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북위 외교의 재개와 북위의 간섭전략
2. 대북위 외교의 재개와 북위의 간섭전략
1) 북위와의 관계 개선 시도와 양국 관계의 전개
북연왕 풍홍의 거취를 둘러싸고 대립하던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장수왕 27년(439년) 고구려가 북위에 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을 끝으로 관련 사서에서 교섭 사실이 보이질 않는다. 이후 상당 기간 양국은 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양국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462년(장수왕 50년)이었다. 이해 3월, 고구려는 오랫동안 관계를 단절하고 있던 북위에 사절을 보냈다. 이 사실은 23년의 기간 동안 대북위 외교를 중단하고 있던 고구려가 태도를 바꾸었음을 뜻한다. 장수왕은 그동안의 대립관계에서 벗어나 양국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노태돈, 1999).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게 된 원인에 대해 많은 연구들이 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 변화에서 찾곤 하였다. 송의 약세에 따라 송과의 연결이 더이상 자위책이 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백제 개로왕이 사자를 북위에 보내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였고, 물길이 보낸 사자가 북위에 고구려 공격 의향을 밝혔다. 이처럼 고구려 주변의 적대세력이 북위와의 연계를 도모하면서, 고구려는 이들 간의 제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북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야 했다는 것이다(江畑武, 1968; 朴漢濟, 1988; 李在成, 2002; 李成制, 2004; 梁起錫, 2013; 위가야, 2020). 이러한 이해는 북위의 우세가 확실시되어 가고 있던 남북조 대결관계의 추이 속에서 북위와 고구려 주변 적대세력의 연계 가능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가 북위와의 관계에 다시 나선 것은 462년인 데 반해, 백제나 물길이 북위에 접근한 시기는 470년대였다. 고구려 주변 세력이 북위와의 연계를 도모한 것은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가 재개된 이후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주의하여 앞서의 이해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井上直樹, 2000; 2021).
한편 고구려 주변 적대세력의 동향에 보다 중점을 둔 이해도 있다.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백제와 각축해 왔는데, 여기에 더하여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왜의 연결(古川政司, 1980; 박진숙, 2004), 백제와 신라의 동맹(孔錫龜, 1998; 井上直樹, 2000; 김진한, 2018)에 대응하기 위해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이해는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남방에서 조성되고 있던 위기상황에 초점을 두고 살피고 있다. 이 점에서 남방의 정세 변화와 그 위협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지만, 정작 북위와의 관계 개선이 어떻게 대응책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 대북위 외교의 재개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먼저 정리해 보자. 외교를 재개한 장수왕은 465~470년 해마다 사절을 북위에 보냈다. 이 가운데 467년에는 2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 뒤 472~477년에는 한 해에 2회 많을 때는 3회의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나아가 492년에는 무려 4회나 파견하였다. 거의 매년 보내다시피했던 사절 파견의 모습은 6세기 전반까지 보인다. 사절 파견의 횟수에서나 외교의 지속성으로 보아 462년 이래 고구려가 북위에 다가가는 외교를 전개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에 대해 북위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외교 재개라는 고구려의 유화적인 태도에 대해 북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는 5세기 후반 국제정세의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변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그간의 연구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구려의 사절 파견으로 곧 양국은 우호관계로 나아갔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양국이 우호했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고구려의 사절 파견이 보이지 않는 시기가 몇 차례 보인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462년 이후 465년에 사절이 파견되었으며, 이러한 공백이 479~484년, 495~498년에도 보인다. 470~472년처럼 1년의 공백이 있는 경우는 제외하더라도 이 같은 현상을 보였다는 것은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재개했을 때 고구려 사절을 맞이한 북위 측의 반응을 알려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사료상 확인되는 것은 460년대 말 북위가 고구려 왕녀의 납비(納妃)를 요구해 온 일 정도이다.주 003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에 대해 한동안 북위는 무시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李成制, 2004).
