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3. 안원왕대 대남북조 관계와 대백제 관계

3. 안원왕대 대남북조 관계와 대백제 관계

1) 안원왕대 중국 남북조와의 관계
안원왕대 고구려는 남북조에 꾸준히 견사했다. 특히 안장왕대와 달리 매년 북위(동위)에 사신을 보냈다. 북위는 안원왕에게 532년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 散騎常侍 車騎大將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을, 동위는 534년 종1품에 비견되는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더해 주었다. 520년 안장왕이 정3품에 해당하는 안동장군을 북위로부터 제수받았던 것에 비한다면 안원왕은 높은 책봉호를 받은 셈이다.
당시 안원왕이 받은 장군호는 장수왕, 문자왕에 비해서도 크게 상승한 것으로 북위 역사상 최고의 장군호였다(三崎良章, 1982). 더욱이 남북조시대 주변국이 받은 책봉호 중 장군호가 국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로 기능하기도 했던 사실(坂元義種, 1978)을 상기해본다면, 이는 고구려에 대한 높은 기대와 평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위의 안원왕 책봉에 대해서는 그 전제로 안원왕으로부터 사신의 내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坂元義種, 1981).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고구려의 견사는 북위의 외교정책과 어우러져 높이 평가되었으며 그것이 안원왕에게 증여된 장군호에도 반영되었다고 보았다(井上直樹, 2001). 이에 대해 북위의 책봉이 조공에 앞서 보이고 있는 점을 고려해 책봉의 명분을 내세워 북위 측이 먼저 관계 개선에 나섰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성제, 2005).
사신의 입조를 통해 책봉의 수수가 이뤄짐이 일반적이지만 입조 유무와 관계 없이 자국의 필요에 따라 행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신의 입조 유무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 재개 배경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기인한다.
북위 입장에서 살펴본 견해에서는 내란을 수습하고 있던 북위가 동북방의 안정을 위해 안원왕을 책봉해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먼저 관계 개선에 나섰을 것으로 보았다(이성제, 2005). 고구려 입장에서 살펴본 견해에서는 내부의 정권다툼으로 안장왕이 살해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안원왕이 쿠데타에 따른 국내의 동요를 수습하고자 대외관계의 전환을 꾀하여 다시 북위에 조공하게 되었다고 보았다(井上直樹, 2001).
한편, 사치품을 비롯한 각종 문물에 대한 수요와 관련해 보기도 한다. 북위와 잦은 교섭을 가졌던 고구려가 안장왕대 10년 남짓 북위와 공식적인 외교를 중단함으로써 사치품을 비롯한 각종 문물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귀족들의 불만이 안장왕의 정치 행보에 대한 반발과 맞물려 왕에 대한 시해와 대북위 외교의 재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김진한, 2007). 이 밖에 안원왕은 집권 초기 안장왕대의 외교노선을 이어나갔고, 태자 책봉을 계기로 지지세력을 결집시켰으며 북조 역시 안정화에 접어들자 활발한 교섭을 이어갔다고 보았다(강진원, 2018).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안원왕대 대북위 관계에 영향을 미쳤던 이들은 누구였을까? 『삼국사기』에는 531년 안장왕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죽자, 동생 보연(寶延)이 즉위했음을 전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계체기 25년 12월조에서는 안장왕이 시해되었음을 전한다. 또한 『양서』 고구려전에서는 안장왕이 526년에 죽고 아들 연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안장왕의 사망과 안원왕의 즉위를 둘러싸고 각 사서마다 달리 전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이들 기사를 주목하고 그 진위에 대해 검토하였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 정계의 향방에 관심을 기울였다.
안원왕의 즉위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는 안장왕의 시해 여부이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하지 않는 일면을 보여주는 사료로 왕위를 노리는 모종의 음모에 안장왕이 희생된 것으로 보았다(이홍직, 1954). 이에 따라 이들 기록을 토대로 안장왕의 시해와 안원왕의 즉위 과정을 해명하기 위한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다.
