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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왜와의 문물교류

4. 왜와의 문물교류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중국 정사 ‘25사(史)’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중 양국 관계가 처음 확인되는 사례는 『일본서기』 응신천황(應神天皇) 28년(297년) 9월조이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가 일본국에 견사조공(遣使朝貢)하고 표를 올렸는데, 태자가 그 표를 읽고 노하여 고구려 사신에게 표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대체로 간지(干支)를 2주갑 내려 417년(장수왕 5년)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여러 자료와 비교하면 이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가 항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성은 부정되고 있다(武田幸男, 1989). 또 『일본서기』 인덕천황(仁德天皇) 12년 7월조에는 고구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공납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과거 고구려가 왜에 대해 존대한 태도로 임한 기억을 반영한 설화로 보거나(이홍직, 1971), 『일본서기』 편찬자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池內宏, 1970).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일찍부터 〈광개토왕비〉가 가장 주목을 받아왔다. 〈광개토왕비〉에는 왜와 관련한 기록이 다수 등장하는데, 특히 신묘년조와 관련하여 한·일 간 오랜 논쟁을 지속해 왔다. 이후 고구려와 왜의 접촉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6세기 후반에서야 왜와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고구려와 왜가 통교한 배경에 대해서는 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주목된다.
고구려의 문화가 왜로 전파된 것은 물질자료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 승려나 사신의 파견을 통한 직접교류에서 파생된 물질문화에 고구려 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구려 승려 가운데 도왜하여 일본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도 적지 않다. 평원왕대 혜편(惠便)과 법명(法明), 영양왕대 일본에서 활약한 후 고구려로 다시 돌아와 입적한 혜자(惠慈), 영양왕대 활동했던 승륭(僧隆)·운총(雲聰)·담징(曇徵)·법정(法定), 7세기 중엽에 일본에서 행적이 보이는 대법사(大法師), 도현(道顯) 등이 있다. 또한 중국에서 유학하고 고구려로 돌아온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삼론학 관련 승려인 혜관(慧灌)과 도등(道登)도 있다(정호섭, 2018). 이들의 활동을 통해 고구려와 왜의 교류 및 문화전파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할 것은 해방 이후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 고대국가의 왜로의 문화전파에 대한 연구가 한반도 고대국가들이 시혜적으로 행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의 표현이라는 기본 관점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한국-일본이라는 문화적 서열화를 고착화하고 ‘교류’를 일방적 문화전파로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차원에서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문헌기록과 물질자료를 통해 고구려와 왜의 인적 교류 및 문물교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광개토왕비〉의 고구려와 왜
5세기에 세워진 〈광개토왕비〉에는 왜(倭), 왜인(倭人), 왜적(倭賊), 왜구(倭寇)가 다수 등장하여 고구려와 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소위 ‘신묘년(辛卯年)’조라고 불리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어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19세기 말 일본 관학자들은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해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보고, 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那可通世, 1893; 横井忠直, 1898). 이러한 견해는 훗날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지게 된다(末松保和, 1959). 이후 이 기사는 주어를 고구려로 봐야 한다는 반론이 나오면서 흔들리게 되었고(정인보, 1955), 심지어 일본군에 의한 비문조작설까지 제기되기에 이른다(이진희, 1972). 현재는 신묘년조에서 백제와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설정한 것은 고구려가 예부터 속민에 대한 해방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고 보거나(연민수, 1995), 영락 6년 기사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王健群, 1984) 등으로 추측한다. 이렇게 신묘년조의 주체에 대해서는 고구려 혹은 왜로 보는 입장이 나누어진다. 현재는 〈광개토왕비〉가 세워질 당시 상황을 볼 때 고구려의 입장에서 과장하여 기사를 서술했다고 해석하는 쪽이 우세하다(조영광, 2015).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영락 9년(399년) 왜는 백제와 화통(和通)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여 왜병을 격파하였고, 영락 14년에는 왜군이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했다고 나온다. 고구려는 강력하게 남방 정책을 추진하였고 왜는 백제와 화통하는 존재로 나온다. 이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의미하고, 따라서 왜를 적개심 넘치는 대상으로 기술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연민수, 2012). 한편 왜는 광개토왕의 교화가 미치는 관적(官的) 질서의 편제 대상으로서 고구려의 천하관에 속하는 존재로 인식했다고도 본다(이도학, 2012).
