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반도에 출몰한 왜 격퇴
5. 한반도에 출몰한 왜 격퇴
광개토왕의 백제 공략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왜의 존재이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7세기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며, 그 이전에는 왜(倭)라고 하였다.주 030 『삼국사기』를 보면 왜가 신라 박혁거세 8년경(기원전 50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한 것으로 나타나, 왜의 한반도 침략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려준다. 『일본서기』에도 왜의 한반도 출병 기록이 나타난다. 하지만 당시 왜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5세기 당시의 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야마토(大和)정권, 즉 현재 일본의 오사카(大阪) 지역 및 나라(奈良) 일대의 호족들이 연합하여 세운 정권으로 이해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남진 과정에서 왜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반면에 〈광개토왕릉비〉는 왜의 존재를 상세히 기록하였다.주 031 광개토왕이 파견한 고구려군이 신라 지역에 있던 왜를 공략하여 가야 지역까지 추격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해외의 정치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 간의 갈등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국제관계로 볼 때 정치적인 관심과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림7 |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倭)’, ‘왜적(倭賊)’(제2면 하단부)
이렇듯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 기록은 내용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양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은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갈등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는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 관련 기록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백제와 연합한 왜
〈광개토왕릉비〉에는 왜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광개토왕이 집권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백제는 광개토왕의 남진에 대처하기 위해 왜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서기』는 392년 진사왕을 죽이고 즉위한 아신왕의 등장 배경에 백제 진사왕과 왜국 간의 불화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왜의 후원을 받았음을 암시한 것이다. 아신왕은 397년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이후 402년 5월에 사신을 왜국으로 보내 큰 구슬을 구하니, 다음 해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고, 아신왕이 맞이하여 특별히 위로했다고 한다. 백제와 왜가 긴밀하게 연합했음을 알려준다. 광개토왕의 등장 이후 백제는 왜의 군사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19세기 후반 압록강변에서 발견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는 ‘왜’라는 글자는 일본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주 032 관련 내용 중에서 특히 영락 6년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너무도 유명한 문구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왜를 중요한 정벌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일본 학자들은 “백제(백잔)와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었다. 그래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부터 [바다를] 건너와 … 백제, □□,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였다.주 033
각주 033)

이 문구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부합하여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의 근거 사료로 활용되었다.주 034 이는 한·일 고대사 연구자의 관심거리로 등장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야기되었다.주 035이를 처음으로 연구한 학자는 1889년 일본 학자인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였다. 그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였다. 이후 일본 학자들은 이 기록을 『일본서기』에 보이는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방을 정벌하고 다스렸다’(한반도 남부경영설)는 기록 즉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 사실을 증명해주는 근거 사료로 활용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곧이어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의 식민지정책으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 측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남·북한 학계의 비판에 이어 198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 학계도 이 논쟁에 참여하였다(王健群, 1985). 한일정상회담에서 합의되어 발족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난 2010년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에게서 아직도 임나일본부와 연결하려는 주장이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이에 대해 4세기 말 5세기 초 당시 백제와 왜 사이에 있었던 군사협력 사실을 『일본서기』 편찬자가 천황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윤색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연구(홍성화, 2010)가 참조된다.
