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하관의 이상과 국제관계의 현실
3. 천하관의 이상과 국제관계의 현실
고구려의 천하관 속에서 천하는 국왕을 중심으로 해서 방사상(放射狀)의 공간으로 구획되었다(여호규, 2017). 크게 보면 천하의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천하의 내부는 다시 두 종류의 공간으로 구분되었다. 첫째 천하의 중심 공간으로 고구려의 영역이 있었고, 둘째 천하의 외곽 공간으로 속민 즉 주변국의 영역이 있었다. 천하의 외부 공간은 속민이 아닌 주변국으로, 왜 등이 해당하였다. 고구려는 천하의 내부 공간에 국왕의 질서를 관철하고자 하였다(林起煥, 1996; 노태돈, 1999). 고구려의 천하관 속에서 추구된 국제관계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5~6세기 중반 고구려의 천하관이 단지 국제관계의 이상으로 현실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았다. 〈능비〉에서 신라와 숙신은 나라의 일을 고구려에 논의하였다고 하였다. 신속국의 내정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셈이다. 〈충주고구려비〉에서 신라 국왕은 ‘매금(寐錦)’이라고 하였는데, 고구려와 신라 국왕은 형제 내지 상하의 수직적 관계였다. 또한 신라를 동이라고 하였고, 신라 국왕과 그 신료에게 의복과 물품을 하사하였다. 신라의 영역 내에 고구려의 관인과 군대를 파견하였고 인력을 모집하였다. 중원 왕조의 화이 관념을 적용하여 신라를 낮추어 보았고, 수직적 국제관계를 관철하고자 하였으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러 문헌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의 왕족을 인질로 삼기도 하였다. 대체로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의 사정이었다.
고구려와 주변국의 수직적 관계는 우주의 질서와 같다고 하였다. 이에 토벌이란 전쟁의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군사적·정치적 우위가 유지되었던 5~6세기 중반까지 천하관의 이상은 일정한 구속력을 지닐 수 있었다. 주변국의 조공이 이를 보여준다. 예컨대 504년 북위에 사신으로 간 예실불(芮悉弗)의 발언을 보면(『위서』 권100 고려), 고구려는 일찍이 부여의 황금과 섭라의 가옥(珂玉)을 공물로 받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의 부여와 섭라의 공물은 정치적 복속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능비〉의 표현대로 하자면 조공이었다.
주변국의 조공은 책봉이 수반되었다고 보인다. 〈충주고구려비〉에 보이는 의복과 물품 사여의 의례가 그와 밀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임기환, 2020). 중원 왕조와 주변국의 조공·책봉 관계가 고구려와 주변국의 수직적 국제관계에 원용되어 실제로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5~6세기 중반 동아시아 주요 강국은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와 주변국의 수직적 국제관계 역시 공인하였다.
예컨대 후연을 비롯하여 북조의 여러 왕조는 평주목(平州牧), 요동국왕(遼東國王), 대방국왕(帶方國王) 등의 책봉호를 수여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현실적인 세력범위를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武田幸男. 1989). 북위의 세종(世宗, 宣武帝, 재위 499~515년)은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지위를 갖고 해외(海外)를 전제(專制)한다고 하였다. 비록 북위 세종의 발언이 자국의 이해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하나, 고구려를 동북아시아 강국으로서 그 일대의 패권을 공인하고 있었음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런데 천하관을 통해 제시된 국제관계의 이상이 현실과 언제나 일치할 수만은 없었다. 이를 위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구려와 중원 왕조가 관계이다. 고구려의 천하관 속에서 중원 및 북방 초원의 주요 강국은 천하의 범위 내에 포함되지 않았다. 동아시아 주요 강국의 천하는 고구려의 천하와 구분되었다. 동아시아 내에 몇 개의 천하가 병립하였다고 본 셈이다. 다원적인 천하관이었다(노태돈, 1999).주 005 그런데 현실의 국제관계에서 고구려와 여타의 천하는 서로 무관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일찍이 한 왕조대부터 역대의 중원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였다. 4세기 이후 5~6세기 중반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연·전진에 이어 후연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고, 413년 동진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남조 여러 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5세기 중반 북위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와 오호 제국 및 남북조의 조공·책봉 관계는 상대 측에서 추구한 국제관계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 오호 제국, 남북조와의 조공·책봉 관계는 실리를 고려한 것으로 명목적인 성격이 강하였다(徐榮洙, 1981; 노태돈, 1999).
