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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남조와의 관계

2. 남조와의 관계

1) 동진과의 외교
장수왕은 즉위 이듬해인 413년 동진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쳤다. 이에 동진 안제(安帝)가 장수왕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使持節 都督營州諸軍事 征東將軍 高句麗王 樂浪公)’으로 봉하였다[표 1번]. 장수왕의 사신 파견은 412년 10월에 죽은 광개토왕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를 알리기 위함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다. 동진과 343년 이후 70년 만에 교섭했음을 감안하면, 장수왕 즉위를 계기로 고구려가 새로운 외교적 모색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堀敏一, 1993).
특히 자백마까지 바치는 공을 들였음이 주목된다. 붉은색과 흰색의 털이 뒤섞여 있는 자백마는 고구려가 유목국가들과 농목교역을 통해 확보한 귀한 말이었다(이정빈, 2014; 이동훈, 2019). 실제로 전연 모용외(慕容廆)와 모용황(慕容皝)이 자색마를 애용했는데, 생김새가 빼어나고 빠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진서』 권110). 송 안연지(顔延之)가 441년에 지은 〈자백마부(赭白馬賦)〉(『문선(文選)』 권16)에서도 제왕의 수레를 끄는 말로 사용된 자백마를 칭송하고 있다. 〈자백마부〉는 안연지가 자백마의 죽음에 대해 송 문제를 대신해 지은 애도시이다. 문제는 이 말을 무제 유유에게 받았고, 유유는 418년에 동진 조정에서 받았다(양승덕, 2020). 그렇다면 장수왕이 413년 동진에 바친 자백마가 동진 안제부터 유유와 송대까지 황제의 말로써 애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설사 같은 말이 아닐지라도 자백마의 특출함과 고귀함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살피기에는 충분하다.
외교적 조공품으로써 자백마의 가치를 고려할 때, 장수왕이 413년 동진에 사신을 파견한 까닭은 광개토왕의 부고와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것에서 나아가 더 고차원적인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가 광개토왕대에 차지했던 요동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한 외교적 포석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고구려가 요동을 지키기 위해서는 요서 지방이나 산동반도 방면에 유력한 거점을 확보해야 하므로 산동반도를 점령한 동진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김진한, 2012; 2020). 동진의 입장에서 유유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고구려 사신의 파견을 요청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택민, 2012).
장수왕은 동진에 자백마를 보내며 극진한 외교를 한 결과 안제로부터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을 책봉 받았다. 중국사에서 ‘사지절’은 장군이 군주로부터 위임받은 독자적 권한을 의미하며, ‘도독~제군사’는 그 권한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군사지구를 규정한다. 도독은 일차적으로 군사적 기능을 가지면서 해당 지역 백성에 대한 정치적 통치 권한을 겸임하였다. 장군호 정동장군은 송의 관품으로 제3품에 해당한다(김종완, 1995; 2004; 박찬우, 2015). 곧 장수왕이 동진 황제로부터 영주(營州: 朝陽)에 대한 군사권을 위임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북조의 영역이어서 남조인 동진이 관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실제 당시 영주는 북연의 영역이자 수도 화룡성이 있는 중심지였다. 곧 이들 책봉호는 실제 관직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없는 허직인 셈이다. 낙랑공도 고구려의 지배 영역 일부가 과거 중국 군현이었던 낙랑군 지역이라는 사실을 연상시키는 허봉(虛封) 작(爵)일 뿐이다(노태돈, 2006). 그렇다면 동진 안제가 현실적으로 고구려의 지배권이 미칠 수 없는 지역에 대한 군사권을 위임한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향후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관철시켜 북조를 견제하고, 그럼으로써 남조의 지배 영역이 간접적으로나마 확대하기를 기대한 것으로 해석된다(김종완, 2004).