각주 035)

신묘년 기사가 내포하고 있는 결론의 중요성은 가야를 비롯하여 삼국 및 왜 관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비문에서 판독된 글자는 1,775자가량이다. 건립된 지 1,600년 정도 되다 보니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었다. 특히 발견 당시 표면에 달라붙은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글자 훼손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광개토왕과 주변 국가 간의 관계를 기록한 제1면이다. 여러 국가가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후대 정치적 필요에 의한 인위적 훼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문에 대한 여러 종류의 탁본자료를 검토한 결과 해석 문제가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중에서도 영락 6년조 부분을 두고 해석 방식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바다를 건너온 주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였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정인보, 1955; 박시형, 1966), 극단적으로는 일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비문을 석회로 변조했다는 주장(이진희, 1972) 등도 제기되었다. 논란을 정리하면, 탁본을 어느 정도까지 신빙하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이를 위해 비문의 단편적인 글자 해석을 지양하고 비문의 문장구조를 파악하여 당시의 역사상과 부합하려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학계는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의 실체를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결국 신묘년 기사에서 훼손된 글자를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어떤 글자를 삽입해 복원해야 하는지 또는 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한·중·일 학계에서 당시의 역사상과 합리적으로 연결, 해석하기 위해서 다양한 주장이 제출되었고,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양국의 우호관계를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백제와 왜가 서로 통했다’라고 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이와 같은 백제·왜의 군사연합 상황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영락 9년(399년): 백잔(백제)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주 036
영락 14년(404년): 왜가 느닷없이 대방(帶方)의 경계 지역에 침입하였다. [왜는] 백제군과 연합해 석성을 공격하고 … 전함을 서로 연결하여 … [이에 광개토]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 선두의 군대가 서로 충돌하였다. 광개토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목을 베어 죽였다.주 037
영락 14년(404년): 왜가 느닷없이 대방(帶方)의 경계 지역에 침입하였다. [왜는] 백제군과 연합해 석성을 공격하고 … 전함을 서로 연결하여 … [이에 광개토]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 선두의 군대가 서로 충돌하였다. 광개토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목을 베어 죽였다.주 037
〈광개토왕릉비〉는 “신묘년(391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왔다”라고 기록하였다. 왜가 한반도 상황에 직접 간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391년에 들어온 왜의 역할에 대해서는 비문이 마모되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백제가 왜와 군사연합을 추진한 구체적인 계기를 생각해보자면, 영락 6년(396년)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백제 왕성이 함락되고 아신왕이 항복하며 “앞으로 영원토록 [광개토왕의] 노객이 되겠다”라고 맹세했던 사실이 떠오른다. 고구려군에 의해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던 백제는 복수를 위해 왜와 연합한 것이다. 연합 사실은 영락 9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백제는 3년 전의 약속을 어긴 것이다. 하지만 백제·왜 연합의 내용, 광개토왕의 대응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상황을 알기 어렵다.
이와 같은 왜·백제의 군사연합은 400년에도 실행되었다. 영락 10년(400년) 기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 근거는 ‘잔왜궤도(殘倭潰逃)’주 038라는 문구에서 ‘잔왜’를 백제와 왜로 해석할 수 있는 데 근거한다. 또한 404년에는 왜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 영토가 된 옛 대방군 지역을 공격하였다.주 039 이 지역은 북으로는 재령강 남쪽, 남으로는 멸악산맥 이북 지역에 해당한다. 사실 왜가 멀리 서해안까지 우회해 들어와서 고구려 깊숙이 대방 지역을 침범할 만한 어떤 이유도 찾기 어렵다. 이 공격은 왜·백제 연합군이 해로를 활용하여 대규모 연합공격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광개토왕은 이 소식을 듣고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내려왔다. 광개토왕 군대는 대방 지역을 침략해온 왜를 공격하였다. 구체적인 전과를 기록한 부분이 마모되어 그 내용은 추적하기 어렵다. 하지만 ‘연선(連船)’이라는 문구를 통해 해안가에 배를 서로 묶어둔 채로 상륙해 쳐들어온 왜·백제 연합군의 상황, 그리고 광개토왕의 군대가 길목을 차단하여 이들을 좌우에서 협공해 승리한 전투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왜군을 참혹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고구려 영토에 무단으로 침범해 온 왜군을 격멸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했던 고구려군의 분노에 찬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일찍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에 의해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살해당했던 모욕을 갚고,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왜와 함께 자신의 영토에 무단침입한 백제군에 대한 응징의 결과였을 것이다. 광개토왕 군대의 요격으로 왜·백제 연합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 신라 지역을 침공한 왜
『삼국사기』는 왜가 여러 차례 신라를 침략했음을 기록하였다. 신라는 건국 이래 수시로 침범해오는 왜가 골칫거리였다. 특히 광개토왕 시기에 이르러 왜의 침략은 한층 빈번해졌다. 신라는 왜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고구려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392년 나물이사금의 인질외교로 시작되었다. 실성을 고구려로 보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와 신라 간에 종속적인 외교관계가 맺어졌다. 하지만 왜의 신라 침략은 단순하게 보이는 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이면에는 백제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광개토왕 시기에 이르러 백제와 왜는 군사적으로 연합한 상태였다. 표 3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관련 기록이다.
