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야와의 문물교류
3. 가야와의 문물교류
4세기 초 중국에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가 전개되면서 대립과 융합의 혼란이 연쇄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고구려는 낙랑·대방군을 멸망시키면서 점차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진입하였다. 낙랑·대방군의 멸망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 교역체계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특히 한반도 서북부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이르는 교역로가 침체하였다. 이에 기존의 교역로를 대신하여 한반도 북부에서 경주 지역으로, 그리고 경주 지역에서 낙동강 하구로 연결되는 교역로가 활성화되었다(이현혜, 2001).
낙랑과의 원거리무역을 통해 발전해나갔던 김해의 금관가야(구야국)의 영도력은 당면상황에 크게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4세기 이후 낙랑 계통의 위세품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일반적으로 낙랑·대방군 소멸 이후 가야 여러 세력이 중국 및 북방 문물을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대성동고분군에서 로만글라스, 중국 동북계 마구와 청동용기 등이 출토되어(대성동고분박물관, 2015),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가 기존의 교역로를 이용하여 전연(前燕)과 교섭하는 등 중국 및 북방 세력과 교섭하였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김일규, 2016; 심재용, 2016; 조성원, 2017; 백진재, 2019).
한편, 고구려가 전연과의 전쟁으로 주춤한 사이에 백제는 근초고왕 즉위 이후 대외적인 팽창을 전개하였고 그에 따라 옛 대방군 지역을 차지하였다. 백제는 낙랑을 대신하여 교역창구 기능을 맡게 되었고, 가야와 왜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개척하였다. 백제가 대외적 팽창을 이루던 때에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대내적인 안정을 추구함과 동시에 백제를 견제하는 방편에서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는 377년, 381년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동행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지역에서 출토된 여러 고구려계의 유물은 양국의 문화적 교류를 추정하게 한다(신가영, 2020). 그에 따라 가야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및 중국의 문물도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를 매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이영식, 2006).
고구려와 가야의 직접적인 교류 흔적은 많지 않지만, 가야 지역에서 지속해서 고구려계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어떠한 형태로든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진(南進)과 고구려·백제·신라의 역학관계는 가야 세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따라 고구려와 가야는 일시적으로 교류 또는 대립한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고구려가 가야 사회에 제한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신가영, 2020). 따라서 문헌자료와 물질자료를 통해 고구려와 가야의 교류 형태와 내용을 파악해 보자.
1) 금석문과 문헌상의 교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391년 즉위하면서 한반도의 정세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광개토왕은 즉위 직후 백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수십 개의 성을 빼앗았다. 한반도 내에서의 패권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이동한 것인데, 이러한 상황은 가야 제국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고구려와 가야의 접촉은 〈광개토왕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399년 백제와 왜가 화통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 요청을 하였고, 이에 400년 고구려는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사가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이르렀고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을 두었다고 한다.
이 안라인수병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데, 안라국(安羅國)과 연결지어 왜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기도 한다(那珂通世, 1958; 末松保和, 1961). 반면, 해당 서술이 적대세력에 대한 비문의 일반적인 서술과 달라 고구려의 원군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89). 또 ‘안(安)’을 서술어로 파악하고 ‘신라인을 안치하여 수병하게 하였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王健群, 1984), 비문에서는 신라인을 ‘라인(羅人)’으로 약칭한 사례가 없고 신라와 임나가라가 혼동될 수 있는 만큼 서법상 알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武田幸男, 1989). 그 외에 ‘라병(羅兵)’으로 해석하거나(高寬敏, 1990), 고유명사로 이해하는(이영식, 2006)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통설적으로 ‘안라’를 지명 또는 국명으로 이해함에 따라 고구려와 안라가 적대관계였다는 견해가 다수이다. 그러나 ‘안라’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왜군을 물리쳤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山尾幸久, 1989; 유우창, 2005). 또 임나가라에 대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이 고구려에 귀순하여 항복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고구려와 가야가 우호관계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이해하거나(白承忠, 1995; 유우창, 2013), 수병을 둔 것을 바탕으로 그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없다고 한 견해도 있다(신가영, 2020).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임나가라를 김해와 고령 중 어느 지역으로 파악하느냐와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에 따라 나뉜다. 그러나 왜가 임나가라로 패주하였고 금관가야와 왜의 연계를 고려하였을 때 임나가라는 대체로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김태식, 1994; 이용현, 2013).