납비 요구에 대해 장수왕은 왕제의 딸을 보내는 것으로 응하고자 했다. 폐백을 가져온 북위 사자가 평양에 이르기도 하는 등 고구려 왕녀의 납비는 한때 성사될 뻔했지만, 결국 고구려가 북위 측의 의중을 의심하여 이 일을 무산시켰다고 한다. 여기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납비 요구에 장수왕이 응하려 했다는 점이다. ‘육궁(六宮)의 미비’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북위는 고구려 왕녀를 황제의 후궁으로 요구했을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 결코 반길 만한 조건이 아니었을 듯하다. 왕녀를 지목한 데에서 느껴지는 북위의 태도는 상당히 고압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허실이 알려질 우려가 고구려 내부에서 제기되었듯이, 북위의 의도도 불순하다고 볼 여지가 있었다(李成制, 2004). 그럼에도 장수왕이 여기에 응하려 했다는 것은 이로써 우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 국제관계에서 납비를 포함한 국가 간의 혼인은 서로 우호하겠다는 정치적 결합을 뜻했다(坂元義種, 1978; 朴漢濟, 1988).
이렇게 보면, 장수왕이 납비 요구에 응하려 했던 것은 대북위 외교를 재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위의 태도가 미온적이어서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던 양국 관계를 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한 납비를 위해 양국 사절이 오갔지만, 사절의 왕래가 곧바로 양국 관계의 우호를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납비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 과정이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 재개는 양국의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기에 부족했다고 이해해야 온당하다.
5세기 후반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에서 고구려의 일방적인 사절 파견에 대해 북위는 때로는 고압적 태도를 보이며 관계 개선에 미온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러한 양상은 고구려가 양국 관계의 형성과 유지를 주도해 나간 듯이 보였던 고구려와 송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양국 관계의 주도권이 북위에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462년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게 되었던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무렵 고구려가 직면했던 현안은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어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한반도 내에서 각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나 이들 간의 동맹이, 혹은 물길과 같은 새로운 적대세력의 등장이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를 추동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현안에는 북위가 당사자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472년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낸 사실과 이에 대해 북위가 보인 반응은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외 관계에서 현안이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2) 백제의 청병외교와 북위의 간섭전략
472년 백제 개로왕은 여례(餘禮) 등을 북위에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백제는 이때에 이르러 북위를 상대로 청병외교에 나섰던 것이다. 이전까지 양국이 사절을 교환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백제의 청병외교는 갑작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440년에 백제가 송에 사절을 보냈던 일로 보아 이해에 북위에도 사신을 보냈을 것이라는 이해가 있다(노중국, 2004). 『위서』 개로왕의 표문에 보이는 “지난 경진년(庚辰年: 440년) 이후 신의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의 바다에서 시체 10여 구를 발견 … 나중에 들으니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아 바다에 가라앉은 것이라 합니다”라는 구절은 이때의 사절 파견에 대한 북위 측의 사행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로왕이 472년 북위에 보낸 표문의 서두 부분에 “건국 이래 고구려가 길을 막아 북위에 조공하지 못했으나 … 이제야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는 내용에서(박찬우, 2018), 이때의 일이 백제가 북위에 처음으로 보낸 사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줄곧 중국 남조의 송과 교섭해 왔는데, 이해에 갑자기 북위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여기에서 472년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양국 관계가 백제의 고구려 공격 요청이었다는 점은 이 무렵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살피는 데 주된 소재가 되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적대관계에 서 있었다는 점에서 472년 백제가 대북위 외교에 나선 것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盧重國, 1981; 김철민, 2016), 왕녀의 납비 문제로 인한 북위와 고구려의 갈등을 틈탄 외교(주보돈, 2007; 양기석, 2013), 보다 적극적인 입장에서 고구려를 둘러싼 정세 변화를 공격의 호기로 여겨 북위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는 이해(金壽泰, 2000; 박찬우, 2018; 위가야, 2020) 등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 “개로왕은 고구려인이 여러 차례 변경을 침범해오자 표를 올려 북위에 군대를 청하였다”는 언급이나 『위서』에 “지난 30년간 [고구려의 침입으로] 백제의 국력이 고갈되었다”는 표문 내용은 472년 무렵 고구려의 남진이 백제에 위협을 주고 있었다는 판단의 주된 근거가 되어왔다. 