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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북조와의 관계

1. 북조와의 관계

1) 북위와의 관계 추이
고구려와 북위가 처음으로 교섭한 시기는 장수왕 13년(425년)이다[표 9번].주 001
각주 001)
146~151쪽 표의 9번 내용을 참고하라는 의미이다. 이하 동일하게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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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遣使如魏貢)”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위서(魏書)』에는 정작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일본인 연구자 중심으로 이 기록을 믿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위서』 고구려전에 장수왕이 435년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된 점, 사신 파견의 일반적 표현인 ‘견사입위조공(遣使入魏朝貢)’과 다르다는 점, 425년 당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북연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북연을 넘어 직접 북위에 조공하기 어려웠을 정황이 고려되었다(三品彰英, 1963; 武田幸男, 1989; 박정기, 2006).
이와 달리 한국 학계에서는 대부분 425년을 고구려와 북위의 첫 교섭으로 인정하고 있다(서영수, 1981; 지배선, 1998; 노태돈, 1999; 이성제, 2004; 박진숙, 2005; 장종진, 2011). 『삼국사기』 편찬자가 『위서』 외에 다른 사료를 참고했을 수도 있고(박진숙, 2005), 고구려가 북위에 처음 사신을 파견하면서 조공의 예가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에 『위서』에 누락되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지배선, 1998).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이미 422~424년에 고구려와 송이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표 5~7번], 고구려가 435년에 이르러서야 북위와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굳이 장수왕 13년 고구려와 북위의 첫 교섭 기사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당시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배경은 북위와의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치·외교적 의도(박진숙, 2005), 427년 평양 천도를 앞두고 북위의 실상 및 정세 파악을 위한 것으로 분석되었다(지배선, 1998; 장종진, 2011).
장수왕 13년 고구려와 북위 간에 첫 교섭이 있었더라도, 책봉 관련 기사라든지 구체적인 내용이 전하지 않아 두 나라 관계에 미친 영향을 알 수는 없다.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가 좀 더 진전된 것은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장수왕 23년(435년)이다. 그해 6월에 장수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나라의 휘(諱)를 알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태무제가 황실의 계보와 휘를 적어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으로 봉하였다[표 18번]. 북위의 사신 이오는 고구려 평양성 등을 방문한 후 돌아가 태무제에게 고구려의 지리적 조건과 풍속, 관호(官號) 등 그가 수집한 정세를 보고하였다(『위서』 권100). 같은 해 가을 장수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북위의 책봉에 감사를 표했다[표 19번].
고구려가 북위에게 나라의 휘를 알려달라고 한 것은 북위 황실의 계보와 이름을 알아 차후 고구려가 이를 피휘(避諱)하겠다는 의도였다. 문면상으로만 보면 고구려가 북위를 인정함으로써 북위 주도의 국제질서에 따르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武田幸男, 1989; 이성제, 2005). 그러나 고구려의 향후 대북위 외교 행보를 살피면, 장수왕이 당시 국제관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추진한 전략적 외교술로 파악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지배선, 1998; 박정기, 2006). 당시는 북위가 북연 정벌을 앞둔 직전이었다. 실제로 태무제가 장수왕을 책봉한 지 이틀 만에 북위는 4만 대군을 이끌고 북연을 쳐들어갔다(『자치통감』 권122).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와 북위 측의 장수왕 책봉은 북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려가 이때 북연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을 수도 있고(이성제, 2005), 북위를 안심시킴으로써 향후 위급상황 시 대처하기 위한 전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박정기, 2006; 박세이, 2010). 북위 태무제가 책봉을 위해 고구려에 직접 사신을 파견한 것도 다른 나라와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살필 때 흔한 예는 아니다. 보통은 책봉을 요청한 사신이 귀국할 때 그들을 통해 책봉조서를 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김종완, 1995).
