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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백제와의 문물교류

1. 백제와의 문물교류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이후 국경을 접하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각축전을 벌였다. 문헌기록상으로 양국 관계는 주로 대립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문화교류에 관한 기록은 거의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두 나라가 많은 전쟁을 겪었음에도 그 과정에서 문물교류는 이루어지며, 전쟁이 인적·물적 교류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문물자료 사이에 유사한 요소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양국 사이의 직접적인 인적 교류 과정에서 문물교류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함께 두 나라는 초기부터 낙랑군 등 중국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문화권의 보편적인 문화적 속성도 병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이후에는 고구려가 북방의 왕조들로부터의 문화를 수용한 것에 비하여, 백제는 주로 해양을 통한 교류로 남조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양상은 두 나라 간 문화적 공통성과 차이점이 발생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양국 간 문물교류의 결과로 확인되는 요소들은, 주로 한성기에는 고분문화, 전쟁과 점유에서 확인되는 문물자료 등이고, 웅진시기 이후에도 건축기술, 고분벽화, 불교문화 등의 사례에서 제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마주했던 시기에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적대적인 관계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양국 간의 문물교류에 대한 계기와 과정을 추적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정치적·군사적으로 전쟁을 반복하였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문화적 교류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물질자료에 나타나는 고구려 문화와의 유사성에 주목하며,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양국 사이에 직·간접적인 문화교류의 흔적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문헌기록과 물질자료에서 확인되는 양상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문물교류를 이해해 보자.
 
1) 고분과 고분벽화
고구려와 백제 간의 문화교류 흔적이 나타나는 사례로는 백제 지배계층의 무덤과 그 무덤 내부에 그려진 고분벽화를 들 수 있다. 고분의 사례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의 보급 및 확산과 적석총(積石塚)의 영향을 들 수 있고, 고분벽화의 사례로는 부여 능산리1호분과 공주 송산리6호분이 있다.
백제 석촌동고분에 있는 적석총 계통의 무덤은 고구려와의 관계성이 논의되고 있다. 석촌동 1~4호분은 고구려식 적석총과 백제식 적석총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전자는 내외부를 석재로 축조한 반면, 후자의 경우 외부는 석재로 축조하였으나 내부는 점토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정치영, 2017). 고구려식 적석총은 석촌동 1호분 남분과 3호분이 해당한다. 이 중 3호분은 40~50cm 정도 점토를 깔아 정지 작업을 한 후 지대석이 위치한 외곽에 20cm로 돌을 깔고 그 위에 장대석을 한 줄 배열하고 석렬 내부를 석재로 채웠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내축하여 2·3단을 쌓았고, 1단 주위에 버팀석을 세웠다. 이러한 축조 방식은 천추총이나 태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 계단식적석총(階段式積石塚)의 축조방법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강현숙, 2016).
한편 백제식 적석총은 석촌동 1호분 북분과 2호분, 4호분이 있다. 이 중 2호분은 지면을 정지한 후 돌로 석축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할석을 깐 후 그 위에 점토나 사질토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강현숙, 2016). 이러한 백제식 적석총에 대해서는 현지 선행 묘제가 고구려 적석총의 요소를 반영하여 변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임영진, 1995), 고구려 적석총이 도입되어 외부만 돌로 축조하고 내부는 흙으로 채웠다고 보는 견해(박순발, 1998), 즙석분구묘(葺石墳丘墓)가 백제식 적석총으로 변화되었다는 견해(김승옥, 2000), 계단식적석총에 즙석분구묘 축조방식이 채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강현숙, 2005) 등이 있다. 