하지만 사료상 확인되는 양국의 교전양상은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던 일과 469년 백제가 고구려 남변을 공격한 두 건에 불과하여, 5세기 후반 양국의 대결은 일단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金壽泰, 2000; 양기석, 2013; 박찬우, 2018). 고구려의 남진이 백제에 위협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백제가 갑자기 대북위 외교에 나선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한편, 백제가 북위와 고구려의 갈등관계를 고구려 공격의 호기로 판단했다는 이해는 백제의 대북위 외교를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살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백제의 대북위 외교는 위기 상황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점에서 그 외교의 진의는 ‘도움을 바라는 청병외교’라기보다는 ‘양국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아가 이렇게 백제가 판단할 수 있었던 근거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필요해 보인다. 개로왕이 표문에서 북연왕 풍홍을 언급한 것은 과거 북위와 고구려 간의 갈등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李在碩, 2004)로 보이지만, 이것만으로 북위가 고구려를 상대로 행동에 나설 것으로 여겼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위서』에 나오는 납비 문제나 표문에서 “나라는 자연히 으깨어졌고 대신(大臣)·강족(强族)이 살육을 그치지 않아 … 바로 멸망할 시점이다”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을 강조한 서술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백제는 북위와의 첫 만남에서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통교조차 없던 양국 관계에서 백제의 이러한 제안은 언뜻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북위는 백제의 외교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백제의 외교는 북위가 여기에 관심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 아래 추진되었던 것이다. 즉 양국의 만남은 북위가 고구려 주변국의 동향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효문제(孝文帝)가 개로왕에게 보낸 조서가 아닐까 한다.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바깥의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잘 알 수가 없었소. _ 『위서』 권100
이 구절은 앞서의 표문에서 개로왕이 서해에서 10여 구의 시신과 의기(儀器)·안장 등을 건져 올렸는데 북위가 백제에 보낸 사절이 아닐까 의심된다고 한 것에 대한 답변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효문제는 황복 바깥의 나라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황복 바깥의 나라는 그 지역적 범위를 특정하기 어렵다. 다만 선후의 내용으로 보아 백제라고(노중국, 2012; 양기석, 2013) 단정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바다 건너 고구려 주변의 나라를 가리킨다고 보여진다(李成制, 2004).
북위가 황복 바깥 지역에 일부러 사절을 보냈던 것은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국이 대립한 이래 고구려는 북위에 굴하지 않고 맞서고 있었지만, 북위로서는 고구려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점에서 북위는 위험 부담이 있는 직접적인 행동보다는 고구려 배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압박하려 하였고, 이를 위해 사절을 보내 연결을 도모했다고 여겨진다(李成制, 2004).
백제가 북위가 공조 상대를 구하고 있음을 전제로 청병외교를 했다는 것은 물길과 북위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위서』 물길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북쪽,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아성(阿城) 일대에서 일어난 물길은 475년 북위에 을력지(乙力支)를 사자로 보냈다. 물길은 이를 통해 자신들이 ‘고구려의 북쪽을 위협하고 있는 세력이며, 지금까지 홀로 고구려에 대항해왔지만 앞으로는 백제 그리고 북위와 연결하여 대고구려전을 전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물길의 이 같은 제안은 백제의 청병외교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북위와 군사적 연계를 도모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이 역시 북위가 응할 것이라는 판단이 없고서는 실현 가능성이 전무했다.
물론 북위와의 군사적 연계를 도모했던 백제·물길의 바람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점에서 앞서 살핀 이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효문제의 조서 후반부에 보이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고구려를 함께 치자는 백제의 제안에 대해 북위는 고구려에게 정벌을 가할 죄상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그렇지만 북위가 백제와의 연결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북위는 양국 관계가 긴밀해지기를 원했다. 나아가 ‘고구려가 북위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란 단서를 달고 있지만, 앞으로 백제의 제안에 따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위는 앞으로의 정세를 보아가며 고구려에 대한 대응을 함께하자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李成制, 2004; 위가야, 2020). 게다가 북위는 사자 소안(邵安)을 백제에 보내 이 같은 입장을 전달하고자 했다. 제휴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북위가 백제의 도전을 부추기고 있었음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李成制, 2004).
