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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백제의 대양 관계와 고구려의 대남방 관계

2. 백제의 대양 관계와 고구려의 대남방 관계

1) 백제의 대양 관계와 고구려의 백제 공격
(1) 백제의 친양정책
6세기 전반 백제와 양의 관계는 고구려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백제 무령왕은 일관되게 고구려에 대해 적대정책을 취하였는데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 겪었던 경험과 무관치 않다. 무령왕은 475년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살해되고 한성이 함락되는 상황과 웅진 천도 뒤에도 왕들이 살해되는 등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듯, 순탄치 않은 시절을 보낸 무령왕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고구려에 빼앗긴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양에 대해 화친정책을 취하였다(이기백, 1973)
그런데 양이 50년 가까이 존속했던 것에 비한다면, 현재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백제와 양의 교류 기사는 몇 건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백제의 견사 유무를 확인하기 어려운 양의 책봉 기사(502·524년)가 2건, 백제의 견사 기사(512·521·534·541·549년)가 5건이다.
이 밖에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와 『법화전기(法華傳記)』에는 무령왕 때 백제의 사문(沙門)인 발정(發正)이 양에 유학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牧田諦亮, 1977; 이기동, 2003; 조경철, 2015) 백제의 법화(法華) 신앙에 대한 일면을 알려준다. 또한 성왕대 백제가 요청한 열반경(涅槃經), 모시박사(毛詩博士), 공장(工匠)과 화사(畫師) 등을 양이 보내주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백제의 통교 목적을 잘 보여준다(김상기, 1973).
백제와 양의 관계는 고고자료를 통해 더 잘 드러난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남조(南朝)의 무덤양식을 모방한 벽돌무덤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근에 자리한 송산리6호분에서는 “양의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梁官瓦爲師矣)”는 내용의 명문벽돌이 발견되었다. 특히, 2021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발굴조사를 통해 29호분의 실체를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무덤 입구를 폐쇄할 때 사용한 벽돌 가운데 “이것을 만든 사람은 건업인이다(造此是建業人也)”라는 당시 제작자의 출신지가 기록된 명문이 확인되기도 했다.주 001
각주 00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 2022. 1. 27,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새로운 명문 벽돌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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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무령왕릉의 각종 부장품 가운데 철제 오수전(五銖錢)은 양 무제 때 주조된 것으로 보이며,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는 중국 절강(浙江) 지방의 초기 청자로 판단된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3). 이렇듯, 양과의 통교는 단순한 외교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문화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이기백, 1973).
51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신이 각각 3월과 4월 한 달 정도의 시차를 두고 양에 입조하고 있어 두 나라 사이 외교 경쟁의 모습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했으며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무령왕이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으로 책봉받았다’고 전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 관계를 살피는 중요한 사료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백제는 고구려가 남북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높은 국제적 지위에 대항해서 이와 대등한 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였으며, 이에 대해 양은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인정하였다(이기백, 1973; 유원재, 1991). 이렇듯, 백제는 고구려를 상대로 맞설 수 있을 만큼 국력이 회복되었으며(이기동, 2003; 정재윤, 2009) 백제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노중국, 2012). 나아가 521년 무령왕이 받은 영동대장군은 그 전해 안장왕이 받았던 영동장군에 비해 높은 작호임을 고려해 백제의 위상이 고구려보다 높았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박윤선, 2008; 양기석, 2019).
한편,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관련 사료가 과연 실상을 반영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백제의 한성(漢城) 영유 관련 기사에 대한 불신론을 근거로 허위로 보고하거나 날조하는 것은 백제의 관용(慣用)수단이기에 이 또한 과장한 것으로 보았다(津田左右吉, 1913). 또한 무령왕대 초를 제외한다면 고구려에 대해 수세에 몰렸음을 지적하며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했다(累破句驪)”는 내용은 실상이 아니라 백제의 인식을 반영한 과장이나 대외선전이라고 파악했다(위가야, 2019).
그리고 도홍경(陶弘景, 456~536년)의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 가운데에는 ‘백제가 지금 고구려에 신속해 있다’고 묘사한 내용이 있어(윤용구, 2005) 오히려 백제는 고구려에 신속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에 512년 이후부터 523년 고구려와 백제 간에 전투가 재개될 때까지 전투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점,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비로소 통호했다(今始與通好)”는 사료를 고구려와 백제가 통호한 것으로 이해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화호(和好)관계에 있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서보경, 2003).