먼저 안장왕을 시해한 세력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나왔다. 안장왕의 피살을 국내계 귀족 세력의 동향과 관련해 살펴보거나(임기환, 1992) 한씨녀와 연관된 인사들의 중앙 진출로 고구려 지배층의 통혼권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기존 질서와 갈등을 야기함으로써 안장왕이 피살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노태돈, 1999). 그리고 문자왕이 태손으로 왕위계승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까지 장수왕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었으며, 이때 억압받았던 대상들과 그와 연계된 정치 세력, 그 후손들이 안장왕 시해사건에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현숙, 1999).
이 밖에 장수왕 말년에 탄압을 받았던 낙랑·대방계 귀족들이 안장왕의 왕권 회복 노력에 위기감을 느껴 시해한 것으로 보거나(조영광, 2003) 안장왕의 후계구도와 관련해 안원왕이 선수를 쳐 안장왕을 시해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도학, 2006). 또한 안장왕이 약화된 왕권을 일신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쳤으며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 줄 세력을 규합하고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하여 정계 개편을 시도하다가 시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진한, 2007).
이렇듯, 당시 안장왕을 시해한 세력을 포함한 고구려 국내 정치 세력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을지는 연구자들마다 이해가 다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구체적으로 이들이 누구였는지 짐작할 만한 단서가 남아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인용된 백제본기가 전하는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외척 간 세력다툼이 그것이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안원왕은 정부인(正夫人)·중부인(中夫人)·소부인(小夫人) 세 명의 정실부인을 두었다. 그런데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으며,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외가가 추군(麤群)이며,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외가가 세군(細群)이었다. 각기 그 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자 전투를 벌였는데 세군이 패하였다’고 전한다. 안장왕의 시해로부터 안원왕, 양원왕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분쟁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6세기 전반 고구려 정국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의 기록은 당시 사정을 알려주는 사료로 신뢰할 만하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보듯, 『일본서기』에는 안원왕대 정치 세력으로 추군과 세군이 등장한다. 학계에서도 추군과 세군의 의미와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 결과 추군과 세군을 털이 굵고 가는 동물로써 부족을 식별한 고대적인 잔재이거나 대소가(大小家)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홍직, 1954). 또는 추군과 세군 두 외척 간의 싸움을 왕위 계승과 정치지향이라는 두 측면이 함께 내재한 것으로 보았다. 즉, ‘추(麤)’는 거칠고 크다는 뜻인 반면, ‘세(細)’는 작고 섬세하다는 정반대의 뜻을 지닌 것으로 고구려 사회가 나아갈 지향에 대한 입장에서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거칠고 크다는 것은 곧 고구려적인 지향을, 가늘고 자세하다는 것은 중국적(한문화적) 지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했다(주보돈, 2003b).
한편, 추군과 세군을 지역과 연관시켜 정치 세력을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즉 세군계는 고구려 초기 이래 중앙귀족으로 성장한 전통적인 구 귀족 세력으로 국내(환도) 지역 정치 세력뿐만 아니라 국내 지역과 연고를 맺고 있는 중앙귀족까지를 모두 포괄한 하나의 정치세력권으로 보았다. 그리고 추군계는 평양 천도 이후 국내계 구 귀족 세력이 위축되면서 평양 지역에 기반을 둔 낙랑·대방계 지방호족세력과 중국계 망명인들로 왕권의 뒷받침을 받으며 장수왕과 문자왕대를 거치며 구 귀족 세력과 대립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보았다(임기환, 1992). 이에 대해 ‘추’와 ‘세’를 ‘멀고 가깝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백제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 지역에 세력기반을 두고 있는 정치집단을 추군으로,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정치집단을 세군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남무희, 2007).
이렇듯, 추군과 세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떠한 정치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평양계 세력인지 국내계 세력인지 등 여러 기준에 따라 논의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들이 안원왕대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추군과 세군의 타협 속에 안원왕의 정치적 행보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양원왕 즉위 뒤에도 추군계가 외척으로서 줄곧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고구려가 대북조 관계에 치중하고 있는 점을 본다면 추군계가 안원왕대 대북위 외교 재개에 중요한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김진한, 2007).
