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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신라에 대한 종속적 외교관계 수립

4. 신라에 대한 종속적 외교관계 수립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는 신라에 대해 상하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양 기록을 살펴보면, 발생연대, 사건 내용 등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양국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 기록에 나타난 차이를 염두에 두고 알아보아야 한다.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와 신라 관계를 요약하자면 우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고구려가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를 속민(屬民)화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계는 5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4세기 후반경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급박하게 전개된 삼국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고구려와 신라는 동반자가 되었다. 사실 신라는 건국 이후부터 왜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광개토왕 시기에 이르러 왜의 침략은 이전보다 빈번하고 강력해졌는데, 왜가 백제와 군사 협력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전쟁, 즉 경자년 출병과 연결된다. 광개토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나물이사금(재위 356~402년), 실성이사금(재위 405~417년)이 통치하였는데, 백제, 왜의 위협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 고찰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 기록을 중심으로 양국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양국의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전환된 계기는 백제 독산성주의 신라 망명 사건(373년)이었다.주 022
각주 022)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해왔다.[신라 나물]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백제왕이 편지를 보내어 “두 나라가 화합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이제 대왕께서는 도망한 우리 백성을 받아들였으니 이는 [양국의] 화친과는 거리가 있으며 [내가] 대왕에게 바라던 바도 아니니, 돌려보내기를 요청합니다”라고 말했다. …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3, 나물이사금 18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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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계기로 우호관계를 지속해오던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대립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대백제 전략의 일환으로 신라가 필요하였고, 신라 또한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국가적 안정을 지켜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양국의 이해관계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끌어들였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377년, 381년에 화북지방에 있던 전진에까지 사신을 파견하였다.
391년 즉위한 광개토왕은 이듬해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사신을 통해 구체적인 광개토왕의 요구사항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때 신라 나물이사금은 고구려가 강하다는 것을 내세워 곧바로 실성(후일 실성이사금)을 인질로 보냈다.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인질외교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구려에 저자세 외교를 벌이고 있던 신라 나물이사금은 사신을 보내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이 사건에 대하여 “왜인이 국경에 가득 들어와 성지를 부수고 노객(신라왕)을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제가 광개토]왕께 의지하고자 하니 구원해주기를 요청합니다”라고 기록하였다. 다급한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은 신라에 대한 우월한 외교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구원병 파견을 약속하고, 신라 사신에게 계책을 알려주어 돌려보냈다. 곧이어 광개토왕의 ‘경자년 출병’이 단행되었다. 고구려의 구원전쟁은 대성공을 거두고 종료되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이때부터 신라왕이 처음으로 찾아와 광개토왕에게 조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상황과 관련하여 왕실 관련 무덤이 조성된 경주 대릉원에서 고구려 또는 광개토왕을 연상케 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금동관이 출토된 호우총(壺杅塚)에서는 ‘국상강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출토되었다(그림 5-좌). 또한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에서는 은제그릇이 출토되었다(그림 5-우). 이 그릇에는 고구려의 연호가 들어간 ‘연수원년태세재신묘(延壽元年太歲在辛卯)’라고 새긴 글씨가 있다.
그림5 |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과 서봉총 출토 은제그릇 - 청동그릇(국립중앙박물관)
그림5 |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과 서봉총 출토 은제그릇 - 은제그릇(국립중앙박물관)
광개토왕이 단행한 경자년 출병은 이후 고구려가 힘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를 종속적인 관계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는 왜를 몰아낸 다음 보호를 명분으로 삼아 신라땅에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신라 왕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고구려군이 주둔한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 내정에까지 간섭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신라 지역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실상에 대하여 〈충주고구려비〉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고 기록하였다.주 023
각주 023)
2019년 경주 월성 해자에서 5세기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 곡물의 관리와 관련하여 당주라는 관직 명칭이 기록된 목간이 발견되어 신라가 당주라는 고구려 관직명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524년 법흥왕은 군사당주를 설치하였으며, 6세기대 금석문인 〈단양신라적성비〉, 〈남산신성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등에 당주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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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 〈충주고구려비〉에 기록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고구려 주둔군주 024
각주 024)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의 모습은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1 실성이사금조에 “[실성]왕은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 죽이려고 하여 고구려의 군사를 청해서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게 했다. 고구려병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음을 알고 창 끝을 돌려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이후 464년까지도 신라땅에 고구려군이 존재했음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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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까지 영향을 끼쳤는데, 실성이사금과 눌지마립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400년 ‘경자년 출병’ 이후 일찌기(382년) 인질로 갔던 실성이 10년 만에 고구려에서 돌아왔다. 402년 나물이사금이 승하하면서 실성은 신라왕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는 나물이사금의 여러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성이 즉위했다고 기록했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사실 실성은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로서 나물이사금과 혈연관계가 없다. 나물이사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실성이 이사금(왕)으로 즉위하게 된 배경은 고구려가 실성을 선택한 것으로 파악함이 당시 상황에 부합한다.주 025
각주 025)
실성이 신라왕이 된 배경은 석씨 세력의 도움과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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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실성을 통해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신라 왕위 계승에 간여한 보다 직접적인 증거는 눌지마립간의 경우이다.