북위가 장수왕을 책봉한 호칭의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는 요해(遼海) 지역주 002
각주 002)
요해는 ‘광대한 사막이 바다와 같이 펼쳐져 있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요하(遼河)의 서부 상류인 내몽고자치구의 시라무렌하 유역을 가리킨다. 다만 사서에 따라서 요하동쪽의 요동평야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이재성, 2018, 『고구려와 유목민족의 관계사 연구』, 소나무,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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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한 것이다(지배선, 1998; 노태돈, 2006). ‘정동장군(征東將軍)’은 장군호로서 북위의 관품으로는 정2품에 해당한다.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도 동이에 대한 고구려의 관할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김종완, 1995; 노태돈, 1999; 2006). 특히 요하 동쪽 동이의 여러 나라, 곧 북방의 부여부터 남으로 백제와 신라까지 포괄한다(윤용구, 2005). 물론 백제와 신라가 실제 고구려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상징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고구려가 북위로부터 435년에 받은 책봉호는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하고 요해 이동 지역의 패자로 인정한 결과물이다(노태돈, 1999; 임기환, 2003). 다만 북위의 책봉이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한 조치가 아니라 북연 공략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제한해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이성제, 2005; 2015). 436년부터 북연을 둘러싸고 전개된 고구려와 북위의 대립관계를 고려하면, 고구려가 북위로부터 받은 책봉호의 의미를 표현에 얽매여 고정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북위의 대북연 정책에서 고구려의 역할을 고려한 외교적 조치 정도로 생각하면 무난하다(박진숙, 2005).
 
2) 북연의 건국과 북위의 공세
407년 풍발(馮跋)이 후연의 마지막 왕 모용희(慕容熙)를 살해하고 고운(高雲)을 옹립함으로써 북연(北燕)을 건국하였다. 고운은 할아버지대에 전연(前燕)에 끌려간 고구려계 인물이었다. 그는 후연의 두 번째 왕 모용보(慕容寶)의 양자가 되어 모용씨 성을 받아 모용운(慕容雲)으로 불렸다. 북연왕이 고구려 출신 인물이었으므로 초창기 두 나라는 서로 사신을 파견하며 우호관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고운이 409년 10월에 부하들에게 살해되면서 북연의 권좌는 풍발(409~431년)을 거쳐 그의 동생 풍홍(馮弘, 431~436년)으로 이어졌다.
북연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막북의 유연과 국혼을 맺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서방의 하(夏)뿐만 아니라 남방의 송과도 교류하였다(『북사』 권98; 『위서』 권97; 『자치통감』 권116). 북위에게 동쪽 변경을 위협하는 북연의 존재는 점차 눈엣가시로 부각되었다. 이에 418년 5월 북위는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북연을 공격하였다.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 和龍, 遼寧省 朝陽)까지 이르렀는데, 풍발의 농성전 때문에 북연의 백성 1만 호를 약탈하고 데려오는 데 그쳤다(『자치통감』 권118). 이후 북위가 정복의 우선 순위를 하로 둠에 따라 북위의 북연 공격은 432년까지 소강상태를 맞았다. 그러다 태무제 즉위 후 431년 서방에서 북위를 위협했던 하의 혁련정(赫連定)이 토욕혼(吐谷渾)에게 사로잡혀 북위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로써 하는 멸망하였고, 북위는 북연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하였다.
태무제는 432년 5월 수도인 평성(平城: 山西省 大同) 남쪽 교외에서 군사를 정비하였고, 6월에 공격을 개시하면서 좌복야(左僕射) 안원(安原) 등을 고비사막 남쪽에 배치해 유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7월 태무제가 북연의 수도 화룡에 이르자 석성(石城: 遼寧省 凌原) 태수 이숭(李崇)이 이끄는 군 등 10개 군이 북위에 항복하였다. 태무제는 북연 백성 3만 명을 징발해 주위에 해자를 판 후 왕성을 포위하였다. 8~9월 벌어진 여러 차례 전투에서 북위가 승기를 잡았지만, 화룡성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태무제는 북연의 영구(營丘)·요동(遼東) 등 6군의 백성 3만여 호를 유주(幽州: 北京)로 이주시켰다. 이때 북연의 상서 곽연(郭淵)이 풍홍에게 딸을 북위에 바쳐 부용국이 될 것을 권유하였다. 국가의 존립에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로 피해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홍은 이를 거절하였다. 풍홍은 오히려 주수지(朱脩之)를 송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무제는 북연 원정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끝내 북연의 수도를 빼앗지 못한 채 11월에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위서』권4상; 『자치통감』 권122). 432년에 북위가 북연 원정을 장기전으로 치렀음에도 멸망까지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유연에 의한 기습공격을 우려한 측면이 컸다. 또한 서쪽에 북량과 토욕혼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지배선, 1998).