장수왕이 동진 안제에게 책봉을 받은 지 3년이 지난 416년, 안제는 백제로 사신을 보내 전지왕(餘映, 405~420년)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으로 봉하였다[표 2번]. 그런데 안제의 책봉사(冊封使) 전에 백제의 조공사(朝貢使)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416년 이전 가장 가깝게 백제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한 시기는 406년 2월이다(『삼국사기』 권25 전지왕 2년). 전지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한 의도하에 파견된 듯하다. 406년 백제의 조공 이후 동진 측의 책봉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416년 동진의 책봉사는 406년 백제 조공에 대한 화답으로 봄이 자연스럽다. 다만 416년 직전 백제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양서』 백제전에 “의희 연간(405~418년) 백제왕 여영이 사신을 파견해 생구(生口)를 바쳤다”고 되어 있음이 참고된다(박현숙, 2017).
전지왕은 동진과의 조공·책봉 외교를 통해 국내에서는 국왕의 위세를 드러내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을 테고, 대외적으로도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박현숙, 2017).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의 외교전은 남조 동진을 둘러싼 시기부터 경쟁적으로 전개되었다. 자연스럽게 동진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는 바닷길의 확보가 관건이었다.
한반도에서 동진의 수도 건강까지의 경로는 한강 하구-황해도 남부-산동반도 남부-강소성-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황해 중부 횡단항로’로 추정된다(임동민, 2016). 백제는 386~406년까지 20여 년 동안 동진과 교섭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한강 하류와 황해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06년과 416년에 재개된 백제의 대동진 외교는 화성 일대에서 출발하여 덕적군도를 경유하는 새로운 바닷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임동민, 2016). 이와 같은 고구려와 백제의 남조로의 사신 파견과 외교전은 송이 건국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2) 대송 관계의 추이와 배경
송이 건국된 420년부터 461년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대송 교섭의 전체적 빈도와 동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표 참조]. 고구려는 423년, 424년, 436년, 438년, 439년, 441년, 443년, 451년, 453년, 455년, 458년, 459년, 461년 모두 13회에 걸쳐 송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역으로 송은 고구려와 420년, 422년, 424년, 438년, 439년 5회 교섭하였다. 그나마 420년과 422년의 책봉이 송의 사신 파견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3회만 사신을 파견한 셈이 된다. 백제는 송에 424년, 429년, 440년, 443년, 450년, 457년, 458년 모두 7회 사신을 보냈다. 반대로 송은 백제와 420년, 425년, 430년 3회 교섭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420년 책봉이 송 측의 일방적인 것이었다면 2회만 사신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계 수치로 볼 때 대송 외교의 빈도는 고구려가 13회로 백제의 7회보다 두 배 가까이 더 많았다. 남조 국가들과의 외교는 백제가 더 빈번했을 것이라는 선입관과 어긋나는 부분이다. 곧 5세기 초·중반의 대송 외교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왕들(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보다 적극적으로 주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대송 외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갔음도 시사받을 수 있다. 특히 고구려 대송 외교의 빈도와 동향이 특징적이다. 고구려와 송의 관계 추이 및 사신 파견의 배경과 의미를 진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20년 6월 동진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은 유유가 송의 첫 번째 황제(武帝, 420~422년)가 되었다. 송 무제는 즉위한 다음 달 곧바로 장수왕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使持節 都督營州諸軍事 征東大將軍 高句麗王 樂浪公)’으로 봉하였다[표 3번]. 413년 동진 안제로부터 받은 책봉호와 같은데, 장군호만 정동대장군(2품)으로 한 등급 승격되었다. 이러한 책봉은 고구려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송이 신왕조 개국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사신 파견 없이 일방적으로 행한 것이다(坂元義種, 1978; 김종완, 1995; 박윤선, 2008; 박현숙, 2017).
무제는 장수왕과 동시에 전지왕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봉하였다[표 4번]. 그런데 당시 백제왕은 전지왕이 아닌 구이신왕이었다. 이는 송이 백제의 부고사(訃告使)를 받지 않았고, 책봉 과정에서 실제 사신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송은 전 왕조가 행한 책봉을 추인하고 장군호만 높여주는 진호(進號) 형식을 취했다. 개국을 기념하는 책봉의 경우 모두 진호 형식이었다(김종완, 1995; 2002). 무제의 책봉은 신왕조의 정통성을 알리며 과거 동진의 책봉을 받은 나라들의 이탈을 막고 송의 책봉체제 안에 계속 포섭하려는 의도하에 행해졌을 것이다(김철민, 2016).
