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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5세기 후반의 국제정세와 남조와의 관계

1. 5세기 후반의 국제정세와 남조와의 관계

1) 북위·송의 대결관계와 대송 외교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중단한 것은 439년의 일이었다. 양국 관계의 단절은 고구려가 다시 북위에 사절을 보낸 462년까지 이어졌다. 한편 고구려와 송의 관계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고구려는 439년과 441년, 443년에 송으로 사절을 파견하였고, 대북위 외교를 재개한 462년까지 송 일변도의 외교를 이어나갔다. 이 시기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고구려가 대송 외교에 의지하여 북위의 세력 확대에 맞서고 있었다는 점이다.
439년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해였다는 점에서 5세기 후반의 고구려와 중국 남북조의 관계는 북위의 화북 통일 이후 전개된 국제정세와 긴밀하게 연동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먼저 북위의 화북 통일 이후 국제정세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439년 5호(胡)의 여러 나라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하서[河西: 감숙성(甘肅省) 서부와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 동부]의 북량(北涼)이 북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이렇게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북방에서 위협하고 있던 유연(柔然)을 상대로 북벌을 거듭하여 그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북위의 세력은 음산산맥(陰山山脈)의 북쪽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박한제, 1988; 窪添慶文, 2020). 이렇게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면서 송과 남북으로 대치하게 되었고, 두 세력 간에 대결이 벌어졌다.
450년 송 문제(文帝)는 대규모 북벌을 감행하여 낙양(洛陽)과 그 동방의 요충 호뢰[虎牢: 하남성(河南省) 형양(滎陽)], 활대[滑臺: 하남성 활현(滑縣)]에서 북위를 몰아냈다. 양국은 황하(黃河)를 경계로 하면서도, 황하 이남의 이들 지역만은 남진의 교두보로 북위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을 북위로부터 빼앗았다는 점에서 송의 공세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 성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해 말,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송군을 격파하고 연말에는 장강(長江)의 북안(北岸)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의 전쟁은 일단 양국의 화의로 451년에 종료되었다. 송은 태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듬해 공격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성과 없이 퇴각하였다. 이렇게 재정리된 양국의 국경선은 북위 헌문제(獻文帝) 때에 이르러 변하게 된다(窪添慶文, 2020).
송의 북방 영토는 본래 황하 남안(南岸)에서 산동반도에 걸쳐 있었다. 이 지역은 동진(東晉) 말 유유(劉裕)가 북벌에 나서 확장한 영토로, 산동반도는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얻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450년대에 이르면 북위 황제가 직접 장강 북안까지 남정해올 정도로 송의 판도는 어느덧 황하 남안에서 회수(淮水) 지역으로 줄어들었다(藤井律之 2018).
문제는 내정을 잘 다스려 30년간의 치세(元嘉之治)를 이루었다고 일컫는 송의 2대 황제로, 국내 안정을 배경으로 450년 북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송의 군대는 북위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리어 수도 건강(建康) 근처까지 적군이 몰려오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다행히 강남은 무사했으나 전란이 벌어진 회남(淮南) 지역이 황폐해지는 등 대량의 물적·인적 자원이 소모되어 이후 송의 국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川本芳紹, 2005).
이상에서 살핀 중국 남북조의 대결관계를 놓고 볼 때, 이 시기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된다.
