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2. 왕실의 천손의식과 태왕 중심의 천하관

2. 왕실의 천손의식과 태왕 중심의 천하관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 등 5세기를 전후한 고구려의 금석문을 보면 자국과 주변국과의 국제관계 인식이 엿보이는데, 이는 현실에서 하나의 세계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세계 인식을 천하관이라고 부른다(노태돈, 1999; 2009).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였고, 고구려의 중심은 국왕이었다. 4~5세기 금석문에서 국왕은 주로 태왕이라고 칭하였다. 고대 예맥(濊貊)과 한(韓) 계통의 여러 나라에서는 정치적 지배자를 가(加)·간(干)·한(旱) 등으로 불렀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서 3세기 중반 고구려의 지배층 역시 대가(大加)와 소가(小加) 혹은 제가(諸加)라고 하였다. 다만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듯 제가의 상위에 국가의 최고 지배자로 왕(王)이 군림하였고, 이미 1세기를 전후한 국제관계에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위략(魏略)』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고조선에서 왕을 칭하였다고 하는데, 고구려도 국초부터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노태돈, 1999; 2009).
태왕은 왕의 칭호를 격상시킨 것이다(坂元義種, 1978; 梁起錫, 1983). 〈능비〉의 호태왕(好太王)이나 〈집안고구려비〉의 호태성왕(好太聖王), 〈모두루묘지〉의 성왕(聖王)·성태왕(聖太王), 〈충주고구려비〉의 대왕(大王) 등도 왕의 존칭이었다. 다만 태왕은 선대의 왕 또는 성왕과 구분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에 새로이 제정된 왕의 칭호였다. 대체로 4세기 중반 고국원왕대를 전후해서 태왕의 칭호 즉 태왕호가 등장하였던 것이다(武田幸男, 1989; 시노하라 히로카타, 2004; 여호규, 2014).
태왕호의 등장은 3~4세기 왕권의 성장을 반영하였다. 이미 2세기 후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년)대를 전후해서 부자상속의 왕위 계승이 정착되어 갔으며(李基白, 1996), 3세기 후반까지 5나부(那部) 연맹의 국가체제가 재편되고 있었다. 5나부의 제가는 왕도(王都)와 왕기(王畿)로 이주해 이를 중심으로 편성된 방위명(方位名)의 부(部)에 편제되었고, 국왕이 수여한 관등과 관직을 받았다. 국왕 아래의 중앙귀족으로 전환한 것이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일련의 국가체제 정비였다(노태돈, 1999; 임기환, 2004; 김현숙, 2005; 여호규, 2014). 이러한 국가체제 정비의 결과 국왕 중심의 정치질서가 구축되었고, 국왕의 권위는 고양되었다.
국왕의 권위는 의례와 건국신화를 통해 부여되었다. 이 중에서 건국 신화는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 및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주요 내용은 이미 『위서(魏書)』 고구려전뿐만 아니라 5세기 고구려의 금석문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능비〉에서 역대의 국왕은 추모왕의 후손이었고, 추모왕은 천제(天帝)·황천(皇天)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이었다고 하였다. 〈집안고구려비〉에도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주 001
각주 001)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추모왕은] □□□ 아들이고, 하백의 자손으로, 신령이 도와 보호하고 음덕으로 보살펴 나라를 열고 강토를 개척하였으니, 후손이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 □□□子, 河伯之孫, 神靈祐護蔽蔭, 開國辟土, 繼胤相承).
닫기
〈모두루묘지〉에서 역시 추모왕이 하백의 손자이자 일월(日月)의 아들이었다고 하였다.주 002
각주 002)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추모왕의 이름이 주몽(朱蒙)으로 나오는데, 스스로 일자(日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닫기
왕실은 물론이고 여러 귀족 가문이 공유한 건국신화의 내용이었다(徐永大, 1995).
