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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4~6세기 고구려와 동아시아 국제질서

1. 4~6세기 고구려와 동아시아 국제질서

4세기에 접어들며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한층 적극적인 양상을 보였다. 먼저 311년(미천왕 12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차지한 사실이 주목된다. 당시 서안평은 서진(西晉, 265~316년) 요동국(遼東國)에 소속된 현(縣)의 하나였다. 현의 치소는 지금의 중국 요령성 단동(丹東)에 소재한 애하첨고성(靉河尖古城)으로 파악된다.
고구려는 이미 2세기 중반부터 후한(後漢, 25~220년), 조위(曹魏, 220~265년)와 공방·진퇴를 거듭하며 서안평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서안평이 위치한 압록강 하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압록강 하구는 황해·발해 연안의 교통로상 요지였다. 그러므로 311년 서안평 확보는 고구려의 영역 확장에서 발판이 마련된 것과 같았다. 이제 압록강 중류를 중심으로 한 내륙산간지대에서 발해·황해 연안의 주요 거점과 평야지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李丙燾, 1976).
4세기 전반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서방과 남방을 중심으로 하였다. 서방으로 요동 지역을 두고 모용선비(慕容鮮卑) 세력과 경쟁하였고, 남방으로 낙랑(樂浪)·대방(帶方) 두 군현세력을 축출하였으며, 이후 대동강 유역을 두고 백제와 각축하였다. 하지만 경쟁과 각축의 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4세기 후반까지 고구려는 서방과 남방 중 어느 한쪽에서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340년대 전반 모용선비 계통의 왕국이었던 전연(前燕, 337~370년)의 공격을 받아 도성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고,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371년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년)은 평양성에서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성장을 거듭하며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미 4세기 전반부터 북부여 지역까지 세력범위에 두었고, 4세기 후반까지 요동의 천산산맥(千山山脈) 동부와 대동강 이북의 영역을 차지하였다(노태돈, 2014). 부여 계통은 물론이고 중원지역 북부·요동 방면의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낙랑·대방 지역의 주민을 포섭하였고, 전연·전진(前秦, 351~394년)과 활발히 교섭·교류하였다. 주변의 문물을 수용하였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李基東, 1996; 李成市, 1998).
372년(소수림왕 2년)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373년(소수림왕 3년)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특히 율령의 반포가 주목된다. 율령은 일원적 법체계를 의미하는데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완비를 함의하였기 때문이다(盧重國, 1979). 이러한 대내의 국가체제 정비를 바탕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고, 대외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년) 때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영역과 세력범위가 급속히 팽창하였다.
광개토왕대 고구려는 백제를 압박하면서 한강 하류까지 남하하였고, 이에 저항하였던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낙동강 유역의 신라와 가야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모용선비 계통의 왕국이었던 북연(北燕, 407~436년)을 제압해 요동 지역을 온전히 차지하였고, 두만강 유역의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요하 상류의 거란(契丹)와 연해주 일대의 숙신(肅愼, 읍루)의 일부 부락을 세력범위에 두었다(孔錫龜, 1998).
고구려의 영역과 세력범위는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년)대까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427년(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 정책을 강화하였다. 475년 백제 한성(漢城)을 함락시켰으며, 소백산맥 북쪽의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장창은, 2014).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동쪽의 지두우(地豆于)를 압박하였고, 그 일부를 세력범위에 두었다(노태돈, 1999).
이처럼 광개토왕과 장수왕 재위기 영역과 세력 범위의 확장을 통해 5세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일대 최대 영역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지위는 6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150년이 넘도록 구가된 장기간의 전성(全盛)이었다. 고구려의 전성은 대내적인 국가체제 정비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4~6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였다. 국제정세 변화의 서막은 서진의 쇠퇴였다.
서진은 팔왕(八王)의 난(291~306년)으로 내분에 휩싸였는데, 영가(永嘉, 307~312)의 난으로 결국 남천(南遷)하였다. 이제 중원의 북부는 유라시아 초원지역에서 유목생활을 영위하였던 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의 오호(五胡)가 차지했다. 그들은 연이어 여러 왕국을 수립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었다. 한족(漢族)이 세운 중원 왕조의 중심지가 양자강(揚子江)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그 자리를 북방의 유목 종족이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차지하고 영역 확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던 무렵이다.
4세기에 이어 5세기까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오호십육국시기는 439년 북위(北魏, 386~534년)가 중원 북부를 장악하며 종식되었는데, 북위 왕조는 탁발선비(拓跋鮮卑) 계통이었다. 북위는 유목 계통의 종족과 중원지역의 한족을 융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며 번영하였는데, 동위(東魏, 534~550년), 북제(北齊, 550~577년)에서 서위(西魏, 535~556년), 북주(北周, 557~581년)에 이르기까지 중원 북부의 여러 왕조가 그로부터 비롯하였다. 이를 통틀어 북조(北朝)라고 한다.
같은 시기 중원 남부에서는 동진(東晉, 317~419년)에 이어 송(宋, 420~479년), 제(齊, 479~502년), 양(梁, 502~557년), 진(陳, 557~589년)이 양자강 하류의 건강(建康: 南京)을 중심으로 한족의 왕조를 유지하였다. 이 중에서 송부터 진까지를 남조(南朝)라고 한다.