북위 태무제의 북연 공격 직후인 같은 해 12월, 풍홍이 정비 왕씨(王氏)를 폐위시켰다. 이에 세자였던 풍숭(馮崇)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우려해 두 아우를 데리고 북위로 투항하였다. 풍홍은 곧바로 장수 봉우(封羽)를 보내 요서의 풍숭을 포위하라고 명했다. 태무제도 433년 1월에 탁발건(拓跋健)을 보내 풍숭을 구원하도록 했다. 같은 해 6월 탁발건은 화룡을 공격하였고, 장군 누발(樓㪍)이 별도로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범성(凡城: 河北省 平泉)을 포위해 그곳을 지키던 봉우의 항복을 받았다. 그 사이 태무제는 433년 2월에 풍숭을 ‘가절 시중 도독유평이주 동이제군사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유평이주목(假節 侍中 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車騎大將軍 領護東夷校尉 幽平二州牧)’으로 삼고, ‘요서왕(遼西王)’으로 책봉하였다(『위서』 권97; 『자치통감』 권122).
풍숭이 태무제에게 받은 장군호 ‘거기대장군’은 북위 초 관품상 분명하지 않지만 태화 23년(499년)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종1품에 해당한다. 북위 역사상 외국 왕에게 준 최고의 장군호이며, 435년 장수왕이 북위로부터 받았던 ‘정동장군’보다도 한 등급 높다(김종완, 1995). 풍숭은 책봉호를 통해 태무제로부터 유주와 평주(平州) 나아가 동이를 포괄하는 지역의 군사권을 위임받았다. 북위가 풍숭에게 이와 같은 대우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북연 세력의 분열을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전략적 측면이 깔렸을 것이다(지배선, 1998). 요서는 중원 지역과 한반도·만주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북위로서는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고 동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요서를 안정적으로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북위는 풍숭 세력을 이용해 요서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북연 공격에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이성제, 2005; 박한제, 1988; 김종완, 1995; 2002).
434년에 들어 북연 왕 풍홍은 북위에 대한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바꾸었다. 풍홍은 1월 북위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무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풍홍은 3월에 다시 상서 고옹(高顒)을 보내 표문을 올리면서 번국(藩國)을 자칭하고 죄를 받겠다고 했다. 급기야 막내딸까지 태무제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또한 북연에 21년간 잡혀 있었던 북위의 사자 우십문(于什門)을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무제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태무제는 북연의 신속을 상징하는 확실한 인질로써 태자 풍왕인(馮王仁)의 입조를 요구하였다. 이는 북연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안이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유훈(劉訓)이 태자를 빨리 북위로 보내야 한다며 풍홍에게 건의했지만, 화가 난 풍홍은 유훈을 죽여버렸다. 6월 태무제는 무군대장군 탁발건(拓跋健)을 보내 북연을 다시 공격하였다(『위서』 권97; 『자치통감』 권122; 『십육군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 권100).
풍홍은 결국 송에 사자를 보내 번국임을 자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이에 435년 1월 송 문제(文帝, 424~453년)는 풍홍을 연왕(燕王)으로 책봉하였다(『송서』 권5; 『자치통감』 권122). 송도 북위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북연과의 제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같은 해 3월 풍홍은 대장 탕촉(湯燭)을 북위에 보내 공물을 바치고 태자 풍왕인에게 병이 있어 아직 보내지 못했다며 핑계를 댔다. 북위의 공격을 늦추기 위한 지연술이었다. 풍홍은 4월에 곧바로 우위장군 손덕(孫德)을 송에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위서』 권4상; 『자치통감』 권122; 『십육국춘추집보』 권100). 물론 송이 북연에게 군사를 내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해 풍홍의 의도는 좌절되었고, 결론적으로 북위만 자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3) 북연을 둘러싼 국제분쟁
북위 태무제는 435년 6월에 고구려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직후[표 18번] 표기대장군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 5명의 장군에게 4만 명의 군을 주어 북연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와의 조공·책봉이 북위의 북연 공격 결행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이성제, 2004). 7월에 낙평왕 비 등은 북연의 수도 화룡에 도착하였다. 풍홍은 술과 고기로 북위의 군사를 달래며 갑옷 3,000벌을 바쳤다. 북위군은 남녀 6,000명을 포로로 삼아 귀환하였다(『위서』 권4상; 『자치통감』 권122). 북위의 잦은 침략에 북연이 위태롭게 되자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해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11월 상서 양이(陽伊)를 은밀히 고구려에 보내 맞이해주기를 청하였다(『자치통감』 권122; 『십육국춘추집보』 권100). 한편으로는 북위의 침략을 늦추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436년 2월 풍홍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태자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태무제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만시지탄이었다. 태무제는 풍홍의 제안을 거절하고 10여 명의 사자를 고구려 등 여러 나라에 보내 북연 정벌을 통보하였다(『위서』 권4상; 『자치통감』 권123). 북연 원정 기간 동안 북위를 넘보지 말고 북연을 돕지 말라는 협조 요청이자 경고의 메시지였을 것이다(三崎良章, 1982).