천제·황천은 하늘의 신이었다. 천상(天上)의 지고신(至高神)이었다. 일월은 천상의 별자리 중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믿었기에 하늘 신을 함의하였다. 하백은 고대 중국에서 황하(黃河)의 신으로, 후한~동진에서 천후(川后)라고도 하였다. 백(伯)이나 후(后)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천제에 버금가는 최고위 신이었다.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주 003
각주 003)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인용하였다.
닫기
를 보면 건국신화 속의 하백은 고구려와 부여 일대의 하천을 주관하였고, 하천 또는 물의 신(水神)으로 수중 세계를 다스린 것으로 묘사되었다.주 004
각주 004)
추모왕의 모친은 하백의 장녀인 유화(柳花)로 나오는데, 그는 청하(淸河)·웅심연(熊心淵)·우발수(優渤水)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대체로 압록강 유역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하백은 수중(水中)의 궁(宮)에 거처했다고 하였다.
닫기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능비〉를 비롯한 여러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하늘신의 아들이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추모왕(주몽)이 탄생하였다고 전한다. 고구려의 시조는 하늘신의 아들, 다시 말해 천자(天子)였고(노태돈, 1999; 2009), 하백 즉 수신(水神)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능비〉에서 추모왕은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였다. 부여군의 추격을 받아 위기상황에 놓이자 신에 호소해 얻은 도움이었다. 하늘신은 추모왕이 왕위를 기꺼이 여기지 않자 천상의 황룡(黃龍)을 보내주었다. 추모왕의 뜻을 헤아린 것이다. 신의 보호를 받았고, 천상과 소통하였던 셈이다. 신적 권능이었다.
이처럼 건국신화 속에서 추모왕은 천상과 천하를 매개하였고, 신적 권능을 갖고 있었다(노태돈, 1999; 2009). 비단 추모왕만 아니라 그의 후손으로 왕위에 오른 역대 고구려의 국왕 역시 그러한 신적 권능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국왕의 신적 권능은 민의 삶과 무관치 않았다. 〈능비〉에서 광개토왕의 치세에 나라와 민은 부강하였고, 오곡(五穀)은 풍성히 익었다고 하였다. 동명왕본기에서 유화는 추모왕이 부여를 떠날 때 오곡의 종자를 주었다고 하였고, 추모왕은 그를 신모(神母)라고 하였다. 유화가 가진 농업신의 성격을 말해준다(김철준, 1990). 광개토왕의 치세에 영위된 민생(民生)의 안녕은 그러한 왕실의 신성한 혈통과 권능을 통해 보장되었다고 믿었다. 왕권의 정당성이자 권위의 원천이었다.
천상에서 부여된 국왕의 권위는 천하에서 행사되었다. 천하의 범위는 고구려의 영역을 넘어섰다. 〈능비〉에서 광개토왕의 무위(武威)가 사해(四海)에 떨쳤다고 하였다. 〈모두루묘지〉에서는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이 국군(國郡)을 가장 신성히 여긴다”고 하였다. 사해와 천하사방은 같은 뜻으로, 중심국의 주변을 의미하였다. 물론 중심은 고구려였다. 〈충주고구려비〉에 보이는 ‘대왕국토(大王國土)’였다. 고구려의 영역이 천하의 중심이었다(노태돈, 1999). 고구려의 국왕은 천하 중심국의 지배자로서 주변지역에까지 권위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국왕의 권력 역시 고구려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충주고구려비〉에 보이듯 고구려의 국왕은 수천(守天)의 주체였다. 이때 수천의 천(天)은 천제·황천인 하늘신이었고, 보다 구체적으로 하늘신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도리 내지 질서를 의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집안고구려비〉에서 천도(天道)를 받았다고 한 구절이 참고된다. 그리고 〈능비〉에서 광개토왕의 “은택이 황천의 뜻에 흡족했다고 하였다(恩澤洽于皇天)”고 한 사실이 주목된다. 고구려의 국왕은 하늘신의 후손이었기에 그의 뜻을 계승하여 부합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수천의 주체인 고구려의 국왕은 우주질서의 수호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국왕의 통치는 천상의 우주질서를 천하에 구현하는 것과 같았고, 천하의 여러 나라는 그 질서에 순응해야 하였다. 〈능비〉에서 백제와 신라, 그리고 동부여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 내지 신민(臣民)이었고, 이 때문에 조공해 왔다고 하였다. 숙신은 광개토왕대부터 조공했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주변국은 국왕의 신속(臣屬)으로 조공의 의무를 가졌다고 한 것이다(武田幸男, 1989; 노태돈, 1999).