북조와 남조는 국력면에서 ‘남약북강(南弱北强)’의 형세였다고 하지만(朴漢濟, 1982), 각각은 서로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추구하였고, 어느 한쪽이 동아시아 전역에 패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중원지역의 남북조 이외에도 여러 강국이 병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방의 초원 일대에서는 4~6세기 전반까지 유연이 강성하였고, 서방의 티베트고원과 오아시스로 일대에서는 4~7세기 전반까지 모용선비 계통의 토욕혼(吐谷渾)이 왕성하였다. 그러므로 북조와 남조는 물론이고 유연과 토욕혼 또한 역학관계의 연동성에 의해 상호 간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예컨대 북위 군대가 북진하여 유연을 공격하면 남조의 군대가 북진하였고, 북위 군대가 남진하여 남조를 공격하면 유연의 군대가 남진하였다. 북위 군대가 북방의 유연과 남방의 남조를 공략하지 못하고 번번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4~6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주요 강국이 병립하며 다원적인 국제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노태돈, 1999).
이처럼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5~6세기 중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였고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북조와 남조 그리고 유연과 두루 교섭하며 상호 간의 역학관계를 조율하고자 하였고, 그들이 동북아시아 일대의 국제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하나의 축을 구성하였던 것이다(노태돈, 1999).
이와 같은 까닭에 북제의 위수(魏收)는 『위서』 동이전의 서문에서 고구려를 동번(東藩)의 으뜸(冠)이라고 하였고, 남제는 고구려가 강성해서 자국의 칙서(勅書)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아시아 주요 강국이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성제, 2005).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국제관계의 실상만이 아니라 이념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종래 중원지역의 한족 왕조에서 마련되었던 중화(中華)의식과 화이(華夷) 관념이 변모하였던 것이다. 중화는 ‘중원(中原)이라는 지역’을, 화하(華夏)란 ‘한족(漢族)과 그 문화’를 의미하는데, 중원지역을 장악한 왕조의 정통성을 함의하였다. 이러한 중화의식에 기초해서 주변 여러 나라를 이적(夷狄)으로 배척·천시한 화이 관념이 마련되었다(박한제, 2019).
일찍이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를 지나며 화이 관념이 발생하였고, 화이를 포괄한 천하(天下)를 상정하였다. 나아가 진(秦)과 한(漢)에서 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에 적용되었다(호리 도시카즈, 2021). 이와 같은 국제관계 인식과 정책은 한 왕조에서 유교정치사상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념에 입각해 당위성을 갖추었는데, 비록 명실상부하기는 어려웠지만, 조공·책봉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다(金翰奎, 1982; 渡邊信一郞, 2003; 홍승현, 2009; 미조구치 유조 외 지음, 2011). 중원의 한족 왕조였던 서진 역시 중화의식과 화이 관념에 기초한 국제관계를 추구하였다.
그런데 서진이 남천하면서 중원지역을 장악한 중화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 의식은 여전하였다. 비록 현실에서 중원지역을 확보하지는 못하였지만, 동진과 남조의 여러 왕조는 교주군현(僑州郡縣)을 설치하며 관념적이나마 실지(失地)를 복구하며 중화의 정통을 자부하였다.
종래 이적으로 취급되었던 오호 제국과 북조의 여러 나라 역시 중화를 자처하였다. 예컨대 전진의 부견(符堅, 재위 357~385년)은 스스로 중국으로 규정하고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홍승현, 2009). 북위에서는 동진과 남조의 여러 나라를 지방정권으로 간주하였고, 그들처럼 교주군현을 두어 천하의 중심으로 자임하였다(최진열, 2018).
이를 위해 오호 제국과 북조의 여러 나라는 중화의식과 화이 관념을 분식하던 유교정치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자국의 군주 또한 덕을 갖추고 천명(天命)을 받아 중화의 제왕이 되었다고 하였고, 중원 왕조의 정통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중원 왕조의 배타적 중화 의식과 화이 관념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것이다(박한제, 2019).
비단 오호십육국과 북조의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그러하였다. 예컨대 478년 유연은 남조의 송에 외교문서를 보내 자신이 ‘중원 세력을 이기고 중화를 광복(光復)한다’고 하였다. 토욕혼의 모용복련주(慕容伏連籌, 재위 490~529년)는 북위와 교섭하면서 ‘북조에 준하는 관사를 두고 여러 나라에 칭제하였고 스스로 대국으로 과시하였다’고 한다. 중화와 같은 지위를 가졌다고 내세운 것이다.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복수의 ‘중화’가 출현하였던 셈이다(박한제, 2019).
복수의 ‘중화’는 동아시아 각지에서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단 고구려만 아니라 백제·신라·왜 역시 시간적인 선후를 달리하면서 중화 내지 그에 준하는 천하의 중심국으로 자신하였다(酒寄雅志, 2001; 川本芳昭, 2002). 그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고구려의 천하관이었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5세기 금석문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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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6세기 고구려와 동아시아 국제질서 자료번호 : gt.d_0004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