결국 같은 해 4월에 북위의 아청(娥淸)과 고필(古弼)이 북연의 백랑성(白狼城: 遼寧省 建昌 남쪽 大凌河 상류)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장수왕은 갈로(葛盧)·맹광(孟光)과 수만 명의 군사주 003
각주 003)
『삼국사기』·『자치통감』·『십육국춘추집보』에는 고구려가 보낸 군사의 규모를 ‘數萬’이라 했고, 『위서』에는 ‘步騎二萬’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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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북연의 양이를 따라 수도 화룡에 가서 북연 왕 풍홍을 맞이하였다. 고구려군은 화룡 동쪽 임천(臨川)에 주둔하면서 화룡성을 둘러싸고 북위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화룡성 내에는 친북위파와 친고구려파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 같다. 먼저 상서령 곽생(郭生)이 화룡성의 서문을 열어 북위군을 들이려 했다. 그러나 북위군은 의심하여 화룡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북연 내부에서 북연 정권의 향방에 대한 내분이 있었지만, 풍홍 중심의 친고구려파에 비해 친북위파는 북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소수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곽생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풍홍을 공격하였다. 이에 풍홍은 화룡성 동문을 열어 고구려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고구려군은 곽생군을 물리쳤다. 이어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해진 군복을 벗게 하고 무기고에 있는 예리한 무기를 나누어주자 성 안을 크게 약탈하였다.
5월에 풍홍이 가호(家戶)와 백성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때 부인들은 갑옷을 입혀 행군 가운데 두고, 양이 등은 정예병을 통솔해 바깥에 배치하였다. 갈로와 맹광의 기병이 맨 뒤에 섰는데 방형의진을 한 군대 앞뒤 행렬이 80여 리나 되었다고 한다. 북위 고필(古弼)의 부장 고구자(高苟子)가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필이 술에 취해 칼을 뽑아 고구자를 제지하면서 풍홍은 무사히 고구려로 갈 수 있었다. 태무제는 곧바로 산기상시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북연 왕을 보낼 것을 촉구하였다(『위서』 권4상; 『삼국사기』 권18 장수왕 24년; 『자치통감』 권123; 『십육국춘추집보』 권100).
435년 4~5월 북연을 둘러싼 고구려와 북위 간 일촉즉발 긴장 국면에서 북위군의 행보는 의아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군의 작전이 전격적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북위군이 당황하여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이성제, 2005; 박세이, 2010). 또한 군사적인 면에서 열세인 까닭에 고구려군의 위세에 눌렸을 가능성도 있다(지배선, 1998; 박세이, 2010). 다만 북위군과 직접 교전할 수 있는 상황하에서도 직접적 충돌을 피한 것으로 볼 때 고구려도 북위와의 정면 대결을 원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게 보면 고구려의 북연 출병과 북연의 민(民) 쇄환을 고구려의 요서 진출과 관련짓기는(지배선, 1998) 무리라고 생각한다. 고구려군은 애초부터 풍홍 세력과 북연민의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고구려군의 행보는 북위에 대한 무력시위 성격 정도로 해석된다. 장수왕은 북연왕을 확보함으로써 북연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북위를 견제하는 데도 유효했을 것이다(이성제, 2005; 시노하라 히로카타, 2009).