〈능비〉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왕은 고구려 국왕의 노객(奴客)을 자처하였다. 〈모두루묘지〉에 보이듯 노객은 국왕의 신민(臣民)을 의미하였다. 고구려와 주변국의 주종관계는 국왕과 국왕의 군신관계를 통해 성립하였던 것이다(梁起錫, 1983; 武田幸男, 1989). 〈능비〉에서 백제 국왕은 ‘궤왕(跪王)’하고 스스로 맹세했다고 하였다. 〈충주고구려비〉에서 고구려 국왕은 ‘궤영(跪營)’에서 신라 측에 교서를 내렸다고 하였다. 궤왕과 궤영은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의례 및 그 공간으로 파악된다(武田幸男, 1989; 임기환, 2020). 형식을 갖춘 의례와 맹세를 통해 고구려와 주변국의 주종관계를 재정립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와 주변국의 주종관계는 우주질서와 같았으므로, 이탈과 교란의 행위는 엄중히 대응하여야 하였다. 토벌(討伐)이었다. 〈능비〉를 보면 패려(稗麗)·백제·동부여가 토벌의 대상으로 나온다. 군신의 주종관계를 이탈하였거나 그와 같은 질서를 교란시켰기 때문이었다. 왜 역시 토벌 대상이었다. 법도를 어기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자 광개토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탕했다고 하였다. 다만 토벌 대상 중에서 왜는 백제·동부여 등과 구분되었다.
〈능비〉에 따르면, 백제는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和通)하였다. 백제와 왜의 화통은 맹세의 위반으로, 군신의 주종관계에서 이탈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고구려와 왜가 군신의 주종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왜의 경우 속민으로 표현하지도 않았고 조공의 의무를 가졌다고 하지도 않았다. 왜는 천하의 외부에 위치하였다고 상정한 것이다(노태돈, 1999; 이성시, 2001). 중심과 주변 그리고 그 외부로 구성된 천하의 모습이었다. 이 중에서 천하 외부세력의 침입은 우주질서를 교란하는 것과 같았다. 침입자가 부각될수록 질서를 회복한 광개토왕의 업적은 더욱 찬양받을 수 있었다.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를 비롯해 〈능비〉에서 왜와 관련한 광개토왕의 무력이 강조된 까닭이었다(노태돈, 1999; 이성시, 2001).