첫째, 북위를 상대로 한 대결에서 송의 약세가 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대송 외교를 지속했다는 점이다. 450년에 벌어진 송과 북위의 교전은 양국 대결에서 송이 역부족임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이듬해인 451년에 고구려 사절이 송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 같은 역관계에 대해 고구려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고구려는 대북위 외교를 재개한 462년까지 다섯 차례의 사절(453·455·458·459·461년)을 보내 대송 외교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북위에 대패하여 국력이 기울기 시작한 송은 곧 문제가 453년 황태자에게 시해되었고, 아우 유준(劉駿)이 이를 수습하고 효무제(孝武帝)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제 시해부터 시작된, 형제·일족을 차례로 살해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였고, 이 같은 일이 그 뒤에도 거듭되면서 송 왕조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川本芳昭, 2005).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고구려와 송의 관계에 어떠한 모습이 보이는지를 살펴, 고구려가 대송 외교를 추진한 의도와 외교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당시 국제관계에서 주축은 송과 북위였고, 이들의 대립이 이 시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대전제가 되었다는 이해(金鍾完, 2002)는 옳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런 국제정세 속에서 각국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점은 또 다른 문제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438년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고구려와 송의 분쟁 이후 전개된 양국 관계에서 고구려가 보인 입장은 결코 ‘반북위·친송’이라고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송과 북위의 대결이 당시 국제관계의 주축이었다는 점에 주목한 연구들은 고구려가 송과 연계하여 북위에 대항하려 했다고 본다(江畑武, 1968; 金鍾完, 1995; 노태돈, 1999; 김진한, 2018). 그러면서도 정작 그 상대가 되는 송의 전략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송이 북위와의 대결 속에서 고구려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점은 송과 고구려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 점에서 『송서(宋書)』에 등장하는 송이 북연왕 풍홍을 영입하려고 사절단을 보낸 사건은 송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다. 송이 북연왕을 맞이하려 보낸 사절단의 규모는 7,000여 명이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사절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송이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요동에 세력 근거를 마련할 기회로 만들고자 했거나(노태돈, 1999; 金鍾完, 2002), 고구려나 북위와의 충돌 가능성에 대비하여 병력을 보낸 것(백다해, 2016)일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사절에 대해 송은 북연왕을 맞아들이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이를 송의 진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북연왕 풍홍은 그의 왕국이 붕괴되기 이전 여러 차례 송에 도움을 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송은 북위의 공격으로 위급해지고 있던 북연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던 송이 북연왕을 위해 고구려 경내에까지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다는 것은 북연왕에 대한 송의 입장이 변했음을 뜻한다(李成制, 2003).
그러면 이때에 이르러서야 송이 북연왕을 중시하게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북위의 동방에 거점을 만들고자 했다면, 고구려에 의지하고 있는 망명집단을 이용하기보다는 약체였을망정 멸망 전의 북연을 지원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서지 않았던 송이 이때에 와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북연왕의 거취를 놓고 송이 교섭해야 할 상대는 고구려였다. 그럼에도 송의 행동은 일방적이었다. 고구려의 수중에 놓여 있던 북연왕을 내어달라는 것이나 제반 준비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이 송 사절단과 고구려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아 7,000여 명의 사절단에는 상당수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송의 군대와 사절이 고구려로 들어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양측의 연결로 의심받을 행동이었다. 특히 북위에게는 그렇게 보여질 수 있었고, 송이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북위가 이런 상황을 우려하게 되리라는 것도 예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송과 연결된다는 것은 북위의 동방이 위협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李成制, 2003).
이러한 점에서 송이 북연왕 영입을 구실로 출병한 것은 고구려와 북위의 불안한 관계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고 보인다. 설령 고구려의 협력을 얻지 못하더라도 송은 전략적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북위에게 있어 이것은 두 세력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송은 북위의 위협에 대한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반면 고구려는 송의 북연왕 영입 시도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던 대북위 관계가 이로 인해 긴박한 적대관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북연왕을 제거함으로써 송의 전략을 무위로 만들었고, 북위와 송의 대결관계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李成制, 2003). 따라서 고구려와 송의 관계는 송과 북위의 대결관계 속에서 고구려를 제2전선으로 내세우려 했던 송의 전략과 이를 간파한 고구려의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살펴야 할 것이다.
