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장왕대 고구려 정계와 대남북조 관계
1. 안장왕대 고구려 정계와 대남북조 관계
1) 안장왕대 정계 동향
학계에서는 5세기 이후 고구려 정국을 이해하기 위해 크게 국내(國內)계 귀족 세력과 평양(平壤)계 귀족 세력이라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국내계 귀족 세력은 국내성(國內城) 도읍기에 형성된 전통적 귀족 세력이고, 평양계 귀족 세력은 427년 평양 천도 이후 형성되었으며 그 중심에 낙랑·대방계 호족과 중국계 망명인이 포함된다(임기환, 1992). 안장왕대 고구려 정국도 이러한 국내계와 평양계 귀족 세력 간의 길항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안장왕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 측 자료에서 수집한 대외관계 기사를 제외하면 고구려 국내 사정을 알려줄 만한 고유한 기사는 거의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사로는 즉위, 시조묘 친사(親祀), 구휼(救恤), 가뭄, 전렵(畋獵), 백제와의 전투, 사망 등 7건이 전부다. 이러한 자료적 한계 속에 개별 기사가 갖는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흥안(興安)은 498년 태자에 책봉된 이후 20여 년을 문자왕 곁에서 국정을 지켜본 뒤, 519년 고구려 제22대 왕으로 즉위했다. 안장왕이 마주했던 고구려 안팎의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안장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고구려 내부에는 불안 요소가 존재했다. 문자왕대 잦은 천재(天災)나 궁문(宮門) 붕괴사건은 왕권 하락을 나타내는 징후로 주목을 받았다(김현숙, 1999). 더구나 고구려는 남변에서 무령왕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백제와 대립하였으며, 북변에서는 물길(勿吉)과 대치하였다. 이러한 대외상황은 고구려 내부에 불안한 기류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김진한, 2020).
그런 가운데 521년 안장왕이 졸본(卒本)에 이르러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지나는 고을마다 구휼을 병행하는 모습은 일련의 수습책으로 주의된다. 더구나 왕의 시조묘 친사는 고국원왕 2년(332년) 이후 189년 만에 보이고 있어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안장왕의 시조묘 친사를 즉위의례적 성격과 순행의 목적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최광식, 1989) 대체로 정치적 행위로 간주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데 주력하였다. 임기환은 시조묘 친사의 공백 기간인 소수림왕대부터 문자왕대까지가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된 시기라는 점에서 정치기반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치적 절차가 필요 없었던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어 5대 동안의 공백을 깨고 안장왕이 시조묘 친사를 한 데는 평양 천도 이후 중앙정계에서 세력기반이 위축되어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국내계 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모색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임기환, 1992). 이 밖에 소외되었던 국내 지역 세력을 포용하고자 한 정치적 목적을 지녔다거나(정원주, 2013) 평양계 정치 세력을 견제하고 국내계 정치 세력과의 유대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최일례, 2015) 대체로 앞선 견해의 연장선 위에 있다.
한편, 왕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거나(민철희, 2002), 강성해진 귀족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왕권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조영광, 2008), 대외정책의 기조 변화를 정당화하고 이를 대내외에 선언하기 위한 의도로 이해하기도 한다(강진원, 2008).
안장왕대 정치 세력의 동향과 관련해서는 대외정책의 전개 과정과 맞물려 검토가 이루어졌다. 당시 정세를 보여주는 자료로 『삼국사기』지리지에 보이는 안장왕과 한씨녀(漢氏女) 이야기와 1977년 중국 요령성 조양에서 출토된 수대(隋代) 〈한기묘지(韓曁墓誌)〉를 주목하였다. 전자에 따르면, 한산주(漢山州) 내 왕봉현(王逢縣)은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왕영(王迎)이라고 한다. 그리고 달을성현(達乙省縣)은 한씨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뒤에 고봉(高烽)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후자는 북위 말 혼란을 틈타 고구려가 한인(漢人)을 대거 데려왔는데 그 가운데 한상(韓詳)이 대사자의 관등을 받고 있음을 전한다.
안장왕과 한씨녀 이야기는 대체로 당대에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한씨녀와 연관된 인사들의 수도 5부 편입은 그에 따른 귀족들 간 갈등이나 불만을 야기하는 요소가 되었으며, 안장왕의 피살과 안원왕 말년 귀족들 간 분쟁으로 이어졌다고 추정하였다(노태돈, 1999). 이후 연구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안장왕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 유입 및 기존 세력과의 갈등구도 속에서 정국을 이해하였다(김진한, 2007; 정원주, 2013; 최일례, 2016).
2) 안장왕대 중국 남북조와의 관계
안장왕 즉위 이전 고구려 외교의 중심 대상은 북위였다. 문자왕대 고구려는 거의 매해 북위로 사신을 보냈으며, 한 해 두세 차례씩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북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주원욱(朱元旭, 479~545년)이나 풍원흥(馮元興, ?~532년)은 여러 차례 고구려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당시 북위 선무제(宣武帝)는 효문제(孝文帝)와 달리 고구려에 대해 유화책을 취하는 등 두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교류가 활발했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김진한, 2006).
북위의 대외정책에서 고구려는 비견할 만한 나라가 없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三崎良章, 1982). 이를 반영하듯, 519년 문자왕이 죽자 북위의 실권자인 영태후(靈太后)는 동당(東堂)에서 거애(擧哀)를 행하고, 사신을 보내 최고위급 관작을 추증하였다.
