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 남북조와의 문물교류
2. 중국 남북조와의 문물교류
고구려와 남북조 간의 문물교류는 위진시기부터 시작된 다양한 인적 이동과 공식적인 사절 왕래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북위와 90회 이상, 남조와 50회 이상의 사절단 왕래와 책봉 기록이 전한다. 고구려인의 중국 이동에 대해서는 4세기 초 낙랑군 소멸 후 수·당과의 전쟁 이전에 중국으로 이주한 동이계 주민, 낙랑·요동 등 군현민과 부여·고구려에서 포로로 잡혀 강제 이주된 유민의 궤적을 보여주는 출토 자료가 최근에 새롭게 제시되었다. 요서·평성·관중에서 넓게 확인되는 동이계 주민은 원래 모용선비에 의하여 요서 대릉하 지역으로 교치(僑置) 혹은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전연·후연·북연의 지배 하에 있다가 북위에 의하여 후연이 멸망한 후인 398년, 뒤이은 432년 북연을 정복함에 따라 평성 일대로 대규모 사민이 이루어졌고 다시 북위의 낙양 천도에 따라 관중 지역까지 이동하게 된다. 낙랑 왕씨(王氏), 발해 고씨(高氏) 등 동일 가계의 묘지명이 평성과 낙양에서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요서의 대릉하 유역으로부터 평성을 거쳐 관중에 이르는 이주민의 이동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윤용구, 2021).
남북조시기 북위는 고구려와의 문물교류에서 위진시기의 삼연과 전진, 후조와 유사한 외래문화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북위의 북중국 정복활동은 다양한 문화를 융합시켰고, 이러한 복합적인 문화요소는 북위를 통해 고구려로 흘러들어갔다. 고구려 중기의 벽화고분은 중국 남북조의 벽화고분과 화상석곽, 북조의 불교석굴과 도상의 특징을 공유하거나 양식 발달을 같이하고 있어 문헌으로 찾아볼 수 없는 밀접한 문 물교류를 증명한다.
1) 불교 분야
고구려 불교 분야에서 인적 교류는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 구법승과 공양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 구법승들에 대한 기록은 중국 고승전에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 특히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에 많이 보인다. 고구려 구법승들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동아시아 불교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인물은 승랑, 실법사, 인법사, 파야, 지덕, 지황, 정법사 등이 있다(정호섭, 2018).
고구려 요동성 출신인 승랑은 5세기 후반에 중국에 가서 신삼론학을 연구하였다. 승랑이 찾아가서 삼론을 학습한 지역은 하서주랑의 돈황 또는 대동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대동은 북위 수도 평성으로 운강석굴 건립에 참여했던 석공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동할 때, 승랑이 이들의 무리에 섞여서 남조의 건강 지역으로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승랑이 거주한 서하사는 운강양식의 불상이 조성되어 ‘강남의 운강’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법사와 인법사는 진 멸망 전후 중국에서 활동하였는데, 실법사는 601년부터 3년간 대승경론을 강의하였고, 인법사는 개황 연간(581~600년)에 촉 지방으로 가서 삼론을 강의하였다. 실법사와 인법사는 동문 후배로 여겨지며, 승랑과 함께 세 명의 삼론학 연구 승려로 강남에서 크게 활약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고구려의 파야는 남조 진의 수도 금릉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596년 천태산으로 가서 천태교를 수행하였다. 지덕은 홍인의 뛰어난 제자이자 유명한 선승으로 인정받은 고구려 출신 승려이다. 지황은 577년 진에서 활동하며 설일체유부에 밝았던 고승으로 유명하였다. 중국 고승전에 남은 이들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은 남북조와 수·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여 이들의 활동을 통해 고구려의 사상사적 문물교류를 살펴볼 수 있다(김상철, 2007; 2008; 남무희, 2011; 2017; 정호섭, 2018). 또한 576년 북제에 갔던 고구려 승려 의연은 법상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여 고구려의 불교 이론을 심화시켰다. 의연은 북제에서 여러 불교 전적을 가져왔으며, 북제 불상도 고구려에 전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최성은, 2020).
고구려인들이 중국 내지에 조성한 불교 사원과 석굴의 존재도 주목된다. 북위의 수도였던 하남성 낙양과 감숙, 섬서 지역 북부 등에 고구려인들이 거주하면서 불사활동을 한 석굴들이 남아 있는데 감숙, 섬서 등의 고구려 공양인들은 신분 계층이 높지 않은 이들인 반면, 낙양의 고구려인들은 최고 권력층으로 대조된다. 북위와 고구려의 결혼연맹 형태를 통해 북위에 들어온 선무제의 어머니 문소황후 고씨와 북해왕의 어머니 고태비는 풍태후 집정시기였던 5세기 후반대에 평성으로 이주하였고, 494년 효문제의 천도로 낙양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불사 활동을 하였다. 반면 감숙, 섬서 북부지역에 거주하며 불사활동에 참여한 고구려인들은 전쟁 등을 통한 강제 이주, 또는 부락을 이끈 부족장과 부락민의 중국 투항 혹은 이주로 추정한다. 전연은 342년에 고구려, 346년에 부여를 공격하여 남녀 5만여 명을 전연으로 호송하였고, 전진은 전연 인구와 ‘잡이’ 10만 호를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에 이주시켰는데, 이 가운데 부여인과 고구려인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섬서 북쪽과 감숙 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이 부락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구려 복식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양은경, 2007).