표3 | 『삼국사기』의 광개토왕 시기 신라를 침공한 왜·백제 관련 기록
| 연도 | 내용 | 시기 |
| 393년 | 왜인이 금성(왕성)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 [나물]왕이 날쌘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적이 후퇴하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였다. [왜인을] 협공해서 크게 물리쳤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나물이사금 38년 |
| 403년 | 백제가 변경을 침입했다. | 실성이사금 2년 |
| 405년 |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에서 잠복하였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깨부수고 300여 명을 죽여 그 목을 베었다. | 실성이사금 4년 |
| 407년 |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 실성이사금 6년 |
| 408년 | [실성이사금은] ‘왜인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놓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왕은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병력을 격파하려고 했다. … 정벌을 중지하였다. | 실성이사금 7년 |
표3을 보면 왜가 신라를 공격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403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난 373년 독산성주의 신라 망명 사건 이후 양국 관계가 적대관계로 전환된 이후 백제의 대응이라 하겠다. 백제의 입장에서 신라는 이미 고구려와 연합한 상태이므로 공동의 적이었다. 따라서 403년 사건은 고구려·신라 연합군에 의한 공격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백제 측의 고육지책으로 생각된다. 이때 왜의 협력이 수반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광개토왕 시기 왜가 신라를 공격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393년 신라 왕성인 금성을 5일 동안이나 포위했다는 사실, 405년 왜가 금성 근처까지 쳐들어와 왕성을 지키는 명활성주 040을 공격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공격의 배후에 백제가 있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삼국사기』 기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보를 기록하였다. 양 기록은 사건 내용이나 발생 연도 등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 기록에 나타난 상황으로 전반적인 양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관련 기록이다.
영락 9년(399년): 백잔(백제)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신라 [나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국경에 가득 쳐들어와 성지를 모조리 부수고, 이 노객(老客: 나물왕)을 왜의 백성으로 삼고자 합니다. 하여 [광개토]왕에게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은혜롭고 자애로운 광개토왕께서는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하게 여겨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비밀리에 계책을 알려주면서 돌아가서 [계책을] 보고 하도록 했다.주 041
[영락] 10년(400년):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교시하였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군이 가득 차 있었다. 관군(官軍)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왜적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종발]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임나 또는 신라] 사람에게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주 042 [이어서] 신라성과 염성을 공격하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는데, 성 안에 있는 열 중 아홉가량을 모두 죽이거나 강제로 옮겼다. [이 성을 임나 또는 신라] 사람에게 지키게 하였다. … 나머지 왜구는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또한 □성을 탈취하고 [이 성을 임나 또는 신라] 사람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전에는 신라왕이 직접 와서 조공 문제를 이야기한 바가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왕이 … 조공해왔다.주 043
[영락] 10년(400년):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교시하였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군이 가득 차 있었다. 관군(官軍)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왜적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종발]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임나 또는 신라] 사람에게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주 042 [이어서] 신라성과 염성을 공격하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는데, 성 안에 있는 열 중 아홉가량을 모두 죽이거나 강제로 옮겼다. [이 성을 임나 또는 신라] 사람에게 지키게 하였다. … 나머지 왜구는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또한 □성을 탈취하고 [이 성을 임나 또는 신라] 사람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전에는 신라왕이 직접 와서 조공 문제를 이야기한 바가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왕이 … 조공해왔다.주 043