이들 적석총의 존재는 고구려 적석총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전하는 백제 건국세력이 고구려로부터 출자했다는 전승이 물질자료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적석총 조영세력을 온조계로 이해하거나(강인구, 1991), 3세기 중엽 압록강 이남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계 이주민이 조영했다고 보는 견해(임영진, 2003)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 건국세력의 고구려 출자를 부인하며 석촌동3호분은 백제 지배세력이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고구려 묘제를 채용한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이도학, 1995). 한편 석촌동의 계단식적석총은 매장부가 확인되지 않으며 공주 송산리 및 수촌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제단시설과 유사하다고 본 견해도 있어(이남석, 2013), 그 성격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백제 고분벽화의 대표적 사례로 공주 송산리6호분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문화의 요소도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나타내는 사례 중 하나이다. 1933년에 발견된 송산리6호분은 이 시기 백제의 일반적인 묘제인 지하로 묘광을 파서 장방형의 묘실과 남벽 중앙에 이중구조의 연도를 조성한 백제의 횡혈식고분이다. 이 무덤은 송산리고분군의 무덤들이 주로 횡혈식석실분인 데 반해, 무령왕릉과 함께 벽돌로 축조한 몇 되지 않는 사례이다. 이들은 웅진시기에 국한되어 백제 왕실이 중국 남조의 전축분을 모방하여 축조되었다(이남석, 2016). 그런데 송산리6호분에서는 네 벽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존재하는데, 남조의 영향력이 강한 건축형식과는 달리 내부에 그려진 사신도의 경우 고구려의 사신도 벽화와 유사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송산리6호분이 고구려의 사신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비정하면서, 당시 적대적이었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다(강인구, 2002). 그러나 정치적 대립관계 속에서도 문화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점과 그 양식을 볼 때 고구려의 영향력을 받은 벽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호섭, 2011; 전호태, 2019). 이 같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벽화는 이 시기 고구려와의 문화교류 및 수용이 일정 수준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 피장자가 이 문화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거나 혹은 적극적인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정호섭, 2011). 다만 이 시기 벽화가 고구려의 문화 전파 또는 수용의 결과였다고 해도 그 제작기법은 백제의 묘제에 맞게 고구려의 보편적인 기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신도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주작의 경우 좌우에 해와 달을 거느리는 단독상인데, 이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중국 남북조의 사신도와도 다른 형태로서 백제식으로 변형되었다고 해석된다(전호태, 2019).
능산리1호분의 경우는 능산리고분군 내에서 유일하게 벽화가 확인되는 유적으로, 사비기 백제 고분에서도 유일한 사례이다. 능산리1호분의 벽화는 송산리6호분처럼 네 벽면에 사신도를 그렸으며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 문양이 있다. 그 제조기법에 관해서는 한 장의 화강암 판석을 물갈이하여 벽면을 축조한 기법, 사신도나 연꽃·구름 문양도 모두 고구려의 영향이 나타나는 그림으로 지적된 바 있다(關野貞, 1941; 梅原末治, 1947; 김원룡, 1968).
또한 능산리1호분의 사신도는 청룡과 백호가 진파리1호분 벽화의 그것과 구성만이 아니라 세부묘사까지 닮은 부분이 매우 많다(전호태, 2019). 예컨대 백호가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나 백호 주변으로 구름이 날아가는 모습 등은 6세기 전반에 축조된 진파리1호분의 백호와 구도상에서 매우 닮은 것으로 지적된다. 고구려 진파리1호분 벽화뿐만 아니라 진파리4호분과 수렵총에 보이는 사신과 일월이 같이 배치되는 부분도 벽화의 구성면에서 일정한 유사성이 보인다(정호섭, 2011). 다만 진파리1호분의 백호 그림은 역동성 면에서 백제의 벽화를 앞서고 있는데, 이는 벽화 전통을 오랫동안 보유한 고구려와 그렇지 못한 백제의 수준 차이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도 고구려 후기 석벽화들은 지금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인 반면, 능산리1호분의 석벽화는 훼손이 매우 심하여 안료와 벽 사이의 접착성분 차이와 같은 기술수준에서도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정호섭, 2011).