이후 고구려와 가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5세기 후반 전쟁상황과 관련하여 확인된다.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는 금강 유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와 가야의 지리적 거리는 이전보다 더욱 가까워졌고, 고구려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였다. 고구려의 남정 이후 가야 제국의 중심이 된 대가야 역시 이러한 군사 협력관계에 참여하였다(이문기, 1995; 양기석 2007).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3년 기록에 의하면 가야가 백제,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침입을 막은 사실이 있다. 이때의 가야는 대가야로 추정된다(노중국, 1995). 고령 지역에 위치하였던 대가야는 백제와 육로를 통해 쉽게 교류할 수 있었고, 활발한 교류를 통해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김규운, 2011). 이에 앞서 대가야는 479년에 남제와 교섭하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이용현, 2001; 양기석, 2007). 고구려가 진군했던 미질부(彌秩夫)는 포항시 흥해읍 일대로 비정되는데, 고구려가 신라 왕경과 가까운 지역까지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백제보다 대가야가 가까웠으므로 대가야는 신속하게 군사를 신라로 보냈다(신가영, 2020).
이처럼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는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대가야가 고구려와 교섭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보인다. 『일본서기』 권15 현종(顯宗) 3년 기록은 대산성전투를 전하는 기록이다.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는 백제계 목씨 세력이며, 계책을 제공한 임나의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는 대산성전투의 핵심인물로 특정지역의 재지세력이라고 이해된다(신수진, 2016).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죽인 곳이 고구려의 이림(爾林)이었으므로, 임나 측에서 고구려와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구려와는 교섭했지만 백제와는 대립관계에 있었으므로, 그에 따라 대산성전투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와 대가야와의 관계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교섭은 일회성으로 끝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신가영 2020).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가 가야 지역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임에 따라 가야는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안라는 고구려와 교섭을 시도하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일본서기』에 보인다. 『일본서기』 권19 흠명(欽明) 9년 하(夏)4월 임술삭조와 권19 흠명 10년 하6월 을유삭조는 마진성(馬津城)전투와 관련된 것으로, 고구려가 548년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한 것과 동일한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김태식, 2014; 신가영, 2020). 그 내용에 따르면 백제는 사로잡은 포로를 통해 안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을 알게 된다. 즉, 고구려의 백제 공격에 안라가 개입한 것이다(남재우, 2003; 이영식, 2016). 안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에 대해서는 백제의 압력을 완화하고 가야연맹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김태식, 2014), 이후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연나사(延那斯), 마도(麻都)는 6세기 대외교섭에 참여한 인물들로, 이들이 신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것으로 파악하여 안라가 ‘반백제’, ‘친신라’적인 대외교섭을 전개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박윤선, 2010; 이영식, 2016; 신가영, 2020).
2) 고고·미술자료를 통해 본 교류
고구려와 가야가 일찍부터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물질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함안 말산리3호 목관묘와 합천 저포리D-40호분에서는 2조의 돌대를 가진 철부가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유물은 길림성의 유수 노하심 중층41호, 집안 산성하191호 적석묘와 연해주의 뽈체문화와 같이 1~2세기 부여와 고구려의 중심지에서 특징적으로 분포한다(이재현, 2005). 3세기 초로 비정되는 김해 대성동45호분에서 출토된 유견철부 역시 같은 특징을 보인다(신경철 외, 2000; 이영식, 2019). 그 외에도 여러 유적에서 고구려 및 북방 계통의 문물이 확인됨에 따라 일찍부터 가야 지역은 철을 북방으로 수출하고 반대급부로 철제문물을 수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4세기 이전까지 고구려와 가야 지역은 낙랑·대방군을 통해 어느 정도 문물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세기 이후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을 멸망시키고 남정을 추진하면서 신흥 선진국으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는 가야의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해, 창원, 고성 등에서 확인된 3세기까지 선진문물 대부분이 한(漢) 계통이었다면, 부산 복천동고분군과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되는 4세기 유물에서는 고구려 계통 문물이 출현한다.