학계에서는 『양서』 백제전이 보여주는 사료를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에서 고구려와 백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세부내용에서는 백제의 국제적 위상이 고구려와 비교해 대등하거나 더 높았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양국이 대립이 아닌 우호관계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또한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사료를 백제의 과장된 주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견해나, 백제가 고구려에 신속한 내용을 담은 『본초경집주』와 같은 자료의 등장은 학계의 통설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당시 양국 관계의 실상에 대해서는 어느 한 나라의 일방적 시선이 아니라 시기별 변화양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2) 고구려의 백제 공격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은 6세기 초에도 이어졌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치거나 변경을 침입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04년 북위 선무제를 만난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은 일부 공물이 갖춰지지 못한 책임을 백제에 떠넘기며 비난하고 있다.
이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가 말갈(靺鞨)을 동원하여 공격하거나 백제를 직접 공격하는 기사가 줄곧 이어진다. 예를 들어, 506년 7월 말갈이 고목성(高木城)을 공격하여 6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갔다. 507년 백제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웠으며,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였다. 또한 507년 10월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백제 한성을 공략하고자 횡악(橫岳) 아래 나아가 진을 쳤으나 백제가 군대를 내어 공격하니 곧 퇴각하였다. 그리고 512년 9월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하고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무령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상 고구려의 백제 공격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고목성(髙木城), 장령성(長嶺城), 횡악(橫岳), 가불성(加弗城), 원산성(圎山城), 위천(葦川) 등 전투를 벌인 장소이다. 이들 지명 모두 『삼국사기』 권37 지리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실려 있는 데서 보듯이, 그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동안 여러 연구자들이 관련 지명에 대한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지만 통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
이들 지명 가운데 한성도읍기 당시 고목성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일대로 보는 의견이 강하다(천관우, 1976). 마수책(馬首柵)은 고구려의 마홀군(馬忽郡)으로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지역으로, 횡악은 서울의 삼각산에 비정하고 있다(정구복 외, 2012). 이 밖에 가불성과 원산성 및 위천의 위치는 고구려와 백제, 말갈 간 교전지역의 흐름을 감안하여 한강 이북 지역으로 추정하지만(문안식, 2006; 장창은, 2014) 원산성은 마한과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천안 일대나 금산, 전주, 음성 등에서 찾기도 한다(여호규, 2013; 김영관, 2020).
이렇듯, 관련 지명에 대한 위치 비정이 명확치 않은 가운데, 무령왕이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했다거나 한성을 순행하는 기사 등도 확인되고 있어 논란을 더하고 있다. 만일 『삼국사기』에 보이는 이들 기사를 그대로 신뢰하고 따른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선이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동안 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아왔던 고구려의 한강 유역 영유 주장과 배치된다.
이에 동성왕 이후 보이는 백제와 말갈의 충돌 기사는 초고왕 ~고이왕대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후대 사서 편찬 시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보아 그 사실성을 부정하였다(임기환, 2007). 이와 동일선상에서 507년 고구려병과 연합한 말갈병의 한성 공략 기사 등은 4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상황을 전하는 기사가 잘못 배치된 편년의 오류 사례로 보았다(강종훈, 2006). 또한 웅진도읍기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하는 기사 가운데 등장하는 마수책, 치양성(雉壤城), 우두성(牛頭城), 한산성(漢山城), 고목성, 가불성, 원산성, 한북주군(漢北州郡), 독산성(獨山城), 금현성(錦峴城) 등은 한성도읍기 한강 유역이나 그 이북에 있었던 지명으로서, 한성 함락 이후 백제인들이 집단적으로 대거 남하하면서 지명이 이치(移置)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노중국, 2006).