 
2) 570년대 고구려와 왜의 외교
6세기 후반에 고구려와 왜가 통교한 배경으로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주목된다. 551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고, 신라는 554년 관산성전투, 562년 대가야 병합 등 영역을 확장하였다. 진흥왕은 568년에 북쪽으로 진출하여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고구려는 다소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신라는 중국의 남북조와도 적극적인 외교를 추진했다. 북제와는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진으로는 사절을 보내면서 외교의 폭을 넓히고 있었다(井上直樹, 2008). 이러한 신라의 위협은 고구려가 570년 대왜 외교를 추진하게 된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津田左右吉, 1924; 이홍직, 1971; 李成市, 1990).
한편 이러한 신라가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영토를 일부 후퇴하는 정황을 통해 신라군이 퇴각하고 있었고, 북제와 신라의 관계도 일시 진행되었을 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또 당시 고구려는 장안성을 축조하면서 내부로 체계적인 방어를 구축하는 한편, 외부로는 활발한 대외관계를 통해 안정된 상황을 조성하려고 했을 것임으로, 고구려의 대왜 외교도 그러한 방향의 일환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성제, 2009).
고구려와 북조의 관계도 대왜 외교와 관련된다. 고구려와 북제 관계는 553년 유민 송환 문제와 문선제(文宣帝)의 ‘지영주(至營州)’ 등 문제로 악화되어 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대북제 견사(遣使) 빈도가 줄어든다. 564년과 565년의 사신 파견 역시 백제·신라의 동향과 관련될 뿐 큰 의미는 없었다(井上直樹, 2008).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가 점점 종식되어 갔으며, 결국 수(隋)가 통일을 이루게 된다. 이제 고구려는 6세기 무렵 급성장한 신라의 위협에 대비하는 동시에 중국 정세의 변화에도 반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왜도 가야의 멸망으로 한반도 일대의 관계망을 상실하여 새로운 정책 변화가 요구되었다(김선민, 2007).
570년대 이후부터 보이는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31년 4월조를 보면, 570년 월인(越人) 강정신거대(江渟臣裾代)가 경(京)에 이르러, 고구려 사절이 표류하여 월(越)의 해안에 도착했는데 군사(郡司)가 몰래 숨겨주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천황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산성국(山城國) 상락군(相樂郡)에 객관(客館)을 세워 고구려 사절을 돌보게 하였다고 한다. 흠명천황 31년 5월조에는 왜 중앙에서 사자를 월 지역으로 보내 고구려 사절을 대접하였다. 고구려 대사(大使)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도군(道君)에게 물건을 돌려주라고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대왜 외교는 적극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구려가 진(陳)과의 교류를 전제로 하는 과정에서 진행한 부차적 접근이고, 말 그대로 표착·우발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新川登龜男, 1994). 진으로 파견된 사절의 표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김선민, 2007). 또 그 이전까지 고구려의 대왜 외교는 민간 차원의 루트였으며, 공식적 통로는 전혀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이성제, 2009).
한편,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맞춘 고구려의 전략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平野卓治, 2004). 정황상 고구려가 새로운 대외전략 상대로 왜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하였다(이성제, 2012). 아무튼 고구려가 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외교를 시도하고 있는 점은 특기된다.
왜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서기』의 칙(勅)에 ‘지덕위위(至德魏魏)’·‘인화방통(仁化傍通)’·‘홍은탕탕(洪恩蕩蕩)’ 등으로 표현하여 왕위(王威)를 드러내고 있다(이홍직, 1971). 이는 왜의 대백제·신라 외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으로, 그만큼 왜가 고구려를 특별히 의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선민, 2007). 군사가 고구려 사신을 은닉한 이유와 강정신거대가 이를 천황에게 알린 이유에 대해서는 추후 진행될 고구려와 왜 교류의 출발을 암시하는 설화적 내용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홍직, 1971).