물론 고구려 국왕의 질서가 무력만으로 준수된 것은 아니었다. 〈능비〉에서 광개토왕은 군신의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한 백제의 군주를 은혜로이 용서하였고, 배반한 동부여에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동부여인은 광개토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귀순했다고 하였다. 광개토왕은 신라의 귀순을 수용하고 구원하였는데, 은혜롭고 자애롭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모두루묘지〉에서 모두루의 조상은 북부여에서 귀순하였는데, 공적을 세웠기에 대대로 은혜를 입어 관인(官人)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구려 국왕의 질서에 순응하면 무력으로 응징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며 포용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국왕의 은혜와 교화는 유교정치사상의 왕도정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능비〉를 보면 다수의 표현이 『오경(五經)』과 『맹자(孟子)』를 비롯한 유교경전과 역사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인의(仁義)를 내세운 왕도정치의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三岐晃, 1992; 李道學, 2006). 유교정치사상을 수용한 일면이었다. 유교정치사상은 372년 태학 설립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고 보이는데, 유교의 각종 문물 역시 함께 수용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조공이 주목된다. 조공은 중원 왕조에서 제도화한 국제관계의 한 형식으로 유교정치사상에 의해 수식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충주고구려비〉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한 사실이 주목된다. 〈능비〉에서는 『삼국지』 동이전의 읍루를 숙신이라고 하였는데, 고대 중국에서 숙신의 조공은 제왕의 덕치(德治)를 상징하였으므로, 조위~서진에서는 읍루를 숙신이라고 하였고, 그의 조공을 중시하였다. 〈능비〉에서 읍루를 숙신이라고 한 것은 조위와 서진에서 제기한 화이 관념과 공간 인식을 수용한 모습이었다(여호규, 2017). 중원 왕조에서 자국과 주변국을 화이로 구분하였듯 고구려도 주변국을 이적으로 간주하였고, 그와 조공·책봉의 국제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年號)도 주목된다. 〈능비〉에 보이듯 광개토왕은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하였고, 여타 명문자료를 통해 살필 수 있듯이 적어도 6세기 이후까지 연수(延壽)·연가(延嘉)·영강(永康)·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는 한 왕조에서 제정한 기년법(紀年法)으로, 천자의 관상수시(觀象授時)를 함의하였다. 유교정치사상의 소산이었다(정운용, 1998).
이처럼 고구려는 화이 관념과 조공·책봉, 그리고 연호 등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해 수식된 국제관계의 이념과 형식을 활용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주변국의 국제관계에 적용된 각종 제도와 문물은 유교정치사상과 더불어 수용되었을 것이다(梁起錫, 1983).
다만 고구려에서 한족이 수립한 중원 왕조의 유교정치사상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보이진 않는다. 오호십육국 및 북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변용된 유교정치사상을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측의 선택적 수용과 재변용이 상정되는 것이다(崔珍烈, 2012). 더욱이 고구려의 천하관은 단지 유교정치사상만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었다.
유교가 정치사상으로 기능한 것은 한 왕조에서부터였는데, 이때 천자의 권위는 천명을 통해 부여받는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상(商)에서 주(周)로 왕조가 교체되며 나타난 천(天) 관념의 변화가 고려된다. 상 왕조에서 지고신은 제(帝) 또는 상제(上帝)였는데, 그는 공간적인 하늘(自然天)과 구분되었다. 제·상제의 뜻은 불변의 숙명(宿命)이었고 주술을 통해서나 파악할 수 있었다(미조구치 유조 외, 2011; 조우연, 2019).
이와 비교해 주 왕조에서는 공간적인 하늘에 신격을 부여하였다(人格天). 주 왕조대의 천제는 상 왕조대의 제·상제가 가졌던 지고신의 성격을 계승했지만, 천하에 적극적으로 선의를 발현하는 인격신이었고, 인간세계와 상호 작용하였다. 덕이 있는 위정자에게 천명을 부여해 천하에 통치를 맡겼으며, 재이(災異)와 같은 견고(譴告)를 보내 덕치를 인도하였다고 믿었다. 상 왕조에서 제·상제와 천자는 혈연적인 관계였다면, 주대부터 천제와 천자의 혈연적인 관계는 상정되지 않았다. 천명은 덕을 갖춘 위정자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다. 한 왕조의 유교정치사상은 그와 같은 천명사상에 기초하였다(미조구치 유조 외, 2011).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국왕은 천제의 자손이었다. 상 왕조대와 같이 혈연적인 관계가 설정되었다. 유교정치사상의 천명사상과 차이가 있었다. 국왕의 덕은 권위를 수식하였지만 필요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천부적인 성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고구려의 천하관 속에서 왕권을 수식하였던 관념적 기초는 유교정치사상보다 신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해 있었다고 이해된다(노태돈, 1999; 2009).