422년 송 소제(少帝, 422~424년)는 장수왕에게만 다시 산기상시와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의 책봉호를 더해 주었다[표 5번]. 이는 고구려의 조공 사신이 오기도 전에 단행된 것으로, 송이 개국 초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평주의 중심 치소는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북쪽의 비여성(肥如城)이었다(『위서』 권106). 송이 북위의 관할권하에 있었던 평주에 대한 군사적 권한을 장수왕에게 위임한 것은 북위에 대한 외교적 견제를 기대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종완, 2002; 임기환, 2003; 김철민, 2016). 송 소제가 재위 시기 내내 산동과 하남 방면에서 북위의 남침에 시달렸음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송 소제의 정치적 기반이 약해 내부적으로 황제의 권위와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고구려를 책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백다해, 2016).
장수왕은 423년 3월에 비로소 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표 6번]. 송의 책봉에 대한 사은사(謝恩使)였을 것이다(김종완, 2002; 김철민, 2016). 장수왕은 연이어 424년 2월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송의 왕궁으로 보내 방물을 바쳤다. 이에 송 소제도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王邵子) 등을 보내 치사하였다[표 7번]. 이때 송에 파견된 고구려의 장사 마루는 평양 일대의 정치 세력이자 관료집단이었던 중국계 인물로 추정된다(임기환, 2007).
423~424년 고구려의 대송 외교 추진 배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되었다. 먼저 고구려가 중국 화북지방의 혼란과 백제·일본의 대송 외교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파악한 바 있다(江畑武, 1968). 이에 대해 5세기 전반 고구려가 백제에 대해 확실한 세력의 우위를 점했고, 왜도 당시에는 고구려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면서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김진한, 2018; 2020). 한편 당시 북위와 송이 산동 일대에서 전쟁을 벌였으므로 고구려가 산동 일대의 영유권 동향에 각별한 관심이 있음을 환기한 연구도 발표되었다. 곧 고구려는 당시 평양 천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바닷길을 이용해 공격해올 경우 평양이 방어에 취약해 그 출발지인 산동의 정세를 탐색함으로써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는 것이다(백다해, 2016). 이러한 측면에 더해 산동반도는 바닷길로 요동반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곳의 동향이 고구려 서북방 방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고구려가 남조와 안정적으로 교섭하기 위해서도 산동 일대의 정세 파악과 해상 경로의 확보가 지속적으로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의 대송 외교는 436년 6월에 재개될 때까지 12년간 단절되었다. 427년 평양 천도 전후 고구려가 내부 정치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에 따른 결과인 듯하다(김종완, 2002; 백다해, 2016; 김진한, 2018; 2020). 이 밖에 장수왕과 돈독하게 지냈던 송 소제가 424년 6월에 살해당한 후 문제가 적국인 백제와 사신을 교환하며 우대하자 장수왕이 이에 반발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김철민, 2016).
실제로 424~436년 고구려와 송의 교섭이 전무했던 시기에 백제와 송은 네 차례 교섭하며 조공·책봉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먼저 424년 백제왕 영(映: 전지왕)이 송 소제 재위 시기에 장사 장위(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표 8번]. 장위는 백제로 이주한 대방 지역 재지세력으로 추정되는데, 외교문서의 작성과 통역에 능통해 사신으로 파견됐을 것이다(임동민, 2016). 송 문제가 즉위해 원가(元嘉)로 개원하는 때가 그 해 8월이므로 백제의 사신 파견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박윤선, 2008). 문제는 425년 겸알자(兼謁者) 여구은자(閭久恩子) 등을 보내 전지왕이 기존에 받은 책봉호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을 추인해주고 노고를 위로하는 조서를 보내주었다[표 10번]. 곧 『송서』에는 424~425년 대송 외교를 주도한 인물이 전지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전지왕은 420년 3월에 죽고 구이신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이 시기 백제의 대송 외교를 주도한 인물은 구이신왕으로 파악해야 한다.주 005
각주 005)
『송서』 기록을 존중해 구이신왕의 즉위 연도를 425년 이후로 수정해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424~425년 송과의 교섭 주체를 전지왕으로 파악한 것이다(임동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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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비유왕 즉위 후에도 대송 외교를 이어갔다. 429년 7월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표 12번], 430년 4월 송 문제는 이에 화답해 비유왕에게 이전 전지왕의 책봉호를 이어받게 하였다[표 13번].