양국 간의 정보 무지 상태, 고구려와 월 지역의 교류 양상 등을 통해 고구려 사절의 이동경로를 추정하기도 한다. 고대 한반도와 왜의 교통은 주로 한반도 남부를 거쳐 큐슈(九州)로 이동하였는데,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적대하여 이 경로를 이용할 수 없었다. 고구려 사절은 신라군의 방해를 벗어날 수 있고 거리도 짧은 동해 횡단코스를 선택하였다(연민수, 2007; 井上直樹, 2008; 이성제, 2012).
흠명천황 31년 7월 임자삭조를 보면, 왜는 고구려 사절을 극진히 대접하고 산성국 상락관(相樂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즉 고구려 사절이 1개월 이상 걸려 근강(近江)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회를 베푼 배경에 대해서는 고구려에 대한 왜의 경계심으로 보는 동시에, 빈례(賓禮)가 성립하기 이전 왜의 객관 영접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平野卓治, 1988). 본래 의례대로라면 고구려 사절을 상락관에 안치한 뒤 입경(入京)과 국서의 전달 과정이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이성제, 2012). 조물(調物) 검사와 국서(國書) 수령은 고구려 사신이 직접 천황을 만나지 않고 행해지고 있었다(김선민, 2007). 그런데 왜국 내에서 흠명천황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민달천황(敏達天皇)이 즉위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고구려 사절은 상락관에 국서도 아직 전달하지 못한 채 머무르고 있었다. 민달천황 원년 5월 임인삭조와 병진조를 보면, 천황이 고구려 사인(使人)의 행방을 묻고 비로소 고구려의 표소(表疏)가 전해지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국서를 아무도 읽을 수 없었는데 왕진이(王辰爾)만이 읽어 내어 천황의 칭찬을 받는다. 고구려의 국서는 까마귀 깃털로 작성되었고, 왕진이가 그 깃털을 밥의 증기로 찐 다음 비단으로 눌러 숨어 있는 글자를 모두 밝혀내었다. 왜 조정이 고구려 사절이 도착하고 2년이나 지난 시점에서야 국서를 접수하는 태도는 그만큼 왜가 고구려 국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당시 고구려왕인 평원왕의 의중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왜는 571년 신라에 사자를 파견하였는데, 이때의 사자 파견을 고구려와의 관계로 연결지어 보기도 한다(김은숙, 1994). 왜가 고구려 사절의 방문을 빌미로 신라에 압박을 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이는 신라가 왜에 사절을 보낸 점과 아울러 이해하면 고구려-왜-신라 간의 급격한 외교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성제, 2009).
민달천황 2년 5월 병진삭 무진조를 보면, 고구려 사절이 다시 ‘월해지안(越海之岸)’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도 풍랑으로 피해를 보고 익사자도 많았다고 한다. 왜는 번번이 길을 잃는 점을 의심하면서 이번에는 이들을 받지 않고 방환(放還)시키는 조치를 내린다. 이는 10달 전 ‘사처(賜妻)’ 조치에 대비하면 매우 다른 대응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 배경으로 이번 사절이 조물과 국서를 휴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송사(送使)격으로 고구려로 향한 왜 사신이 고구려인 2명을 바다에 던져 넣고 단독으로 귀환한 배경도 선진문물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을 원인으로 들었다(이영식, 2006).
민달천황 3년 5월 경신삭 갑자조를 보면, 고구려 사절이 다시 ‘월해지안’에 도착한다. 제3차 외교사절이다. 이들은 송사의 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그 이유를 듣기 위해 왔다고 하였다. 이에 왜에서는 그 진상을 조사하고 난파(難波)의 송사를 처벌하였다. 이 내용은 고구려 사절의 귀국 사정에서 발생한 불상사의 연속을 보여준다. 기술이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높으나, 이러한 사건의 연속은 양국 간의 알력을 암시한다. 왜의 신하들 사이에 고구려와의 통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김선민, 2007).