 
2) 송의 대북위 포위망 구축과 고구려의 전략
『송서』에 따르면, 439년 고구려는 송의 요청에 따라 말 800필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해의 사절을 끝으로 고구려는 대북위 외교를 중단하였다. 이로부터 대북위 외교가 재개되는 462년까지 고구려는 아홉 차례에 걸쳐 송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고구려가 이 기간 동안 송 일변도의 외교를 전개했음을 뜻한다.주 001
각주 001)
438년 이후 송에서 남제로 왕조가 교체되는 479년까지 40년간 고구려가 송에 사절을 보낸 것은 모두 16회로 남조의 다른 시기에 비하면 빈도가 잦다(김종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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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구려의 외교가 송 일변도였다는 점에 주목한 연구들은 고구려가 친송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고구려가 당시 송이 추진하고 있던 대북위 포위망에 가담했다고 이해해 왔다(江畑武, 1968; 坂元義種, 1978; 武田幸男, 1989; 徐永洙, 1981; 三崎良章, 1993; 노태돈, 1999; 朴漢濟, 1988; 金鍾完, 1995; 井上直樹, 2000). 대북위 포위망이란 북위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송이 주변 여러 나라와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토욕혼(吐谷渾)-하(夏)-북량-유연-고구려로 이어지는 북위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한 것을 말한다(金鍾完, 1995). 중국 남북조사를 다룬 최근의 연구(窪添慶文, 2020)는 송의 대북위 포위망에서 고구려가 주요 구성원의 하나였다는 이해가 여전히 통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와 중국 왕조 간의 외교는 책봉과 조공의 형식을 통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관계를 이해하는 데 책봉·조공의 여부와 빈도수는 중요한 단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의 대송 외교는 북위와의 불안한 관계를 배경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사절의 교환 여부만으로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구려가 송에 사절을 보낸 아홉 차례의 사행 가운데 그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은 세 건에 불과하다. 438년의 사절은 풍홍을 둘러싼 분쟁 결과, 송 측에 사절의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439년의 경우는 송이 요청한 말을 보내주기 위한 사행이었다. 455년의 사절은 송 문제의 2주기(週忌)를 위문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그 사절의 임무를 알 수 있는 사행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사행은 예외 없이 “사자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遣使獻方物)”는 관용적 표현만으로 기록되고 있어, 당시의 외교 현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이 점에서 462년까지 고구려가 송 일변도의 외교를 전개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만으로 고구려가 친송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李成制, 2003). 더욱이 송 일변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외교는 송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38년과 이듬해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송이 사절을 보내온 사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관심했다고 평가해도 좋을 송의 반응과 관련하여, 송과의 연결이 무얼 의미했으며, 그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상대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주었는가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대송 외교의 목적을 북위 견제 하나로만 설명하는 것에 의문을 표하고, 송이 백제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대응이라고 보기도 한다(김철민, 2016; 백다혜, 2016). 하지만 송이 백제와 연결된다고 해서 그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송이 차지했던 비중을 보여주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관련 이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제 송이 추진하고 있었다는 대북위 포위망과 고구려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다음 자료는 450년 2월 북위 태무제가 송 문제에게 북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순종하라고 요구한 국서의 일부다.
그대는 지난날 북으로 유연과 통모(通謀)하고 서로는 혁련정(赫連定)·저거몽손(徂莒蒙遜)·토욕혼과 결탁하고, 동으로는 풍홍·고구려와 연결되었었다. 그러나 이들 여러 나라는 내가 모두 멸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대가 어찌 홀로 설 수 있겠는가. … 내가 이제 북으로 [유연을] 정벌하는 것은 먼저 유족지구(有足之寇)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대가 만일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올 가을에 다시 와서 공격하여 차지할 것이다. 그대는 발이 없기에 먼저 치지 않을 뿐이다. _ 『송서』 색로전(索虜傳)  
이 국서의 내용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그동안 송이 추진해온 대북위 포위망이 언급되었고 고구려에 대한 북위의 입장도 보이기 때문이다. 국서에서 태무제는 송의 포위전략이 북위를 위협했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송을 위시하여 북위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국가가 모두 북위에 적대했음도 부정하지 않았다. 고구려도 여기에 해당되었다. 북위는 고구려를 송 측에 선 국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위를 저버리고 송과 연결한 국가들을 정벌했다는 국서 내용에 따른다면, 고구려도 제압해야 마땅한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실제 북위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북위가 적대적 행동을 삼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李成制, 2003).
