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위진십육국 왕조와의 문물교류
1. 중국 위진십육국 왕조와의 문물교류
고구려와 중국 위진십육국시기 여러 왕조와의 문물교류는 먼저 북방민족인 모용선비가 3세기 초부터 5세기 전반까지 200여 년 동안 중국 동북지역과 중원지역에 세운 전연·후연·서연·남연·북연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서진 말기에 일어난 영가(307~312년)의 난 이후 한족들이 유망하게 되고, 여러 국가가 적극적으로 사민정책을 폈다. 당시 고구려에는 산동, 하북 일대에서 온 유이민과 망명객이 늘고, 약탈 또는 전쟁으로 인한 포로가 유입되는 등 빈번한 인적 이동과 교류가 일어났다(이기동, 1998; 전호태, 1993; 2000).
오호의 화북지방 대이동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299년 하남성 정주 부근에 245년 관구검이 강제로 끌고 온 고구려인 포로의 후예가 수천 명이나 되고 고국천왕 19년(197년) 많은 한인이 피난하여 들어왔다는 기록 등으로 보면, 2~3세기부터 이미 양 방향으로 일어난 인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연시기 고구려와 중국 간 인구 이동의 사례로는 4세기 후반 후연(384~409년)이 건국 후 곧바로 고구려에 내투한 유주·기주 유민을 적극 초무한 일이나, 전연의 봉유가 345년 모용황에게 낸 헌책에서 10만 호의 고구려, 백제, 우문부, 단부의 사민들이 귀국을 원하므로 국도에서 서경의 제성으로 옮겨 안무 감독할 것을 제안한 사실, 342년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할 당시에 5만 명의 고구려인을 포로로 끌고 간 사건, 진의 마지막 동이교위직 최비(崔毖)가 한족 유민의 보호자를 자임하면서 모용외를 공격하려다가 미천왕 20년(319년) 고구려로 도망한 사건 등이 잘 알려져 있다(이기동, 1998). 이러한 다양한 인적 이동의 사례는 문물교류의 동반도 촉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물교류 면에서 위진십육국시기의 인적 이동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건은 340년대 전연(337~370년)의 환도성 공략과 그에 따른 고구려인의 이주이다. 342년 전연 모용황의 침략에 따라 고구려의 왕모(王母)와 왕비 및 남녀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343년에 왕제를 전연에 보내 많은 보물을 바치고 칭신 입조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355년에는 볼모를 주고 조공을 하여 왕모를 돌려받았다.
이 시기에 전연으로 이동한 고구려 인질들의 활동상을 보면, 도성과 왕궁의 숙위를 담당하거나 전연의 관직을 얻거나 동상(東庠)과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전연의 호한 융합 문물을 경험하고 이후 전진-남연 또는 고구려에서 활동함으로써 국가체제 정비와 문물교류에서 역할을 하게 된다(이정빈, 2017).
고구려인이 중국 내지로 이동한 것과 반대로 전연의 내분기인 333~336년 및 전연과 후조(319~351년)가 각축전을 벌이던 338년경에 중국계 망명인이 대거 고구려로 내투했다. 이들 망명자 집단이 문물교류에서 한 역할도 주목된다. 330년대 후조와 전연, 선비 단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후조와 내응하였던 전연의 동이교위 봉추, 호군 송황, 거취령 유홍 등이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한인 관료 출신 송황은 모용황 휘하에서 동이호군을 지내다가 338년에 모용황에게 등을 돌리고 후조에 내응하였다가 패배하자 고구려로 도망하여 11년간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면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였다. 349년 고구려는 전연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를 돌려보냈는데, 다시 전연으로 돌아간 송황은 모용황의 한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한인 관료의 고구려 망명은 소수림왕 3년(373년)의 율령 반포에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중국계 망명객들을 집안 우산하3319호묘의 피장자처럼 국내성 일대에 거주하게 하다가, 342년 이후 낙랑·대방 지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면서 서북한 각지로 대거 이주시켰다(여호규, 2009; 공석구, 2000; 2004).
4세기에 고구려로 이주한 중국계 인물은 수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주민의 신분은 왕, 관리, 승려, 전쟁포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요서 지역에서 고급관리를 역임한 전연의 모용평, 진 동이교위 평주자사 최비, 전연의 동수, 곽충, 동이교위 봉추, 호군 송황이 있으며, 승려로는 전진의 순도, 아도, 담시 등이 있다. 전쟁포로로는 302년 낙랑군 남녀 2,000명, 315년 현도군, 385년 요동군, 현도군의 1만 명 등이 있다(공석구, 2016).