 
3) 고구려승의 도왜활동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3년 5월조에 보이는 승려 혜자의 도왜 기사에 따르면, 혜자는 왜에 도착해서 황태자(廐戶皇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 갑작스러운 도왜의 배경으로 고구려 왕권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지적된다. 즉 당시 등장한 수·당과의 관계나 신라와의 전투 상황을 살피면서, 고구려가 벌인 대왜 외교의 상징으로 추측한다(坂元義種, 1979; 李成市, 1990; 이성제, 2009). 이는 북제 등 중국 왕조와의 관계 설정과도 연결된다. 570년대 고구려가 북제와의 관계 악화를 바탕으로 외교적 고립을 타파할 목적으로 왜에 사신을 보낸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山尾幸久, 1989).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 왜 역시 601년 고구려와 백제로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백제-왜를 잇는 연합전선의 구축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연민수, 2007). 왜의 경계심을 품지 않게 할 목적으로 승려를 보냈다는 의견도 있다. 왜는 588년에 아스카사를 건립하고 백제에서 승려 혜총·영근(令斤) 등을 받아들였다. 고구려는 왜의 이러한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국계 승려를 통해 왜국 내에서 고구려의 입지를 높이려고 한 것이다. 그 속에서 혜자의 역할을 중요시하게 보는 것이다(井上直樹, 2011).
추고천황 시기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추진했던 대수(對隋) 외교에 고구려승 혜자의 영향력을 추정하기도 한다. 『수서』 왜국전에 보이는 607년 견수사(遣隋使)가 가져간 왜의 국서에는 “해 뜨는 곳(日出處)의 천자(天子)가 서(書)를 보내는데, 해 지는 곳(日沒處)의 천자는 별 탈 없으신가”라고 묻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에 수 양제는 매우 불쾌해하고 오랑캐의 글을 다시는 올리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백제·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자국의 건국신화, 천하관 등이 확립되어 있었고,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자존의식이 강고하였다. 이러한 정신체계를 성덕태자의 스승 혜자가 전수하였고, 그 결과가 견수사의 국서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山尾幸久, 1967; 坂元義種, 1979; 李成市, 1990).
혜자 이후로는 『일본서기』 추고천황 10년 윤10월조에 나오는 602년 승륭·운총의 파견과 추고천황 13년 4월조에 나오는 605년 왜의 불교사원 조영에 관련한 고구려왕의 황금 전달 사례가 있다. 이 배경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요서를 공격하자, 수 문제가 고구려에 원정군을 파견하고 고구려왕의 관직을 삭탈하는 등 첨예한 대립상황을 들고 있다. 고구려의 위기상황과 수와의 관계 악화를 요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坂元義種, 1979). 다른 배경으로 백제를 들기도 한다. 『삼국사기』 등에 보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 기사를 살피고, 고구려가 백제 견제를 목표로 왜에 접근했다는 것이다(김현구, 1985).
『수서』 백제전에 607년 무렵 고구려와 백제가 내통하고 있었다는 자료에 주목하여,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고(津田左右吉, 1964),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경위를 왜에 파견된 수사(隋使) 배세청(裴世淸)의 활동에서 찾기도 한다. 즉, 왜에서 활동 중인 고구려승 혜자와 백제승 혜총 등의 활동을 보고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은 것으로 잘못 인식했다는 것이다(井上直樹, 2011).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8년조 등을 보면 이 무렵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고 있고, 고구려 승려는 계속해서 왜로 건너갔다. 610년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추고천황 18년 3월조에 보이는 담징과 법정(法庭)의 도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특히 담징은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 등의 제작방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담징과 법정 파견 이후 고구려는 수와 전면전을 하게 된다. 615년의 상황에서 『일본서기』 추고천황 23년 11월조에 혜자가 고구려로 귀국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이 건국된 618년 고구려는 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수의 원정군에 승리한 사실을 알리고, 수군(隋軍)의 포로 및 그때 포획한 고취(鼓吹)와 노(弩) 등을 헌상하였다. 그 배경에는 친수(親隋) 태세를 취하고 있던 왜에 수의 멸망을 알리면서 고구려와의 화친을 요구하려 했다고 보거나(坂本太郞·家永三郞·井上光貞·大野晉 校注, 1967), 한반도 정세상 고구려의 위상을 각인시키려 했다는 견해(井上直樹, 2011) 등이 있다.