조공·책봉 관계를 통해 고구려는 자국의 세력범위를 보장받고자 하였으며(여호규, 2005), 조공에 수반되었던 교역상의 이득을 얻고자 하였다(徐榮洙, 1981).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에 철저히 구속받지도 않았다. 예컨대 5세기 후반 북위의 방량(房亮)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는데, 의례상의 마찰을 빚었다고 전한다. 고구려가 북위 측에서 요구한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을 거부한 사례의 하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서로 적대적이었던 남조·북조와 각기 교섭하였고,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유연과 교류하였다. 이른바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란 조공·책봉 관계의 정형에서 벗어난 국제관계였다(노태돈, 1999).
이와 같은 이유에서 고구려는 남북조의 이해관계와 다른 방향에서 대외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436년 북연(北燕)의 수도 화룡성(和龍城: 遼寧省 朝陽)에 군대를 보내 북위 군대와 대치하기도 하였고, 북위와 요서 지역을 두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비록 조공·책봉 관계의 형식을 준수하기도 하였지만 실리를 더욱 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노태돈, 1999).
고구려의 이러한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에 남북조는 물리적인 실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5~6세기 중반 고구려와 남북조의 조공·책봉 관계는 국제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항상 일치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노태돈, 1999). 고구려와 주변 여러 나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천하관에서 설정한 수직적 국제관계는 고구려의 이상이었고, 상대 측의 입장은 다를 수 있었다.
먼저 백제의 사례를 주목해 보자. 〈능비〉에 보이듯 고구려는 백제를 속민으로 인식하고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패전한 백제는 고구려에 복속을 맹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백제가 곧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남북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와 더불어 물길·신라 등과 교섭하며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에 472년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표문에서 고구려를 북적(北敵)으로 표현하였고, ‘승냥이와 이리(豺狼), 추악한 무리(醜類), 어린아이(小竪)’ 등으로 낮추어 불렀다. 나아가 6세기 전반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년)은 남조의 양(梁, 502~557년)에 사신을 보내 “자주 고구려를 격파하였다”고 전했다. 백제는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를 거부하고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추구하였다.
예컨대 부여 구아리 출토 ‘대왕천(大王天)’ 명문이나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영기의 ‘대왕폐하(大王陛下)’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을 높여 대왕(大王)이라고 하였고, 황제와 같은 격으로 존칭하였다. 대왕 아래에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소왕(小王) 등을 두기도 했다.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보이듯 5세기 전반 양과 교섭하면서 주변국을 방소국(旁小國)이라고 하였다.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5세기 후반 탐라국(耽羅國)을 속국으로 삼고, 그 국왕에게 좌평(佐平)의 관호를 사여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369년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년)은 영산강 유역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공격하며 그곳을 남만(南蠻)이라고 하였다. 가야 여러 나라에 부자 내지 형제 관계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주변국에 화이 관념을 적용하였고,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적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백제의 국제관계 인식은 그 나름의 천하관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李鎔賢, 1999; 노중국, 2012; 양기석, 2013a). 고구려는 백제를 천하의 외곽에 위치한 주변국으로 자국의 속민이었다고 인식하였지만, 백제는 그와 같은 고구려의 천하관에 포섭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의 사례를 살펴보자. 〈능비〉와 〈충주고구려비〉를 통해 보건대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신라는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에 포섭된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미 5세기 중반부터 신라는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이탈하고자 하였다. 가령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450년 신라는 실직에서 사냥하던 고구려의 변장(邊將)을 살해하였다. 신라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년)이 사과함으로써 사태는 수습되었다고 하지만, 이 사건은 신라가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탈피해 간 모습을 보여준다(장창은, 2014). 5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였고, 6세기 이후 양·진(陳)·북제·수·당 등 중원의 여러 왕조와 교섭하였다. 동아시아의 다각적인 국제관계 속에서 자국의 실리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특히 6세기 전반 국가체제 정비를 통해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이에 따라 신라 국왕의 권위 역시 고양되었다. 법흥왕대(法興王代, 514~540년)에 수용된 불교가 그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신라의 국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견하였고, 왕실이 전생에 석가모니의 가문이었다고 하였다. 비단 불교만 아니라 종래의 신앙과 유교정치사상도 왕권의 수식에 활용하였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천사옥대(天賜玉帶)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같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하였듯 신성시하였다. 이와 같은 왕권의 수식과 권위의 고양은 자국 중심의 국제관계 인식과 밀접하였다(노태돈, 2002).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년)은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의미를 부여하였고,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년)은 561년 건립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서 ‘사방군주(四方軍主)’를 설정하였듯 자국 중심의 천하를 상정하였다(朱甫暾, 1998; 윤선태, 2021). 또한 진흥왕대에 건립한 여러 순수비(巡狩碑)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유교정치사상을 수용해 중화의식과 화이 관념을 나타냈다(盧鏞弼, 1996; 酒寄雅志, 2001).
