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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신라와의 문물교류

2. 신라와의 문물교류

고구려와 신라가 본격적으로 접촉하는 시기는 4세기 후반부터다. 이 시기 신라의 나물마립간은 고구려를 경유하여 북중국의 전진(前秦)과 수교하였으며, 고구려의 원병을 빌어 왜의 발호를 저지하였다. 특히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영락 10년 경자년에 이루어진 보기(步騎) 5만 명을 동원한 신라 구원은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예속을 심화시켰다. 신라의 왕위 계승 후보자였던 실성과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서 한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으며, 신라의 왕위 계승에 고구려가 개입하여 실성을 살해하고 눌지를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의 신라매금(新羅寐錦)에 대한 의복 사여 및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존재 등을 통해서도 고구려에 대한 신라 예속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라는 백제와 수호하고 고구려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등 점차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6세기 중반에는 북진하여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강 유역까지 차지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문물교류는 이러한 양국 간의 정치적 변동 과정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5세기 초부터 6세기 전반에 이르는 동안 신라의 중앙지배층 묘제인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고구려를 통해 입수되거나 영향을 받은 품목이 많으며, 착장형 장신구와 마구·마주·금속용기·유리용기·장식보검 등이 고구려를 거쳐서 반입되었거나 고구려 문화의 요소가 나타난다(홍보식, 2018). 다만 양국 간의 문물교류와 관련되어 현존하는 자료들은 대다수 신라 영역에서의 고구려 영향을 나타내고, 고구려 유적에서 신라의 문물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고구려에서 신라로 이입된 여러 요소 중에 인적·물적 교류로 볼 수 있는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불교
고구려와 신라의 인적 교류는 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깊다. 5세기 신라 눌지왕 시기 사문(沙門)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이르러 모례의 집에 거처하며 불교를 전파하였고, 6세기 중반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기에는 승려 혜량이 그의 문하를 이끌고 신라로 귀부하였다. 특히 혜량의 신라 망명에 대한 전말은 『삼국사기』 거칠부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칠부는 젊은 시절 고구려를 정탐하고자 불경을 강경(講經)하던 혜량의 문하에 머물러 있었는데, 혜량이 거칠부가 신라에서 온 것을 알고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다. 혜량의 은혜를 입은 거칠부가 551년 장수가 되어 고구려를 침입하자 혜량은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이유로 그 무리를 거느리고 거칠부에게 항복하고 신라로 망명하였다고 전한다. 혜량은 신라에서 승통이 되었고 신라는 비로소 백고좌회와 팔관지법을 두었다고 한다. 혜량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망명하기 전 금강산의 장안사에서 주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김수진, 2020), 거칠부가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10군을 취할 때 거칠부에게 망명 의사를 표현하였다. 승 려 신분으로 아국정란(我國政亂)을 이유로 신라에 망명한 혜량은 ‘정치난민’과 ‘종교난민’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장창은, 2020). 이렇듯 고구려에서 건너온 혜량은 신라 진흥왕대의 불교정책에 대한 중요한 자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백고좌회, 팔관지법이나 황룡사 창건에도 혜량의 발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며(김복순, 2010; 주보돈 2014), 이러한 과정에서 혜량을 통해 고구려 불교 및 북조 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주보돈, 2014).
한편 『삼국사기』 거칠부전에서 혜량이 임명되었다는 ‘승통’은 『삼국사기』 잡지,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의 세주에서는 ‘국통’ 또는 ‘사주’라고 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혜량이 동위(東魏) 승관제에 존재했던 국통(國統)이라는 명칭을 파악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고승대덕으로서 신라에 승관제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도 본다(문무왕, 2019). 혜량이 임명되었다는 사주는 ‘사찰을 관장하는 책임자’라는 직임으로도 풀이되는데, 그 직임은 내외 사찰의 법회에 한정되었으며, 혜량은 대왕흥륜사의 사주로서 외사의 팔관회까지 관장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박남수, 2013).
불교 조각에 있어서도 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 등은 고구려 평천리 반가사유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신라 불상에 고구려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기도 하다.
 
2) 고분과 고분벽화
고구려와 신라의 문물교류 양상 중 특기할 점 중 하나가 바로 벽화고분이다. 경북 영주 순흥에 위치한 읍내리벽화고분(영주 순흥 벽화고분)과 어숙지술간묘(영주 순흥 어숙묘)는 석실봉토분이자 무덤 내부 현실과 연도의 벽과 천장에 회를 바른 후 인물, 생활풍속, 연꽃 등을 그린 벽화고분이다. 피장자는 고구려 출신이거나 고구려와 강한 관련성을 지닌 신라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고분이 발견된 순흥은 죽령 이남에 위치하며 5~6세기 무렵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때문에 신라의 북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벽화고분이 확인된 것은 고구려에서 당시 유행하던 벽화고분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이해한다.
