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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고구려 세력권의 동요와 전제해외

3. 고구려 세력권의 동요와 전제해외

1) 신라의 고구려 세력권 이탈과 고구려의 군사적 대응
475년 장수왕의 전격적인 공격으로 백제의 왕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사로잡혀 죽었다는 것은 숙적이었던 양국 관계에서 특기할 사건이었다. 3만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장수왕이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백제가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주요한 상대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5세기 후반기에 양국이 교전한 사례는 4회에 불과한 데 비해, 고구려와 신라의 교전 사실은 여덟 차례에 걸쳐 보인다. 이는 모두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여 일어났으며 그중 6회가 470년대 후반부터 6세기로 들어가는 시점에 집중되어 있다. 이 점에서 5세기 후반 특히 470년대 후반부터 고구려의 주공은 신라를 향해 있었다(양기석, 2013).
고구려에 대해 종속적 관계에 있던 신라가 이탈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전반기였다. 그러던 신라에 대해 이 시기에 들어서 고구려가 거듭 군사행동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은 양국이 끝내 적대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서 5세기 후반은 격변의 시기였던 것이다.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이 시기 양국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실물자료다. 449년 12월을 전후하여 벌어진 일을 기술하고 있는 이 비에서 양국의 관계는 ‘여형여제(如兄如弟)’의 형제 관계로 서술되고 있어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가 신라를 속민(屬民)으로 간주했던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鄭雲龍, 1994). 그럼에도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전했다. 비문에는 태왕(太王)의 교(敎)에 따라 신라매금(寐錦)과 신료들이 충주까지 와서 고구려 측이 주재하는 행사에 참여했으며, 고구려 장수가 주둔지의 신라인을 역역(力役) 동원했음을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국 관계는 곧이어 파국을 맞이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50년 7월, 고구려 변장(邊將)이 실직(悉直: 삼척)의 들판에 사냥 나갔을 때 신라의 하슬라성주(何瑟羅城主)가 급습하여 죽인 일이 일어났고, 장수왕은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략했다.주 004
각주 004)
이 기록은 고구려 변장 살해로 촉발된 군사적 위기가 신라왕의 ‘비사사지(卑辭謝之)’로 수습되었음을 전한다. 여기에서 고구려 변장 살해는 군사적 위기를 불러온 원인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450년 7월은 고구려군의 철수로 사태가 수습된 때였다(李成制,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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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라 눌지왕의 “공손한 말로 사죄하다(卑辭謝之)”로 고구려군이 철군하며 일단락되었지만, 고구려 변장 살해는 신라가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더 이상 종속적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林起煥, 2000). 또한 변장 살해사건에서 보인 대응은 고구려가 양국 관계의 현상 유지를 원했음을 보여준다(鄭雲龍, 1994). 고구려는 신라가 적대적 입장을 보였음에도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여 고구려 세력권으로부터 이탈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이에 대해 신라는 왕도 경주(慶州)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병 100명을 죽임으로써주 005
각주 005)
이 사건이 일어난 연대에 대해서는 464년(정운용, 1994)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 변장 살해와 이어진다는 점에서 453년(장창은, 2012)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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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세력권에서 벗어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기존의 백제에 더하여 신라까지 상대하게 되었고, 신라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백제와 연대했다. 465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군은 백제를 구원했다. 그 뒤 468년 고구려는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의 실직성(悉直城)을 공격했고, 475년에는 앞서 보았던 고구려의 한성 공략에 대해 신라가 1만 명의 병력을 보내 구원에 나섰다.
신라는 468년 고구려가 실직성을 침공하자, 하슬라인(何瑟羅人)을 동원하여 니하(泥河: 남한강 상류)에 성을 쌓았다. 북변 요새지에 대한 공세를 차단하고 방비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鄭雲龍, 1994). 이어서 470년에 충북 보은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고, 473년에는 명활성(明活城)을 고쳐 쌓고 475년에 국왕이 이거하는 등 왕경 방어 조치를 취하였다(閔德植, 1987).