현존하는 고구려 불상은 대부분 6세기대로 편년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재질은 금동상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며 중국의 북위 말~북제대 조각양식과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양은경, 2008). 최근의 연구에서는 남조와 북조의 영향이 보다 상세하게 분석되고 있다. 장천1호묘 전실 북벽의 불상과 서울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은 선정인에 통견의 법의를 입고 사자가 대좌 좌우에 앉은 형식이다. 400년경 유사한 중국 불상으로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포그미술관 금동불좌상, 중국 병령사 11호, 12호 불삼존도의 불상(420~427년경)이 있다.
고구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중국 남조 불상과 이에 영향을 받은 북위 불교조각의 여러 요소가 다양하게 혼재되어 고구려 불상 특유의 양식이 나타난다. 새롭게 출토된 남북조시대 불상들과 비교하면 상호, 착의형식, 수인, 옷주름 표현 등 요소로 보아 불상의 조성 시기를 520년 이전으로는 올릴 수 없으므로 명문에 새겨진 연가 7년 기미는 539년으로 편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최성은, 2017).
평안남도 평원 원오리사지에서 발견된 312점의 불보살상은 중국 북위의 사원불사, 사연불도, 영녕사, 업남성 사원지에서 발굴된 소조상과 출토 상황과 내용, 출토지의 성격, 제작기법, 봉안장소 면에서 비교된다. 사연불도, 영녕사의 목탑지에서는 대·중·소·극소형의 소조상이 출토되었으며, 불상·보살상·제자상·역사상·비천상·공양자상·연화화생상·동물상·불감·연꽃장식·식물문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제작틀에서 찍어낸 것과 손빚기로 성형한 방식을 사용하였고 소성을 한 예와 자연건조 시킨 예가 있다. 마지막에는 채색을 더하였다. 고구려의 원오리사지 출토 토제여래입상(그림10)은 성형 이후 소성을 거쳤으나 중국의 경우 사연불도의 몇몇 예를 제외한 나머지 소조상들은 자연건조를 했다는 점에서 제작기법에 차이가 관찰된다. 원오리사지 출토품이 중국에 비해 간단한 성형기법을 채택한 이유는 형상의 크기가 중국보다 작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원오리사지 출토 소조상은 크기가 아주 작았기 때문에 금당에 봉안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목탑 속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양은경, 2009).

그림10 | 원오리사지 출토 토제여래입상(전호태 외, 2009)
평양 토성리에서 출토된 3점의 도제불상범은 소조불상을 제작하기 위한 거푸집으로, 고구려 불교 초기 여래좌상의 도상과 양식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범 1점의 여래좌상 형식은 북위시대인 5세기부터 중국 섬서, 감숙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북중국의 불상 양식이 고구려 불교조각에 영향을 미친 이른 사례로 이해된다. 이는 중국 남북조 불교조각에서 나타나는 도교적인 요소와 관련하여 주목되는데, 낙랑시기부터 평양 지역에 퍼져 있던 서왕모 신앙이 고구려 불교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평양 토성리 출토 도제불상범 2점의 상현좌 옷주름은 남조 불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특히 남제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찍이 5세기 무렵에 고구려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형태의 상현좌 옷주름은 남제 다음 왕조인 양대에 이르러 보다 자연스러운 형태로 변화되었으나 고구려에서는 고식적 표현이 계속되었다. 토성리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불상범 양식은 고구려 초기 불교조각의 형성에 북조와 남조의 불교조각이 고르게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최성은, 2015).
한편, 불교의 전파와 발달로 고구려에서는 4세기 말경 권운문와당을 대체하여 연화문와당이 사용되었다. 집안 산연화총, 산성하332호묘, 산성하983호묘, 환인 미창구1호묘 등 5세기 중엽 고분에 출현한 연화문장식은 불교 공인 이후 불교의 확산에 따른 결과이다(강현숙, 2013). 한편 고구려 귀면문와당은 입의 모양에 따라 역사다리꼴과 장방형 두 종류로 구분된다. 역사다리꼴 귀면문와당은 북위 수도였던 대동 명당유지 및 낙양 영녕사지 출토품과 유사한데, 시기를 6세기의 1/4분기로 비정한다(강현숙·양시은·최종택, 2020).
고구려 청암리토성 부근 출토 금동관(그림11)의 계보, 문양, 구성요소 등을 살펴보면 고구려에서 금동관을 착용한 목조보살상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의 불상은 주로 금동을 사용하여 소조로 제작되었다. 북위의 수도였던 대동과 낙양의 주요 황실사찰에 봉안된 불교조각상의 재료로는 금, 금동, 옥, 금실, 색실과 진주 등이 확인된다. 북조와 달리 남조의 문헌기록에서는 나무를 재료로 한 불교조각상이 많이 확인된다. 북조보다 남조에서 목조 불교조각상이 많이 조성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청암리토성 금동관은 고구려와 남조 불교의 교류를 보여준다(양은경, 2011).