고구려로 이주해 온 중국계 인물들의 고분 형식은 수도 지역과 그 외 지방 간에 차이가 있다. 국내성에 배치된 인물의 경우(우산하3319호묘), 외부는 고구려 전통 묘제인 적석총, 내부는 중국 전통 묘제인 전축분을 선택하여, 고구려 수도에 지어진 중국 망명객의 고분이라는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그림1, 그림 2). 지방인 낙랑·대방군 고지에서는 전축분을 계승하거나 전축분에 석재를 추가하기도 하고 석실봉토분을 새롭게 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원 왕조(동진, 후조)의 연호를 채용하거나 관직을 사용하여 독자적 성격을 드러냈다(공석구, 2016). 낙랑·대방 지역의 전축분은 낙랑·대방군 멸망 이전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여 100여 년 정도 존속하였다. 전축분에 돌천장으로 축조된 서읍태수 장씨묘(342년)와 대방태수 장씨묘(348년), 석재를 일부 가미한 전축분인 동리묘(353년) 등은 중원 왕조의 혼란기에 이주해 온 집단이 낙랑·대방 지역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석재와 혼합하여 축조한 전축분의 특징을 보인다(공석구, 2016; 2020).

그림1 | 우산하3319호묘 외관(김광섭 촬영)

그림2 | 우산하3319호묘 내부 전경(孫仁杰 外, 2007)
정사년(丁巳年) 와당(그림3)의 출토로 35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우산하3319호묘의 피장자는 소수림왕, 고국원왕으로 보기도 하나, 동진 출신으로 중랑을 역임한 인물과 그의 부인의 합장묘로 여겨진다. 342년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던 전연의 왕우(王禹)나 한수(韓壽)의 묘, 동진에서 온 최비의 묘로 보기도 한다(정호섭, 2010). 이 무덤은 계단 전실 적석총인데 벽화 잔편이 발견되어 인물 및 생활풍속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본다(정호섭, 2010). 이 무덤에서 나온 중국 동진제 청자반구호(그림4)는 강소성 남교 온교묘, 인태산 왕흥 부부묘에서 출토된 청자와 형태상 유사하다(강현숙 외, 2020). 또 일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된 계수호는 중국 절강성박물관 소장의 청자계수호(그림5, 351년)와 서안 동진 태화 3년묘 출토 청자점채계수호(368년) 등과 형태 및 제작 시기가 근접한 동진대 유물이다. 계수호는 서진시대 청자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부장품과 위세품으로 사용된 기형이다. 동진대 계수호의 계미는 호형(弧形) 손잡이로 바뀌었으며 상단은 반구에 접합되고 하단은 견부에 장식되었다(방병선, 2012).

그림3 | 우산하3319호묘 출토 정사년 와당(孫仁杰 外, 2007)

그림4 | 우산하3319호묘 출토 청자반구호(吉林省集安市文物局, 2008)

그림5 | 절강성박물관 소장 청자계수호(방병선, 2012)
우산하3319호묘 출토 청자반구호와 절강성박물관 소장 청자계수호와 같은 문물교류를 보여주는 다른 사례로는 집안 마선구2100호묘 출토 철경이 있다. 철경은 고구려 고분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부장품이다. 이 철경은 휴흑칠(髹黑漆)이 되어있으며 천부조(淺浮彫)로 사엽문이 장식되었고 양각으로 ‘부(富)’자와 ‘자(子)’자가 남아 있어 길상문자로 보인다. 문양이나 양식이 감숙성 무위 뇌대묘에서 나온 도금은철경과 유사하다.