그러나 안장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북위 관계에서 일련의 변화가 감지된다. 안장왕대 대북위 관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안장왕의 책봉호(冊封號) 조정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확인된다. 문자왕 사후 북위는 고구려에 대홍려경(大鴻臚卿, 정3품)을 겸한 유영(劉永)을 파견하여 안장왕을 책봉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고구려가 양에 사신을 보냈는데 양의 답사(答使)가 북위군에 사로잡혀 낙양(洛陽)으로 압송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북위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종4품상)을 겸한 손소(孫紹)를 다시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사신의 관품 변화가 눈에 띈다. 둘째, 고구려의 북위에 대한 견사(遣使)가 보이지 않는다. 안장왕 재위 기간 고구려의 대북위 사행은 523년 한 차례 정도 확인된다. 셋째, 〈한기묘지〉에 따르면, 효창(孝昌, 525~528년) 연간 고구려가 북위의 변경을 침입하여 유인(流人)을 데려왔다고 전한다. 이에 따라 이 시기 양국 관계가 변화된 배경은 무엇이며, 고구려가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논의가 이뤄졌다.
고구려와 북위 두 나라 관계가 변화된 배경은 주로 북위 측 사정에서 찾는다. 북위의 한화정책에 따라 지위가 낮아진 북경(北境) 선비 무인들의 반감이 6진의 난으로 폭발하였고, 이 난이 진압된 뒤에도 궁정 내분이 지방의 진장(鎭將)들과 연결되어 광범위한 내란으로 발전하여 고구려와 교섭이 일시 두절되었다(노태돈, 1999). 6진의 난 이후 혼란이 계속되자 고구려는 친북위 외교방침을 수정하였으며(김종완, 2002), 혼란을 틈타 북위에 침입하기도 했다(朱子方·孫國平, 1986; 井上直樹, 2001).
한편, 안장왕대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 변화에 대해 북위의 불안정한 내정뿐만 아니라 고구려 내부의 정국 동향과 남북방 관계를 주목한 견해도 있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무령왕대 비약적인 성장을 하며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략을 벌였으며, 북쪽에서는 물길이 북위와 근거리 교역로를 확보함으로써 고구려 북변에 대한 위협을 가중시켰다. 이렇듯 악화된 남북방 관계가 고구려 내부에 불안요소로 작용하는 가운데, 중원 대륙에서는 내란에 접어든 북위에 대해 양 무제가 지속적인 북벌을 단행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관망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대북위 관계를 전면 검토한 것으로 이해하였다(김진한, 2007).
다음으로 안장왕대 고구려가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는지 여부에 대해 살펴보자. 〈한기묘지〉에 따르면, 고구려는 효창 연간 북위의 변경을 침략하여 유인을 데리고 왔다(朱子方·孫國平, 1986). 이에 따라 고구려는 북위의 내란을 계기로 발생한 유인들을 확보함으로써 요서 일대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거나(이성제, 2005) 평주(平州)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았다(井上直樹, 2001).
북위의 내분에 따른 대륙 정세의 변동 국면에 북중국 주민의 상당수가 고구려로 피난해오는 등 그 여파가 밀려왔다. 하지만 고구려는 북중국 방면으로 진출할 의도가 없었고 중국 지역의 내분과 상쟁이 고구려 안위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므로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또한 고구려가 북위의 변경을 공략하고 일부 유인집단을 받아들인 점은 인정하지만 인접한 거란(契丹)이나 고막해(庫莫奚) 등은 지속적으로 북위와 교류하고 있음을 근거로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뚜렷한 증거가 보이지 않음을 지적하였다(김진한, 2020).
한편, 안장왕 즉위 이전 고구려와 양의 교류는 북위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대체로 두 차례(502·508년)에 걸친 양의 문자왕에 대한 책봉호 조정과 두 번(512·516년)의 고구려 견사 기사가 보인다. 이에 따라 책봉호를 통해 고구려의 위상을 살펴보았다. 즉, 당시 고구려가 양으로부터 받은 책봉호를 송(宋)·제(齊) 시기와 비교하여 문자왕대 그 지위가 내려가고 있음을 지적한다(韓昇, 1995). 하지만 502년 받은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은 함께 진호된 국가들의 장군호 가운데 최고위직이며, 508년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은 개편된 장군호 24반(班) 가운데 제23반의 고위직 장군호였다(김종완, 2002). 더구나 제24반에 해당하는 장군호를 주변국 수장에게 진호한 사례가 없으며, 문자왕의 장군호만 조정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가하였다는 사실(백다해, 2020)을 고려한다면 고구려는 양으로부터 주변국에 비해 높은 위상을 인정받았다.
안장왕은 즉위 이듬해인 520년 정월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양 무제도 곧 안장왕을 책봉하고 강법성(江法盛)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도중에 북위 병사에게 사로잡혀 낙양으로 압송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안장왕은 남북조의 동향을 관망하는 가운데 북위가 내란에 빠진 사이, 526년과 527년 연이어 양에 사신을 보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고구려 대양 관계의 변화를 주시하고 그 배경으로 북위와의 관계 변화 및 백제 문제를 살펴보았다. 525~527년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양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를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 악화를 보완하는 외교전술로 보거나(井上直樹, 2001), 북위 내부의 권력다툼에 따른 혼란과 문자왕대 후반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남북방 관계가 고구려 내부에 불안요소로 작용하자 양과 우호관계를 다져나간 것으로 보았다(김진한, 2007). 이 밖에 백제에 대응하기 위한 일환으로 파악하거나(강진원, 2016; 최일례, 2016), 양이 강성해지고 백제가 중흥하면서 고구려에 압력이 가중되자 친양(親梁)정책으로 전환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金錦子,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