잠시 보이지 않던 고구려의 대왜 외교는 625년에 재개되는데, 『일본서기』 추고천황 33년 정월조에 승려 혜관이 파견되었다. 혜관의 파견에 대해서는 신라에 대한 견제로 이해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대당 외교에 집중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대왜 외교는 저조하였다. 630년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흠명천황 2년 3월조에는 고구려가 다시 왜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때는 승려가 아닌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는 백제와 대립하던 신라가 629년부터 고구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으로 이해하고 있다(井上直樹, 2011).
 
4) 고고·미술자료를 통해 본 교류
1972년 일본 나라현 아스카에서는 다카마쓰고분(高松塚)벽화가 발견되었고, 1983년에는 그 바로 아래에 있는 기토라고분(キトラ古墳)에서도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고분들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706~719년으로 한정 짓기도 한다(有賀祥隆, 2006).
다카마쓰고분벽화에 그려진 치마 양식을 고구려 수산리고분의 벽화와 비교하지만, 수산리고분벽화가 비교적 이른 시기인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연대 차이가 크다. 따라서 다카마쓰고분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형식상 고구려 고분과의 관련성은 없으며 벽화 또한 중국식과 고구려식이 혼합된 복합적 양식으로 보았다(奈良縣敎育委員會·明日香村, 1972). 아울러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계 도래인인 황서조본실인(黃書造本實人)의 관여 가능성을 언급하거나(井上薰, 1972), ‘고려화사’ 자마려(子麻呂)와 가서일(加西溢) 등 고구려계 화가들이 참여하였고 이들의 기법이 벽화에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永島暉臣愼, 2005).
두 고분의 사신도(四神圖) 양식을 통해 고구려 벽화와의 관련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즉 수·당의 사신은 청룡과 백호로만 한정되고 점점 크기가 거대화하는 데 반해, 고구려와 이 두 고분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和田萃, 1999).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교과서 등에서 다카마쓰고분의 여인인물상을 수산리고분의 여인인물상과 비교하여 복식의 유사성을 통해 고구려 영향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소 잘못된 이해로 보인다. 다카마쓰고분의 여인상은 당(唐)풍 여인상의 전형적 모습이다.
아스카사는 발굴조사에 따르면, 남대문에서 중문으로 들어가고 그 북쪽에는 기단 위에 탑이 있으며, 탑을 중심으로 세 방향에 중금당·동금당·서금당이 있다. 동·서 금당은 기단 위에 초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폭이 좁은 소초석(小礎石)을 사용한 구조를 가진다고 한다. 이처럼 각 금당이 탑을 둘러싸고, 다시 회랑이 금당을 둘러싸고 있다. 이 양식은 고구려의 금강사로 추정되는 청암리폐사(靑巖里廢寺)와 유사하다고 보았다(奈良文化財硏究所 編, 1958). 『일본서기』 추고천황조에는 백제로부터 사리가 들어오고 승(僧)·사공(寺工)·노반박사(鑪盤博士)·와박사(瓦博士)·화공(畫工) 등이 도래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추고천황 4년에 도왜한 고구려승 혜자는 백제승 혜총과 함께 아스카사에 주석하였다. 아스카사가 백제의 기술로 건립되었을 수도 있지만, 고구려 가람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奈良文化財硏究所 編, 1958; 淺野淸, 1958; 齊藤忠, 1976).
호류사 금당벽화를 담징이 그렸다는 기록은 1852년 이 절을 방문하고 벽화를 본 소감을 남긴 고경당(古經堂) 양제철정(養鵜徹定, 1814~1891)에 의해서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요철법·채색법·인물묘사법 등이 서역화풍에 토대를 두고 당풍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 하쿠호시대(白鳳時代)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후의 속전(俗傳)으로 현존 호류사 금당벽화를 담징 개인의 직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이홍직, 1957). 또한 호류사가 670년에 불탔기 때문에 610년에 건너간 담징이 그렸다고 볼 수는 없다고 이해하고 있다(안휘준, 1989). 그러나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인식은 오세창(오세창, 1928), 문일평, 에카르트(Andreas Eckardt)를 거쳐 이병도로 이어져 왔다(이병도, 1948). 고대 한·일 교류는 문헌기록이나 여타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부족하므로 전승에 의존하기보다는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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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와의 문물교류 자료번호 : gt.d_0004_003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