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제 및 신라와의 관계
3. 백제 및 신라와의 관계
1) 백제와의 각축
광개토왕대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장수왕 즉위 후 집권 전반기에는 『삼국사기』에 직접적인 교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가 북연을 둘러싸고 북위와 갈등했고, 436년 북연이 멸망한 후에는 북위와 국경을 맞대면서 긴장 국면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고구려는 북위·송과의 외교전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백제에 대한 견제도 대송 외교를 통해 관철시켜 나가려 하였다. 서북방에서 북위와의 긴장 국면을 안고 고구려가 백제를 선제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백제로서도 대송 외교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거나 축성사업을 통해 방어체계를 정비하는 수준의 행보를 보였다. 전지왕은 417년에 동부인과 북부인을 징발해서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다(『삼국사기』 권25 전지왕 13년). 병관좌평 해구(解丘)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한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구성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비정하기 어렵지만, 이름에서 유추해 볼 때 해안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해주목 봉수에 ‘사포곶(沙浦串)’과 ‘사곶(沙串)’이 나오는데, 후보지로 주목할 만하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관미성(關彌城) 등 한강 하류의 경기만을 둘러싼 제해권 쟁탈전을 벌여 왔다. 사구성의 축조도 이러한 측면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장창은, 2014).
장수왕은 427년에 수도를 기존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삼국사기』 권18 장수왕 15년). 평양 천도는 고구려가 처한 대내외적인 배경하에서 추진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가장 큰 부담을 느낀 것은 백제였다. 4세기 중반부터 예성강과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각축전을 벌였던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남진의 거점을 남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평양 천도 이후 백제가 고구려에게 느끼는 압박감은 점차 증대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양 천도를 전후한 424~425년과 429~430년에 집중된 백제의 대송 외교는 고구려를 의식한 외교적 돌파구 차원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선택한 또 다른 전략은 4세기 말부터 고구려와 종속적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신라를 고구려에서 떼어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에 비유왕은 433년 7월에 먼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이듬해 2월에 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필을 선물로 주었다. 9월에도 흰 매를 보내주었다. 백제가 세 차례에 걸쳐 연이어 신라에 적극적인 구애를 한 것이다. 결국 신라도 이에 화답해 434년 10월 질 좋은 금과 명주(明珠)를 보내 답례하였다(『삼국사기』 권3 눌지마립간 17년·18년; 권25 비유왕 7·8년).
학계에서는 이때 신라와 백제 두 나라 간에 동맹이 맺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일반적으로는 ‘나제동맹’으로 부르지만, 동맹을 주도한 국가가 백제이므로 ‘제라동맹’으로 호칭함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박진숙, 2000; 노중국, 2012). 또한 동맹의 결성 시기를 동맹군의 군사적 활동이 나타나는 455년으로 보거나(정운용, 1996; 2006), 475년 백제 한성 공파 때 파견된 신라 구원군 1만 명에 주목해 실질적인 군사동맹은 전해인 474년에 체결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유우창, 2006; 2009). 한편 433~434년 백제와 신라의 사신 교환과 우호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동맹 절차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동맹’이라는 용어 사용의 적절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연구도 있다. 433년 이후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군사 협력단계(체제)’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정재윤, 2001; 위가야, 2018; 공석구, 2020).주 009
결국 ‘나제동맹’은 427년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백제와 신라가 공동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대응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동맹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자국에 종속되어 있던 신라가 숙적 백제와 우호를 모색한 것은 그 행위 자체로만 보아도 충분히 나무라거나 응징할 법한 데도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430년대 고구려가 처한 대내외적인 상황 때문인 듯하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이후 기반시설 정비 및 통치체제 정비 차원에서 한동안 내정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평양 천도를 전후하여 ‘국내성계’와 ‘평양성계’의 정치적 갈등과 숙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서영대, 1981; 박성봉, 1984; 김병남, 1997). 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30년대 북연을 둘러싸고 북위와 일촉즉발의 긴장 국면을 맞이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국경을 맞댄 채 지속되었다. 곧 고구려가 처한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이 백제와 신라의 동맹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없게끔 했던 것으로 보인다(장창은, 2008).