안원왕이 즉위한 뒤에도 고구려의 양에 대한 견사는 꾸준히 이어졌다. 『양서』에 따르면 “526년 안(安: 안장왕)이 죽자, 아들 연(延: 안원왕)이 [왕위에] 올랐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로 연이 작위를 잇게 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원왕 즉위조에는 “양 고조가 조서를 내려 습작케 했다”고 나온다. 안장왕의 사망연도는 앞서 본대로 531년이며, 보연(寶延)은 그해 왕위에 올라 양에 사신을 보냈고 안원왕에 대한 책봉도 이때 이뤄졌다.
531년 책봉 수수 이후 고구려의 대양 사신 파견은 532·534·535·541년 네 차례 확인된다. 이와 달리 고구려는 안원왕 즉위 이듬해인 532년부터 사망하기 전해인 544년까지 매년 북조(북위, 동위)로 사신을 보냈다. 이와 비교하면 대양 관계의 비중은 안장왕대에 비해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안원왕의 대양 관계에 대해 동위의 불만이나 갈등 양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안장왕대 양이 파견한 고구려 사신을 낙양으로 압송한 것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이는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재편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 북위는 6년여에 걸친 6진의 난을 진압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크게 약화되어 결국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였다. 이로써 동위와 서위, 양이 경쟁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맞추어 양에 대한 견사를 이어나갔다. 동위 입장에서는 강력한 경쟁 상대이자 적인 서위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양으로 사신을 보내는 고구려에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김진한, 2007).
한편, 안원왕대 대양 관계를 5세기 중엽 이래 형성된 기본적인 대외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안원왕은 집권 초기 정국 장악의 한계와 북위의 내정 혼란에 따라 안장왕대의 외교노선을 이어 대양 외교에 관심을 기울여 나갔다. 이는 북위에 대한 견제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백제가 중흥의 움직임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물품 수요의 충족이라는 면에서도 양과의 교섭을 지속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533년 태자 책봉을 계기로 지지세력을 결집시켰으며 북조 역시 안정화에 접어들자 기존 북조 중심의 대외노선으로 전환하였다고 보았다(강진원, 2018). 안원왕대 대양 관계에 대해서는 연구가 매우 부진한 편이다. 사료 부재의 한계가 있지만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2) 백제와의 관계
529년 오곡전투 이후 10여 년간 고구려의 대백제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비단 사료 부재만이 아니라 고구려 안팎의 사정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안원왕대 고구려 국내 상황은 매우 어수선하여 자연재해가 잇따르는 등 내부를 추스르는 데 힘을 모아야 했다. 백제는 가야를 둘러싸고 신라와 미묘한 갈등을 벌이는 가운데 538년 사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런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양국 관계는 소강상태가 이어졌다(김진한, 2020).
그런 가운데 백제의 선제공격으로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40년 9월 성왕이 연회(燕會)를 보내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했으나 안원왕이 정예 기병 5,000명을 보내 쫓아냈다. 우산성전투는 529년 오곡전투로부터 551년 한강 유역을 둘러싼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의 흐름 속에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가 고구려와의 소강상태를 끝내고 우산성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학계에서도 우산성전투를 주목하고 있지만 우산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우산성은 540년 고구려와 백제 간 전투 이전에 두 차례 더 확인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496년과 497년 고구려와 신라가 전투를 벌인 곳으로 처음 우산성을 언급하였다. 이에 따르면, 496년 7월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실죽(實竹)이 나와 니하(泥河) 위에서 물리쳤으며 497년 8월에는 고구려가 우산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우산성은 5세기 말부터 6세기 전반에 한정해서만 나온다. 『삼국사기』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우산성이 표기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는 미상이다. 학계에서도 의견만 분분할 뿐 통설은 없다. 대체로 산성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496·497년 고구려와 신라 간 전투에 보이는 우산성과 540년 고구려와 백제 간 전투에 보이는 우산성을 동일한 성으로 볼 것인지(이하 ‘동일설’) , 다른 성으로 볼 것인지(이하 ‘별개설’)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동일설은 우산성이 고구려·신라 간 전투와 고구려·백제 간 전투가 벌어졌던 곳임을 주목하였으며 니하의 위치를 비정의 중요 근거로 활용하였다. 별개설은 540년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을 어디로 설정하느냐가 위치 비정의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우산성의 위치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정리하면 표1과 같다.
