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방유목민족 및 서역과의 문물교류
3. 북방유목민족 및 서역과의 문물교류
고구려 벽화고분과 서역미술과의 관계에 주목한 초기의 연구자는 독일 유학 후 안악3호분을 포함하여 북한의 고고학 유적 발굴을 주도한 북한 학자 도유호이다. 그는 고구려의 고임식 천장을 ‘파르티아류 건축’ 특징의 하나로 보고, 고구려가 흉노나 돌궐과 접촉하여 장성지대에 흐르던 문화의 조류를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기마수렵의 모티프 역시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벽화를 사례로 들면서 파르티아와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안악3호분 발굴 시에 현실 동벽 무용수의 눈동자가 노란 빛깔로 표시된 것을 목격하여 고구려 벽화에 서역인의 출현을 처음 제시하였다. 고구려가 서역과 초기에는 간접적으로, 후에는 직접적 교류를 하여 고구려 고분에 서역문화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제시하였다(도유호, 1959).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서역과의 문물교류상은 서역의 미술과 건축기법, 악기 전래, 복식 교류 등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정수일, 2005). 연구가 점차 심화되면서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서역계 인물과 문물, 장식요소를 구분하고, 그것이 관념인지 실제인지를 분별하는 작업과 전파 경로를 유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강현숙, 2013; 전호태, 2012).
집안 지역 벽화고분의 경우, 요령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평양·안악 지역의 한(漢)계 벽화고분과 다르며, 하북-산동-요령으로 이어지는 교류로가 아닌, 중국 서북지역이나 북방지역과의 폭넓은 교류를 상정하게 한다. 3~4세기 중국에서 벽화고분 축조가 쇠퇴하는 동안 고구려는 벽화 장식을 위한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중국 북방 지역과 하서 지역의 고분벽화와 불교석굴예술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박아림, 2015).
고구려와 시차 없이 문물을 교류하던 삼연의 수도가 있던 조양은 실크로드의 연장선 끝에 있는 중심교역지로서 소그드인의 집단거주지가 위치하였으며, 소그드가 왕래한 하서-포두-호화호특-대동-적봉-조양으로 이어지는 북중국루트에 위치하였다. 조양은 가장 동쪽에 있는 소그드 상인들의 취락지이며 사마르칸드로 가는 기점이었다. 조양에서는 7세기 중엽 전후의 전형적인 소그드 금은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권영필, 2007). 또한 조양은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고구려로 연결되는 불교문화의 전파경로나 북위 불교미술의 고구려로의 전파에서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조양 북탑 출토 소조불상은 감숙성 병령사 석굴 제169굴의 서진대 불상, 막고굴 제268굴·272굴, 금탑사 동·서굴 불상 등 감숙 지역 오호십육국시대 불상과 유사한 점이 지적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 감숙 지역 불상의 대의(大衣) 표현 수법은 신강위구르자치구 쿠처, 호탄 등 서역 불상과 직접적 영향관계를 보인다(양은경, 2007).
고구려 고분벽화와 북위 고분미술과의 두드러진 연관성은 ‘북방기류’라는 용어로 설명되는데, 고구려와 중앙아시아의 관계를 한문화 중심이 아닌 북방문화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이러한 북방기류론은 북방민족 간에 문화적 연대가 형성되었으며 고구려의 조형이 북방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고구려 벽화의 일정한 문양과 특정한 양식적 표현이 서역미술, 특히 돈황벽화의 유사한 사례들의 선구가 되고 있어 이러한 고구려의 조형성이 북방의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흐르는 현상을 설명한다(권영필, 1996). 남북조시기에 오면 고구려가 북방기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동시에 고구려와 하서 지역과의 문화교류가 양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권영필, 1997). 이는 북방지역을 통한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가 양방향으로 오랜 시기 동안 꾸준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무용총 벽화와 관련하여 실크로드 동북루트가 만주를 통해 한국으로 연결된다고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무용총에 보이는 고구려의 기마반사자세는 북방의 유목문화와 연관된 낙랑을 통해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는 동시에 돈황 제249굴, 제285굴(6세기 중엽, 서위) 수렵도와 유사하여 고구려와 북중국 북방과 문화교류가 행해졌을 것으로도 본다(권영필, 2007). 고구려가 북위와의 접촉을 통해 가깝게는 북위 수도인 평성의 문화를, 멀게는 북위가 치중한 하서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고구려는 두 지역을 발판으로 중앙아시아 문화를 간접적으로 흡수하였고, 북위가 439년 북량을 멸망시키고 돈황을 영토화한 후로는 더욱 직접적으로 중앙아시아 문화를 받아들이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권영필, 1997; 2007).
무용총을 포함하여 집안 지역 묘주도에 묘사된 의자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불교사원에서 유래하여 북방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이방인들이 사용한 것이 전래되어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직접적인 중앙아시아 문화와의 교섭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이송란, 2005).
각저총과 무용총에는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계 씨름인이 등장하며, 장천1호분 앞방 북벽에는 여러 명의 서역계 인물들이 곡예사나 마부 등으로 등장한다(그림31).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서역계 인물들에 대해서는 후조로부터 온 갈호나 그 후예(전호태, 1993) 또는 소그드인으로 추정되어(이송란, 1998). 서역인의 직접적인 유입을 상정하게 한다(전호태, 1993; 이송란, 2005). 소그드인들은 일찍이 한대부터 중국에서 활동하였는데, 고구려의 경우 안악3호분 주실 가무기악도의 가무인(그림32)과 같이 고구려 연희에 소그드 예인들이 표현되어 고구려와 소그드 간의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이송란, 2005).