이후로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이어졌다. 『삼국사기』에 481년 고구려가 7성을 함락하고 미질부(彌秩夫: 興海)까지 진공한 것은 그 공세가 신라의 수도 외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때 신라는 백제·가야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 니하까지 북진하였다. 고구려는 484·489·494·495년에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특별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497년의 공격으로 니하 부근의 우산성(牛山城)을 함락하였는데, 그 위치는 강릉·삼척(鄭雲龍, 1994) 혹은 정선·영월(張彰恩, 2012)로 여겨진다. 파상적 공세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신라 북변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제압하여 세력권 내에 묶어 두려 했지만, 그 의도를 이룰 수 없었다.
한편 5세기 후반기 고구려와 신라·백제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고구려의 공세에 맞서 신라와 백제가 군사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가 백제에 원군을 보낸 일로부터 양국이 고구려의 공세에 대해 군사적 협력으로 대처했음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481년의 전역은 고구려의 공격에 대한 공동 대응이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시기 공방전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상호 간 군사동원 기록이 없는 전역이 보인다는 점에서 양국의 군사적 협력관계가 이 시기에 성립되었고, 줄곧 유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김병준, 2018). 따라서 나제동맹이 고구려가 대북위 관계를 재개하도록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는 없겠다.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는 그 주변의 특정 국가나 어느 한두 해의 현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462년 사절 파견을 재개한 이래,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가 거의 줄곧 이어졌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과 전제해외(專制海外)
그런데 이렇게 바라보면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이해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발견된다. 즉 435년 장수왕이 북위 태무제로부터 책봉된 이후 평원왕까지 역대 고구려왕은 모두 북조 여러 왕조로부터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이나 동이교위(東夷校尉)의 관(官)이 포함된 책봉호를 받았다. 이 같은 사실에서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그동안의 이해는 북조가 동이교위의 직능을 고구려왕에게 위임했으며, 고구려왕을 동북아 지역의 수장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보아왔다(盧泰敦, 1984; 金鍾完, 2004).
그러나 앞서 살핀 473년 북위 황제가 백제왕에게 보낸 조서는 그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를 동방지역의 패자(霸者)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 점에서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가 재개된 시기는 물론이고, 435년 이래 북위가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리어 북위 측의 간섭전략으로 보아 고구려는 이른바 동이세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북중국 왕조가 최초로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이래, 북위는 동방 여러 나라 가운데 고구려에게만 책봉호를 수여했다. 북위의 동·서 분열로 등장한 동위(東魏), 이를 계승한 북제(北齊) 역시 그러했다. 북위부터 북조의 여러 황제들은 고구려 국왕을 책봉하면서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郎將)·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의 특정 군관직을 수여했다. 이들은 본래 동이를 감호하던 군관직이었다는 점에서주 006
각주 006)
해당 집단을 통령 혹은 보호한다고 해서 ‘지절영호관(持節領護官)’이라 하거나 다른 민족을 통제한다고 하여 ‘이민족통어관(異民族統御官)’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한대 이래 내외의 여러 민족을 관리하는 일을 ‘영호(領護)’라고 표현했고, 이 임무를 2,000석의 관위를 지닌 군관들이 담당했기에 이들을 ‘영호군관(領護軍官)’이라 칭하기도 한다(李周鉉,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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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이해는 이 책봉호가 수여된 배경에 주목해 왔다(盧泰敦, 1984; 朴漢濟, 1988; 張國慶, 1989; 三崎良章, 2000; 林起煥, 2002; 金翰奎, 2004; 尹龍九, 2005).
중국 남북조시대의 책봉·조공 관계 연구에 따르면 책봉은 중국이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황제가 주변국가의 수장에게 특정한 관작과 그에 상응하는 물품을 사여함으로써 자격과 지위를 부여하고 공인하여 신속(臣屬)시키는 양식으로, 주변국은 책봉을 통해 그 세력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고 이해된다(金鍾完, 1995). 이러한 시각에서 435년의 책봉은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공인한 조치로 그 책봉호 가운데 ‘영호동이중랑장’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의 범위인 ‘요해(遼海)’는 북위의 동방, 요하 이동의 세계를 뜻한다고 보았다(盧泰敦, 1984; 三崎良章, 2000).