특히 4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부산 복천동고분군의 경우 최고 계층의 분묘라 할 수 있는 73호분에서 갑주가 출토되었다. 복천동고분군의 갑주 보유층 확산 양상은 5세기 전반대로 이어져 소형 분묘에서도 갑주가 부장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갑주와 함께 마갑과 마주 등 중장기마전술과 관련된 무구도 출현한다. 이러한 변화는 갑주의 직접적인 도입이라기보다는 고구려 기병으로부터 받은 자극에 의한 변화로 이해된다. 즉, 고구려의 남정을 계기로 새로운 무장체계와 접한 가야는 새로운 갑주문화를 수용하였을 것이다(송계현, 2005).
5세기 중엽 함안 마갑총에서 출토된 마갑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말갑옷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마갑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획득했으며 위신재(威信材)로 부장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이영식, 2019). 이렇게 해석할 경우에는 고구려와 가야 사이에서 교역을 통한 문물교류보다는 전쟁을 통한 문물의 노획 형태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갑주와 마구의 계통에 대해 대성동고분군의 유물을 부여 계통으로 보거나(신경철 외, 2000), 복천동고분군의 유물을 고구려 계통(송계현, 1999; 강현숙, 2003), 혹은 부여와 고구려 이전의 선비 계통(김두철, 1998; 이상률, 1999)으로 보는 의견 등 다양하다. 그러나 갑주와 마구가 출토되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에 상응하는 형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다수의 유물이 고구려 계통인 것으로 볼 수 있다(이영식, 2006).
가야의 무구류와 관련지어 김해 대동면 덕산리 출토로 전해지는 기마인형토기는 가야의 중장기마전사를 보여주는 특징적인 자료이다. 철갑으로 중무장한 말과 전사의 모습은 4세기 이래 김해 지역 중장기마전사의 모습으로 말의 몸에는 마갑(馬甲)을 둘렀고 말 등에는 전사가 앉아 있다. 전사의 머리에는 투구가 씌워있으며 목에는 목가리개를 두르고 몸에는 판갑옷을 걸쳤다. 양손에는 각각 쇠투겁창과 방패를 들고 있다(김태식, 2002).
이처럼 토기로 형상화된 기마전사는 가야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악3호분(357년), 덕흥리벽화고분(408년) 및 약수리벽화고분에 나오는 행렬도이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벽화의 중장기병은 모두 묘주행렬도의 가장 바깥쪽에서 일렬로 행진하고 있고, 그 안에는 중장보병이 주인을 호위하고 있다. 반면, 약수리고분벽화에서는 행렬 대부분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묘주 뒤쪽으로 대형 중장기병대가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호위병적인 성격에서 독립된 기마전사단으로 변화하게 된 시기를 5세기 초로 이해하고 있다(이난영·김두철, 1999). 이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파악되며, 거의 같은 시기 신라와 가야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는 고구려와 가야 사이의 교류가 이전보다 빈번했음을 의미하며, 시기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정 이후가 된다. 고구려와 가야의 교류는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신라를 매개로 하였거나 신라가 고구려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증여했던 위세품으로 파악된다(이영식, 2006).
갑주 등의 무구류가 4세기대까지는 낙동강 하류지역에 한정되었다면, 5세기에 들어서는 가야 전역으로 확산하고 그 출토량도 급증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구려 교류의 중심이 가야 남부에서 북부로 바뀌게 된 상황을 보여준다. 5세기 전반의 합천 옥전23호분은 이전 단계와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갑주, 마주, 마갑, 마구 등과 같은 중장기병 관련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는 4세기 전반부터 갑주와 마구의 부장이 차례대로 진행되어 오던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부산 복천동고분군과 구별된다(이영식, 2006).