그림1 | 공주 송산리6호분 - 동벽의 청룡
그림1 | 공주 송산리6호분 - 서벽의 백호
그림1 | 공주 송산리6호분 - 남벽의 주작과 일월
그림1 | 공주 송산리6호분 - 북벽의 현무
그림2 | 부여 능산리1호분의 백호와 월상(月像)
그림3 | 고구려 진파리1호분의 백호
그림4 | 부여 능산리6호분 천장 벽화
그림5 | 고구려 수렵총의 청룡도와 일상(日像)
 
2) 토기 제작기술
백제의 물질자료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에 대해 가장 활발하게 검토가 이루어진 분야는 토기에 관한 연구였다. 백제 토기에서 고구려 문화 요소는 사비시기에 가장 두드러지며, 한성시기와 웅진시기 토기에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기존 연구에서는 백제 한성 시기에 유행한 흑색마연토기가 고구려 토기의 영향력을 받아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김원룡, 1986). 흑색마연토기는 고구려 노남리형 토기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표면을 마연하고 무늬를 내는 효과가 백제의 흑색마연토기 제조기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흑색마연토기는 고구려의 토기들과 기형이 다를 뿐만 아니라, 흑색마연기법은 고구려 고유의 제작법이 아닌 초기철기시대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강현숙, 2007). 또 서울 몽촌토성 내에서도 고구려의 원통형 삼족기나 심발에 가까운 양이부호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475년 한성 함락을 전후하여 고구려가 이 성에 주둔하면서 남긴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최종택, 1998; 1999; 양시은, 2014).
반면, 사비시기의 백제 토기 중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토기는 매우 다양하여 이배(耳杯), 대부발(臺付鉢), 자배기, 대상파수부호, 대상파수부뚜껑, 암문토기, 시루 등이 있다(박영민, 2002). 사비시기에 출현한 백제 토기는 크게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계통과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山本孝文, 2005), 후자의 경우 일상생활용 토기부터 고급 기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고 있다. 이들 중 고구려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토기로는 이배와 대부발을 들 수 있는데, 이배의 경우 부여 관북리, 부소산성, 궁남지, 화지산, 능산리사지, 익산 왕궁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배는 사발 모양의 몸체에 양 측면이 평행으로 절단된 악(顎)이 부착된 형태로 한성시기나 웅진시기의 백제 토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이는 오히려 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의 구의동유형 토기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로, 최근에는 고구려 아차산일대보루에서도 같은 형태의 이배가 출토되었다(양시은, 2014). 이들은 고구려 중기인 4~6세기로 편년되며 바닥에 굽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의 부착 수법 등에서 백제 후기의 이배와 매우 유사하다. 이후 이러한 양식의 토기가 백제에도 전해져 사비 천도 이후인 6세기 후반 이후에 출현하여 부여·익산 등 중앙지역에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김용민, 1998).
또 주로 부여 능산리사지와 신암리·동남리 및 익산 왕궁리 등에서 출토되는 대부발, 혹은 뚜껑과 함께 합(盒)으로 불리는 토기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사례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주로 백제 후기 왕실이나 귀족층에서 생활용기 및 화장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강인구, 1977; 윤무병, 1994). 이들은 백제 한성시기에 보이는 완 계통 토기와는 제작기법이나 형태상 차이를 보이며, 고구려의 토기인 구의동유형에 속하는 평저완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곧 이들 토기가 백제에 유입되고, 이후 굽이 달리는 등의 일정한 변화를 거쳐 정착되었다고 본다(김용민, 1998). 나아가 뚜껑을 갖춘 합도 고구려의 청동합과 경주 호우총(壺杅塚) 출토 청동합을 잇는 계통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보며, 백제의 토기합도 이들 청동합을 모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난영, 1992).
이와 같은 고구려 토기들은 6세기 전반대부터 출현하며 토기의 형태만이 아니라 제작기법 및 소성기술까지 같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고구려 토기 제작기술을 보유한 공인의 이주 가능성이 지적된다(土田純子, 2009). 예컨대 암문토기의 경우는 부여 일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데 암문이 정형화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백제로 이주한 고구려인이 제조하였거나 백제 도공의 현지 제작품으로 비정된다(김종만, 2007). 반면 6세기 중·후반에는 부여 정암리 가마터나 청양 관현리 가마터에서 자배기 및 대상파수부사이호 등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토기들이 확인되기 때문에 백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고구려 토기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병호, 2013). 한편, 토기 제작의 좀 더 구체적인 계기로 551년 성왕대 한강 유역 점령을 지목하기도 한다. 이 지역이 475년 고구려의 침공 이후 줄곧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나, 이후 551년 성왕의 이 지역 탈환으로 인해 아차산일대보루 등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토기 문화가 백제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김용민, 1998).