그림31 | 장천1호묘의 야외연회도(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그림32 | 안악3호분의 가무기악도(모사선화, 전호태, 2012)
한편, 이러한 서역계 인물의 표현에 대해서 중원 요소와 비중원 요소로 나누기도 한다. 중원 요소로는 수박희나 씨름, 평복의 수문장, 비중원 요소로는 기마자세의 하늘을 받드는 역사와 갑옷 차림의 수문장이 있다. 이들이 실제 서역인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서역인에 대한 이미지를 관념과 결부시켜 표현한 것인지, 혹은 도상화된 이미지를 그대로 모방하였는지는 좀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장의예술의 하나로 중국에서 유입되었지만, 서역계 인물이 표현된 제재는 관념과 도상화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고구려의 실제가 반영되었다. 서역계 인물로 표현된 비중원적 제재가 표현되기 시작하는 5세기 전·중엽에는 고구려에 서역계 주민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중국 북방왕조로부터의 불교 수용과 확산이 고구려화된 서역인과 서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 주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강현숙, 2013).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다양한 문화요소를 보아, 고구려와 북위 사이의 상설사행로와 유연을 매개로 한 고구려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북방 교역로(적어도 43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유연과의 교섭)를 통하여 새로운 벽화 요소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된다(전호태, 2002). 같은 시기의 고분벽화 가운데 서역계 문화요소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장천1호묘 벽화는 실제 서역 출신일 가능성이 있는 백희기악도의 서역계 인물들과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불상예불도 등으로 북위를 통한 간접적 유입, 유연을 통한 직접 교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전호태, 2015). 479년 고구려가 유연과 대흥안령 동남부에 있는 지두우 분할 점령을 도모한 사건도 유연 지역을 통 한 교류가 집안 지역 5세기 고분벽화에 중앙아시아 문화요소가 도입되는 배경으로 작용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악3호분 부엌도에 그려진 유리용기(그림33)와 유사한 유물이 나온 중국 고분으로는 1956년 발굴된 서관영자1호묘(415년)가 있다. 풍소불묘(馮素弗墓)라고도 불리는 이 묘에서 출토된 5점의 유리기(그림34)는 한대의 불투명한 유리와 달리 초록빛을 띠는 투명유리로 서방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연 풍씨는 유연과 통혼하였고 유연이 당시 막북을 점거하여 서역 제국과 연관된 점을 고려하면 풍소불묘의 동로마 유리기는 유연을 통해 전입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북위를 비롯한 북조의 상류층 분묘에서는 서방에서 제작되어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공예품이 종종 출토되는데, 특히 금이나 보석을 사용하여 만든 반지나 장신구류, 유리기 등이 많다.

그림33 | 안악3호분 부엌도에 그려진 유리용기(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b)

그림34 | 서관영자1호묘 출토 유리기(필자 촬영, 2006, 요령성박물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서역 요소의 일부는 중원을 거치지 않고 유연과의 교류를 통하여 초원길로 고구려에 바로 전해져 수용되었을 수 있다. 고구려의 문물교류에서 초원길의 역할은 잘 알려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궁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림35). 이 벽화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두 명의 사신에 대해서는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김원룡, 1976; 1984)와 고구려인으로 보는 견해(박진욱, 1988)가 있는데, 최근에는 고구려인으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우덕찬, 2004; 지배선, 2011; 이재성, 2013). 실제 고구려 사절이 소그드왕국의 땅 사마르칸트로 가기 위해 선택한 길은 돌궐제국의 영역을 지나는 초원길로 추정한다(전호태, 2012).

그림35 | 아프라시아브궁전벽화의 외국사절도(모사복원도 일부, 동북아역사넷 제공)
한편, 아프라시아브궁전벽화와 돈황 불교석굴벽화 등 조우관을 쓴 인물이 그 지역에서 활동했던 고대 한국인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당으로부터 모본이 전해져서 그려진 고대 한국인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 도상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정호섭, 2013).
최근에는 당시 강국이 서돌궐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사실에 주목하여 아프라시아브궁전벽화가 중국 당이 아닌 돌궐의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한다. 〈퀼 테긴 비문〉(그림36)에 보이듯이 6세기 이래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해 돌궐인들이 고구려에 대해 가지게 된 이미지가 강성한 당의 사절과 함께 바르후만왕의 치세를 영광스럽게 보여주는 등장인물로 벽화에 묘사될 수 있었다(이성제, 2019).

그림36 | 퀼 테긴 비(필자 촬영, 2019, 몽골 호쇼차이담박물관)
고구려 고분벽화를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여러 나라의 범위를 넘어서서 북방과 서역을 포괄한 유라시아문화 차원에서 조망하여 흉노, 스키타이, 그리스·로마, 쿠샨, 에프탈, 사산조페르시아, 비잔틴제국 등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다양한 문화요소를 구별하여 고구려 벽화의 원류를 살펴본 연구도 진행되었다(박아림, 2015). 고구려 벽화고분의 유라시아문화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북방초원의 유목세계에서 확인되는 고임식 천장가구, 기마반사자세, 팔메트 문양의 사례를 들어 알타이 지역에서 고구려로의 문물전파 가능성이 제시되었다(정석배, 2017).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중기의 북방민족과 중국 여러 나라들과의 문물교류는 위진십육국시기와 남북조시기에 걸쳐서 다양한 인적 이동과 교류, 사회문화적 교류, 불교 사상과 미술의 전파, 고분미술의 시기별 변천과 상호 영향, 고분미술과 불교미술의 융합 등 방면에서 상호 양방향적으로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졌다. 최근 대동 지역과 성락 지역에서 고고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향후 고구려와 북위 간의 직접적인 교류와 북위를 매개로 한 북방지역과 중앙아시아지역과의 교류가 더욱 상세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