그림11 | 청암리토성 부근 출토 금동관(전호태 외, 2009)
고구려의 향로는 불교를 매개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주로 고분벽화에 나타난다. 불교 공인 이전의 향로는 안악3호분 벽화(그림12), 불교 공인 이후의 향로는 쌍영총과 장천1호묘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안악3호분 묘주부인도의 향로는 중국 남조 계통의 향로를 수용한 것이고, 쌍영총 공양행렬도의 향로는 동진의 청자등 또는 청자향로와 기형 면에서 유사하여 고구려의 향로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李溶振, 2010).

그림12 | 안악3호분의 묘주부인도(남북역사학자협의회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2006)
고구려의 건축에서 불탑은 8각 평면을 가진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중국 서북부 지역의 북량 소탑에서 확인되는, 고대 중국의 천문학적 우주관이 투영된 8괘 사상과 습합된 열반경 등의 8천신(天神)사상과 미륵신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강병희, 2010).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불교적 요소에 대해서는 중국 북량, 북위시기의 불교석굴미술에서 주로 연원을 찾는다. 장천1호묘의 보살상(그림13)은 병령사 169굴(420년) 북벽의 보살상으로 대표되는 북량의 양주양식과 연관되는데, 북위가 439년 감숙 지역을 점령하면서 감숙에서 평성으로 양주 인구가 이동하여 전파된 양식이다. 고구려 감신총의 신상형 인물에 보이는 불교적 도상의 특징은 돈황의 북량, 북위 석굴불상과 유사한데, 이는 감신총의 묘주가 하서 지역과 연관된 인물이거나 혹은 이 지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였던 인물임을 추정하게 한다. 중국 오호십육국시기에 북방민족 국가들의 초기 불교문화가 고구려에 전파되면서, 감숙 지역의 불교문화가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고구려로 전래되었다고 본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적 소재 가운데 감숙 지역 석굴벽화의 제재와 도상적 상관성을 보여주는 예로서는 불·보살상과 비천, 연화문, 연화화생문, 화염문, 공양인행렬도, 묘주초상 등이 있다(김진순, 2008).

그림13 | 장천1호묘의 보살과 비천(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삼실총의 역사상은 중앙아시아미술이 유입된 북위 운강석굴의 역사상과 평성시기 북위 고분벽화와 석곽벽화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환문총의 환문은 불상 두광의 생략적 표현, 또는 연화문의 간략화된 표현으로 본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전형적인 천장 구조 형식인 모줄임천장(말각조정)은 북위 운강석굴의 제9굴과 제10굴 천장에 비천 등과 함께 장식문양으로 출현한다(그림14, 그림15). 모줄임천장 형식은 서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지중해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데, 의례적 건물에 많이 사용된다(김병모, 1987). 이미 357년에 말각조정을 사용한 안악3호분을 고려하면 고구려 벽화고분의 모줄임천장은 낙랑·대방군 지방에 존재하던 모줄임천장 건축법의 전통과 지식을 토대로 새로 북위와의 문물교류를 통해 실견하게 된 석조건물의 말각조정을 배워 고구려 석실묘에 실현시킨 것으로 본다(김원룡, 1984). 아마도 산동, 하남 등의 한대 화상석과 벽화고분에서 사용되던 모줄임천장 형식이 위진십육국시기 고구려와 북위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림14 | 쌍영총의 모줄임천장(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그림15 | 운강석굴 제10굴의 모줄임천장(필자 촬영, 2000)
운강석굴의 불감 지붕 위에 출현하는 삼각형 화염문도 고구려 각저총과 무용총, 쌍영총에 보이는 것으로, 북위보다 50년 이상 앞선 고구려 벽화의 화염문을 현존 유물로 판단하면 고구려가 오히려 중국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위의 화염문이 대동과 고원에 한정되어 나타나므로 운강석굴을 지으면서 요동의 모용선비, 고구려인 등 중국 전역에서 36만 명을 대동으로 이동시킨 태무제의 사민정책으로 고구려의 화염문이 북위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이송란, 1998).
삼각형 화염문이 나타나는 운강석굴 제9굴과 제10굴은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굴로서 천인·역사·신수·산악(수미산) 등 다양한 도상과 문양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친연성을 보인다. 북위 고분미술의 도상과 문양이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불교미술, 장식문양과 융합되어 있다(주경미, 2020). 이는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문화적 다양성과 동일한 맥락에서 형성된 당시 북위의 국제적 미술문화를 살필 수 있어 중요하다.