고구려의 북연민 쇄환 배경을 과거 전연과 후연에게 끌려갔던 고구려인 포로들에 대한 재송환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박세이, 2010). 북연민의 출신과 구성에 대한 세부 정보는 알 수 없겠지만, 고구려가 다수의 북연민을 확보함으로써 얻은 국익은 상당했을 것이다. 『십육국춘추집보』에 따르면, 풍홍과 함께 고구려에 온 백성의 규모는 1만 호이다. 1호당 5명씩만 계산해도 5만 명에 달한다. 군사력과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박세이, 2010; 최일례, 2013).
실제로 백제 개로왕이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에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고구려)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백제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과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삼국사기』 권25 개로왕 18년; 『위서』 권100). 여기서 ‘풍씨’가 곧 북연의 풍홍 세력이고 ‘남은 사람들’이란 함께 온 1만 호를 의미한다. 물론 개로왕이 보낸 외교문서이므로 백제 입장에서 표현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풍홍과 북연민 흡수 후 국력이 강해졌고, 그것이 장수왕의 남방 진출과 대백제 관계에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장수왕은 풍홍과 북연민 확보가 일단락된 그해 9월 사신을 북위에 보내 풍홍과 함께 태무제의 덕화(德化)를 받겠다는 표문을 올렸다[표 23번]. 435년에 맺어진 기존의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자는 타협적 제안이었다(이성제, 2005). 그러나 신하로서 북위를 섬기겠다면서도 태무제가 요구한 풍홍의 소환은 사실상 거절하였다. 고구려는 북위 황제와 장수왕·풍홍의 군신관계보다 장수왕과 풍홍의 상하관계를, 즉 북위의 예적질서보다 고구려의 국제질서가 우선임을 주장한 것이었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9). 이에 태무제는 고구려가 조서를 어겼다며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농우(隴右: 甘肅省 일대)의 기병을 동원하려 하자, 낙평왕 비가 농우 지역이 새로 편입된 곳이니 우선은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주어야 하고, 북연의 화룡을 안정시킨 후에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태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위서』 권17; 『자치통감』 권123).
장수왕은 재위 25년(437년) 2월 다시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표 24번]. 전해 9월에 사신을 보낸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북위와의 긴장 국면을 해소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태무제는 낙평왕 비의 건의를 수용해 437년 2월에 몸소 유주로 갔고, 3월에 남평왕(南平王) 혼(渾)을 보내 화룡을 지키게 했다(『위서』 권4상; 『자치통감』 권123).
장수왕은 풍홍 집단을 우선 평곽(平郭: 遼寧省 蓋州)에 두었다가 다시 북풍(北豐)으로 옮겼다. 북풍을 개주(蓋州) 인근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稻葉岩吉, 1913), 풍홍 집단의 도주를 막기 위한 차원의 이주일 것이므로 태자하(太子河) 상류에서 환인~ 집안으로 이어지는 요동 내지(內地)로 파악함이 타당할 듯하다(임기환, 1998; 이성제, 2012). 풍홍은 평소 고구려를 업신여기며 행동을 함부로 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의 측근을 빼앗고 태자 왕인을 인질로 삼았다. 급기야 풍홍은 438년 3월 남조(南朝) 송에 사신을 보내 망명을 요청하였다. 송 문제는 곧바로 왕백구(王白駒)에게 7,000명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장수왕에게 풍홍에게 노자를 마련해 주어 속히 송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수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못 가도록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를 보내 왕백구 군대가 당도하기 전에 북풍에 있는 풍홍과 자손 10명을 살해하였다. 풍홍이 죽은 후 북풍에 도달한 송의 군대는 고구려군과 교전하였고, 그 결과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이에 장수왕은 급히 군대를 보내 왕백구를 사로잡았고, 그를 송으로 보내버렸다. 송 문제는 왕백구를 잠시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송서』 권97; 『삼국사기』 권18 장수왕 26년). 고구려와 송이 양국 관계가 파탄 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적절히 타협한 셈이다(노태돈, 1999). 439년 송 문제가 북위를 토벌하고자 고구려에 군마(軍馬)를 요청하자 장수왕이 말 800필을 보내 준 사실이[표 26번] 당시 두 나라의 대외관계 향방을 시사한다.