그렇다면 고구려의 백제를 상대로 한 남방 진출은 북위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원만하게 단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장수왕이 475년에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462년 이후 북위와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장수왕이 439년에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한 후 461년까지 단절되었다[표 참조]. 이 기간에 고구려와 북위 사이 긴장 상황이 유지된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 충돌이 없었다는 데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북위와 고구려는 자국이 처한 사정으로 인해 서로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셈이다. 말하자면 비록 북위와의 긴장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430년대에 비해서는 남방 진출의 조건이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것은 455년에 이르러서였다. 곧 그해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자 눌지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는 내용이다(『삼국사기』 권3 눌지마립간 39년). 나제동맹군의 첫 번째 군사활동이었다. 다만 455년까지 고구려와 백제 간에 전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의 내용이 주목된다.
개로왕은 북위 효문제에게 “… 추악한 무리들(고구려)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백제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과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삼국사기』 권25 개로왕 18년; 『위서』 권100). 곧 외교문서에 따르면, 442년 전후부터 고구려가 백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해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개로왕이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를 쳐들어가게끔 하기 위한 외교적 과장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제는 그동안 남조 송과만 교섭하였지 북위에 이때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여러 가지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위기에 빠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불과 3년 후에 백제 한성시대가 종식된 것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기보다는 두 나라의 적대적 관계가 누적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장수왕이 북위와의 관계가 소강상태로 들어간 440년 이후 백제를 주요 목표로 한 남진정책을 추구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2) 대신라 관계의 변화
장수왕 즉위 당시 신라의 왕은 실성왕(402~417년)이었다. 실성왕은 재위 11년(412년)에 나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삼국사기』 권3 실성이사금 11년).주 010 실성 자신도 즉위 전 고구려에서 10여 년간 인질 생활을 했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성왕은 415년 7월 혈성(穴城)의 들판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그리고 금성(金城) 남문에 행차하여 활쏘기를 구경하였다(『삼국사기』 권3 실성이사금 14년). 실성왕은 열병 의식을 통해 군사통수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 내정은 고구려의 감시와 간섭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성왕의 이러한 행보는 장수왕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을 법하다(우선정, 2000; 장창은, 2008).

그림1 |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壺杅)(국립중앙박물관)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壺杅)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시사해주는 실물자료이다. 명문은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적혀 있다. 광개토왕의 시호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청동합의 제작 시기인 을묘년은 415년임이 분명하다(김재원, 1946). 이때는 장수왕 즉위 3년이자 아버지 광개토왕의 3년상이 끝나는 해였다. 따라서 이 청동합은 광개토왕의 장례의식과 관련하여 고구려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것이 언제 어떻게 신라로 유입되어 경주 왕족의 무덤에 부장될 수 있었을까?
먼저 제작 연대를 존중하여 장수왕이 실성왕에게 보낸 것으로 파악한 연구가 있다(鈴木治, 1959; 김정배, 1988). 같은 실성왕대이지만 광개토왕을 장사지낸 1년 뒤 왕릉의 제사의식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이 호우를 받아서 가져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7). 이와 달리 눌지왕 2년(418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복호가 돌아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재원, 1946). 어느 경우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 청동합의 제작 및 신라로의 반입 시점과 경위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종속적 우호관계와 떼놓고 말하기 어렵다. 신라 왕족 내지 귀족의 것임이 분명한 무덤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합이 부장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실성왕은 나물왕의 큰아들이었던 눌지를 제거하기 위해 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고구려 군사는 도리어 실성을 살해하고 눌지를 왕으로 세운 후 돌아갔다(『삼국사기』 권3 눌지마립간 즉위년; 『삼국유사』 권1 제18 실성왕). 실성왕의 죽음과 눌지왕의 즉위를 좌지우지할 정도도 고구려 세력이 신라의 내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눌지왕은 비록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실성왕과 달리 고구려에 볼모로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정권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에 눌지왕은 즉위 후 김씨 왕실 중심의 권력 강화를 추구하였고, 그 전제 조건으로 고구려 세력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눌지왕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정치외교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실성왕대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를 귀환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복호의 귀환 시기와 과정이 『삼국사기』(권3 눌지마립간 2년; 권45 박제상전)와 『삼국유사』(권1, 나물왕 김제상) 간에 차이가 난다. 곧 『삼국사기』는 복호의 귀환이 눌지왕 2년(418년)에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삼국유사』는 눌지왕 9년(425년)주 011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귀환 과정도 『삼국사기』가 박제상의 언변으로써 장수왕의 허락을 받아 순탄했다면, 『삼국유사』는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우여곡절을 겪으며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되어 있어 대조적이다.