이들 토기는 주로 6세기대 고구려 토기가 아니라 이전 시기인 5세기 고구려 토기의 전통을 따르는 경우가 많지만(양시은, 2011), 고구려에서 6세기 후반경에 사용된 호자가 부여 부소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 사비시기 백제에서 고구려 토기의 제작기술 교류가 더욱 장기적으로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김종만, 2007). 주목되는 점은 같은 시기 고구려 토기에서도 백제 토기의 영향력이 확인되고 있어서, 이러한 토기 제작의 문물교류가 한 방향으로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천 호로고루나 은대리성, 파주 주월리, 청원 남성곡 유적 등에서 백제 토기 특유의 타날문이나 유사한 형태를 가진 토기들이 확인된다. 이는 백제 공인이 고구려에서 토기 제작에 참여한 사례로 추정하기도 한다(박순발, 2005).
 
3) 기와 제작기술
백제의 와당(瓦當)에서도 고구려와의 문물교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웅진시기 단계에서도 이미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무령왕릉에서 나타나는 백제 문화는 주로 중국 양(梁)의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이들 사이에서 고구려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판단첨형 와당 형태는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 왕비두침의 문양에서도 확인된다. 탁잔 몸체 밑부분에 새겨진 연꽃의 경우 8엽겹꽃잎형으로 이는 6세기 백제 와당에서 자주 나타나는 문양이다(박용진, 1983). 이들은 5세기 후반 이래 평양 일대의 고구려 문화가 백제에 수용되어, 이후 백제식 변형을 거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전호태, 2019). 웅진시기에는 주로 판단융기식 및 판단원형돌기식의 문양을 취했던 반면, 이와는 별개의 고구려와 유사한 와당이 등장하고 있다. 나아가 이 시기 와당은 색조면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적색와당이나 고구려의 형태와 유사한 연화문이 나타나기 때문에, 고구려 장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와당 제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장인들의 기술력 지도를 통해서 와당이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면, 고구려의 한성 침공과 같은 전쟁을 치른 직후에도 백제는 고구려와 일정한 문물교류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512년 한강 유역을 둘러싼 무령왕대 백제의 대고구려전이 이후 521년까지 전쟁 기사가 없다는 점을 들어, 양국 간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었고 이 시기에 고구려와 일정한 통호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곧 공식적인 경로가 아니라고 해도 전후 평화 기간을 양자 간의 일정한 문화교섭이 이루어진 배경으로 추정한 것이다(조원창, 2008).
한편, 사비 천도 이후에는 고구려 와당의 영향력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례가 등장하여 이 시기에는 고구려 장인이 직접 현지에 거주하며 와당을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와당 중에서 표면에 백회칠을 하는 기법은 백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만의 제와기술이며, 이외에도 자방의 귀목형 등에서 고구려의 제와술을 엿볼 수 있다. 이를 고려한 연구에서는 사비시기에 들어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 국가 간에 제와기술의 전파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장인들이 직접 유입되는 예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 백제는 새로운 와전(瓦塼) 제작을 위해 중국 양에서 장인을 초청하거나 일본에 와박사를 보낸 사례도 있다. 고구려와 백제 간에 기와 제작자 교류는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이들 기술 전파 사례를 볼 때 장인의 교환이나 유입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조원창, 2008).