2) 고분미술 분야
최근에 북위 수도 평성이 있었던 산서성 대동 지역에서 북위 벽화고분이 여러 기 발견되었다. 북위 벽화고분은 고구려 초기 벽화고분보다 조성이 늦어 고구려의 벽화가 북위의 벽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고구려 벽화고분과 동 시기 중국 위진남북조~수·당 벽화고분과의 비교는 1980년대 이후부터 고분 구조, 벽화 제재와 배치 등 여러 선행연구가 이루어졌다.
북위 벽화고분은 한·위 벽화 전통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지역과 하서 지역의 위진 문화요소를 흡수, 계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남조의 묘장예술을 흡수하는 동시에 불교예술 형식을 융합하여 북위 특유의 다원적인 새로운 묘장장식예술을 만들었다고 본다.
고구려 중기 고분미술과의 문물교류를 보여주는 북위의 벽화고분은 수도였던 산서성 대동과 하남성 낙양에 주로 분포한다. 묘실, 목관, 석관, 석곽의 회화와 조각 등을 포함하여 북위의 벽화고분은 20기 이상이다. 대동 지역에는 탁발선비가 398년 평성으로 천도하고 494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1세기 동안 주요 묘장이 조성되었다. 이전에는 북위 벽화고분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고구려 중기 벽화의 생활풍속도와 비교할 수 있는 사례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대동 지역에서 2005년 사령묘(435년), 2008년 동가만묘(양발호묘, 461년), 2009년 운파리로묘, 어동신구 문영북로묘, 2011년 장지랑묘(460년), 2014년 운파로 화우 석곽묘, 2015년 부교발전창 석곽묘(469년), 2017년 어동신구13호묘(가보묘, 477년), 2018년 사령건재시장 석곽묘, 2019년 운파리 화우 이기묘, 2019년 이전창37호묘, 2020년 평성구 칠리촌묘 등 새로운 벽화고분이 계속 발굴 소개되고 있다.
적석총과 석실봉토분이 중심인 고구려 벽화고분과 비교하면 대동 지역 북위 벽화고분은 대개 전실묘와 토동묘 두 종류이고 경사진 묘도를 갖고 있어 구조상 차이가 난다. 북위 고분의 회화 형식은 묘실벽화와 석장구(석곽, 석관, 석상) 및 목관의 채화 또는 조각, 병풍 등 부장 기물의 채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는 묘실벽화가 주종이며 강서대묘 등에서 칠관 잔편이 나왔으나 현재로서는 칠관화가 어느 정도 제작,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어렵다.
평성시기 후반부로 가면 벽화가 석곽이나 석관, 칠관 등으로 옮겨가면서 묘실 내 벽화가 감소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북위가 천도한 낙양 지역에는 벽화고분이 적고 대개 520~530년대의 것이며 보존상태도 좋지 않다. 6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여전히 활발하게 벽화고분을 지은 것과는 대조된다. 대신 낙양에서는 석관이 대표적인 장구로 사용되었다. 30여 건이 발견된 북위 화상석 장구 가운데 낙양 지역에서 약 18건이 발견되었고, 보존이 양호한 사례는 14건이다. 북위 석관의 화상자료는 청룡과 백호 등 사신 도상 외에 도교의 승선(昇仙) 도상과 유교의 효자 도상과 수목·산석·가옥 등 현실 제재를 추가하여 내용이 풍부해진다. 대동의 벽화고분에 묘주도·수렵도·행렬도가 주로 그려진 반면, 낙양의 석장구에는 사신과 승선, 산수 등이 선각화로 새겨졌다. 고구려 후기의 벽화 주제인 사신도·승선도·산수도는 낙양 지역 석장구의 선각화 주제와 연관되며, 사신과 산수의 양식적 발달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비록 벽화와 선각화라는 제작 매체와 기술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고구려와 북위가 화본 등을 통하여 장의미술의 주제와 양식을 교류 또는 공유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최근 활발하게 발굴되고 있는 대동 지역의 북위 고분은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문화적 포용성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오호십육국시기에 북방민족이 세운 여러 나라의 정복활동과 사민정책으로 북중국 여러 지역의 인적·물적 교류와 혼합이 이루어졌는데, 북위시기에도 북위의 동북과 서북 지역 정복활동으로 수도 평성에 여러 지역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흘러들어 한, 위진, 십육국시기의 고분미술과 불교미술이 하나로 융합된다.