6세기 전반 고구려와 가야의 교류와 관련하여 경상남도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11호분에서 출토된 금상감 환두대도 명문이 주목되기도 하였다. 이 고분군은 1911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 알려졌으며, 1918~1919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에 의해 일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穴澤啝光·馬目順一, 1975; 김수환, 2013). 그 외에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발굴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고 충분한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984년 국립진주박물관 개관 시 환두대도를 전시하기 위해 보존처리가 이루어졌고, 이에 X선 촬영을 한 결과 상감된 문자가 있음을 확인하였다(국립진주박물관, 1984). 당시 대략 7자 정도의 글자가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최초로 판독되었다. “乙亥年□扞率□”으로 판독함에 따라(田中俊明, 1987) 백제의 대도(大刀)로 이해하기도 하였다(김창호, 1989). 그러나 당시 촬영 각도 문제와 명문을 반대로 읽은 오류가 지적되어 이 판독안은 곧 철회되었다. 1990년에는 표면의 녹을 제거하여 상감된 명문을 노출시키고 새롭게 X선을 촬영하여“[上]咅先人貴□刀”로 판독하였다(한영희·이상수, 1990). ‘상(上)’은 ‘하(下)’, ‘도(刀)’는 ‘내(乃)’일 가능성이 제시된 바 있으며(국립중앙박물관, 1991), ‘부(咅)’는 ‘부(部)’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면서 뒤의 ‘선인(先人)’을 고구려의 관등명으로 이해하고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유물로 파악되기도 하였다(한영희·이상수, 1990; 이문기, 1992; 이영식, 1993).
그에 따라 환두대도를 신라가 고구려에 대한 신속관계를 가야 진출의 기회로 삼은 정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파악하기도 한다(이영식, 2006). 그러나 다수의 연구에서는 고구려에서 환두대도가 출토된 예가 없고, ‘상(上)’으로 판독하는 것과‘부(咅)’를‘부(部)’의 약자로 이해하는 것에 대한 의문, 그리고 제작기법이나 출토유물의 빈도 등을 이유로 대도를 백제(최종규, 1992; 홍성화, 2013; 김낙중, 2014; 高田貫太, 2014; 이현태, 2018), 혹은 대가야(이한상, 2010; 김우대, 2011; 박천수, 2012; 김도영, 2014)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최근에는 신라 계통일 가능성도 제기되어(홍승우, 2021) 이 환두대도를 바탕으로 고구려와 가야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각도로 검토해야 할 문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1963년에 발견된 고령 고아리벽화고분에서는 가야 유일의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 고분은 축조 시기를 특정할 만한 유물이 적어 백제 웅진기 고분과의 형식 비교를 통해 6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홍보식, 2003).
고분 내 현실과 연도의 천장에는 연화문이 상당수 남아 있다. 탈락된 부분이 많지만 대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으며, 고구려 쌍영총 계통이면서 백제 송산리고분 벽화와 통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김원룡, 1964). 이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연화문을 검토하여 고구려와의 상호 문화교류에 따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였다(진홍섭, 1978). 반면, 최근에는 백제의 횡혈식석실분 연화문과의 유사성이 지적되어 백제의 영향을 받아 가야의 방식으로 재창조되었다고 보거나(전호태, 2005), 가야 멸망 후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조원창, 2008), 백제 계통의 묘제와 벽화 전통을 수용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백제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문화전파의 연속선상으로 이해하는(정호섭, 2014) 등 연화문 벽화의 계통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당시 연화 문양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두루 쓰였으므로 기원과 계통이 한 지역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양은경, 2017).

그림9 | 고령 고아리벽화고분 천장 벽화
4세기 이후 가야 지역에서는 호미, 작살 등이 보이는데, 고구려에서 4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형태와 유사하다. 호미는 부산 복천동67호분, 함안 도항리22호분에서 보이고, 작살은 금관가야의 대성동2호분과 부산 복천동10호분에서 보인다. 이들은 모두 고구려에서 확인되는 것과 그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김재홍,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