한편 인용 사료의 ‘고구려가 송과 연결되었었다’는 언급과 관련해서는 고구려가 송과, 송에 버금가게 북위를 적대한 유연의 연결을 중계해주었다고 보거나(노태돈, 1999; 金鍾完, 2002; 李成制, 2003), 고구려가 유연과 연결되었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孔錫龜, 1998). 『송서』에 나오는 463년 송의 효무제가 장수왕에게 보낸 조서의 “사표(沙表)에 통역하여 짐의 뜻을 잘 펼칠 수 있었다”는 대목이 바로 송과 유연의 연대에 고구려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표란 유연을 가리키며, 짐의 뜻이란 북위에 대한 공벌(共伐)을 뜻한다(金鍾完, 2002). 특히 『위서(魏書)』에 나오는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에서도 “[고구려가] 남으로 유씨(劉氏: 송)와 통하고 북으로 유연과 맹약하여 서로 순치관계를 이루면서 왕의 전략을 능멸하려 하고 있다”고 고구려와 유연의 연계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도 이 같은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459년 고구려는 숙신을 동반한 사절을 송에 보낸 바 있었다. 숙신의 조공은 역대 중국 왕조에게 왕화(王化)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이때의 사행은 패전과 내전을 겪은 송의 정통성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이 점에서 463년의 조서 내용에 보이는 사표란 사막의 나라인 유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먼 나라인 숙신을 가리킨다는 이해가 최근 제시되었다(백다해, 2020).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나 숙신을 동반했던 고구려 사행을 적시한다는 점에서 타당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송은 북위와의 대결에서 대패한 뒤 국력이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어, 유연과의 군사적 제휴를 도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후자의 이해에 따르면 사표 운운의 언급은 459년 사행에서 고구려가 숙신의 입조를 도와주었던 사정에서 나온 표현이 된다. 물론 고구려와 송 그리고 유연의 연결에 관한 내용은 백제 개로왕의 표문에서도 보인다. 이 점에서 이들 간의 연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종래와 같이 송의 대북위 포위망과 관련하여 고구려가 중계 역할을 떠맡았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북위가 고구려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고구려가 송의 대북위 포위전략에 가담했기에 북위의 위협을 견제할 수 있었다는 이해와는 다른 각도에서의 설명이 필요하다. 앞서 본 태무제의 국서로 보아 북위는 고구려를 송 측에 선 국가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북위의 위협은 상존해 있었다. 그럼에도 실제에 있어서 양국의 충돌이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은 대송 외교를 앞세운 고구려의 전략이 상당히 유효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을까.
송 일변도의 외교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략은 송과 연결했던 유연·토욕혼 등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북위의 세력 확대를 막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대책이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전략은 송과 연결했던 다른 국가들의 그것과 구별된다. 기본적으로 고구려는 송 측에 서서 북위에 대항한 다른 국가들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북위로서는 이들 국가들이 송과 연결될 때 그 위협은 심각해질 우려가 있었다. 이에 북위는 이들을 제압해 나갔고, 심지어 일부 국가를 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관계가 북위를 적대하는 정세였음을 염두에 두면, 북위가 사방을 적대국으로 돌려놓고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북위는 힘의 우위를 내세우면서도 일방적으로 국제관계를 이끌어갈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양 진영 사이의 격전은 북위·송·유연 사이의 국경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토욕혼과 무도국(武都國)이 자리잡은 하남도(河南道)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송과 유연이 교통했던 경유지였기 때문이다(金鍾完, 1995). 자연히 북위는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 방면이라는 세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감당해 나가야만 했다. 이것은 북위로서도 벅찬 일이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한계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438년의 풍홍사건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를 통해 북위와 송의 대결관계에서 고구려의 전략적 중요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송의 풍홍 영입 시도는 고구려가 북위의 동방에서 새로운 전장이 될 수 있음을 북위에 인식시키는 계기였다. 고구려를 북위와의 대결관계에 끌어들이려던 송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는 고구려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문제였다. 고구려는 풍홍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런 가능성을 강하게 비쳤다. 군사적 충돌이 있었음에도 사태를 마무리 짓고 양국 관계를 이어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439년에는 송에 800필의 말을 보내 직접적인 군사적 제휴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음을 보였다. 이와 함께 고구려는 대송 외교를 추진함으로써 행동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태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쪽은 다름 아닌 북위였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고구려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북위에게 그 향배를 의식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고구려는 대송 외교를 추진하면서도 북위의 동방을 위협하려 하지 않았다. 북위의 위협에 맞서 송 측에 기우는 경향을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견제의 선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달리 말해 북위와 송의 대결관계에서 고구려는 중립에 가까운 태도를 표방하였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전략이 다른 국가들과 달랐다고 보인다. 송 일변도의 외교에도 불구하고 송이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무관심에 가까운 반응을 유지했던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한편 고구려가 중립적 입장에 선다는 것은 북위의 적대적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야 유지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대송 외교는 만일에 있을지 모를 북위의 적대행동을 견제하는 안전판의 구실을 하였다(李成制, 2003).