북위의 평성시대 전기(398~465년)에는 서진·한조·후조·전연·전진 간의 문화교류, 후연·후진·대하·북연·북량·유연·동진·유송 간의 문화왕래에 더하여, 북위의 정복전쟁으로 한족, 흉노족, 고차인, 모용선비족, 고구려인, 강족 등 대규모 사민 인구가 평성으로 이동하였다. 북위 수도 평성의 건설에 많은 고구려인이 참여한 사실은 『위서』 권2 태조기 천흥 원년 정월조에 기록되어 있다. 천흥 원년은 398년으로, 탁발부가 산동성 육주에서 평성으로 옮긴 인구 중에 ‘고려’, ‘잡이’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용부와의 전쟁으로 인해 화룡성으 로 옮겨진 고구려인이 다시 평성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의 묘장문화, 하북·산서의 서진 묘장문화, 위진시기 오환·흉노의 묘장문화, 한조·후조·대하 및 중원 지역 전연·후연의 묘장문화가 모두 한곳에 융합된다.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와 많은 친연성을 보이는 북위의 평성시기 묘실벽화, 석곽벽화, 목관채화는 묘주연회도, 수렵도, 행렬도, 부속건물도 등 일정한 주제가 유사한 구도와 배치로 반복된다. 북위의 고분벽화는 동북지역의 고구려 벽화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서 유입된 문화요소의 융합이 관찰된다. 북위 벽화의 묘주연락도, 거마출행도, 산림수렵도, 문리무사도는 삼연과 고구려 문화요소, 장원생활도는 하서와 동북 요소, 복희여와도와 청룡백호도는 하서 요소, 진묘무사와 진묘수는 중원 요소가 크다고 본다. 수면·역사·운기문과 사신 등 대표적 기금이수 제재는 동북과 하서 지역에서 모두 발견된다.
북위 사령묘(435년)의 묘주도(그림16)는 덕흥리벽화고분(408년)과 쌍영총 등 고구려 벽화고분의 묘주도 형식을 따르고 있다. 사령묘의 묘주도는 산서성 대동의 동가만묘와 운파리로묘, 내몽고자치구 유수량촌묘, 서경박물관 소장 해흥석당(458년)(그림17) 등으로 이어지는 북위 고분 묘주도의 전형이다. 동가만묘, 운파리로묘, 유수량촌묘의 묘주도는 모두 호인의 가무 기악과 함께 그려지는데, 이는 고구려의 무용총, 수산리벽화고분에 보이는 묘주와 가무 또는 곡예의 구성과 같다.

그림16 | 사령묘의 묘주부부도(徐光冀, 2011a)

그림17 | 해흥석당의 묘주부부도(大同北朝藝術硏究院 編, 2016)
산서성 대동 지가보 석곽묘는 묘주 좌우에 연꽃을 든 시종들과 날개옷을 입은 천인들이 등장하는데, 안악2호분의 비천 아래에 행렬하는 연꽃을 든 인물들과 구성이 유사하다. 고구려와 북위 벽화에 보이는 연꽃을 든 인물의 행렬 묘사는 불교석굴의 공양인상을 받아들여 고분미술에 표현한 결과이다.
북위의 묘실벽화는 석장구로 옮겨지면서 구성이 간결해진다. 해흥석당의 묘주부부도는 고구려의 쌍영총, 북위 동가만묘와 운파리로묘의 묘주상과 구도 및 형식에서 거의 같다. 서경박물관 소장의 석관에는 작은 나무들이 둘러싼 야외공간에서 묘주 부부가 손님 및 악사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고, 다른 석판에는 가옥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들과 여러 대의 수레, 천막을 포함한 부속건물들, 생산활동 등이 담겨 있다. 묘주 부부의 크기가 다른 인물들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가무, 연회 등 화면이 비교적 자유롭게 구성되어 장천1호묘의 전실 북벽에 그려진 야외연회도 구성과 흡사하다. 해흥석당과 서경박물관 석관의 화면 곳곳에 묘사된 키가 작고 둥근 잎이 달린 나무의 표현은 덕흥리벽화고분과 장천1호묘의 나무를 연상케 한다.
사령묘에는 덕흥리벽화고분과 같은 대규모 행렬도가 있어, 안악3호분에서 덕흥리벽화고분, 약수리벽화고분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행렬도 형식을 잇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가만묘와 운파리로묘는 행렬도 대신 수렵도가 묘실 한쪽 벽면에 크게 묘사되었다(그림18). 운파리로묘의 수렵도는 중앙에 큰 나무가 화면을 반으로 나누고 있으며, 동가만묘 수렵도는 화면 중앙에 지그재그 방향으로 뻗은 산악을 배치하여 화면을 양분하고 산악 좌우로 기마반사자세를 포함하여 각 4명씩의 기마 또는 도보 수렵 인물들을 배치하고 다양한 동물들을 야외의 빈 공간에 채워 넣었다. 동가만묘의 수렵도를 가로지르는 산천(山川)의 표현은 덕흥리벽화고분의 천장 은하수에서 연원한 동북 요소로 본다. 산악의 형태나 산 위에 낮게 자란 나무의 형상, 그리고 수렵 인물들의 동세와 화면 구성 등이 덕흥리벽화고분, 약수리벽화분, 무용총(그림19), 장천1호묘와 유사하여 5세기경 동북아시아 지역 수렵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고구려와 북위의 공통적인 수렵도 형식은 내몽고 지역의 유수량촌묘에서도 출현한다. 하류가 화면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고, 소·호랑이·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들을 대각선 방향의 산악과 수렵 인물과 함께 운동감 있게 배치하여 북방민족 사이에 공유한 수렵도 특징이 잘 묘사되었다.