두 벽화분에서는 공통적으로 고분 구조와 벽화 내용에서 고구려 문화요소가 확인된다. 읍내리벽화고분의 경우 현실에 마련한 시상대와 측면의 화염문, 연도 좌·우벽에 그려진 역사가 그렇고, 어숙지술간묘의 경우 무덤 내에 장막을 걸었던 흔적, 사신과 생활풍속이 결합한 벽화가 있었던 점 등이다(강현숙, 2003). 그러나 고구려 고분에서 읍내리벽화고분 석상과 같은 높은 시상대가 발견된 바가 없고, 벽화의 내용도 고구려 벽화와 다소 차이가 나는 점은 설명이 어렵다.
아울러 두 고분의 내부에서는 각각 간지년(干支年)을 포함한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벽화분의 축조연대를 파악하는 데 실마리를 던져준다. 1985년 발견, 조사된 읍내리벽화고분의 현실 남벽에는 “己未中墓像人名/ □□”라는 2행의 묵서 명문이 쓰여 있었고(이명식·이희돈, 1995), 이보다 앞서 1971년에 발견된 어숙지술간묘에는 문비(門扉) 안쪽에 “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여덟 글자가 주칠(朱漆)로 각자(刻字)되었음이 확인되었다(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4).
그림6 | 영주 순흥 읍내리고분벽화의 명문
어숙지술간묘의 을묘년에 대해서는 대체로 6세기에 해당하는 535년이나 595년으로 보고 있다. 어숙지술간이라는 표기가 ‘인명(人名)+지(知)+관등(官等)’이라는 신라 중고기의 인명 표기방식이고, 술간(述干)과 같은 외위 관등의 출현이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는 법흥왕 이전 시기를 상회할 수 없으며, 연도 천장에 그려진 능숙한 필치의 연화도를 볼 때 법흥왕대 불교 전래 직후 을묘년인 535년보다는 그다음 을묘년인 595년에 가깝다는 것이다(진홍섭, 1984). 다만 술간이라는 관직이 지방에서 더 이른 시기에 쓰였음을 고려하여 535년이 을묘년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진홍섭, 1986).
읍내리벽화고분 묵서명의 연간지는 발굴 당시부터 대다수 기미년으로 판독하였고, 해당 기미년에 대해서 5~6세기 사이의 넓은 시간 속에서 탐색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539년과 479년이 기미년의 유력한 대상으로 떠올랐다. 읍내리벽화고분의 조사 책임자는 신라가 소백산맥 이남의 고구려를 축출한 것이 551년 이후이고, 어숙지술간묘가 595년으로 편년된다면 읍내리고분은 구조상 이보다 선행하므로 묵서의 ‘기미’는 539년이며 따라서 고구려의 벽화고분일 것으로 파악하였다(이명식, 1986). 그리고 어숙지술간묘의 축조 연대가 535년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면 양 고분의 시기가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기미년을 539년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진홍섭, 1986).
반면 벽화의 내용이나 양식적 측면에서 읍내리벽화고분이 고구려 초기 및 중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그중에서도 산악도는 고구려 덕흥리고분이나 무용총의 것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기미년을 479년이나 539년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고(안휘준, 1986), 벽화에 사신도가 등장하지 않고 삼족오 일상(日像)으로만 방위가 표시되고 고식풍의 벽화인 점에서 기미년이 479년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였다(이은창, 1987). 또한 읍내리벽화고분은 4~5세기 고구려 벽화의 전통을 따른 인물풍속도 고분으로 고졸한 표현이 역력한 데다 고구려의 유행경향과 비교할 때 6세기보다는 5세기에 조성되었고, 구름무늬, 연꽃무늬, 어형기, 역사상 등은 덕흥리벽화고분, 삼실총, 무용총, 수산리벽화고분에 그려진 5세기대 벽화와 가까워 기미년이 479년에 해당한다고도 하였다(이태호, 2010). 이 외에 서체적으로 필법에 예의(隷意)가 보이기 때문에 기미년을 419년으로도 보았다(임창순, 1986).