영락 9년, 백제와 왜가 연합하였다. 광개토왕은 그 소식을 듣고서 평양으로 행차하였다. 양국이 연합한 상황은 그 이듬해인 영락 10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나물이사금이 사신을 파견해 광개토왕을 찾아왔다. 광개토왕이 사신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는 왜가 신라를 침공해왔다는 것이다. 왜가 성벽과 해자를 모조리 부수고 나아가 신라성까지 점령하려고 한다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기록은 표 3의 『삼국사기』393년, 405년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매우 과장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백제가 있었다.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고 뒤이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모의한 것이 이 기록에 대한 전반적인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을 들은 광개토왕은 왜를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을 신라 사신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에 신라 구원군을 파견하였으니, 이른바 ‘경자년 출병’이다. 400년,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5만 명에 달하는 파병은 4~6세기 당시 삼국이 동원한 병력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고구려군은 정해진 교통로를 따라 신라 영역으로 들어갔다.주 044 그런데 이 내용을 기록한 비문이 상당 부분 마멸되어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일부 확인 가능한 내용을 소개하자면, 고구려군은 신라성(新羅城), 염성(鹽城)으로 쳐들어가 성안에 있던 왜적을 물리쳤다. 그때 적군 열 명 중 아홉 명을 죽이거나 강제로 옮겼다고 한다. 크게 패배한 왜적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나가야 지역까지 도망가기에 이르렀다.주 045 이를 통해 임나가야도 백제, 왜 연합군에 협력했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고구려 원정군은 백제·왜 연합군을 궤멸하였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 지원에 보답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광개토왕릉비〉는 “이전에는 신라왕이 조공하지 않았는데, 이 사건 이후 신라왕이 직접 와서 조공했다”라고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신라 구원에 명분을 두었지만, 실제로는 신라뿐만 아니라 임나가야 지역에까지 고구려 주둔군을 파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는 이를 계기로 죽령 동남쪽의 일부 지역을 세력권에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지역 깊숙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400년에 단행된 경자년 출병은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의 중무장한 기병을 경험한 신라, 가야는 이를 계기로 무기 체계가 급격하게 변화하였다고 한다. 신라, 가야 지역에서 발견되는 마구나 갑옷 등은 고구려 원정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한편 지난 2009년 경주시 황오동 쪽샘지구 C10호 무덤에서 거의 완전한 상태로 출토된 5세기대에 해당하는 말갑옷은 고구려 중장기병을 연상시킨다. 1992년 신문배달원이 함안군 가야리 말이산 자락의 아파트 공사장에서 철제조각을 발견해 신고하였다. 이곳은 아라가야(安羅)의 왕성이 있던 지역이다.주 046 조사 결과 5세기에 해당하는 목곽분에 부장된 대형 말갑옷으로 밝혀졌다. 그 형상으로 볼 때, 왜를 추격해 가야 지역까지 원정을 하고 돌아간 광개토왕의 군대를 연상케 한다.

그림8 |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함안박물관)
6. 거란·숙신·동부여에 대한 지배권 확립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는 주변의 국가와 종족을 대표하는 중심 국가였다. 광개토왕은 인접해 있는 국가를 고구려가 주도하는 질서 체계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질서 체계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에 근거한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가 신성한 국가로서 ‘하늘의 혈통을 계승한 후계자(천제의 아들)가 통치하는 국가’라는 왕실의 인식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광개토왕은 주변에 있던 정치 세력인 거란, 숙신, 동부여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1) 거란 공략
고구려의 서북쪽에는 거란(契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란은 요하 상류 지역에 있던 세력이다. 그 존재에 대해서는 『진서(晉書)』에서부터 나타난다. 일명 ‘해단(奚丹)’이라고도 한다. 거란은 유목민족으로서 반농반목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8개 부락으로 구성되었다. 거란은 요서 지방의 북쪽에 해당하는 서요하 부근의 시라무렌하(西拉木倫河)와 노합하(老哈河) 유역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광개토왕은 서북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삼국사기』는 “[392년]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쳐서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고구려)이 빼앗겼던 백성 1만 명을 타일러서 데려왔다”라고 하였다. 이 내용에 보이는 ‘빼앗겼던 본국 백성 1만 명’은 378년 소수림왕대에 있었던 거란의 침략 사건주 047과 연관된다. 광개토왕은 거란을 공격하여 소수림왕 때 거란에 포로로 잡혀 갔던 고구려 백성을 되찾아온 것이다.