사실상 고구려의 백제 공격 문제는 한강 유역의 향방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된다. 주지하듯,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직접적인 충돌을 벌였다. 학계의 통설은 475년부터 551년 나제연합군이 점령할 때까지 76년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유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상 근거로 『삼국사기』에 보이는 551년 신라의 죽령 이외 고현(高峴) 이내 고구려 10군 공취주 002
각주 002)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조; 『삼국사기』 권44 열전 거칠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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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한주(漢州)조 고구려 고지(故地) 관련 기사주 003
각주 003)
『삼국사기』 권35 지리 한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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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551년 백제의 6군 수복 기사주 004
각주 004)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2년조,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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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뒤에도 한성 및 한산성을 경영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에 따라 한성 및 한산성 경영 기사를 신뢰하는 입장에서 한강 유역이 백제의 영유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양기석, 1980; 성주탁·차용걸, 1981; 박찬규, 1991; 김영관, 2000). 일부 논자는 백제가 무령왕대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다고 보기도 한다(김현숙, 2003; 주보돈, 2003a; 김병남, 2007; 장창은, 2010).
551년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환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언제부터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는가이다. 이에 연구자들이 주목한 해가 529년이었다. 백제 성왕이 즉위한 뒤, 고구려 안장왕은 백제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벌여나갔다. 특히 『삼국사기』에 보이는 529년 오곡(五谷)전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고양군 고적조의 옛 고봉현과 왕봉 폐현 유래 기사에 보이는 한씨 미녀 일화를 근거로 고구려가 529년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고 보았다(김영관, 2000; 김현숙, 2003; 문안식, 2006; 박현숙, 2010). 아울러 2005년 홍련봉2보루에서 발견된 ‘경자(庚子)’명 토기편을 근거로 아차산 일대의 보루가 529년에서 멀지 않은 이전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백제의 북진을 주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고 적어도 529년부터는 고구려가 한강 이북 지역을 영역지배하였다고 이해했다(장창은, 2010). 다만 안장왕대는 정치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된 시기로 한강 유역을 다시 점령할 만한 기반을 갖고 있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529년 오곡전투 한 번만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김수태, 2010).
한편, 통설에서는 웅진 천도 이후 보이는 『삼국사기』 소재 한성과 한산성 관련 기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대체로 기사 자체를 아예 믿지 않는 불신론(津田左右吉, 1913; 이병도, 1977), 웅진 천도 이후 지명이 옮겨졌다고 보는 지명이동론(今西龍, 1934; 이기백, 1978; 노중국, 2006), 일부 지명의 이동 및 조작론(이도학, 1984), 기년 착종론(강종훈, 2006; 2014; 임기환, 2007; 2008)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강 일대는 물론 한강 이남인 경기 남부와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도 고구려 고분 및 산성 등의 유적과 유물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영유하였다는 통설을 보강하고 있다(최종택, 1998; 양시은, 2010; 윤대준, 2010).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 문헌자료의 신빙성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 사료 비판이 필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불신론에 바탕을 둔 지명이동론이나 기년착종론, 조작론 역시 명증(明證)된 것이 아닌 만큼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고자료에 대한 해석도 문제가 된다. 대체로 고구려의 토기 편년에 기초하여 유적의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토기 편년이라는 것이 자의적이어서 연구자에 따라 그 편차가 너무 커 해석상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 가지 제언하고 싶은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였다는 인식이 강한 탓에 두 나라 사이 문화적 교류까지 단절되었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대립하고 있을 동안에도 문화는 끊임없이 교류된다. 그런 점에서 475년 백제가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 양국은 이를 둘러싸고 공방을 거듭하였지만 어느 한 쪽이 고정적으로 자신의 영토로 확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주보돈, 2006)도 주의해볼 만하다.
 
2) 고구려의 대남방 관계
(1)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관계로 일관할 때, 변수로 작용한 것이 신라의 동향이다. 대체로 6세기 전반 삼국 관계는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했다는 견해가 통설이다(진단학회, 1946; 노중국, 1981). 551년 백제와 신라가 함께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환한 만큼 별다른 의심 없이 5세기대 고구려와 신라 관계를 그대로 투영한 면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 신라와 백제 관계를 동맹관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이를 토대로 고구려와 신라 관계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사실 고구려와 신라 관계가 5세기와 같지 않다는 점은 여러 정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6세기 전반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에 관한 직접적인 기사가 전하지 않으며(양기석, 1994; 노태돈, 1997),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공동 군사대응도 보이지 않는다(김병주, 1984; 김현숙, 2003). 『일본서기』에는 6세기 초 가야를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가 각축하는 모습이 확인된다(주보돈, 2003a). 또한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연대와 내용을 문자왕대로 파악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연계 가능성을 지적하거나(김현숙, 2003; 박성현, 2010), 504년 북위 선무제의 권고사항을 고구려와 신라 간 관계 개선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박성현, 2010).