한편, 읍내리벽화고분은 구조적으로 고구려의 ‘ㄱ’자형 석실분 문화와 신라의 동침향(東寢向) 시상대를 갖는 장방형 묘실과 결합한‘고구려계 신라 고분’으로 볼 수 있다(이희돈, 1989). 〈충주고구려비〉의 건립을 5세기 중반 전후로 파악하는 견해에서는 기미년을 소지왕의 날이군 순행 이전인 479년으로 보고, 고구려 세력에 우호적 입장을 취한 신라 출신 묘주가 고구려 문화를 수용한 결과 횡혈식석실분과 벽화가 나타났으며, 연도 설치나 순장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의 고유 묘제·장제가 혼합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정운용, 1999).
이렇듯 읍내리벽화고분의 기년은 묵서의 연간지를 기미(己未)로 판독한 상태에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근래에 이르러 기해(己亥)로 이해하기도 한다. 발굴 직후에도 기미가 아닌 기해로 판독하는 의견이 있었다(東潮, 1987). 이후 읍내리벽화고분 묵서의 연간지 중‘미(未)’로 판독한 글자는 ‘해(亥)’의 이체자로 기미년이 아니라 기해년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김재홍, 2019). 이러한 이해에서 읍내리벽화분에 그려진 역사나 해 안의 새, 버드나무 등 회화의 제재와 기법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비교할 때 6세기 전반에서 더 올라가기 어려우며, 신라 영역 안에서의 불교 신앙 확산과 공인, 그리고 고구려·백제 등에서의 회화 양식 전파와 순흥이라는 신라 변경에서의 소화 과정을 고려해볼 때, 간지년은 579년 기해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도 하였다(전호태, 2020).
 
3) 적석목곽분의 고구려 계통 유물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적석목곽분에서는 고구려에서 신라로의 문물 이입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상당수 발굴되었다. 처음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 관련 유물이 발굴된 것은 서봉총이었다. 1926년 서봉총 발굴 시에 북분에서는 은합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뚜껑 내부에는 “연수 원년 태왕치세 삼월 중에 태왕이 교시하여 은 세 근 여섯 량으로 뚜껑을 만들었다(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 太王敎造合杅用三斤六兩)”가 새겨져 있었고, 겉면 바닥에는 “연수 원년 태왕치세 신○ 삼월에 태왕이 교시하여 은 세 근으로 합을 만들었다(延壽元年太歲在辛○三月 國太王敎造合杅三斤)”가 새겨져 있었다. ‘연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한 적이 없고 한국의 문헌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연호이다. 이에 은합의 제작 주체 및 시기를 둘러싸고 현재까지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은합의 제작국과 관련해서는 크게 고구려설과 신라설로 나뉘며, 연수 연호가 사용된 시점도 신묘년과 결부하여 4세기 초반부터 7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개진되었으나, 451년설과 511년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서봉총 은합의 연수 연호에 대해서는 4세기 초반 고국원왕 연호로 보는 입장이 가장 이른 시기로 이해하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십자형 꼭지손잡이를 가진 금속제합이 나타난 중심 시기는 4세기이며, 391년 신묘년은 영락 연호가 사용되므로 연수는 고국원왕 즉위년인 331년이고 은합우는 고구려에서 즉위기념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강현숙, 2012).
다음으로 391년에 연수 연호가 사용되었고 은합은 고구려에서 제작된 기물이라고 보는 견해에서는 고국양왕의 몰년인 391년에 내려진 ‘불법구복(佛法求福)’의 하교(下敎)와 관련하여 고국양왕의 수명을 연장하길 바라는 연수와 관련이 있거나(古江亮仁, 1989), 이때에 개최된 국가의례에 사용된 기물로 이해하고 있다(신정훈, 2014). 또한 십자형 꼭지손잡이 형태를 가진 칠성산96호분과 황남대총 남분 출토 합을 비교하여 적석목곽분의 연대 등을 종합해볼 때 연수 원년은 391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최병현, 1992). 호우총 출토 청동합의 제작 시기가 415년인 점에 근거해 서봉총의 조성 시기를 4세기 말~5세기 초로 보면서 연수 원년을 391년, 은합은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박진욱, 1964).
