, 청목령으로 나타난다. 석현성은 예성강 이남 한강 이북 지역에 위치하는데, 그 위치가 황해도 개풍군 지역에 해당한다. 충돌지점과 그 위치 관계를 검토해볼 때 종래 임진강과 예성강 주변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양국의 국경선이 광개토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남으로 한강 유역까지 확대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여호규, 2012). 그렇지만 당시의 양국 관계를 분석해보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처럼 고구려 측이 일방적으로 우세했던 것만은 아니다.
396년까지는 고구려의 군사적 우세가 지속되었다면, 이후로는 이와 다른 성격의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백제 아신왕이 398년에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가 돌아왔으며, 399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였다고 한다. 수세에 몰려 있던 백제가 국면을 전환하여 고구려에 공세를 취한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상황이 변화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국내외 정치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백제의 외교전략에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서 왜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당시 왜는 신라의 해안지대를 침략하고 있었는데, 백제는 이러한 왜를 끌어들여 대고구려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 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397년 5월에 백제 아신왕이 태자인 전지(典支: 전지왕)를 왜에 인질로 파견하면서부터였다.주 021 백제는 광개토왕의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태자를 왜국에 보낸 것이다.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태자를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로 백제의 사정이 위급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신왕은 이와 같은 정책 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397년 7월에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하였으며, 9월에는 왕도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 궁궐 서쪽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한편으로 402년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니 이듬해 2월에 왜국에서 사신이 왔고, 아신왕이 이를 맞아 특별히 후하게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405년] 태자 전지가 8년 동안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왜에서 귀국할 때 왜왕이 군사 100명을 보내 호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도 백제와 왜의 연합을 사실적으로 증명한다. 이는 백제와 왜가 “서로 화통(和通)했다”라고 표현한 〈광개토왕릉비〉 문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영락 14년(404년) 기사에 백제·왜 연합군이 고구려의 대방계를 침입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외에도 〈광개토왕릉비〉 영락 9년, 10년 기사에 백제와 왜가 군사적으로 연합했다고 추정되는 관련 기록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고구려의 주된 공격대상은 백제였는데, 그 방향이 후연 방면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광개토왕 9년(399년) 이후의 대외관계 기사가 모두 후연과의 갈등관계를 집중적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그 배경은 요동 지방의 정세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후연은 서쪽에서 북위의 압력으로 계속 밀리게 되자 대외전략을 전환하여 동쪽 즉 고구려 방면으로의 영역 확장을 기도하였다. 즉 후연왕 모용성과 그 뒤를 이은 모용희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후연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백제 방면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제가 추진한 398년, 399년의 고구려 공격은 고구려의 상황을 눈치챈 반격이라고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광개토왕 시기의 국제관계는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여 왜와 백제가 서로 한편이 되어 싸운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 기록의 비교 검토에서 잘 나타나듯이, 당시 광개토왕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적은 백제였다. 당시 고구려가 백제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는지는 〈광개토왕릉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백제에 비중을 두고 기술하였다.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하여 경멸에 찬 어투로 기술하였다. 백제왕을 ‘잔주(殘主)’라고 기술하여 노골적으로 경멸하려는 의도를 노출하였다. 왜는 백제보다 더 고구려가 정벌해야 할 대상이었다. 고구려는 왜를 용서할 수 없는 ‘절대 악(惡)’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왜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잡아 죽였다(영락 14년)”, “열 중 아홉가량을 모두 죽이거나 강제로 옮겼다(영락 10년)”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에 대한 고구려의 인식은 백제가 끌어들인 이질적인 존재로서 과장되게 표현하였고, 이를 통해 백제와 왜에 대한 출정 명분과 정당성을 찾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의 백제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성격상의 차이가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광개토왕 시기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절대적인 우위를 기록하였다. 특히 〈광개토왕릉비〉는 백제왕이 항복하며 왕의 동생을 비롯한 귀족을 인질로 보냈다는 등 극단적인 상황으로 기록하였다. 다시 말해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에 의해 추진된 공격이 백제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성공한 것으로 기록한 것에 비해,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로서 새겨놓았다. 〈광개토왕릉비〉가 광개토왕의 훈적비로서 어느 정도 과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당시의 양국 관계를 분석하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처럼 고구려의 일방적인 우세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 각주 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