송이 풍홍을 영입하려는 목적은 고구려를 위압하고 북위를 측면에서 견제할 수 있는 세력 근거지를 요동 지역에 구축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노태돈, 1999; 2006). 이와 달리 송이 영접이라는 군사적 부담이 적은 조건으로 고구려와 협조를 도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7,000명이라는 비교적 적은 군사를 보낸 이유가 고구려와 풍홍의 갈등이 고구려-송 관계에 비화될 사태를 방지하려는 것으로 파악하였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9). 한편 송이 풍홍 영입 시도와 출병을 통해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긴장 국면으로 유도하려는 전략적 측면을 환기한 견해도 있다. 그러나 송의 의도와 다르게 고구려가 풍홍을 살해함으로써 북위와의 분쟁 원인을 사전에 제거했다는 것이다(이성제, 2005). 이와 달리 고구려가 풍홍을 대북위 관계 개선에 활용하려면 죽이지 않고 넘겨주는 것이 더 타당하다면서 오히려 북위와의 관계 악화를 감수한 조치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풍홍을 살해했던 까닭은 고구려에 대한 불의와 배신을 응징하고 대송 관계에서의 마찰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9).
장수왕은 439년 11~12월 연이어 두 차례에 걸쳐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표 27번]. 이후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462년에 재개될 때까지 오랜 기간 단절되었다. 장수왕이 439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낸 이유는 풍홍의 살해를 북위에 알림으로써 두 나라 간 긴장 국면을 완화하거나 개선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江畑武, 1968; 박진숙, 2005). 또한 북위의 반응을 타진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노태돈, 1999; 김종완, 2002). 이와 달리 장수왕이 풍홍의 살해를 북위와의 관계 개선책으로 활용하고자 했다면 사건 발생 후 곧바로 사신을 보내야 했을 거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풍홍이 죽고 1년 8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장수왕이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까닭은 다른 의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고구려의 대송 관계와 이때부터 46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낼 때까지 양국 관계가 단절된 것을 볼 때 오히려 북위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통보하기 위한 행보로 파악하였다(이성제, 2005).
 
4) 유연의 동향과 국제관계
유연은 4세기 초부터 6세기 중반까지 몽골초원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유목국가이다. 스스로 ‘유연’이라 칭했는데, 북위 태무제는 그들이 무지하여 상태가 벌레(蟲)와 비슷하다면서 ‘연연(蠕蠕)’으로 낮추어 불렀다. 유연은 5세기 초 사륜(社崙, 402~410년) 가한(可汗) 때에 몽골초원을 통일하였다. 그 결과 동쪽으로는 조선(朝鮮), 서쪽으로는 언기(焉耆: 新疆省), 북쪽으로는 사막을 건너 한해(瀚海: 바이칼호), 남쪽으로는 고비사막과 접경하는 광활한 지역을 다스렸다(『위서』 권103; 『북사』 권98).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후 유연과 북위는 장성(長城)을 경계로 적대관계를 지속하였다. 북위는 유연을 전멸시키려 하기보다는 그들 사이에 혼란을 조성함으로써 북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북위 기마병은 유연의 초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백성과 가축을 빼앗아 왔다. 북위는 사로잡은 유연의 민을 변경의 요충지에 군대로 주둔시켜 초원을 통제하려 했다(토마스 바필드, 2009).
유연의 동향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위뿐만 아니라 고구려 및 송과도 관련되었다. 북위 태무제가 450년 4월 송 원정 때 송 문제에게 보낸 국서에서 “그대는 지난날 북으로 예예(芮芮: 유연)와 통하고, 서로는 혁련(赫連: 하), 몽손(蒙遜: 북량), 토욕혼과 연결했으며, 동으로는 풍홍(북연) 및 고구려와 연합하였다”고 말했다(『송서』 권95). 그리고 463년 송 효무제(孝武帝, 453~464년)가 장수왕에게 보낸 조서에 따르면, “고구려왕 낙랑공 연(璉)은 대대로 충의로 섬겨 바다 밖의 번병(藩屛)이 되었다. 짐의 조정에 충성을 다해 포악 잔인한 무리(북위)를 없애는 데 뜻을 두었고, 사막의 나라(유연)에 통역하여 짐의 뜻을 잘 펼쳤다”고 되어 있다. 개로왕이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 말과 행동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인물의 대명사)가 번국으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 송)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蠕蠕: 유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면서 왕법을 능멸하려 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삼국사기』 권25 개로왕 18년; 『위서』 권100).