하지만 책봉호의 내용을 보면 북위가 고구려를 동방의 패자로 인정하고 그 독자적 세력권을 공인했다고 보기에는 걸맞지 않은 부분이 보인다. 우선 책봉의 내용은 장수왕을 정동장군(征東將軍)·영호동이중랑장으로 삼아 관할범위인 요해를 ‘도독제군사’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동장군은 패자라는 지위에 비해 낮은 장군호에 해당한다. 북위의 관품에 따르면 정2품에 해당하는 장군호이며, 그마저도 하위였다. 장군이 군주로부터 독자적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보여주는 ‘사지절(使持節)’이 없다는 점도 이상하다. 요해의 범위가 막연하다는 지적도 있다(金鍾完, 1995).
종래의 연구는 도독제군사의 내용과 영호군관직의 수여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장군호와 사지절 역시 책봉호의 중요 요소에 해당한다. 남북조는 진봉(進封)할 때 장군호를 상위직으로 바꾸어 제수하곤 했다. 이 점에서 장수왕의 장군호 역시 그에 걸맞는 것이어야 했다. 또한 이 책봉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북위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정세로 보아 북위는 북연 공략이라는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장수왕 책봉이 필요했다고 보인다. 북위의 전략이 이러했다면 이때의 책봉이 고구려의 실력을 인정하고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북중국을 제패해 가고 있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북위의 입장으로 보아 장수왕이 조공 사절을 보내온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 고구려를 특별히 우대해 주어야 할 까닭은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사한 책봉 내용이 보인다는 점에서 토욕혼의 사례가 도움이 된다. 493년 효문제는 토욕혼왕 복련주(伏連籌)를 책봉했는데, 책봉호의 구성 내용이 동서(東西)의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구성 내용과 전부 동일하다. 도독제군사와 영호군관직이 ‘요해’와 ‘서수(西垂)’, ‘동이’와 ‘서융(西戎)’으로 대치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유사성에서 북위가 양국을 동서의 번병(藩屛)으로 여겨 그 세력권을 인정했다고 보는 이해가 있었으나(三崎良章, 1982),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즉위한 복련주는 병이 있다는 핑계로 북위의 입조 요구를 거부하고 변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북위를 자극했고 문명태후(文明太后)의 부고(訃告)에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벌 논의가 있었고 정벌에 앞서 회유의 뜻을 담은 효문제의 조서가 전달되었다. 이 같은 북위의 압력에 토욕혼은 세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토욕혼은 북위의 압력에 굴복했던 것이다. 책봉의 배경이 이러했다면, 북위가 토욕혼을 서방의 강국이라고 여겼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이해된다. 실제로 이렇게 이루어진 양국 관계에서 토욕혼의 독자성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탕창(宕昌)과 토욕혼 간에 일어난 분쟁이다. 토욕혼을 대국(大國)으로 섬겼던 탕창이 토욕혼왕에게 평대(平對)하고 사자를 구금한 일이 있었다. 이때 복련주는 군사적 보복에 나서려 했으나 토욕혼에 와 있던 북위 사자는 두 나라 모두 북위의 번(藩)이기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신절(臣節)을 어기는 행위라고 하며 저지했다. 북위의 간섭으로 토욕혼은 인접국과 의 분쟁조차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한편 토욕혼은 영호동이중랑장 수수가 복련주 1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호동이중랑장 책봉은 장수왕에 이어 문자왕에게도 수여되었다. 또한 문자왕을 이은 안장왕은 영호동이중랑장 대신 영호동이교위를 수수하였다. 북위가 인접국의 왕을 책봉하면서 영호군관직을 수여한 사례는 여럿이지만, 그것을 1대에 한하지 않고 승습(承襲)케 하고 중랑장에서 교위로 개수한 예는 고구려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이는 고구려와 북위 관계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양국 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들 책봉이 결코 우호적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자왕의 책봉에 영동이중랑장이 보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장기간의 대립관계와 관계 재개 과정에서 보인 북위의 냉담함을 염두에 두고 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책봉과 짝하여 고구려 세자의 입조를 요구했다는 점은 관계 개선을 빌미로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음을 알려준다. 문자왕의 책봉호 역시 그 명호(名號)에 어울리는 의미를 부여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적어도 문자왕을 책봉했던 492년 무렵까지 북위는 고구려를 동방의 패자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책봉·조공 관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바랐던 서방 관계에서의 안정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면 북위가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대체로 504년(문자왕 13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그 같은 관계의 변화가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과 북위 선무제(宣武帝) 간의 대화에서 북위 동방의 지역 세계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양국 관계의 변화에 따른 조치가 519년 사망한 문자왕에 대해 ‘거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에 추봉하고, 즉위한 안장왕의 책봉에 ‘영호동이교위’를 수여한 것이라 여겨진다. 