한편 연수 원년 은합은 451년에 고구려에서 제작했다고 보는 연구(坂元義種, 1968; 이병도, 1979; 김창호, 1991; 정운용, 1998 등)가 있는데, 대체로 법흥왕대 신라 연호와 태왕이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에 은합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서봉총 은합우의 신묘 표기처럼 연간지가 나누어진 예가 황해도 봉산 대방군 태수 장무이묘 출토 문자벽돌과 신천 간성리 출토 벽돌에서 발견되고, 집안 칠성산96호묘에서 십자형 꼭지손잡이 동합이 출토된 점에서 고구려 제작설에 기반하여 연수 원년을 451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小田富士雄, 1979),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의 연가 연호와 연수 연호는 장수왕대의 연호로 상호 연관된다고 보고 연수 원년을 451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영태, 1997). 한편 연수 원년 신묘년을 451년으로 보면서도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호우총 청동합 제작 시기와 견주어 제작국과 연대를 파악하기도 하였고(이홍직, 1954), 서봉총 은합의 글자 새김방식이 호우총 청동합보다 낙후된 점에서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고구려의 연수 연호를 신라 눌지왕이 받아들여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손영종, 1966).
마지막으로 연수 원년을 511년 신묘년으로 보는 경우는 은합의 제작국이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서봉총 은합 발견 초기부터 제기되었는데, 일본의 오오미 미즈오(近江水尾)고분 및 경주 금관총, 금령총 등의 출토유물과 비교하여 연수를 지증왕대의 일년호(逸年號)로 보았다(濱田耕作, 1929). 또한 연수 연호가 노년에 즉위한 지증왕과 관련되며, 태왕도 신라 국왕에 대응할 수 있으므로 지증왕대인 511년으로 보기도 한다(穴澤咊光, 1972). 십자형 꼭지손잡이 형식이 출토된 집안 칠성산96호묘, 경산 조영동II-1호분, 경주 천마총, 은령총, 황오리16호분, 황남대총 남분, 서봉총 출토 7개 합의 재질과 제작방법을 비교 검토하여 서봉총 은합우를 신라에서 제작하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연구에서도 은합의 제작 시기를 지증왕의 장수 기원과 연관시켰다(박광열, 1999).
그 밖에 은합의 지증왕대 신라 제작설과 관련하여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청동초두 뚜껑에 새가 장식된 것과 지증왕의 어머니 조생부인(鳥生夫人)을 연결하여, 지증왕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은합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하며(김병모, 1998), 은합의 연수 연호를 도교의 불로장생 표현인 ‘연수익수(延壽益壽)’의 줄임말로 보기도 한다(김태식, 2003). 나아가 은합의 연간지를 뚜껑 안쪽과 합의 밑바닥에 나누어 표기한 것은 은합의 제작 주체인 태왕의 장수를 염원했던 도교적 산물일 것으로 이해하였다(장창은, 2015).
고구려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은 경주 호우총에서도 출토되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서는 경주 노서동에 있는 고분을 발굴조사하였는데, 남북으로 잇대어진 고분의 남쪽 고분에서 명문이 새겨진 호우(壺杅)가 출토되었다. 발견된 호우에 새겨진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호우 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에 따라 이 호우가 장수왕 3년(415년)인 을묘년에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는 데 큰 이견이 없다. 다만 호우총에 공반된 유물의 형식이 6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후기 적석목곽분 출토유물과 평행하거나 늦은 형식을 지니고 있어 호우의 전세기간 설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박광열, 1999).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복호나 그의 권속이 호우를 전했으며, 복호의 직계나 자손이 배장분인 호우총에 묻힐 때 호우를 같이 부장했거나(김용성, 2006), 광개토왕 안장 1년 기념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제조한 것을 사절로 참석했던 신라 사신이 경주에 가져왔다고 이해하기도 한다(고광의, 2004). 그 밖에 호우총의 호우, 서봉총의 은합, 고구려 태왕릉의‘호태왕’명 동령(銅鈴)에서 모두 ‘태왕’과 명문 마지막에 숫자가 기재된 것에 주목하여 호우를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해진 도량형 기물로 보기도 한다(조우연, 2017).
그림7 | 호우총 청동합
마구와 관련해서도 고구려 영향이 보인다. 경주 황남동109호분 3·4곽, 황남대총에서는 몽고발형주, 괘갑, 환두대도, 등자 등 갑주와 마구가 부장된 채 발견되었는데, 이를 고구려계 문물로 보면서 경자년 호태왕군의 남정이 유입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최종규, 1983). 한편, 경주 황남동109호분 3·4곽에서 갑주와 마구들이 완비되었으나 경주 주변지역에서 이에 선행하는 과정이 확인되지 않아 신라 사회에서 갑주와 마구 확산의 직접적 계기를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강현숙, 2008).