 
4) 불교
삼국이 불교를 공인한 시점은 사서마다 각기 다른 시점으로 나타나며, 그 사상적인 내용에서도 이질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불교 승려를 통한 사상 교류는 삼국의 정치적·군사적 대립과는 별개로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백제 불교 문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중국 불교의 영향, 특히 백제가 가장 활발하게 정치·문화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던 남조의 영향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백제에는 남조만이 아닌 다양한 문화 유입 경로가 존재했으며, 특히 불교에 있어서 남조만이 아니라 ‘왕즉불(王卽佛)’사상으로 나타나는 북조 불교의 요소도 수용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북조 불교의 요소를 수용하는 과정에 대해 추적하며, 이를 고구려를 통하여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교류 흔적은 사서상에서 거의 확인하기 어렵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개로왕대의 고구려승 도림(道琳)에 관한 기록이 주목된다. 개로왕이 고구려에서 간자(間者)로 파견한 도림의 모략으로 무리한 토목공사를 단행한 결과 민심의 이반과 재정 탕진을 초래하게 되고,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패사로 이어지는 과정을 전한다. 도림의 역할을 허구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이도학, 1985), 도림이 불승(佛僧)이었던 사실에 착안, 고구려와 백제 간의 불교문화 교류라는 측면에서 이 시기 개로왕의 정책과 백제 불교의 모습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즉 개로왕이 도림을 측근으로 두었던 것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한 고구려 불교의 수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남조 불교보다는 ‘왕즉불’ 전통의 북조 불교에 관심이 있던 개로왕이 북조 불교 계통인 고구려 승려들을 백제로 유입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조경철, 2010; 2015). 또 개로왕 재위 18년인 472년에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할 당시 표문(表文)에서 북위를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다”는 구절에 주목하여, 이전 시기부터 북조와 문화적 교류가 있었으며 이러한 양국 간 교류가 도림이 고구려 승려로서 개로왕의 측근에서 활동한 배경이었다고 지적한 것이다(길기태, 2012). 이들 견해에 따르면 도림의 백제 내 활동은 고구려와 백제가 북조 불교 문화를 수용 혹은 교류하는 양상으로 이해된다.
한편 삼국시대 말기에 일어난 고구려 승려 보덕의 백제 이주에서도 양국 간 불교문화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도림의 사례보다 더 직접적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경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보덕은 연개소문 집권 이래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아 650년 백제의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보덕이암조(普德移庵條)에서는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전하면서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겼다는 경복사(景福寺)의 ‘비래방장(飛來方丈)’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 사료는 고구려가 무덕(武德)·정관(正觀) 연간에 당으로부터 도사를 받아들여 노자(老子)를 강론하게 한 것을 시작으로 도교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보덕과 같은 불승이 백제로 피신했던 상황을 전한다. 고구려 내에서 도교 전례에 따라 불교 교단에 대한 통제가 심했으며, 보덕은 폐불 정책이나 거주지인 반룡사 파괴 등 핍박으로부터 도피하여 망명했다고 이해하고 있다(정선여, 2007; 남무희, 2001; 조법종, 2013).
그런데 보덕이 백제로 이주를 선택한 것은 이곳이 전통적으로 불교 숭상의식이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더 나아가 단순 도피가 아니라 이 지역에 대한 불교문화의 포교라는 측면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특히 ‘비래방장’ 설화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그의 이주는 단신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주였고, 『삼국유사』에 보덕에게는 11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며, 보덕이암조에서는 대원사(大原寺), 유마사(維摩寺) 등 이들 제자가 세운 사찰을 나열하고 있기에 보덕과 그의 집단들이 백제로 이주한 이후 거주한 지역을 중심으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김복순, 2004). 특히 보덕이 완산주의 고대산으로 이주한 것은 신라 하대 진감국사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고구려인들이 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곧 불교 교단의 집단적인 이주를 통해 이 지역에 고구려계 불교가 상당 수준으로 번성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백제 멸망 이후 이 지역에서 보덕의 사상은 백제 유민들에게 선호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의 유입도 다수 이루어져 안승이 보덕국을 세우는 기반이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노용필, 1989). 나아가 『대각국사문집』에 원효와 의상도 수학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사상교류의 측면으로 볼 때 고구려 불교가 백제를 거쳐 신라에까지 전파된 사례로, 특히 원효와 의상이 650년 중국행을 시도한 것이나 의상이 이후 『열반경』을 중시했던 사례들은 모두 보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복순, 2004).