그림18 | 운파리로묘의 수렵도(大同市考古硏究所, 2011)

그림19 | 무용총의 수렵도(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고구려 벽화고분의 묘실 입구에 주로 그려지는 묘를 지키는 수문장상은 갑주무사형 수문장과 불교의 보살 또는 천왕형 수문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위의 수문장 역시 동 시기적 특징을 공유한다(박아림, 2021). 북위 벽화고분 진묘무사의 도상은 무사·시종형(사령묘)에서 보살·천왕형(산서성 회인묘, 문영로묘, 운파리로묘)으로 변천한다(그림20).

그림20 | 문영로묘의 수문장도(大同市考古硏究所, 2011)
사령묘의 진묘무사상은 묘실 남벽에 넓은 소매에 적색포를 입고 칼과 방패를 든 한 쌍의 무사상과 용도 양 벽에 인면신수와 함께 갑옷을 입고 칼과 방패를 든 한 쌍의 무사상이 출현한다. 용도 양 벽의 벽화는 진묘무사와 진묘수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 무덤의 용도에서도 각저총에는 개가, 환문총에는 커다란 진묘수가 그려져 있어 묘를 지키는 신수 도상이 고구려와 북위에 공통적으로 출현한다. 사령묘의 우락부락한 수문장은 쌍영총의 수문장(그림21)과 같이 벽사로서의 상징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림21 | 쌍영총의 수문장도(오른쪽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쌍영총 전실과 용도 견취도 일부, 왼쪽은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1993b)
북위 영빈대도16호묘(산서성 대동)의 진묘무사상은 손에 긴 창을 들고 갑옷을 입고 연화좌 위에 서 있어 전통적 진묘무사상에 불교적 요소가 추가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표현은 고구려 통구 사신총의 연꽃 위에 서 있는 천왕형 수문장과 유사하다.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사신과 서수 도상을 북위 사례와 비교해 보면, 고구려의 사례가 북위보다 선행하여 출현한다. 양국 고분벽화에 그려진 천상세계 제재의 연원은 중국 섬서성 정변이나 감숙성 돈황 같은 북방지역의 위진시기 벽화고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위 사마금룡묘(산서성 대동) 석관상의 인수조(人首鳥)와 영빈대도90호묘의 관덮개에 그려진 천하성운도 등은 덕흥리벽화고분의 전실 천장벽화에서 연원을 찾는다. 고구려 덕흥리벽화고분과 무용총 천장의 다양한 천상 제재 벽화는 4세기 동아시아 벽화고분의 천장벽화에서 보기 어렵다. 그 연원은 위진시기 감숙성 불야묘만묘와 정가갑5호묘, 동한대 섬서성 정변현 양교반진 거수호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하수, 복희, 여와, 청룡, 백호, 견우와 직녀 등으로 구성된 거수호묘 천상도는 덕흥리벽화고분 천상도의 연원을 북방기류가 흐르는 섬북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박아림, 2019).
고구려와 북위의 서수 도상 출현을 비교해보자. 먼저 고구려의 경우 5세기 고분벽화 천장 평행고임 부분에 사신 도상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무용총은 사신의 방위 개념에 따라 동서에 청룡과 백호를 배치하고, 현무와 주작은 정식 출현 전이라서 남북에는 다른 도상이 배치되어 있다(그림22). 장천1호묘도 동서쪽 평행고임에 청룡, 백호가 출현하나, 남북 방향에 현무가 출현하지 않았고 주작은 유사한 형태로 여러 마리가 줄지어 그려진다. 삼실총도 사신이 서수의 일부로 인식되어 현무와 여타 서수들이 평행고임에 줄지어 출현한다. 5세기 후반의 쌍영총은 전실 동·서벽에 청룡, 백호가 크게 그려져 두 사신의 중요도가 인식되었으나 주작은 쌍으로 천장 평행고임에, 현무는 묘주부부도 측면에 쌍으로 그려져 사신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다.

그림22 | 무용총의 서수와 천인(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이는 중국 한대부터 고분미술에 중심제재로 사용된 사신 도상이 아마도 문물교류 과정에서 모본이 고구려에 전해지면서 도상의 조합방법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거나, 공간 배치 면에서 중요도가 떨어져 허술하게 배치되었거나, 사상이나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용된 결과로 보인다.
북위의 5세기 벽화에서는 사신의 개념이나 도상이 고구려 5세기 전반 벽화와 차이가 없어 유사한 형태의 서수 모본으로 사령묘와 운파리로묘의 벽면 상단에 모본의 틀을 간직한 채 방형 공간 안에 그려져 있다. 평성시기 고분의 서수 표현은 사령묘와 같이 벽면 상단 장방형 구획 안에 그려져 화본 형태를 그대로 본뜬 경우도 있는 반면, 해흥석당과 같이 문지기상과 서수상이 한 화면에 어지러이 혼합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화면의 무질서함은 석곽, 석당이라는 구조의 화면적 제약도 작용했겠지만, 모본 배치에서 특정한 규칙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거나 화면 구성의 규율을 알지 못한 지역 화공(석공)의 조합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무용총 8단 천장과 삼실총 3단 천장의 좁은 공간에 배치된 여러 종류의 서수나, 사령묘와 운파리로묘 벽면 상단에 일렬로 배치된 이러한 서수의 모본 원형은 하서 지역 감숙성 돈황 불야묘만 위진 채회전묘(그림23)와 고대 지경파 위진 벽화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한대에 중원지역에서 사용되던 서수 도상의 모본이 위진시기에 하서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북방기류 경로를 따라 고구려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박아림, 2019).