또한 신라 적석목곽분 출토 금속제장신구 가운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특히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은관과 금동관 1점은 형태상 차이가 있지만 깃털모양 장식과 중간의 다각형 장식이 집안의 고구려 관식과 비교된다. 또 황남대총 북분 출토 태환이식은 굵은 고리 아래 조롱박 모양으로 생긴 수하식을 매달았는데 고구려 이식과 매우 유사하며, 금동식리는 신라 금동식리와 달리 바닥에 못이 없어 외부 이입품의 후보지로 고구려를 지목하기도 한다(이한상, 2010).
그림8 | 황남대총 출토 은제비갑과 은관
 
4) 신라 왕경의 조영과 고구려척
한국의 고대문헌에서는 고구려척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에서 9세기에 편찬된 『영집해(令集解)』에 고구려척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다. 『영집해』 권12 전령(田令)에는 “고려 5척(高麗五尺)”이란 표현이 보이는데, 일본에서는 고구려에서 전래한 척도를 고려척(高麗尺)이라 불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려 5척이 대척(大尺) 6척에 상당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대척은 당대척(唐大尺)을 가리키며 30cm 내외의 길이였다. 현재의 길이로 환산하면 고려척은 당척의 1.2배에 해당한다. 이 고려척에 대해서 18세기에 이미 일본에서 『수서(隋書)』 율력지에 기록된 동위척의 길이가 『영집해』에 기록된 고구려척과 비슷한 길이임에 주목하여 고구려에서 동위척을 사용하였고, 이것이 일본에 전래하였다고 보았다(狩谷棭齋 著, 冨谷至 校注, 1978). 이러한 견해는 그 후 깊은 영향을 끼쳐서 평양성 외성의 도시유적이 35.6cm의 동위척을 이용하여 조영되었다고 하였고, 이것이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건축에도 이용된 것으로 보았다(關野貞, 1941). 또한 신라의 황룡사에도 동위척이 사용되었다고 보았다(藤島亥治郞, 1969).
하지만 『수서』율력지의 동위척은 ‘진전척(晉前尺:23.1cm)의 1.5008척’이라는 기록은 오기(誤記)이며 『송사(宋史)』율력지에서 ‘진전척1.3008척’으로 기록된 것이 정확하므로, 계산하면 동위척은 30cm 내외가 된다고 한다(馬衡, 1932; 曾武秀, 1990). 즉 35.6cm에 해당하는 척도는 동위척이 아닌 고구려척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안학궁, 정릉사, 금강사, 강서대묘, 평양성 외성을 재검토한 결과 각 건물 및 평면도에서 35cm 내외의 고구려척을 사용했다고 보았다(박찬흥, 1995). 신라에서도 고구려척을 이용한 모습이 보이는데, 통계적 접근을 이용하여 황룡사의 금당과 목탑의 영조척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당척보다 35cm 내외의 고구려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권학수, 1999). 또한 황룡사의 창건과 중건 시에 모두 고구려척을 이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유태용, 2005).
한편, 평양성 외성에 고구려척을 이용한 사례를 참조한다면 황룡사를 위시한 신라 왕경의 조영 과정에도 고구려척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 왕경의 가로구획이 단계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당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7세기 전반 이전에 황룡사와 분황사 일대를 중심으로 일차적 가로구획이 이루어졌는데, 고구려와의 지리적·정치적 관계를 고려하거나 대로·중로·소로라는 도로체계의 유사성 및 가로구획 측량 기준으로 고구려척을 사용한 점을 염두에 둘 때 고구려 장안성과의 관련성이 고려된다고 한다(김희선, 2010). 다만, 당대척의 1.2배인 고구려척은 일본 고대자료에 의하면 7~8세기 초 양전을 위한 척으로 사용되었고,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소위 ‘고구려척(35.6cm)’은 촌과 분이 표시된 부분이 23.7cm의 한척(漢尺)이므로, 이를 1.5배 한 고구려척은 어떠한 특수 목적으로 제작한 척도이거나 양전용 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윤선태, 2002; 이우태, 2007; 이종봉, 2016). 그리고 성덕왕 21년(722년)에 축조된 경주 관문성 석각에 의하면 8세기 초반 당시 신라의 1척은 29.4cm이므로(박방룡, 1982), 그 이전 시기 신라에서 35.6cm의 고구려척을 사용했다면 언제까지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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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라와의 문물교류 자료번호 : gt.d_0004_003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