우산하3319호묘는 건축 면에서 공주 무령왕릉과 같은 전축분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6호분과 함께 웅진기 백제 왕실이 남조의 전실묘를 수입한 사례인데, 이때 조와공과 조묘공도 남조에서 백제로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주경미, 2020). 이로 미루어 우산하3319호묘 경우에도 고구려에 흔하지 않은 전축묘를 축조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조와공, 조묘공, 그리고 벽화제작공이 357년경 국내성으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고분 출토 중국계 유물에 대해서는 최근의 무령왕릉 출토 청자와 동경에 관한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무령왕릉 동경은 제작국과 유통 경로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백제 제작설과 중국 남조 제작설, 그리고 일본 제작설 등이 있다. 일본 학자들은 무령왕릉 출토 동경이 중국 한대의 동경을 모방해서 만든 ‘방제경’이며 제작지는 중국 남조로 추정하였으나, 중국 학계에서는 남조 유물로 잘 발견되지 않는 형식의 동경으로 남조에서 제작하였다고 확증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한편, 동경 제작에 백제 공방과 장인이 관여한 것은 분명하므로 중국 한대 혹은 낙랑시대 이후 내려오는 오래된 전통을 계승하여 무령왕릉 연간에 백제에서 새로 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주경미, 2020). 우산하3319호묘 출토 유물에 대해 제작지와 유통 경로, 제작 방법에 대해서 좀 더 연관 자료를 찾아내어 연구하고 무령왕릉 동경과 같이 문양의 도본이나 화본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와 삼연 간의 문물교류에 대해서는 선비계 마구와 중장기병술의 유입에서 전연설과 후조설이 대립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마구의 부장과 보요 장식 장신구 및 모티브 등은 고구려가 4세기 중엽 전연에서 취사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본다. 고구려의 4, 5세기 부장품을 보면, 4세기 중엽 전연 전성기의 문물로서 인적·물적 교류 속에서 전연의 문물이 그대로 고구려에 유입되었으며, 특히 전연의 마구와 보요 장신구는 고구려에서 변용, 발전 과정을 거쳐 도입, 발전되었다고 본다(강현숙, 2006). 4세기 중엽 판비와 환판비라는 새로운 형식의 재갈이 등장하는데, 이는 4세기 중반 무렵부터 이루어진 고구려와 전연과의 갈등 및 우호관계를 배경으로 전연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가 독자적 제작방법으로 재지화된 사례이다(정동민, 2011).
한편, 선비계 마구와 중장기병술의 유입에서 후조의 역할을 주목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4세기 초반에 친연관계였던 후조로부터 중장기병을 처음 도입하였고, 이후 4세기 중반 전연계 인물들의 대거 망명, 혹은 342년 고구려와 전연의 전쟁을 계기로 전연의 유형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한다. 중장기병의 출현을 의미하는 전마구는 마구이면서 무기의 성격도 동시에 있어 다른 마구와 별개로 하나의 무기로 고구려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정동민, 2007; 2017). 338년경 축조되었다고 보는 우산하992호묘의 마주(馬冑)도 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후조에서 중장기병을 도입한 사례로 본다. 반면, 고구려와 전연의 중장기병 유물이 세부기법 등에서 처음부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모용선비 전연이 오호십육국시기의 혼란을 맞아 큰 시차 없이 독자적으로 중장기병술을 도입, 발전시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전호태, 2017).
보요가 달린 금제나 금동제 장신구도 4세기 삼연과의 외교관계에서 고구려의 취사선택으로 변용, 발전되어 도입된 문물이다(강현숙, 2006). 위진남북조시대 보요관의 유행은 모용선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보요관은 모용선비 묘장에서 3세기대부터 4세기 전반의 것까지 집중적으로 나오며, 주로 전연·후연·북연의 수도였던 요령성 조양에서 출토된다. 태왕릉과 우산하992호묘의 보요 장식은 요령성 북표 서관영자1호묘(풍소불묘) 출토 보요관 장식과 유사하다. 모용선비 장인의 보요 기법이 고구려로 전수되는 과정은 중앙아시아에서 내몽고 지역 선비 금공 장인을 거쳐 요서 모용선비의 금공 장인, 그리고 고구려로의 전파경로가 제시되었다(이송란, 2011; 2015).
전연은 370년 전진(351~394년)에 의해 멸망하는데, 전진은 모용선비에 대한 우대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전진은 376년에 전량을 멸망시키고 서역을 점령하여 서북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전연의 인구를 관중으로 사민시켜 동북지역과 서북지역 간의 교류를 조성하였다.