고구려와 송의 관계는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재개한 462년 이후에도 이어졌다. 고구려 사절이 여덟 차례(462·463·467·470·472·474·475·478년)주 002
각주 002)
『남제서(南齊書)』 유회진전(劉懷珍傳)에는 송 태시(泰始) 연간(465~471년)에 송군이 북위의 동래태수(東萊太守)를 항복시키고 그가 억류하고 있던 고구려 사자를 건강으로 보낸 사실이 보인다(김종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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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걸쳐 송의 수도 건강(建康)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송은 463년 7월 장수왕의 책봉호 가운데 장군호를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진호(進號)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 주었다. 고구려는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면서도 송과의 관계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송의 책봉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된다.
송은 479년 남제에게 왕조를 넘겼다. 남제는 건국하고 곧 장수왕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진호하였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여노(餘奴) 등을 사절로 보냈으나, 해로로 가던 중 광주(光州) 해상에서 북위에게 붙잡혀 돌아왔다. 이때 북위는 고구려의 월경(越境)외교를 질책하는 조서를 보냈으나, 고구려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듬해와 484년에 사절을 남제에 보냈다. 그 뒤 494년 문자왕에 대한 남제의 책봉이 있었고 496년에 진호가 이어졌다. 그해 고구려가 남제에 사절을 보낸 것을 끝으로 양국의 교섭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남제는 502년 양(梁)에게 왕조를 넘기는데, 왕조의 존속기간이 짧았던 것과 함께 송 이래 거듭 이어진 내정 혼란이 양국 관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金鍾完, 2002).
고구려가 남제에 사절을 보낸 횟수는 네 차례에 불과하다. 전 왕조인 송에 비하면 양국 관계가 위축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450년대 이래 계속되고 있는 남조의 내정 혼란과 북위에 대해 약세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양국이 책봉·조공 관계를 이루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제를 세운 소도성(蕭道成)은 개국을 기념하는 책봉에서 장수왕에게 기존 관작 중 장군호를 높여주고 나머지는 종전대로 인정하였다. 이는 전 왕조가 행한 책봉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여 이를 추인하는 것을 의미한다(金鍾完, 1995). 남제는 책봉을 통해 자신들이 전 왕조와 고구려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선언에 대해 고구려는 조공 사절을 파견하여 화답하였고, 이로써 양국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는 점에 유의하고 싶다.
한편 고구려의 대송 외교에 대해 경제·문화적 욕구에서 추진되었다는 이해도 있다(김진한, 2018). 고구려는 강남 일대에 모이는 각국의 상품들, 특히 서적·의복 등 선진문물을 입수하기 위해 송과의 교류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남북조가 대결하면서도 한편으로 사절을 교환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문물 교류가 있었으나 그것은 화의(和議)·정전(停戰)·통호(通好) 등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양국의 외교에 부차적인 것이었고, 교역행위는 원칙적으로 사사로이 이익을 꾀한 불법행위였다(金鍾完, 1995). 물론 남조와 교류했던 남방의 여러 나라들은 정치적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지리적 위치상 고구려나 북위와 동일한 차원에서 양측의 사절 교환을 비교할 수는 없다고 본다.

  • 각주 001)
    438년 이후 송에서 남제로 왕조가 교체되는 479년까지 40년간 고구려가 송에 사절을 보낸 것은 모두 16회로 남조의 다른 시기에 비하면 빈도가 잦다(김종완, 2002). 바로가기
  • 각주 002)
    『남제서(南齊書)』 유회진전(劉懷珍傳)에는 송 태시(泰始) 연간(465~471년)에 송군이 북위의 동래태수(東萊太守)를 항복시키고 그가 억류하고 있던 고구려 사자를 건강으로 보낸 사실이 보인다(김종완, 200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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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세기 후반의 국제정세와 남조와의 관계 자료번호 : gt.d_0004_002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