424~430년 백제의 대송 외교 배경은 고구려와 송의 긴밀한 관계를 억제하고 백제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정재윤, 2009; 임동민, 2020). 구이신왕이 425년에 장위를 사신으로 보낸 것은 같은 해 2월 장수왕의 대송 외교와 관련되어 있을 법하다. 장위의 파견 시점이 분명하지 않지만, 고구려의 마루가 2월에 송에 갔음을 감안하면 그보다 늦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구이신왕의 425년 대송 외교는 앞서 이루어진 장수왕의 대송 외교에 대한 대응의 측면이 컸을 것이다. 429년 7월 사신 파견의 경우 비유왕 즉위 3년차이므로 구이신왕의 부고와 비유왕의 즉위를 알리고자 함이 기본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의식한 외교적 대응으로도 볼 수 있다(임기환, 2002).
장수왕의 대송 외교는 436년 6월 송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함으로써 재개되었다[표 22번]. 당시는 436년 4~5월 북연왕 풍홍과 북연민의 쇄환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북위의 긴장이 최고조로 올라간 직후였다. 따라서 장수왕이 송에 사신을 파견한 까닭은 북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거나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전술 차원으로 파악되었다(김종완, 2002; 임기환, 2003; 김진한, 2018; 2020).
438년 고구려는 송으로 망명을 요청한 북연왕 풍홍의 신병 처리를 두고 송과 긴장 국면을 맞이하였다. 고구려는 북위·송과의 관계에서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풍홍을 제거하였다. 송과는 두 나라의 관계가 파탄 나지 않는 선에서 타협하였다[표 25번]. 그래서인지 439년 송 문제가 북위 토벌용으로 군마를 요청해 왔을 때 장수왕은 선뜻 말 800필을 보내주었다[표 26번]. 이때 고구려가 송에 보낸 군마 역시 유목·수렵사회와 농목교역을 한 결과물로 추정된다(이정빈, 2014). 물을 무서워하고 예민한 말 800필을 배에 태워 수송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북위는 북연에 이어 439년 9월 북량까지 멸망시킴으로써 화북 일대를 통일하였다. 고구려는 439년 11~12월 두 차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후 461년까지 북위와 교섭하지 않았다[표 27~42번]. 반면에 송과는 439년의 군마 지원에 이어 441년과 443년에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표 29~30번]. 따라서 사료의 문면상으로만 보면, 439년 이후 고구려의 대송 외교는 북위에 대한 견제책 내지 자구책으로 해석될 수 있다(江畑武, 1968; 김종완, 1995; 노태돈, 1999; 井上直樹, 2000). 그러나 451년 이전까지 송이 북위에게 실질적인 위협세력이 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고구려가 대송 외교를 통해 북위를 견제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김진한, 2018; 2020). 또한 439년 고구려가 송에 군마를 보낸 것은 전해에 벌어졌던 풍홍 문제 수습을 위한 후속 조치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북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대송 외교를 추구하면서도 중립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것이다(이성제, 2004).
이와 달리 장수왕이 백제와 왜의 대송 외교에 대한 탐색과 견제를 위해 송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주장도 있다(김철민, 2016).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와 송이 교섭한 440년과 443년에 엎치락뒤치락하며 역시 송에 사신을 보냈다[표 28·31번]. 당시 비유왕이 송에 사신을 파견한 배경은 고구려의 공세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김철민, 2016; 임동민, 2020). 말하자면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송을 이용해 상대 국가를 외교적으로 견제하려 했던 셈이다. 그러나 443~451년 유연-북위-송 사이에 공방전이 지속적으로 발생함에 따라(『송서』 권95) 고구려와 백제가 송에게 기대했던 바가 실제로 구현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한편 고구려가 439년에 송과 북위에 연이어 사신을 파견한 데 주목한 연구도 있다. 고구려가 남북조 간의 세력균형을 통해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려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정재윤, 2009).