고구려의 신화적인 세계관은 원시의 수렵·채집사회에서부터 전래되어 온 샤머니즘에서 비롯하였다. 샤머니즘은 샤먼을 중심으로 한 종교 내지 사상을 말한다. 예컨대 수렵·채집생활이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시베리아 여러 종족의 신화를 보면, 그 속의 세계는 천상의 신계(神界)와 천하의 인간계(人間界)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양자를 매개한 것이 샤먼이었다(서영대, 2003). 한국 고대 여러 나라의 국왕은 샤머니즘에 기초해 왕권을 수식하였다. 사제왕(司祭王)의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옛 부여의 풍속(舊夫餘俗)에서 농경의 풍흉에 따라 국왕을 교체 또는 처형하기도 하였다는 전승이 이를 잘 보여준다(노태돈, 2009).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국왕이 천손으로 표현된 것도 사제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삼국지』 동이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3세기 중반 고구려의 동맹(東盟)에서는 천신(天神)제사와 수신(隧神)제사가 동반되었는데, 수신은 수신(水神)으로 지모신(地母神)이자 농업신의 성격을 지녔다(三品彰英, 1973; 徐永大, 2003). 그러므로 동맹은 건국신화를 재현한 것으로 이해되는데(徐永大, 2003), 동맹을 통해 보건대 건국신화의 원형은 전통적인 샤머니즘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된다(노태돈, 1999; 2003). 이에 천하관의 관념적 기초는 국초부터 형성되어 있었고, 일찍부터 주변국과의 국제관계에 적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윤상열, 2008).
다만 샤머니즘 세계관이 곧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천하관과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잘 알려진 것처럼 〈능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부여의 동명신화(東明神話)를 차용한 것으로, 이는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통제한 이후에 성립하였다고 이해된다(노태돈, 1999). 건국신화 성립 전후의 차이가 고려된다.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함으로써 고구려 건국신화의 공간적 무대와 더불어 천하의 범위는 보다 확장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392년(고국양왕 9년)에 국사(國社)를 건립하고 종묘(宗廟)를 수리한 사실이 주목된다. 국사의 건립은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사직제사체계를 의미하였고, 종묘의 수리는 왕실 계보의 정립을 의미하였다(趙仁成, 1991). 이 무렵 〈능비〉에 보이는 것처럼 추모왕(주몽)을 시조로 한 왕계(王系)가 정립되었던 것이다. 왕호(王號)도 함께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임기환, 2002).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성은 한층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국신화의 시간적 범위 역시 확대되며 유구성이 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4세기 후반까지 건국신화와 왕계는 꾸준히 정비되었고, 이에 따라 천하관의 시공간이 확장·확대되었다. 더욱이 5세기 고구려의 천하관이 샤머니즘 내지 신화적인 세계관 그대로는 아니었다. 유교정치사상을 수용해서 천하관을 수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변용의 모습은 오호 제국의 시조 전승과 천왕(天王) 관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오호 제국의 여러 나라 역시 샤머니즘 내지 신화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교정치사상을 수용해서 국왕의 권위를 수식하였다(시노하라 히로타카, 2004).
이상과 같이 건국신화와 왕계의 정비 그리고 유교정치사상의 수용을 참조해볼 때,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의 천하관은 비록 전통적인 샤머니즘 세계관에 기초하였다고 하지만,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그 모습을 갖추었다고 파악된다. 그러면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천하관은 현실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였을까. 언제까지 유지되었을까.

  • 각주 001)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추모왕은] □□□ 아들이고, 하백의 자손으로, 신령이 도와 보호하고 음덕으로 보살펴 나라를 열고 강토를 개척하였으니, 후손이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 □□□子, 河伯之孫, 神靈祐護蔽蔭, 開國辟土, 繼胤相承). 바로가기
  • 각주 002)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추모왕의 이름이 주몽(朱蒙)으로 나오는데, 스스로 일자(日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인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추모왕의 모친은 하백의 장녀인 유화(柳花)로 나오는데, 그는 청하(淸河)·웅심연(熊心淵)·우발수(優渤水)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대체로 압록강 유역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하백은 수중(水中)의 궁(宮)에 거처했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 왕실의 천손의식과 태왕 중심의 천하관 자료번호 : gt.d_0004_00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