고구려는 372년 전진의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와 아도 및 불상, 경문을 받아들이고 국내성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 두 승려가 머물게 하였다. 순도와 아도를 위하여 건축한 초문사와 이불란사는 오호십육국시기의 불교 건축과 조각이 유입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380년대에는 전진의 수도로 고구려와 서역 등 많은 나라가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러한 빈번한 사신 방문은 해당국 간의 교류를 촉진하였을 것이다.
불교 전래 이후 하서주랑 일대가 전진의 지배 아래 있던 376~386년 전진과 고구려 간의 문물교류는 하서 지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 간의 친연성에서 보인다. 감숙성 지역의 위진십육국시기 벽화고분은 종렬 배치 구조를 갖고 있으며,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로 벽화가 구성되었고, 화덕·영락·동복 등 일부 부장품에서 고구려 벽화고분과 특징을 공유한다. 하서 지역이 전진의 세력권에 들어가고 고구려와 전진이 국경을 맞대게 된 4세기 후반 하서 지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 간에 문물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강현숙, 2005). 반면, 요서와 요동 지역 벽화고분은 고구려와 매장구조 및 묘실벽화에서 차이점이 많으며, 벽화도 적극적으로 채용하지 않았다(강현숙, 2000; 2002).
전진은 394년에 멸망하였는데, 전진이 해체된 후에 중원이 다시 내전에 휩싸이자 유주와 기주의 유민들이 다수 고구려로 유입하였으며, 하북·산동·하남 지역의 문물도 고구려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전진의 멸망 이후 요장의 후진(384~417년), 모용수의 후연(384~409년), 여광의 후량(386~403년), 걸복국인의 서진(385~431년) 등이 건국되었다. 전진에 기반한 여광이 세운 후량이 구자국을 정복함으로써 구자의 음악과 악기가 중원에 전해졌는데, 고구려 삼실총에 보이는 서역계 악기의 출현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살펴볼 수 있다. 후진의 요흥은 고장(姑臧)에 근거를 둔 남량(397~414년)을 평정하고, 하서 인구 1만여 명을 장안에 이주시켰으며, 401년에는 키질 출신 명승 구라마습을 장안으로 데려와 불교를 발전시켰다.
고구려는 모용선비가 세운 삼연과 밀접한 정치·외교관계 및 문물교류를 맺으면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북 지역의 전진·후조·토욕혼·유연과도 활발하게 접촉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330~340년대에 후조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330년(미천왕 31년) 후조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으며, 332년 고구려 사신이 우문부의 사신과 함께 후조를 방문하여 석륵(石勒)의 환대를 받았다. 후조와 교류를 시작한 이래, 후조와 내응한 전연 한인 관료(송황)의 망명, 전연과의 협공을 도모한 군사 교류, 낙랑·대방 지역 전축분에서 발견되는 후조의 연호 기년과 같은 사례에서 후조와의 가까운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강선, 2001; 여호규, 2000). 하남·하북·산동을 포함한 영토를 다스린 후조와의 대외교류는 330~34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전연이 낙양을 포함한 하남 지역을 점령하는 350~370년대의 영토 확장 시기보다 앞선다.
낙랑·대방군 지역에서는 서진·동진·후조·전진·후연의 연호 기년이 발견되는데, 황해도 신천 출토 건무 9년(343년) 명전, 건무 16년(350년) 명전 등 340년대의 후조 연호가 많이 나온다. 후조와의 가까운 관계는 낙랑·대방군 지역에서 발견된 연호 기년 중에서 후조와 전진의 연호 기년이 신속하게 채용되었는데, 기년명 전축분을 조영한 인물들이 후조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공석구, 2003; 여호규, 2009).