복호의 귀환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신뢰하는 경향이 우세하다(채미하, 2012; 박남수, 2019). 반면에 『삼국유사』가 복호의 귀환 시기와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주보돈, 1998; 장창은, 2008). 왜냐하면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집권한 눌지왕이 왕권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즉위 다음 해 곧바로 반고구려정책 차원에서 복호를 귀환시키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장수왕의 양해와 허락을 받아 데려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의 언변으로 고구려가 복호를 순순히 놓아주었다는 기록은 박제상의 충절이 후대에 회자되고 기록에 실리는 과정에서 유교적으로 분식된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복호의 귀환은 눌지왕이 신라 내정에서 고구려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재위 9년(425년) 치밀한 계획하에 고구려에서 탈출시켰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사건은 신라가 본격적으로 고구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의 첫 발로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장창은, 2008).
433~434년 백제의 주도로 이루어진 ‘나제동맹’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도출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신라가 4세기 말부터 이어져 왔던 고구려와의 종속적 우호관계를 청산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숙적 백제를 제압해야 하는 숙명에 더해, 그동안 자신들 편에서 백제를 적절히 견제해 주었던 신라마저 자국의 세력권에서 이탈해가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었다.
표 5세기 초·중반 고구려와 백제의 대중국 관계*
| 연번 | 서기년 | 고구려 | 백제 | 주체 국가 (파견 성격) | 세부 내용 | 비고 | 전거 |
| 1 | 413 | 장수왕1 | 전지왕9 | 고구려 → 동진 (조공·책봉) |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 표를 받들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침. 동진 안제(安帝)가 연(璉)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使持節 都督營州諸軍事 征東將軍 高句麗王 樂浪公)으로 봉함.** | 『삼국사기』 장수 원년, 『진서』 권10 안제 의희 9년, 『송서』 권97 고구려국 | |
| 2 | 416 | 장수왕4 | 전지왕12 | 동진 → 백제 | 동진 안제가 사신을 보내 여영(餘映 : 전지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으로 봉함. | 『삼국사기』 전지왕 12년, 『송서』 권97 백제국 | |
| 3 | 420 | 장수왕8 | 전지왕16· 구이신왕1 | 송 → 고구려 (책봉) | 7월 송 무제(武帝)가 고련(高璉: 장수왕)을 사지절 도독영 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使持節 都督營州諸軍 事 征東大將軍 高句麗王 樂浪公)으로 봉함. | • 동진 멸망, 6월 남송 건국. • 사신 파견 없는 송의 일방적 책봉. | 『송서』 권3 무제 하 영조 원년 및 권97 고구려국 |
| 4 | 송 → 백제 (책봉) | 7월 송 무제가 부여영(전지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봉함. | 사신 파견 없는 송의 일방적 책봉. | 『송서』 권3 무제 하 영초 원년 및 권97 백제국 | |||
| 5 | 422 | 장수왕10 | 구이신왕3 | 송 → 고구려 (책봉) | 장수왕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 책봉호를 더해줌. | 『송서』 권97 고구려국 | |
| 6 | 423 | 장수왕11 | 구이신왕4 | 고구려 → 송 (조공) | 3월 사신을 보내 조공. | 『송서』 권4 소제 경평 1년 | |
| 7 | 424 | 장수왕12 | 구이신왕5 | 고구려 ↔ 송 (조공·치사) | 2월 장사 마루(馬婁) 등을 송의 왕궁으로 보내 방물을 바침. 송 소제(少帝)가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王邵子) 등을 보내 치사함. | 『송서』 권4 소제 경평 2년 및 권97 고구려국 | |
| 8 | 424 | 장수왕12 | 구이신왕5 | 백제 → 송 (조공) | 영(映 : 구이신왕)이 장사 장위(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침. | 424~425년 태무제, 유연 원정. | 『송서』 권97 백제국 |
| 9 | 425 | 장수왕13 | 구이신왕6 | 고구려 → 북위 (조공) | 사신을 보내 조공. | 『삼국사기』 장수 13년 | |