고구려와 송의 관계는 444~450년 공백기를 가졌다. 고구려가 송에 다시 사신을 파견한 것은 451년에 이르러서였다[표 35번]. 453년과 455년, 457년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표 36~38번]. 453년은 송 효무제가 즉위한 해이므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을 것이다(백다해, 2016). 고구려가 송 내부 동향에 긴밀한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455년 송 문제의 국상(國喪) 2주기 조문 사신단을 파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김종완, 1995; 2002). 좀 더 높은 차원의 외교적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459년에는 숙신(肅愼)을 대동해 가서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다[표 41번]. 호시와 석노는 숙신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송이 필요했던 무기였다(이동훈, 2019).
450년대 고구려 대송 외교의 배경이 북위 및 백제에 대한 외교적 견제책이라는 측면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433년 이후 신라와 백제 사이에 소위 ‘나제동맹’으로 칭하는 군사적 협력관계가 모색되었고,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던 신라가 급격히 이탈해 454년에는 군사적으로 충돌함으로써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파탄남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장수왕으로서는 송에게 북위와 백제를 외교적으로 동시에 견제해주는 지렛대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다. 특히 북위와의 북방전선을 안정시킨 상태에서 백제를 상대로 남방 진출에 주력하고자 하는 상황 조건의 마련이 이전보다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었을 것이다.
450년대 고구려의 대송 외교는 좀 더 다양한 목적하에 추진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먼저 450년대 북위와 송이 각축전을 지속함에 따라 고구려로서는 산동 일대의 영유권 및 정세 탐색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백다해, 2016). 또한 경제적·문화적 욕구 충족 차원에서 대송 외교의 배경을 환기한 연구도 있다. 곧 강남 일대에 모이는 동아시아 각국의 상품과 서적·의복 등 선진문물을 수입해 오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김진한, 2018). 이러한 측면은 백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비유왕이 450년 1월 조공하면서 국서를 보내 『역림(易林)』주 006
각주 006)
전한시대 초연수(焦延壽, 焦贛)가 지은 점술 관련 책이다(『隋書』 권34 經籍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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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식점(式占)주 007
각주 007)
식반(式盤)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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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노(腰弩)를 요구했고 문제가 이를 들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표 34번]. 요노는 일반 쇠뇌와 달리 허리의 힘으로 장전하여 살상력을 높인 신무기였는데,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활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박윤선, 2008; 임동민, 2020).
고구려가 459년의 사행에 숙신을 대동한 까닭은 고구려가 숙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임을 과시하고 송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이동훈, 2019). 게다가 당시 요서와 부여 등 고구려 서북방의 동향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북위가 450년대 후반 요서 일대의 통치를 강화하자(『위서』 권5) 고구려의 부담이 증대되었다. 장수왕은 이에 서북방 세력의 동요를 최소화하고 역내 세력에 대한 영향권을 드러내기 위해서 숙신 사신을 데리고 송으로 갔다고 추정된다(백다해, 2020).
이와 같은 고구려와의 외교에도 불구하고 송은 북위의 공격을 받은 450년 이후 점차 쇠퇴해 갔다. 453년에 문제가 시해되었고 효무제 즉위 후에도 454년에는 남군왕(南郡王) 의선(義旋)이, 459년과 461년에는 경릉왕(竟陵王) 탄(誕)과 해릉왕(海陵王) 휴무(休茂)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부 정세가 불안하였다(『송서』 권68·권79). 이에 고구려는 대송 일변도의 외교 대신 북위와의 관계 개선에 점차 시선을 돌린 듯하다. 462년 3월에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가 재개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김종완, 2002).