그림23 | 불야묘만37호묘의 주작(戴春陽, 1998)
문물교류의 형태로 전달된 고분미술의 화본은 한번 전달된 이후에는 상당히 긴 생명력을 가지고 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에 그려진 여러 신선들이나 해신·달신 제재(그림24)는 유사한 사례가 동한대 화상석과 벽화에서 자주 관찰된다. 동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고분미술 모본이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와 부활하여 변용, 사용된다는 점은 고분미술 모본의 축적과 전래양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24 | 오회분4호묘의 해신과 달신(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북위 채회관화 가운데 잘 알려진 영하회족자치구 고원묘에서 나온 칠관화(486년경)에는 한대 고분미술의 대표 제재인 동왕공과 서왕모가 관덮개에 출현하고 있으며, 좌우 측판 상단에 효자고사도가 삼각형 화염문으로 구획된 공간에 그려져 있다(그림25).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에 한대 화상석에서 보이는 여러 신화 속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고구려와 북위 고분미술에 복고풍의 제재가 5~6세기에 다시 출현하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그림25 | 고원묘의 효자고사도(寧夏回族自治區固原博物館, 1999)
5세기 고구려 벽화에 한대 고분미술의 제재나 표현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이 시기 대외 교류의 한계로 인하여 오래전에 전해진 모본을 사용하거나 기존의 전통 모본이 부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구려 벽화의 도상 형성을 관찰해 보면, 문물교류 과정에서 들어온 외래 화본이 오랜 기간을 거쳐 계승, 발전되는 특징이 보이므로 해당 화본을 포함한 문물의 전파 경로와 전파 시기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도상은 세대를 이어 전래되는 것이어서 시기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지만 한 세대를 지나 다시 출현하기도 한다.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새롭게 등장하는 귀갑문, 연화문 등을 이용한 순수장식문양도 벽화는 대동 호동1호묘 출토 칠관화와 고원묘 출토 칠관화 및 낙양 출토 북위 석관의 선각화 등과 표현과 배치 방식이 유사하여 고구려와 북위 고분미술의 동 시기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기에는 생활풍속도가 중심이었다가 후기에는 사신·신수·산수 도상이 중심이 된다(그림26). 한편 평양 외곽의 강서 지역에서는 묘주도, 행렬도를 그리는 전통이 타 지역보다 늦게까지 잔존한다. 쌍영총, 대안리1호분 등 5세기 중엽과 후반의 벽화고분에서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고분의 사례 후에도 고구려가 유입해오는 중원지역의 이주민을 계속 이 지역에 이주하여 살게 한 것이 배경이라고 생각된다(공석구, 2020).

그림26 | 오회분4호묘의 사신과 장식문양(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사용된 도상이나 장식문양은 4세기까지 축적된 고분미술 전통을 기반으로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에 새롭게 유입된 불교미술과 중앙아시아미술이 혼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북위 수도 평성의 운강석굴 조성에 고구려인을 포함한 각국의 장인들이 함께 작업하는 과정 등을 통하여 불교미술과 고분미술의 모본을 공유하고 장인들이 서로 교류하는 경로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440~461년 북위와 고구려 간에는 사신 파견이 중지되었고, 460년에 북위가 운강석굴을 개착하면서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고분미술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461년의 동가만묘에는 묘주도·수렵도·가무연회도로 구성된 생활풍속도가 그려진다. 그런데 469년의 부교발전창 석곽묘에서는 불교석굴 내부를 재현한 불·보살상과 공양인, 호법신으로 석곽 내부를 구성하여, 점차 묘실 벽면에 그려지던 생활풍속도 중심의 벽화가 석곽, 목관으로 옮겨 가 간략하게 그려지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는 양국 모두 생활풍속도를 그리는 계세사상보다 불교적·도교적 내세관을 포함한 새로운 사후세계관을 가지게 되면서 고구려에서는 후기에 사신도 벽화가 중심이 되고, 북위에서는 묘실벽화가 사라지는 대신 석관에 사신도 중심의 석관 선각화가 새겨지는 것이다(그림27). 고구려 후기와 북위 평성시기 후기부터 낙양시기까지 공통적으로 생활풍속도가 사라지는 것은 양국이 사후세계관과 그것이 반영된 고분미술에서 사상사적·미술사적 흐름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림27 | 북위 석관의 사신과 장식문양(필자 촬영, 2010, 낙양 관림박물관)
고구려 고분미술에서 불교미술 도상이 장의미술로 편입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사례가 장천1호묘 전실 천장의 불·보살상 예불도(그림28)이다. 묘실 내에 불교 사원 또는 석굴의 미술을 재현한 것으로 동아시아 장의미술에서 드문 사례이다. 북위에서도 장의용 석곽의 벽화에 불교미술을 그대로 가져와 불교 석굴벽화의 구성을 재현한 사례가 2015년에 발견되어 주목된다. 부교발전창 석곽묘 내부에는 이불병좌상, 호인 승려와 선비 복장의 남녀 공양인, 2명의 수문장, 박산향로 등이 벽화로 그려졌다(그림29). 섬서성 정변 팔대량1호묘도 소그드 공양인과 승려, 불탑, 수문장 등 불교적 색채가 짙은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들 북위 고분벽화는 고구려와 북위에서 장의미술과 불교미술의 공존현상 및 내세관의 변천을 잘 보여준다.