위의 세 기록을 종합해 보면 유연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멀리 남쪽에 있는 송과도 우호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연과 송의 교섭에 고구려가 중간 매개 역할을 한 것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들 세 국가가 공조하면서 일종의 반북위 연합전선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송서』의 기록을 감안할 때 5세기 중반보다 앞선 시점부터 5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유연은 늦어도 430년대 말에는 교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노태돈, 1999). 북위와 유연의 지속적인 갈등관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가 국제관계에서 이들 사이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위와 유연의 관계 추이를 살필 때는 이러한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422년 5월 송 무제 유유(劉裕)가 사망하였다. 이에 북위 명원제(409~423년)가 그해 9월부터 송으로의 원정을 단행하자, 그 틈을 노린 유연이 423년 1월에 북위의 변경을 쳐들어왔다(『위서』 권3; 『자치통감』 권119). 북위의 대남방 진출이 처음부터 유연에 의해 제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연의 가한은 대단(大檀, 414~429년)이었다.
태무제가 423년에 즉위하자 북위는 유연의 침략에 대해 수동적 방어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424년 8월 유연의 대단이 6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운중(雲中: 내몽고자치구 和林格爾 서북)을 쳐들어왔을 때 태무제가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장손한(長孫翰) 등을 보내 유연을 선제공격했는데, 북쪽으로 달아난 유연을 추격해 크게 포획하고 돌아왔다. 태무제는 425년에도 대군을 동원해 유연을 정벌하였다. 북위 군대가 사막 남쪽에 이르렀는데, 경무장을 한 기병이 15일분의 식량만 가지고 사막을 종단해 유연을 토벌하였다. 유연의 부락은 놀라서 북쪽으로 도망갔다. 427~428년에는 유연이 연이어 침공하였다. 특히 428년 8월에는 대단이 아들을 보내 기병 1만 명으로 장성을 노략질하고 달아났다. 태무제의 추격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429년 4~5월에 태무제는 남쪽 교외에서 군사를 단련한 후 최호(崔浩)의 계책에 따라 대규모로 유연 원정군을 꾸려서 떠났다. 이에 대단의 무리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때의 승리로 유연의 부락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산과 계곡에 숨어 지냈고, 가축들이 들에 널려도 거두어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위서』 권103; 『북사』 권98; 『자치통감』 권120·121).
대단은 부락이 쇠약해지자 병이 나서 죽고, 아들 오제(吳提, 429~444년)가 다음 가한을 이었다. 오제는 431년 6월 북위에 조공하였다. 유연의 가한으로서는 처음으로 북위에 우호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434년 2월, 태무제와 오제는 각각 자신의 딸과 누이를 보내며 혼인동맹을 맺었다. 북위로서는 436년 북연 정벌을 앞둔 외교적 정지작업의 의도가 짙었다(박한제, 1988; 김종완, 1995). 436년 5월 북연이 멸망하자 북위와 유연의 일시적 화친관계도 자연스럽게 변화하였다. 그해 11월 오제가 먼저 화친을 끊고 북위의 변경(長成)을 공격하였다. 438년 5~7월 태무제는 오원(五原: 내몽고자치구 包頭)을 거쳐 유연을 쳐들어갔다. 그러나 유연 세력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오히려 당시 고비사막 이북(漠北)에 큰 가뭄이 들어 물과 풀이 없어서 북위의 군사와 군마가 다수 죽는 피해만 입었다(『위서』 권103; 『북사』 권98; 『자치통감』 권122·123).