536년(법흥왕 23년)부터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시작으로 650년(진덕왕 4년)까지 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건복(建福)·인평(仁平)·태화(太和)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643년(선덕여왕 12년) 황룡사(皇龍寺)에 구층목탑을 건립하고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조공해 오기를 기원하였다.주 006
이처럼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 역시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한층 분명히 보였는데, 이는 양국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양국의 성장은 국제관계의 현실에서 더 이상 고구려의 정치적·군사적 우위가 유지되기 어려운 사정과 표리를 이루었다. 결국 6세기 중반 고구려는 대내적인 정치 갈등과 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노태돈, 1999).
이에 따라 천하관에서 추구한 고구려 국제관계의 이상은 한층 약화되고 현실적인 인식이 보다 강화된 양상을 보였다고 짐작된다. 특히 6세기 후반 이후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더욱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수(隋, 581~618년)가 중원지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하며 종래의 다원적 국제질서가 해체되었다. 수에 이어 당(唐, 618~907년) 역시 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며 일원적 국제질서를 추구하였다.
수와 당은 고구려에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강요하였다. 변경지대에서 갈등이 확대되고 전쟁 발발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고구려는 수·당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고구려의 천하관은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천하관은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예컨대 546년(양원왕 2년) 혹은 604년(영양왕 1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포시 절골터 금동판 명문〉을 보면, “바라건대 왕의 신령이 도솔(兜率)로 올라가셔서 미륵(彌勒)을 뵙고 천족(天族)을 함께 만나셔서 사생(四生)이 모두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라는 구절이 나온다(이승호, 2015). 불교의 미륵사상과 그의 세계관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천족이란 표현이 주목된다. 천족은 황족(皇族)이란 뜻으로 고구려의 국왕이 천손이었음을 함의하였다(노태돈, 2009; 이승호, 2015).
이와 관련하여 『주서』 고려전에 보이는 신묘(神廟)가 주목된다. 두 곳의 신묘에서는 각기 부여신(夫餘神)과 등고신(登高神)을 모셨다고 하였다. 『주서』 찬자는 이를 각각 하백의 딸(부여신)과 주몽(등고신)이었다고 풀이하였는데, 시조의 사당으로 본 것이다. 신묘에는 관원을 파견해 수호한 것으로 보아 국가적인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당서』와 『신당서』를 보면 요동성(遼東城)에 주몽의 사당이 있었는데, 645년 당의 공격을 받아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요동성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소재하였던 지방의 주요 대성(大城) 중 하나였다. 왕실의 시조가 국가적으로 신앙되며 지방의 주요 거점과 민간으로 확대된 모습이었다. 중앙의 왕실과 지배층뿐만 아니라 지방의 민까지 두루 시조를 신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 속에서 7세기까지 고구려의 국왕은 천손으로 그 권위를 상실하지 않았다. 6세기 중반 이후 귀족연립정권이 수립되면서 왕권이 동요하고, 심지어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그 가문이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존속한 까닭이었다(노태돈, 1999).
이처럼 고구려에서는 후기까지 국왕을 천손으로 인식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는 후기까지 자국을 천손이 다스리는 나라이자 천하의 중심국으로 자부하였다고 여겨진다. 천하관이 지속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만 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와 고구려의 정치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천하관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