후조의 석륵은 호족(胡族) 출신 군벌로 주미에 대한 경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륵이 경배한 주미를 든 묘주 초상이 요령성 요양 상왕가촌묘, 조양 원대자묘, 안악3호분(그림6), 덕흥리벽화고분, 감숙성 주천 정가갑5호묘(그림7)에서 삼족 빙궤와 함께 발견되어 주미가 북방 지역에서 정치가의 위세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이송란, 2005). 석륵은 서역 승려 불도징을 초청하였는데, 불도징은 제자들과 함께 893곳에 불교사원을 건립하였다. 후조의 열성적인 사원 건립은 이후 북연·전진·후진·북위 등 북방민족이 건립한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사원이 건립된다(양은경, 2007). 338년 후조의 석호가 불도징을 동반하여 요서를 공격할 때에 불도징이 교화했다는 융맥의 무리에 고구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전연은 후조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업으로 이동하면서 후조의 발달된 불교와 불교문화를 체험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6 | 안악3호분 묘주도(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a)

그림7 | 정가갑5호묘 묘주도(徐光冀, 2011c)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부견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였고, 불교를 전한 순도와 아도를 위하여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고구려의 불교 도입이 전진이 아닌 후조를 통하여 334~348년에 이루어졌다면 이제까지 알려진 공식 전래보다 20~30년 앞서게 된다. 375년으로 비정되는 안악3호분의 연화문은 불교 공인 이전에 불교문양이 전파되었을 사례로 언급되고 있으며, 장천1호묘 보살상과 삼실총 보살형 수문장상은 중앙아시아 불교석굴의 보살상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이러한 사례의 배경에 후조에서 활동한 구자국 출신 서역승 불도징의 포교를 고려해볼 수 있다. 또한 후조는 적극적으로 불교사원을 건립하였는데 고구려 최초의 절인 초문사가 건립되는 것이 375년 불교 공인 직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불교 건축과 미술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상태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전진, 후조와의 교류는 벽화고분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채용하지 않은 전연과 달리 고구려가 하북, 하남, 산동 지역과 유사한 벽화 주제와 구성의 벽화고분을 적극적으로 축조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박아림, 2012).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원과 전개에 대해서는 중국의 동북지역 요령성 한~위진 벽화고분이 일찍부터 주목받아 고구려 벽화와 비교 연구가 이루어졌다. 중국 위진시기 고분벽화는 한대 고분벽화 및 화상석과 더불어 고구려 벽화의 대외문물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회화자료이다. 동북지역의 한~위진 고분벽화는 내몽고와 섬서 북부를 포함하는 북방지역의 동한 후기 고분벽화와 제재 및 표현에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동한 후기에 와서 동북, 내몽고, 하서를 잇는 벽화문화권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북지역 벽화고분이 요양 한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비교적 동일한 고분구조 및 벽화제재를 보여주는 반면, 하서 지역의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은 무위·주천·돈황 등에 분포되어 보다 다양한 발전양상을 보여준다.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가까운 요령 고분벽화는 고구려 벽화의 형성과 발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요령 벽화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요령에서 고구려로의 단선적 영향관계가 아닌 것으로 본다(강현숙, 2005; 전호태, 2007). 삼연의 중원으로의 영토 확장과 사민정책은 삼연 이전에 형성된 벽화고분의 전통을 중원에서 서북과 동북 지역으로 전파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4세기 초 낙랑·대방을 다스리고, 4세기 말 요동 전역을 영역 내에 두면서 정치 영역이 확대되고 문화적으로 성장하면서 4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고분벽화 제작이 본격화한다(전호태, 2005). 고구려의 대표적 초기 벽화고분인 안악3호분(357년)의 묘주로 추정되는 동수는 전연 출신으로 336년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덕흥리벽화고분(408년)의 묘주 진은 전진 또는 후연 출신으로 대략 4세기 후반경에 고구려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342년 전연 모용황의 국내성 침입을 선비 문물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데, 동수의 망명보다 6년이 늦다. 354년으로 비정하기도 하는 원대자묘와 칠성산96호묘의 부장양상이 유사하여 전연의 문물이 시차 없이 고구려에 전달된 것으로 여겨진다. 342년 전연 모용황이 국내성에 침입한 후 전연과 화친을 도모하면서 전쟁과 우호 관계 속에서 영락장식 장신구나 마구류 등 전연의 특징적 문물이 고구려로 유입되었다(강현숙, 2005). 그러나 모용황이 침입한 집안 지역의 4세기 후반 벽화고분(만보정1368호묘, 우산하3319호묘 등)과 삼연의 벽화고분은 구조나 벽화 내용에 차이가 있다.
삼연시기(3세기 말부터 437년까지 130년간) 벽화고분은 주로 요서 지역의 조양, 북표에 위치하며 고분 구조와 벽화 내용에서 한족과 모용선비의 문화가 혼합된 것으로 요동, 중원 지역과 다르다(강현숙, 1995; 2000). 요서 지역인 조양 일대의 묘실 벽화고분은 단칸 구조이다. 중원 지역의 동한시기 전축분의 종렬 배치 구조는 위진대에 동북과 서북 지역으로 전파된다. 요동 지역인 요동반도 남단의 여대 영성자묘와 길림성 집안 우산하3319호묘 등이 종렬 배치 전축분이다. 우산하3319호묘는 중국계 이주민의 고분으로 여겨지는데, 중원의 종렬 배치 전축분 형식에 고구려 고유의 적석총 외형을 가졌다.