또한 북위는 백제의 표문 내용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사절을 고구려에 보내기도 했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백제를 전략적으로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북위는 백제 사절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구려에 의도적으로 내보였던 것이다. 이 같은 점들은 북위가 백제와의 연결 가능성을 내세워 고구려를 압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북위 사절 소안은 백제 사신을 이끌고 고구려를 경유하여 백제로 가려 했다. 결국 이 일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여기에서 북위는 고구려와 주변국가 간의 관계에 간섭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북위의 전략은 양국이 대면하고 있던 일부 국경만이 아니라 고구려 세력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북위의 전략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를 보여주는 실례가 물길의 대북위 외교였다. 물길의 등장 자체는 고구려에게 지엽적인 문제로 간주될 만했다. 그렇지만 물길이 북위의 전략에 편승하여 고구려에 적대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힘의 열세가 분명한 세력조차 북위와의 연결 가능성을 배경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길이 등장하여 북변을 소란케 한다는 것은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대응해야 할 상대가 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일부 방면에 한정되어 있던 적대의 움직임이 북위의 간섭에 따라 전 방면에 걸쳐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고 보인다. 북위의 간섭전략은 고구려 주변 세력들에게 고구려를 상대로 한 도전에 나설 수 있는 촉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백제가 시도했던 군사협력과 같은 관계라도 맺어진다면 고구려는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북위의 간섭을 차단하고 또 다른 도전세력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고구려는 양국 관계를 개선해 두어야만 했다(李成制, 2004). 『위서』에 이 무렵부터 고구려가 북위에 보내는 공헌물을 배로 늘렸다는 기록은 백제의 청병외교에 대응한 것(노태돈, 2005)이라거나 양국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것(위가야, 2020)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사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5세기 후반 대북위 외교를 중심으로 했던 대외관계 속에서 고구려가 475년 백제 수도 한성(漢城)을 공략한 일과 479년 지두우(地豆于) 분할을 두고 유연과 공모했던 사건은 그동안의 추이와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장수왕은 475년 9월 직접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성을 공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8,000명의 포로를 이끌고 귀환했다. 고구려의 전격적인 공격에 백제는 국왕을 잃었을 뿐 아니라 한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 지역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양기석, 2013).
시라무렌(西刺木倫) 유역과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 자리잡은 지두우와 거란(契丹)은 고구려와 북위의 접경지대에서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북위가 북연을 무너뜨리자 뒤따라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갔던 세력이기도 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위서』에 따르면, 이 지역의 또다른 세력인 고막해(庫莫奚)가 시라무렌 북방에 있던 지두우의 침략을 피해 북위의 경내로 들어가려 했고, 거란 역시 1만여 명의 무리가 지두우를 피해 북위 방면으로 밀려들어가 북위의 변경을 어지럽게 하는 사건이 473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일어났다. 이들이 갑작스럽게 근거지를 떠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북방 유목세계의 패자인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를 분할하려 한 데 있었다. 고막해와 거란이 집단적으로 탈주케 할 정도로 고구려의 움직임은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李成制, 2004). 이 일로 북위가 동방 일대에서 구축해온 안정은 훼손되었고, 자연히 이 일대에 대한 영향력도 실추되었다(노태돈, 1999).
고구려는 대북위 외교를 전개했지만, 그것만으로 북위의 입장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백제의 외교에 대해 북위가 보인 반응은 다른 방도의 모색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성 공략과 지두우 분할 모의는 별개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목적 아래 추진된 전략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두 사건 모두 북위와 관련 있다 는 점에서 그렇다.
고구려는 한성 함락과 개로왕 살해를 통해 백제를 내세운 북위의 간섭전략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로써 백제와의 관계를 앞세워 고구려를 압박하려던 북위의 의도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유연과의 연결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고구려의 향배에 따라 언제라도 북위의 동방과 북방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북위인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이들 사건은 고구려가 북위의 전략을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세적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군사행동과 짝하여 그동안 전개했던 대북위 외교도 중단했다. 앞서 살핀 479~484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상되는 북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신생 남제에 보낸 사절이 중도에서 북위 측에 사로잡힌 사건은 이 무렵의 일이다. 『위서』에 따르면, 이때 북위는 “국경을 넘나들며 찬적(簒賊)과 교통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藩臣)으로서 지절(志節)을 지키는 의리라 하겠는가” 하며 고구려를 비난하였다. 사안의 중요성이나 바로 앞에 있었던 유연과의 모의 등의 일로 보아 양국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북위는 고구려 사절을 풀어줌으로써 사건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비로소 북위도 양국의 우호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李成制, 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