특히, 『위서』에는 502년과 508년 사라(斯羅)가 북위에 조공한 기사가 보이는데, 이 사라를 신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末松保和, 1954; 坂元義種, 1978; 武田幸男, 1979; 서영수, 1981; 이기백·이기동, 1982; 양기석, 1994; 박진숙, 2000; 서영교, 2015; 조범환, 2016). 그 근거로 ‘사라’가 신라의 다른 표기라는 점(武田幸男, 1979), 서역에 보이는 사라는 이미 멸망하고 사라진 나라라는 점, 『북사(北史)』에 언급된 502년 서역 27국 견사 기사를 『위서』와 대조한 결과 일치하는 나라가 4개국에 불과한데 나머지는 모두 서역의 나라라고 했을 것, 502년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점을 들었다(서영교, 2015).
이에 따라 신라의 대북위 관계를 전제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을 펴고 있다. 6세기 초반까지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었다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79; 1980; 서영수, 1981), 신라가 고구려를 위협할 만큼 성장하였고 고구려도 외교전술에 따라 북위 외교를 중개한 것으로 보는 견해(木村誠, 1997), 6세기 초반 고구려와 신라 관계가 우호관계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견해(양기석, 1994; 박진숙, 2000; 서영교, 2015; 조범환, 2016)가 그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505년 실직주(悉直州)와 512년 하슬라주(何瑟羅州)를 설치하는 등 동해안 방면으로 북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노태돈, 1997; 주보돈, 2003a). 고구려와 신라 연화설(連和說)의 근거가 된 ‘사라=신라’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서역에 사라국(斯羅國)이 있고, 그 전후에 기록된 국가들 모두 서역에 위치하였음을 들어 ‘사라=신라’설을 비판하였다(이문기, 1988; 李成市, 1999; 井上直樹, 2000). 또한 사라가 북위에 간 시기는 502년과 508년 3월이다. 502년은 어느 시점에 왔는지 알 수 없어 단정하기 어렵지만 508년 3월은 고구려의 파견 시기와 맞지 않다. 그렇다고 고구려 사신의 동행 없이 신라 사신이 단독으로 양해를 얻어 고구려를 통과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연대나 내용을 문자왕대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특히 고구려가 북위 선무제의 권고사항에 따라 신라와 화약을 맺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섭라(涉羅)가 신라인지 여부도 불확실하지만 권고의 규정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실제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김진한, 2020).
이 시기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자립했는가도 논란이다. 이 논란의 근거는 504년 예실불이 선무제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언급한 백제의 부용국(附庸國) ‘섭라’가 어디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제주도설과 신라설 두 가지가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이 두 설 모두 섭라의 특산물인 가(珂)를 근거로 삼았다.
최근에는 신라의 국호 설라(薛羅)가 ‘섭라’와 음운상 같다는 신경준의 주장과 ‘가’의 실체가 말재갈 장식보다는 옥의 범주에 포함되는 마노(瑪瑙)가 더 유력하다는 점을 근거로 ‘섭라=신라’설을 보강하였다(장창은, 2018). 이에 대해 이 시기 한반도 중서부 이남의 제해권은 백제의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백제의 섭라 병탄’ 언급에 보이는 섭라는 탐라를 지칭한다거나(박남수, 2018), 북위가 마노의 주요 산지를 제어할 수 있었던 만큼 굳이 고구려에 마노 공납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가’를 제주도 특산 패류(貝類)로 보고 섭라는 제주를 가리킨다는 반론(정운용, 2020)도 제기되었다.
이상으로 고구려와 신라 관계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유의해 볼 점은 ‘섭라=사라=신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즉, 앞서 북위에 간 사신 예실불의 언급 가운데 백제에 병합된 것으로 나오는 섭라를 신라로 이해한 가운데(주보돈, 2006), 사라를 신라로 볼 수 있다면 고구려나 백제가 조그마한 나라라는 의미로 신라를 ‘사라’라 불렀는데 그렇게 표기된 것이 고구려를 매개로 하였기 때문일 여지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주보돈, 2019).