 
5) 건축과 기타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고구려의 문화전파 요소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많은데, 먼저 연가(煙家)와 온돌이 있다. 연가는 배연시설인 굴뚝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기둥 몸체를 구성하는 연통(煙筒)에 이어져 그 끝부분을 장식하는 구조물이다. 백제에서 최초로 확인된 연가는 1993년 부여 능산리사지의 제3건물지였는데, 당시에는 그 기능을 알지 못하여 ‘보주형토기(寶珠形土器)’라고 칭하며 토기의 일종으로 분류했다(국립부여박물관, 1997). 이후 같은 능산리 지역에서 보다 상태가 양호한 연통토기가 출토되어 이것의 용도가 분명해지고 고구려와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백제의 연가는 부여 능산리사지를 비롯해서 관북리, 동남리, 화지산, 부소산성, 익산 왕궁리, 사덕 등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집안(集安) 우산하묘구(禹山下墓區)에서 출토된 유사한 토기를 기준으로 하여 4~6세기 무렵에 출현한 것으로 편년된다. 비록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백제의 연가 제작이 고구려 문화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김용민, 2002).
한편, 부여 정동리나 능산리사지 등에서는 할석이나 판석을 이용하여 긴 온돌을 만들고 굴뚝을 구비한 난방시설이 확인된다. 온돌시설은 초기철기시대부터 사용된 고구려 특유의 난방시설로서(송기호, 2006) 집안 동대자유적이나 평양 정릉사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정릉사지처럼 사찰 내에 온돌시설이 존재하는 것은 중국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례이다(양은경, 2013). 그런데 백제 능산리사지에서도 강당지와 북편 1·2·3건물지에서 온돌시설이 확인되며, 건물지의 온돌은 다수의 인원을 수용하는 거주지를 위한 시설로 파악된다(국립부여박물관·부여군, 2008). 이들 온돌시설은 연가의 출현과 함께 고구려식 난방시설이 백제에 전파된 결과로 백제 내에서도 온돌과 함께 연가 등 난방시설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류기정, 2003).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토기가 주로 부엌살림용품, 특히 부뚜막 시설이 많은 점에 착안하여 토기를 제작한 집단이 온돌과 같은 고구려의 주생활과 식생활에 익숙하였으며, 곧 이들 지역에 고구려계 주민집단이 이주했던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강현숙, 2007).
이와 같은 난방시설에 더하여 사비시기 불교 건축양식 전반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유추하는 견해도 있다. 예컨대 5~7세기 사원의 금당이나 목탑에 주로 이용된 이중기단의 경우 고구려의 청암리사지 팔각건물지나 백제의 정림사지 금당지, 군수리사지 금당지 등에서 확인되는데, 백제의 이중기단은 시기적으로 좀 더 빠른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출현했다고 추정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이중기단 양식은 일본 아스카사(飛鳥寺) 금당지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고구려 문화의 요소를 유입한 백제가 일본에 전파한 것으로 추정하였다(이병호, 2013; 2017).
또 백제의 1동 2실 건물지도 능산리사지 강당지를 비롯하여 익산 왕궁리, 미륵사지 강당지와 승방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양식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이보다 앞선 시기인 집안 동대자유적 제1건물지에서 앞서 살펴본 온돌 구조와 함께 같은 1동 2실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능산리사지 강당지와 전체적인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이를 들어 백제의 1동 2실 건물 형식 자체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길식, 2008).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철촉의 경우 백제 철촉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으나,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군이 주둔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최종택, 2000). 고분 부장품 중 재갈이나 등자와 같은 마구에서 고구려와 형태와 재질, 제작방법에서 일정 부분 유사성이 간취되기 때문에 이를 고구려의 영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특징은 신라와 가야에서도 나타나며, 보다 넓게는 중국 동북지방의 삼연(三燕) 마구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직접적인 문물 교류의 결과로 단정 지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북방 기마민족의 문화가 고구려를 거쳐 백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강현숙,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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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와의 문물교류 자료번호 : gt.d_0004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