한편 고구려의 거란 공략과 관련하여 〈광개토왕릉비〉 영락 5년(395년) 기사를 보면 패려(稗麗)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패려가 고구려에 대한 [□□을] 하지 않으므로 영락 5년 을미에 [광개토]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 □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3개 부락과 600~700영(營)을 격파했는데,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 역성, 북풍, 오비□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주 048
이 기록은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패려를 정벌한 기록이다. 광개토왕 군대는 패려의 3개 부락과 600~700영을 격파하고 수많은 소, 말, 양 등 가축을 전리품으로 몰고 귀환하였다. 여기서 ‘영(營)’은 소규모의 유목민 군영(軍營)인 것으로 해석된다. 패려의 정체는 무엇일까? 학계는 이 패려에 대하여 거란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특히 거란 8부의 하나인 필혈부(匹絜部)를 주목하였다(박시형, 1966). 필혈부는 고구려의 서북쪽인 시라무렌하 유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목 세력이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염수(鹽水)주 049이다. 즉 소금호수 또는 소금강을 뜻하는 염수라는 용어는 위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 영락 5년 기사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 기사를 다르게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이미 요동 지방을 상당 부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서북쪽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광개토왕이 직접 정벌을 추진한 명분이 무엇인지는 비문이 훼손되어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 후연, 북위, 고구려 사이에 끼어 있던 거란의 정치적 선택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구려에 조공하지 않는 등의 비협조적인 상황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거란을 공략한 배경에 대하여 후연에 대한 견제(신정훈, 2013) 또는 고구려가 대외정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전에 군수물자를 획득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井上直樹, 2012).
2) 숙신 공략
고구려의 북방에는 숙신(肅愼)이란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명 식신(息愼)이라고도 한다. 선진(先秦)시대에는 숙신으로, 한대에는 읍루(揖婁)로, 북위대에는 물길(勿吉)로, 당대에는 말갈(靺鞨)로 불렸다.주 050 당시 숙신의 위치는 북옥저의 북쪽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침공 사건 때 동천왕이 남옥저에서 북옥저 방면으로 달아나자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추격하여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아왔다고 하는 기록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숙신의 세력 근거지는 송눈평원(松嫩平原)주 051에서 흑룡강(黑龍江) 중·하류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심은 후일 발해의 동경성(東京城)이 있었던 중국 흑룡강성 영안(寧安) 일대를 둘러싼 지역이라 하겠다(이정빈, 2019).
고구려와 숙신은 갈등관계였다. 280년에 숙신이 고구려를 침략해 백성을 살해하니, 고구려 서천왕이 동생인 달가(達賈)를 보내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숙신의]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 600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 6~7곳에서 항복을 받고는 고구려에 의지하여 살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해진다.주 052
광개토왕은 숙신 지역에 대한 보다 확고한 지배를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광개토왕릉비〉 영락 8년(398년)에 “[일부] 군대를 파견하여 백신토곡(帛愼土谷)을 관찰 순시케 하였다. 이때 막□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 인을 잡아왔다. 이후로부터 [숙신은]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주 053 ‘백신토곡’은 ‘식신토곡(息愼土谷)’으로도 판독된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이 공략한 백신토곡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고구려 북방에 있던 세력인 숙신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유력하다.주 054 ‘관백신토곡(觀帛愼土谷)’이라는 문구에서 ‘관(觀)’이라는 글자를 주목하자. 관은 관찰 또는 시찰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숙신 지역이 이미 고구려의 예속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숙신은 이미 서천왕 시기에 복속된 바 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상기하자. 숙신이 ‘이후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는 문구는 앞서 광개토왕에 의한 경자년 출병 결과 신라왕이 고구려에 조공했다는 기록과 유사한 면이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숙신 공략은 종전의 예속상태를 확인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3) 동부여 공략
고구려의 동쪽에 동부여(東扶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부여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아란불이 해부루왕에게 권하여 나라를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북부여와 관련되었음을 기록하였다. 이는 『위서(魏書)』, 『북사(北史)』 등 중국 측 역사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는 광개토왕 시기에 동부여라는 존재가 있음을 기록하였다. 영락 20년(410년) 기사에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 때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해 오지 않았다. [광개토]왕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동부여를 토벌하였다. 왕의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온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하였고 … 태왕의 은혜가 온 나라를 덮게 되자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때 태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광개토왕 군대를 따라온 자가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 무릇 공격하여 격파한 성이 64개, 촌락이 1,400개나 되었다”주 055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410년에 동부여를 토벌하였다. 동부여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 때부터 고구려에 복속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고구려를 배반하고 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개토왕이 공략한 명분은 동부여가 조공하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토벌(討伐)이라고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광개토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토벌하니 온 나라가 항복하였다고 한다. 귀환할 때 다섯 압로(鴨盧)가 광개토왕을 따라왔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광개토왕릉비〉에서만 볼 수 있는 독자적 기록이다.