439년 태무제가 원정을 떠나 북량을 멸망시킨 틈을 이용해 유연이 다시 침략하였다. 태무제는 장락왕(長樂王) 계경(稽敬) 등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고비사막 이남(漠南)에 주둔케 해 유연에 대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제가 침입해 북위의 수도 서쪽 근방에 이르렀다. 마침 오제의 형 걸렬귀(乞列歸)가 음산(陰山: 내몽고자치구 중부) 북쪽에서 패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북위는 유연의 장수 500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태무제는 443~444년에도 막남에 출정하여 유연을 크게 격파하였다. 결국 오제는 멀리 도망갔다(『위서』 권103; 『북사』 권98; 『자치통감』 권123).
오제가 죽고 토하진(吐賀眞, 444~450년)이 즉위하였다. 태무제가 446년 8월 토욕혼 원정에 나서면서 유연과의 관계도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있었다. 449년 태무제는 두 차례에 걸쳐 유연 정벌을 단행하였다. 토하진은 완패한 후 멀리 달아났다. 이때 북위는 유연의 백성들과 가축 100여 만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유연이 쇠약해져 자취를 감추었고 북위를 쳐들어오지 않아 변경의 경계를 늦추었다고 전한다(『위서』 권103; 『북사』 권98; 『자치통감』 권125).
450년 4월 태무제는 송 문제에게 보낸 국서에서 송이 지난날에 유연, 하, 북량, 토욕혼, 북연, 고구려와 연합했음을 상기시켰다. 당시에 하, 북량, 북연은 이미 멸망했고, 토욕혼의 세력도 약해져 있었다. 이에 태무제는 “무릇 이 몇 나라는 내가 거의 멸망시켰다. 이로써 보건대 네가 혼자 어찌 설 수 있단 말인가?”라며 겁박하였다(『송서』 권95). 이에 7월 송 문제는 선제적인 북벌을 단행하였다. 9월 태무제도 송 원정에 나섰다. 태자 황(晃)에게는 사막 남쪽에 주둔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북위군은 12월에 송군을 크게 이기고 장강(長江) 북쪽까지 진출해 송의 수도 건강(建康: 南京)을 위협하였다. 태무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회군하였다(『자치통감』 권125·126).
태무제가 남방으로 장거리 원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유연 세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박한제, 1988). 그런데도 북위는 송 원정에 앞서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는 만전을 기했다. 그래서 태무제가 451년 초 회군한 주된 이유를 송과 장기전을 벌일 경우 염려되는 유연의 동향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주 004
각주 004)
이외에 식량 부족 및 전염병 창궐에 따른 북위 군대의 사기 저하, 태자 탁발황(拓拔晃)의 반란으로 인한 본국의 혼란한 정세도 북위군 회군의 배경으로 지적되었다(최진열, 2011; 백다해, 2016).
닫기
실제로 태무제는 북위로 돌아간 그해 7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음산에 행차하였다. 이는 유연에 대한 무력시위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노태돈, 1999).
이렇듯 유연의 동향은 북위의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북위를 둘러싸고 있던 유연, 고구려, 송의 국제관계는 기본적으로 공조적 성격이 짙음을 여러 기록이 전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북위와 송, 그리고 백제의 관점에 불과하다. 북중국의 강자 북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를 상대해야 하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노골적인 반북위 외교노선을 지속하기에 부담이 따랐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대송 외교를 검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비로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국제관계가 드러날 수 있다.

  • 각주 001)
    146~151쪽 표의 9번 내용을 참고하라는 의미이다. 이하 동일하게 처리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요해는 ‘광대한 사막이 바다와 같이 펼쳐져 있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요하(遼河)의 서부 상류인 내몽고자치구의 시라무렌하 유역을 가리킨다. 다만 사서에 따라서 요하동쪽의 요동평야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이재성, 2018, 『고구려와 유목민족의 관계사 연구』, 소나무, 277쪽). 바로가기
  • 각주 003)
    『삼국사기』·『자치통감』·『십육국춘추집보』에는 고구려가 보낸 군사의 규모를 ‘數萬’이라 했고, 『위서』에는 ‘步騎二萬’이라고 기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외에 식량 부족 및 전염병 창궐에 따른 북위 군대의 사기 저하, 태자 탁발황(拓拔晃)의 반란으로 인한 본국의 혼란한 정세도 북위군 회군의 배경으로 지적되었다(최진열, 2011; 백다해, 2016).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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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조와의 관계 자료번호 : gt.d_0004_001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