| 10 | 송 → 백제 (조서) | 송 문제(文帝)가 겸알자(兼謁者) 여구은자(閭久恩子)와 겸부알자(兼副謁者) 정경자(丁敬子) 등을 보내 구이신왕의 노고를 위로하는 조서를 줌. | 『송서』 권97 백제국 | ||||
| 11 | 427 | 장수왕15 | 구이신왕8 비유왕1 | • 고구려, 평양 천도. • 427~428년 유연의 북위 침공. | |||
| 12 | 429 | 장수왕17 | 비유왕3 | 백제 → 송 (조공) | 7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5월 북위, 유연 공격 대승. | 『삼국사기』 비유 3년, 『송서』 권5 문제 원가 6년 |
| 13 | 430 | 장수왕18 | 비유왕4 | 송 → 백제 (책봉) | 4월 송 문제가 비유왕이 방물을 바친 것에 대해 전지왕의 작호를 이어받게 함. | 416년 받은 작호를 의미함. | 『삼국사기』 비유 4년, 『송서』 권97 백제국 |
| 14 | 431 | 장수왕19 | 비유왕5 | 하(夏) 멸망. | |||
| 15 | 432 | 장수왕20 | 비유왕6 | • 6~11월 북위, 북연 공격. • 12월 북연 풍숭(馮崇), 북위로 망명. | |||
| 16 | 433 | 장수왕21 | 비유왕7 | 2월 북위가 풍숭을 ‘~요서왕(~遼西王)’으로 책봉. | |||
| 17 | 434 | 장수왕22 | 비유왕8 | • 2월 북위, 유연과 통혼. • 6월 북위, 북연 공격. | |||
| 18 | 435 | 장수왕23 | 비유왕9 | 고구려 ↔ 북위 (조공·책봉) | • 6월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그 나라의 휘(諱)를 알려줄 것을 청함.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황실 계보와 휘를 적어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으로 봉함. | • 1~4월 북연과 송, 조공·책봉. • 고구려 조공 2일 후(6. 22.) 북위가 북연 공격. | 『삼국사기』 장수 23년, 『위서』 권100 고구려, 『자치통감』 송기 문제 원가 12년 6월 병오 |
| 19 | 고구려 → 북위 (사은사) | 가을 사신을 보내 사은함. | 11월 북연 풍홍(馮弘), 고구려 망명 타진. | 『삼국사기』 장수 23년 | |||
| 20 | 436 | 장수왕24 | 비유왕10 | 북위 → 고구려 (조유) | 2월 북위가 북연 정벌 계획을 고구려 등 여러 나라에 보내 알리고 깨우침. | 『위서』 4상 세조 태연 2년, 『자치통감』 문제 원가 13년 2월 | |
| 21 | 북위 → 북연 (전쟁) 고구려 → 북연 (구원) 북연 → 고구려 (귀순) | • 4~5월 북위의 아청(娥淸)·고필(古弼)이 북연의 백랑성(白狼城) 공격 함락. 장수왕, 갈로·맹광과 수만 군사를 보내 [북연의] 양이(陽伊)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왕(풍홍)을 맞이함. • 연왕이 가호와 백성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망명. 고필의 추격 실패. 북위 태무제가 고구려에 봉발(封撥)을 보내 북연왕을 보내라고 하지만 장수왕 거절. | • 북연 멸망. • 유연, 434년 북위와 맺은 화친 폐기 후 공격. | 『삼국사기』 장수왕 24년, 『자치통감』 송기 문제 원가 13년 4월, 5월 을묘 | |||
| 22 | 고구려 → 송 (조공) | 6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5 문제 원가 13년 | ||||
| 23 | 436 | 장수왕24 | 비유왕10 | 고구려 → 북위 (견사) | • 9월 사신을 보내 풍홍과 함께 [북위]왕의 덕화를 받겠다고 함. • 북위, 고구려 공격 의논하다가 낙평왕 비의 간언을 수용해 중지. | 『삼국사기』 장수왕 24년, 『위서』 권4상, 『자치통감』 송기 문제 원가 13년 9월 | |
| 24 | 437 | 장수왕25 | 비유왕11 | 고구려 → 북위 (조공) | 2월 사신을 북위에 보내 조공. | 2월 북위 태무제가 유주(幽州) 순방, 백성 위무. 3월 남평왕(南平王) 혼(渾) 화룡에 주둔시킴. | 『삼국사기』 장수 25년 |
| 25 | 438 | 장수왕26 | 비유왕12 | 송 ↔ 고구려 (풍홍 소환 건) | 3월 북연왕 풍홍이 송에 사신을 보내 망명 요청. 송 문제가 왕백구(王白駒)에게 군사 7,000명을 주어 고구려에 파견. 장수왕은 장수 손수와 고구를 보내 북풍(北豐)에 있는 풍홍과 자손 10명을 죽임. 왕백구가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음. 장수왕은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으로 보냄. 송 문제는 왕백구를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줌. | 북위, 유연 공격(438~449년 집중 원정). | 『삼국사기』 장수 26년, 『송서』 권97 고구려국 |
| 26 | 439 | 장수왕27 | 비유왕13 | 송 ↔ 고구려 (군마 지원) | 송 문제가 북위를 토벌하고자 고구려에 군마 요청. 장수왕이 말 800필을 보냄. | 군마 관련 내용은 고구려국전에만 있음. | 『송서』 권5 문제 원가 16년 및 권97 고구려국 |
| 27 | 고구려 → 북위 (조공) | 11~12월 두 차례 사신을 북위에 보내 조공.*** | 9월 북위에 의해 북량 멸망. 북위의 화북 통일. | 『삼국사기』 장수 27년, 『위서』 권4상 세조 태연 5년 | |||
| 28 | 440 | 장수왕28 | 비유왕14 | 백제 → 송 (조공) | 10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삼국사기』 비유 14년, 『송서』 권5 문제 원가 17년 | |