벽화 내용 면에서는 우선 모용선비가 벽화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양 지역처럼 많은 벽화고분이 남아있지 않아 비교가 쉽지 않다. 원대자묘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묘주 초상, 수렵, 사신, 역사 등 많은 주제가 고구려 고분벽화와 친연성이 보인다(그림8, 그림9). 묵서명을 통해 354년으로 비정되는 원대자묘 벽화는 요양 지역 벽화고분에서 보이지 않던 여러 가지 새로운 제재가 출현하는데, 1세기 앞선 요양 지역의 벽화고분과 다른 벽화 제재가 외부에서 유입되어 고분의 벽화 구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원대자묘와 같은 요서지역 4세기 석실 벽화고분과 북위 수도 평성(대동) 호벽 전실묘(弧壁 塼室墓)의 기원을 고구려 석실분과 낙랑 지역 전실묘에서 찾고, 고구려 주민, 요동과 낙랑의 군현계 주민이 이주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李梅田, 2012;王連龍, 2018; 윤용구, 2021).

그림8 | 원대자묘 묘주도(徐光冀, 2011b)

그림9 | 원대자묘 수렵도(徐光冀, 2011b)
고구려 벽화문화의 연원에서 안악3호분의 동수와 같은 중국계 망명객들의 이동으로 어떠한 벽화고분 양식이 전파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인물의 이동과 벽화 양식의 전파가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단정 짓기 어려우므로 쉽지 않다.
한편 전연의 모용선비가 벽화고분이라는 장의미술 형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전연이 수도를 중원으로 옮기고 낙양을 포함한 하남 지역을 점령하는 350~370년대의 영토 확장 시기는 고구려에서 안악3호분이 조성되고 전진이 고구려로 불교를 공식 전래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삼연의 영토는 요령성에 국한되지 않고 하북·산동·하남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지역의 확보는 해당 지역의 문화가 삼연문화에 취합되어 고구려로 전달되도록 도왔을 것이다. 이는 안악3호분에 보이는 하북·산동·하남 지역의 고분벽화와 화상석 문화의 혼재를 설명해준다.
357년에 제작되었다는 안악3호분의 고분 구조는 산동성 기남 동한 화상석고분, 요령성 요양 동한~위진 벽화고분, 벽화 주제는 하북성 안평 녹가장 동한 벽화고분, 요령성 요양 상왕가촌 벽화고분, 조양 원대자 벽화고분(전호태, 2007), 묘지 형식은 낙랑·대방군 고지의 고분과 하남·산동·절강 지역의 한대 고분(김근식, 2020)과 연관되어, 4세기 중반 고구려 고분미술에 담긴 다양한 문화교류의 모습이 확인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형성에는 위진시기 하서 지역의 벽화고분도 중요시된다. 정가갑5호묘의 벽화 제재와 구성 배치는 천장 전체에 펼쳐진 운기문의 배치라든가 운기문과 신수(神獸)의 조합, 묘실 안에 목조가옥 구조를 재현한 점 등 신망~동한 전기 하남 지역에서 궁륭형 천장이 발달한 전축분의 특징과 유사하며, 고구려 벽화고분과도 친연성이 보인다. 고구려와 하서 지역 고분벽화와의 친연성은 서한 이후 벽화문화의 전파 과정과 동한 후기부터 북방지역을 따라 형성된 벽화문화권의 교류가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연원에 대한 고찰은 3~4세기에 벽화고분이 조성된 동북과 하서 지역만이 아니라 그 이전인 한대부터 각 지역별로 발달한 고분벽화와 화상석의 특징, 그리고 상호 교류관계를 깊이 있게 고려하면서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해야 한다.
고구려 초기 고분벽화와 위진십육국시기 고분벽화의 발달을 보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단순히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적·시기적 편차를 가지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연원은 인접한 동북·하북·산동만이 아니라, 보다 시야를 넓혀 중원·관중·북방·하서가 종축과 횡축으로 연결된 교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