이렇게 볼 경우, 502년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북위에 갔기에 신라가 아닌 사라로 표기되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자신의 도움을 받은 ‘조그마한 나라’로 북위에게 인식시킨 것이 된다. 그런데 504년 예실불은 선무제와의 대화에서 공물을 갖추지 못한 이유를 백제가 섭라를 아울렀던 탓으로 돌리며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502년 12월과 504년 4월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다. 고구려는 시간상으로 16개월 만에 신라를 자신의 부용국처럼 표현했다가 다시 백제의 부용국으로 바꿔 말한 것이 된다. 외교가 자국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지만 고구려가 손바닥 뒤집듯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를 자국의 부용국에서 백제의 부용국으로 표현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따라서 ‘섭라=사라=신라’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섭라와 사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
아직은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에 대항하여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만, 고구려와 신라 관계를 새롭게 보려는 주장의 근거를 들여다보면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장수왕대부터 양원왕대까지 한 세기를 고구려와 나제동맹의 대결로 이해하기에는 그 시간 속에 녹아 있는 삼국의 이해관계가 결코 한결 같지 않았다. 사람도 바뀌었고 상황도 바뀌었는데 고구려 대 나제동맹의 대결구도로 일관해서 이해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 사이 삼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좀 더 세밀하고 정치한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2) 가야·왜와의 관계
고구려와 가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에 가로막혀 사실상 직접적인 교섭을 벌이기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다. 다만, 400년 광개토왕의 남정 당시 가야는 고구려와 직접 전투를 벌였으며, 481년에는 미질부(彌秩夫)까지 진군해왔던 고구려군에 맞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일원으로써 싸웠다.
고구려와 가야가 5세기 이후 6세기 전반까지 일관되게 대립을 지속하였는지 여부는 관련 사료가 없어 알기가 어렵다. 『일본서기』에는 현종 3년(487년) 임나와 고구려의 교통 기사 이후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다가 흠명(欽明) 9년(548년) 고구려가 백제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한 기사를 통해 고구려와 가야 관계를 추정할 만한 내용이 처음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동안 가야세력은 백제나 신라와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간접적으로나마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고 이해해왔지만, 고구려와 가야 사이를 연결한 어떤 존재가 있었음을 인정하려는 견해도 있다(박윤선, 2010).
한편, 고고학적으로도 일부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보고되고 있지만 출토 상황이나 유물 상태가 좋지 않아 이것만으로는 고구려와 가야가 의도적인 그리고 직접적인 교류를 맺었다고 볼 만한 정황은 확인하기 어렵다(김태식, 2006; 이영식, 2006).
다음으로 고구려와 왜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왜 관련 기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광개토왕비〉를 통해 5세기 고구려의 대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비문에 보이는 왜는 고구려적 천하의 바깥에 있는 이질적 존재로 간주되었으며(노태돈, 1999), 고구려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이자 고구려 천하관 속에 포함된 속민(屬民)과 다른 이차적인 존재로 파악했다(주보돈, 2005).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남아 있던 왜 관계 기사는 6세기에 접어들면 한국 측 자료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렇듯, 왜 관계 기사가 소멸한 원인을 두고 일본 학계에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삼국사기』가 왜 관계 기사를 편찬할 때 중국 사서에 기재된 왜 기사를 편년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보면서, 6세기 왜 관계 기사의 공백은 사실의 반영이나 사료의 결락이 아니라 중국 사서의 편년을 따르기 위해 편찬할 때 기사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鈴木英夫, 1985).