| 29 | 441 | 장수왕29 | 비유왕15 | 고구려 → 송 (조공) |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5 문제 원가 18년 | |
| 30 | 443 | 장수왕31 | 비유왕17 | 고구려 → 송 (조공) |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5 문제 원가 20년 | |
| 31 | 백제 → 송 (조공) |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9월 북위, 유연 남쪽(漠南) 공격. | 『송서』 권5 문제 원가 20년 | |||
| 32 | 446 | 장수왕34 | 비유왕20 | 북위, 토욕혼 공격. | |||
| 33 | 449 | 장수왕37 | 비유왕23 | 1~9월 북위, 유연 공격 대승. 북위 변경 안정. | |||
| 34 | 450 | 장수왕38 | 비유왕24 | 백제 → 송 (조공) | 1월 비유왕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국서를 보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는 것을 청하고, 표문으로 『역림(易林)』·식점(式占)·요노(腰弩)를 요구하자 송 문제가 들어줌. | 7~12월 송과 북위 전쟁(북위 승). | 『송서』 권5 문제 원가 27년 및 권97 백제국 |
| 35 | 451 | 장수왕39 | 비유왕25 | 고구려 → 송 (조공) | 10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5 문제 원가 28년 | |
| 36 | 453 | 장수왕41 | 비유왕27 | 고구려 → 송 (조공) | 11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6 문제 원가 30년 | |
| 37 | 455 | 장수왕43 | 비유왕29· 개로왕1 | 고구려 → 송 (조문·조공) | 11월 장사 동등(董騰)을 보내 표문을 올려, [송 문제] 국상 3주기를 조문하고 방물을 바침. | 『삼국사기』에는 조공 사실만 전함. | 『삼국사기』 장수 43년, 『송서』 권6 효무제 효건 2년 및 권97 고구려국 |
| 38 | 457 | 장수왕45 | 개로왕3 | 백제 → 송 (조공·책봉) | 10월 개로왕[여경(餘慶)]이 사신을 보내 벼슬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자 조칙으로 허락함.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에 책봉함. | 『송서』 권6 효무제 대명 1년 및 권97 백제국 | |
| 39 | 458 | 장수왕46 | 개로왕4 | 고구려 → 송 (조공) | 10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6 효무제 대명 2년 | |
| 40 | 백제 → 송 (조공·책봉) | 사신을 보내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명에게 관작을 내려달라고 요청함. 이에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으로,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 여훈(餘暈)을 정로장군으로, 행보국장군(行輔國將軍) 여도(餘都)와 여예(餘乂)를 보국장군으로,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과 여작(餘爵)을 용양장군으로, 행영삭장군(行寧朔將軍) 여류(餘流)와 미귀(麋貴)를 영삭장군으로,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우서(于西)와 여루(餘婁)를 모두 건무장군 으로 삼음. | 『송서』 권97 백제국 | ||||
| 41 | 459 | 장수왕47 | 개로왕5 | 고구려 → 송 (조공) | 11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이때 [고구려가] 중역(重譯)해 숙신국(肅愼國)이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침. | 고구려가 숙신 사신 을 데려온 듯함. | 『송서』 권6 효무제 대명 3년 및 권97 고구려국 |
| 42 | 461 | 장수왕49 | 개로왕7 | 고구려 → 송 (조공) | 7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송서』 권6 효무제 대명 5년 |
* 이 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진서(晉書)』, 『송서(宋書)』, 『위서(魏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 『송서』에는 낙랑공(樂浪公), 『삼국사기』에는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되어 있다.
*** 이후 461년까지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는 단절되었다.
** 『송서』에는 낙랑공(樂浪公), 『삼국사기』에는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되어 있다.
*** 이후 461년까지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는 단절되었다.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