 
3) 『삼국사기』의 대송 관계 기사 누락과 그 의미
고구려와 송은 420년부터 461년까지 상호 간에 15회 교섭관계를 맺었다[표 참조]. 420년과 422년에 이루어진 송의 장수왕에 대한 책봉이 사신 파견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교섭의 횟수는 13회로 줄어든다. 고구려와 송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송서』 본기와 열전 고구려국조, 그리고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그런데 438년과 455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송서』만을 전거로 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곧 전체 15건 중 『삼국사기』에는 2건만 남아 있고 13건은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송이 멸망하는 479년까지 확장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462년 이후에도 고구려는 송과 13회 교섭하는데 이중 3회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주 008
각주 008)
고구려의 대송 외교 기록 전거 및 『삼국사기』 기재 여부에 대해서는 최일례의 논문(2013), 244~24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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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기록 중에는 고구려에서 선제적으로 송에 사신을 보낸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누락된 까닭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같은 시기 고구려와 북위 간 관계 기록이 『삼국사기』에 일일이 남아 있는 것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백제와 송의 관계 기록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다. 백제와 송이 9회 교섭했는데, 『삼국사기』에는 3회만 실려 있다. 고구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누락의 비율이 낮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고구려의 대송 외교 기록이 『삼국사기』에 누락된 배경과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먼저 『삼국사기』 편찬 과정이나 편찬자의 사료관에서 원인을 찾는 경우가 있다. 곧 『삼국사기』 찬자가 『송서』를 인용하지 않은 국내 자료를 기초로 하여 고구려본기를 편찬하였기 때문에 대송 외교 기록이 『삼국사기』에 누락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田中俊明, 1982). 이와 달리 『삼국사기』가 『자치통감』을 많이 참고했는데, 『자치통감』에 『송서』의 대고구려 외교 관련 기록이 빠져 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도 자연스럽게 누락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신동하, 1995).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가운데 『송서』 본기 기록이 원전인 경우를 찾을 수 없는 데 주목하여 『삼국사기』 편찬자가 고의로 『송서』 본기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찬자의 고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의를 유보하였다(전덕재, 2018).
고구려의 외교적 입장 내지 내부 정치적 이유에서 누락의 이유를 찾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송서』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와의 교섭 기록이 『삼국사기』에 대거 누락된 것은 양국 관계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곧 양국이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보다 남조 송의 필요성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윤명철, 2003). 그러나 고구려가 전체적으로 대송 외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고유한 자료가 있는 경우 중국 측 사서에 없다고 해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곧 『삼국사기』 찬자가 송과의 외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고의로 누락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당대에 송과의 외교 기사가 부재했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도 있다. 그 이유를 고구려 당대 정치사에 찾으려 하였다. 곧 장수왕 중반기까지 송 중심의 외교를 추구했던 정치 세력과 이후 북위 중심의 외교를 주도했던 정치 세력이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440~461년까지 송 중심의 외교가 결국 고구려의 국익에 손실을 초래하였고, 이후 북위와의 외교를 강화했던 세력이 이전까지의 대송 외교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것이다(최일례, 2013). 이러한 주장은 대외 외교의 주도 세력을 일원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동태적으로 조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감이 간다. 다만 고구려가 462년 이후 북위 중심의 외교를 추구하면서도 2~3년마다 송과 꾸준히 교섭하는 것을 보면, 송·북위와의 외교를 주도했던 정치 세력이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증이 필요하다.
한편 백제 구이신왕대 송과의 교류 기사가 『삼국사기』에 누락된 까닭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의 분석이 있다. 『송서』에는 420년과 424년에 백제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내용이 남아 있는데[표 4·8번], 당시가 구이신왕 재위 시기(420~427년)임에도 불구하고 조공·책봉의 주체를 영(전지왕)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백제왕의 이름이 잘못 표기되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찬자가 『송서』의 기록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박윤선, 2008). 실제로 비유왕대(427~455년) 대송 외교 기록 중에서 429년, 430년, 440년의 기록은 『송서』와 『삼국사기』에 동시에 실려 있다[표 12·13·28번]. 다만 구이신왕과 개로왕대(455~475년) 대송 외교 기록은 『삼국사기』에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그 이유에 대한 다른 합리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 각주 005)
    『송서』 기록을 존중해 구이신왕의 즉위 연도를 425년 이후로 수정해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424~425년 송과의 교섭 주체를 전지왕으로 파악한 것이다(임동민, 2020). 바로가기
  • 각주 006)
    전한시대 초연수(焦延壽, 焦贛)가 지은 점술 관련 책이다(『隋書』 권34 經籍3). 바로가기
  • 각주 007)
    식반(式盤)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방식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고구려의 대송 외교 기록 전거 및 『삼국사기』 기재 여부에 대해서는 최일례의 논문(2013), 244~245쪽 참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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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조와의 관계 자료번호 : gt.d_0004_001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