이렇게 〈광개토왕릉비〉에 갑자기 나타난 동부여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동쪽에 있던 부여를 의미하는 용어일 것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285년경, 모용씨가 부여를 공략하자 부여왕의 자제들이 옥저땅으로 도망갔다고 하는 『자치통감』의 기록을 주목하여 옥저땅으로 도망해온 세력이 세운 국가를 지칭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하지만 동부여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존재한 세력이었는지, 그 위치에 대해서는 두만강 유역, 길림 지역, 함경도 지역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광개토왕을 따라온 압로는 동부여의 귀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도중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중반불공(中叛不貢)’이라는 기록을 통해 고구려에 예속된 바 있던 동부여가 배반해 조공을 하지 않으니, 광개토왕이 재차 정벌하여 그 지배권을 보다 강화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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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31)
- 각주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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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33)
이를 처음으로 연구한 학자는 1889년 일본 학자인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였다. 그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였다. 이후 일본 학자들은 이 기록을 『일본서기』에 보이는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방을 정벌하고 다스렸다’(한반도 남부경영설)는 기록 즉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 사실을 증명해주는 근거 사료로 활용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곧이어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의 식민지정책으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 측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남·북한 학계의 비판에 이어 198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 학계도 이 논쟁에 참여하였다(王健群, 1985). 한일정상회담에서 합의되어 발족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난 2010년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에게서 아직도 임나일본부와 연결하려는 주장이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이에 대해 4세기 말 5세기 초 당시 백제와 왜 사이에 있었던 군사협력 사실을 『일본서기』 편찬자가 천황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윤색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연구(홍성화, 2010)가 참조된다.
- 각주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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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35)
비문에서 판독된 글자는 1,775자가량이다. 건립된 지 1,600년 정도 되다 보니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었다. 특히 발견 당시 표면에 달라붙은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글자 훼손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광개토왕과 주변 국가 간의 관계를 기록한 제1면이다. 여러 국가가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후대 정치적 필요에 의한 인위적 훼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문에 대한 여러 종류의 탁본자료를 검토한 결과 해석 문제가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중에서도 영락 6년조 부분을 두고 해석 방식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바다를 건너온 주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였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정인보, 1955; 박시형, 1966), 극단적으로는 일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비문을 석회로 변조했다는 주장(이진희, 1972) 등도 제기되었다. 논란을 정리하면, 탁본을 어느 정도까지 신빙하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이를 위해 비문의 단편적인 글자 해석을 지양하고 비문의 문장구조를 파악하여 당시의 역사상과 부합하려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학계는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의 실체를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결국 신묘년 기사에서 훼손된 글자를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어떤 글자를 삽입해 복원해야 하는지 또는 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한·중·일 학계에서 당시의 역사상과 합리적으로 연결, 해석하기 위해서 다양한 주장이 제출되었고,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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