표1 | 우산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
구분논자위치
동일설津田左右吉(1913)충북 보은 주변 일대
酒井改藏(1970)강원도 춘천 우두산성
양태진(1989)충북 보은, 충주 부근
김진한(2007)조령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맥 일대
박성현(2010)충북 충주 일대
강민식(2013)충북 영춘
별개설김병남(2006)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일대
전덕재(2014)충남 천안시 직산면 혹은 연기군 전의면 또는 충북 진천군
우산성의 소재를 확인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국사기』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보이는 두 우산성이 동일한 성인지, 별개의 성인지 여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모두 충청도 청양현에 우산성이 있었다고 나온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평안도 삼화에 우산성이 있다고 나온다. 이들 우산성이 동시대에 있었던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위치를 전혀 달리하는 두 우산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문헌에 기재된 우산성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우산성인지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특정한 성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따라서 두 우산성을 각각의 시대상황 속에서 분석해 본 뒤 서로 비교함으로써 공통성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하다.
우산성과 더불어 논란이 되는 지명이 니하이다. 니하와 관련한 사료는 국내서와 국외서로 나눠 볼 수 있다. 국내서로는 『삼국사기』 지마이사금 14년(125년)조, 자비마립간 11년(468년)조, 소지마립간 3년(481년)조·18년(496년)조, 문자왕 5년(496년)조 등 다섯 곳에 니하가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말갈·발해조에 지마왕 14년(125년)과 관련한 사례가 보인다. 국외서로는 『신당서(新唐書)』에 발해와 신라의 국경으로서 니하가 있다.
니하의 위치 비정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에 보이는 니하를 동일한 것으로 볼지(이하 ‘동일설’), 별개로 볼지(이하 ‘별개설’)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이 밖에 양 사서에 소재한 니하에 대해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이하 ‘기타설’) 위치를 비정하거나 『삼국사기』 소재 니하를 날조되었다고 보는 견해(이하 ‘날조설’)도 있다. 이상의 견해를 정리하면 표2와 같다.
표2 | 니하의 위치에 대한 견해
구분논자위치
동일설안정복(『동사강목』)덕원 일대
정약용(「발해고」)강릉 북쪽 니천수
서병국(1981)강릉 연곡천
별개설김정호(『대동지지』)덕원 일대
津田左右吉(1913), 이강래(1985), 홍영호(2010), 장창은(2012)남한강 상류
서병국(1982), 김택균(1997)강릉 연곡천
서영일(1999)강릉 부근
기타설酒井改藏(1970)남한강 상류
이지린·강인숙(1988), 양태진(1989)낙동강 상류
날조설池內宏(1960)
동일설의 경우에는 신라와 발해의 국경으로서 니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따라 동해안 일대에 자리한 덕원이나 강릉에서 그 위치를 찾았다. 별개설의 경우에는 『삼국사기』 소재 니하와 관련된 지명이나 말갈의 침입 사건 등을 근거로 덕원, 강릉, 남한강 상류 등으로 위치 비정을 달리하였다. 기타설의 경우, 하슬라를 실직성 이남 지역에서 찾은 뒤, 니하를 실직성과 하슬라 사이에 있는 오늘날 낙동강 상류라고 추정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에 보이는 니하를 달리 보려는 입장이 강하며, 남한강 상류를 그 위치로 추정하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3. 안원왕대 대남북조 관계와 대백제 관계 자료번호 : gt.d_0004_002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