한편 실성이사금은 즉위하자 미사흔을 왜국에 파견하였다. 여기엔 왜국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백제와 왜의 군사연합을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는 이미 백제와 군사연합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는 미사흔을 억류하였다. 그리고 405년, 407년에 연이어 신라를 침공하였다. 실성이사금의 외교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신라의 선택은 이제부터라도 고구려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실성이사금은 412년 나물이사금의 아들이자 미사흔의 형인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파견하였다.주 026
각주 026)
실성이사금이 미사흔을 왜국에,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파견한 것은 당면한 국가 정치상황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실성이 왕이 되자 나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그의 아들을 해쳐 복수하려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또 다른 역사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418년 박제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인질로 잡혀 있던 복호를 구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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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신라를 고구려가 주도하는 질서 체계에 편입시켰다. 〈광개토왕릉비〉는 이 상황을 ‘속민’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사방에 있는 주변 세력에 대해 차별화된 인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질서 체계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으로 주변 국가와 종족을 대표하는 중심 국가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였다.주 027
각주 027)
동부여의 경우도 유사하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옛날 추모왕 때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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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통치하는 신성한 국가라는 자부심이다.
고구려는 죽령 동남쪽의 일부 지역을 세력권으로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지역 깊숙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5세기 이후부터 양국은 고구려의 일방적 우위 아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는 신라가 왕권국가로 도약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433년경 신라·백제 간 군사연합주 028
각주 028)
433년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마립간 사이에 군사적인 협력관계가 추진되었다. 이를 ‘나제동맹’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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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이었다. 464년경에는 신라 영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제거하는 사건주 029
각주 029)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중국(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고[구]려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 신라왕은 고[구]려가 허위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이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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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나타났다.

  • 각주 022)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해왔다.[신라 나물]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백제왕이 편지를 보내어 “두 나라가 화합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이제 대왕께서는 도망한 우리 백성을 받아들였으니 이는 [양국의] 화친과는 거리가 있으며 [내가] 대왕에게 바라던 바도 아니니, 돌려보내기를 요청합니다”라고 말했다. …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3, 나물이사금 18년조). 바로가기
  • 각주 023)
    2019년 경주 월성 해자에서 5세기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 곡물의 관리와 관련하여 당주라는 관직 명칭이 기록된 목간이 발견되어 신라가 당주라는 고구려 관직명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524년 법흥왕은 군사당주를 설치하였으며, 6세기대 금석문인 〈단양신라적성비〉, 〈남산신성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등에 당주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바로가기
  • 각주 024)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의 모습은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1 실성이사금조에 “[실성]왕은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 죽이려고 하여 고구려의 군사를 청해서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게 했다. 고구려병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음을 알고 창 끝을 돌려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이후 464년까지도 신라땅에 고구려군이 존재했음을 기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5)
    실성이 신라왕이 된 배경은 석씨 세력의 도움과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 1982). 바로가기
  • 각주 026)
    실성이사금이 미사흔을 왜국에,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파견한 것은 당면한 국가 정치상황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실성이 왕이 되자 나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그의 아들을 해쳐 복수하려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또 다른 역사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418년 박제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인질로 잡혀 있던 복호를 구출해왔다. 바로가기
  • 각주 027)
    동부여의 경우도 유사하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옛날 추모왕 때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8)
    433년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마립간 사이에 군사적인 협력관계가 추진되었다. 이를 ‘나제동맹’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9)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중국(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고[구]려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 신라왕은 고[구]려가 허위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이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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