동이교위는 북위가 요서 경략의 초기부터 설치하여 운용했던 관(官)이다. 『위서』 등의 기록에는 동이교위를 역임한 북위 관인들의 활동상이 전한다. 그러던 북위인의 동이교위 역임은 470년대 이후로 보이질 않 는다. 이 동이교위 관이 고구려 국왕의 책봉호에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위의 동이교위가 맡았던 역할을 고구려 국왕이 이어받은 것이라는 이해도 있다(尹龍九, 2005). 그러나 북위의 동이교위 관은 실직이 아니라 화룡진장(和龍鎭將)이나 영주자사(營州刺史)가 겸한 군관직이었다. 470년대 이후 겸직의 관은 사라졌지만, 북위의 동방 경영을 실제로 담당한 영주자사는 건재했다. 이로 보아 북위의 동이교위 관과는 별개로 책봉호로서의 영호군관 직(職)이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북위가 운용했던 다른 영호군관인 서융교위(西戎校尉)에서도 확인된다. 즉 양자는 계통이 다른 영호군관 직이며, 같은 명호를 가진 직이라도 수여받는 자가 외신(外臣)인가 내신(內臣)인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했으며, 나아가 그 기능 역시 동일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토욕혼은 영호군관의 책봉호를 수수했고 그 지역세계를 영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했음에도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서 그같은 책봉호가 양국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상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북위가 인정했는가의 여부이다. 영호동이교위의 책봉호 수여가 고구려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는 조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동쪽의 무리들을 안무하라(輯寧東裔)’는 선무제의 발언이 있음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선언이 있음으로 해서 영호동이교위의 책봉호 수여는 북위가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제도적 의미를 온전히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북위를 둘러싼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유독 고구려만이 북위로부터 지역세계에서의 독자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책봉·조공 관계가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었음은 다른 국가들의 사례에서 살필 수 있다. 도리어 북위가 이 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책봉·조공 관계의 성립만으로는 북위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보장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여기서 장수왕 후반기부터 문자왕으로 이어지는 시기, 고구려가 전개한 대북위 외교가 이룬 성과가 드러난다. 장수왕은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였고, 북위의 냉담한 반응에도 사절 파견을 지속하였다. 문자왕 역시 양국 관계의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북위와 우호관계를 이룸으로써 북위와 적대세력 간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었다. 영호동이교위의 책봉호 수수가 가진 역사적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李成制, 2015).

  • 각주 004)
    이 기록은 고구려 변장 살해로 촉발된 군사적 위기가 신라왕의 ‘비사사지(卑辭謝之)’로 수습되었음을 전한다. 여기에서 고구려 변장 살해는 군사적 위기를 불러온 원인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450년 7월은 고구려군의 철수로 사태가 수습된 때였다(李成制, 2020). 바로가기
  • 각주 005)
    이 사건이 일어난 연대에 대해서는 464년(정운용, 1994)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 변장 살해와 이어진다는 점에서 453년(장창은, 2012)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해당 집단을 통령 혹은 보호한다고 해서 ‘지절영호관(持節領護官)’이라 하거나 다른 민족을 통제한다고 하여 ‘이민족통어관(異民族統御官)’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한대 이래 내외의 여러 민족을 관리하는 일을 ‘영호(領護)’라고 표현했고, 이 임무를 2,000석의 관위를 지닌 군관들이 담당했기에 이들을 ‘영호군관(領護軍官)’이라 칭하기도 한다(李周鉉, 2008).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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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 세력권의 동요와 전제해외 자료번호 : gt.d_0004_002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