그림28 | 장천1호묘의 불상예불도(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그림29 | 부교발전창 석곽묘의 이불병좌상(大同市博物館編, 2018)
고구려와 북위가 불교미술을 고분미술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불교 도상을 장의미술에 직접적으로 적용한 또 다른 사례로는 보살형 또는 천왕형 수문장상이 있다. 고구려 삼실총 제1실 입구에 그려진 보살형 수문장, 북위의 회인묘(산서성 삭주) 용도 동·서벽 수문장, 문영로묘(산서성 대동) 용도 동벽 수문장, 장지랑묘(산서성 대동) 석곽 앞벽 수문장 등이다. 고구려와 북위의 불교식 문지기상과 유사한 불교석굴의 보살상으로는 신강위구르자치구 키질 제171굴(417~435년) 보살상, 병령사 제169굴(서진, 420년) 6호감 좌측 미륵보살, 천제산 제4굴(북위) 중심주 서면 보살 등이 있다. 이들 이질적 수문장상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고분미술을 담당한 화공이나 각공 집단이 여러 갈래의 문화 계통을 가진 다양한 외래계 미술문화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박아림, 2019).
또한 고구려와 북위 고분벽화의 수문장, 우인, 괴수의 표현에서 옷 끝단이 좌우로 갈라진 천의를 입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고구려 덕흥리벽화고분과 무용총의 천인, 병령사 제169굴 6호감 좌측 연꽃을 든 공양인, 맥적산 석굴 제115굴(502년) 우벽 인연(因緣) 고사의 괴수가 입고 있는 천의 등에서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북위 고분벽화의 수문장상이 한대의 전형적인 문지기상에서 불교미술의 신장형으로 바뀌는 급격한 양식적 변화는, 불교미술의 유입을 배경으로 불교 도상의 전파와 불교적 내세관의 유행을 잘 보여준다. 불교미술의 신장상이 고분미술의 문지기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고분이라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묘주를 묻는 장의미술의 장소에서 신앙관이 표출되는 종교적 장소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종교미술은 장의미술 못지않게 일정한 교리나 경전에 따라 상징성을 가진 제재가 만들어진다. 외래미술인 불교미술의 도상과 제재의 전파에는 불교미술에서 휴대가 가능한 견화나 지화 형태의 화본이나 소형 불·보살상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상징성의 변화에는 사상의 변화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고분을 축조하고 장식한 화공, 장인 집단의 정체성, 어쩌면 불교석굴에서 작업한 경험이 있었던 이들의 작업경험도 특정 장소에 특정 제재를 배치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보살형 문지기, 천왕형 문지기가 많이 유입되어 들어온 이유는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견화 사례와 같이 다수의 천왕, 보살 견화가 존재하므로 이들 견화, 지화가 작고 휴대가 간편하여 유입이 쉬웠을 것이다. 벽화는 현장에 가서 실견하지 않은 이상 접하기 어려우므로 실제 모본으로 전달된 것은 견화나 지화였을 것이다(박아림, 2019).
한편,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에 사신도가 묘실벽화의 중심제재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고구려와 남조의 교섭을 배경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고구려는 송에 19회, 남제에 4회, 양에 11회, 진에 6회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양과는 백제의 사신 파견보다 2배 많은 기록이며, 특히 520년대부터 북위, 유연과의 복합적인 국제관계 속에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양과 교섭하게 된다(백다해, 2020). 5세기 중엽인 463년 장수왕의 송 효무제 책봉문에서 송이 유연에 사신을 파견하려 할 때 중재하는 등 고구려는 유연, 북위, 남조의 송 등과 모두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는 주제 구성 면에서 중국 남조의 화상 전묘와 연계하여 발전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강소성 남경 서선교묘, 단양 호교 오가촌묘 등 남조 화상전묘는 대개 단실 전축묘이며 묘실이나 용도의 한 벽면을 청룡과 백호 또는 죽림칠현 도상을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그림30). 고구려와 남조 송·제·양·진과의 교섭은 고구려가 남조의 발달된 화상전묘의 청룡·백호·천인 도상을 도입하여 묘실벽화에 표현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김진순, 2009; 박아림, 2022).

그림30 | 남조묘의 사신도(필자 촬영, 2018, 남경박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