그러나 왜 관련 기사가 비단 한국 측 자료에서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왕의 중원 왕조에 대한 견사는 478년 왜왕 무(武)가 표를 올려 관작을 주청한 이후 6세기 말까지 정식 국교가 중단되었다(西嶋定生, 1985). 앞서 왜는 266년 진(晉)에 견사한 이후 413년 동진(東晉)에 견사할 때까지 약 150여 년간 교류양상이 확인되지 않기도 했다. 따라서 6세기 전반 왜 관련 기사의 공백은 『삼국사기』 편찬자가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이 아니라 왜가 국제사회와의 교섭에 소극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가운데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와 왜의 교섭을 보여주는 기사가 두 건 보인다. 하나는 계체(繼體) 10년(516년) 백제 사신을 따라 고구려 사신 안정(安定) 등이 내조(來朝)하여 왜와 결호(結好)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백제와 고구려가 512년 전투 이후 교전 기사가 보이지 않는 등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을 동안 백제가 고구려의 왜 교통을 인도하였던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이홍직, 1954). 또한 기년(紀年)조정론에 따라 3년을 내려 519년 기사로 파악한 뒤,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와의 통호를 꾀하면서 백제의 중개에 따라 왜에 견사하여 신왕 즉위를 알리려 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三品彰英, 2002). 이 밖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와 일본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으며, 고구려는 일본의 지지를 얻어 신라와 백제에 대항하고자 516년 사신을 보내어 일본과 결호했다는 주장도 있다(朱旻暾, 1995).
근래에는 계체 10년조 기사에 ‘무인(戊寅)’이라는 일자와 고구려와 백제 사신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 사료에 보이는 인명과 외교용어 모두 백제나 한반도 계통 사료에서 나온 것이므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어 『삼국사기』에 512년 이후부터 523년 전투가 재개될 때까지 전투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점,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관련 사료를 “여러 번 고구려를 파해 이제 비로소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稱累破句麗 今始與通好)”로 해석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화호관계에 있었다고 했다. 결국 이를 근거로 백제가 고구려와 왜의 교섭을 주선하여 양국은 우호를 맺기에 이르렀다는 견해까지 나왔다(서보경, 2003). 『일본서기』 역주서에도 고구려가 왜에 파견한 최초의 사신으로 기록하는 등(전용신, 1989; 연민수 외, 2013) 양국이 외교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입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계체 10년조 기사를 백제왕에 의한 위장 파견이 짐작되는 기술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영식, 2006). 더구나 무령왕 지석의 발견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년조정론은 그 허구성이 밝혀진 만큼 이를 519년의 기사로 보기 어렵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왜의 통호관계를 보여주는 기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에는 계체 10년을 전후로 고구려와 왜, 고구려와 백제 관계를 살필 만한 기사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와 백제 전투 기사가 512년 이후 확인되지 않는 점에서 양국이 소강상태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521년에는 백제가 양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하는 등 적대관계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었다. 더욱이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고 이제 비로소 우호관계를 맺었다”에서 백제가 우호를 맺은 대상은 고구려가 아니라 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 기사는 사실성이 의심된다. 설령, 고구려인 안정이 왜에 갔다 하더라도 공식적인 고구려 사신의 대왜 파견으로 볼 수 있을지는 주변 상황에 대한 검토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흠명 원년(540년)조에는 이해 8월 백제, 신라, 임나와 함께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음을 전한다. 540년 고구려의 대왜 조공 기사는 천황의 입후(立后) 및 천도 등 치세의 시작과 함께 기록한 것으로, 주변국의 내조는 형식적 윤색 기사로 파악하고 있다(三品彰英, 2002; 이영식, 2006). 다만, 실제로 고구려인의 내조가 있었지만 이를 조공으로 꾸며낸 것인지, 고구려인이 내조했다는 사실 자체를 조작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본서기』가 갖고 있는 사료적 윤색과 왜곡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일본서기』에는 한국 측 자료에서 전하지 않는 숱한 삼국 관계 기사가 실려 있어 이를 빼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만일, 이 시기 『일본서기』에서 언급한 대로 고구려가 백제를 따라 왜와 교섭을 했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6세기 전반의 역사상은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시할 점은 사실관계 확인이다.

  • 각주 00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 2022. 1. 27,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새로운 명문 벽돌 출토」. 바로가기
  • 각주 002)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조; 『삼국사기』 권44 열전 거칠부조. 바로가기
  • 각주 003)
    『삼국사기』 권35 지리 한주조. 바로가기
  • 각주 004)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2년조,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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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의 대양 관계와 고구려의 대남방 관계 자료번호 : gt.d_0004_00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