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세기 이후 국내 정국의 변화
1. 6세기 이후 국내 정국의 변화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문자왕대를 지나 그의 아들 안장왕대부터 고구려 중앙정계에 심상치 않은 권력투쟁의 암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음은 여러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정국의 변화와 관련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양원왕 13년 10월조에 환도성(丸都城) 간주리(干朱理)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는 기사가 그나마 고구려 정국 내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신라나 일본 측 자료에 보이는 고구려 정국의 혼란한 양상 및 정쟁이 정작 고구려 자체 전승 기록을 담고 있는 고구려본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셈이다. 이는 영양왕대의 『신집(新集)』이라는 역사서 편찬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기 고구려의 정국 양상을 전하는 자료를 좀 더 살펴보자. 먼저 『삼국사기』 권44 거칠부(居柒夫)전에 551년(양원왕 7년,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혜량법사(惠亮法師)가 신라인 거칠부에게 “금일 우리나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멸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무렵 고구려 중앙정계에서 상당히 심각한 정치적 분란이 전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벌어진 정치적 분란의 구체적인 양상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백제본기(百濟本紀)』를 인용하여 전하고 있는데, 고구려 안장왕과 그 뒤를 이은 안원왕이 정치적 변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일본서기』 계체기(繼體紀) 25년조에는 531년 3월에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안장왕이 살해된 동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는 기사를 검토해보자.
안장왕대의 고구려본기 기사는 재위 13년 동안 양과의 대외교섭 기사가 4건, 북위와의 교섭 기사가 1건, 백제와의 전투 기사가 2건으로 대부분 대외관계 기사이고, 국내 기사로는 졸본(卒本)에 있는 시조묘(始祖廟)로의 행차 기사가 1건, 기근으로 인한 구휼 기사 1건, 전렵(田獵) 기사 1건에 불과할 정도로 소략하다. 5세기 이후 고구려본기 기사의 구성을 볼 때 주로 외국의 역사자료에 의거한 대외관계 기사를 제외하면 고구려 국내 전승 기사에 의거한 기사가 대체로 소략한 편이지만(임기환, 2006), 안장왕 본기의 국내 전승 기사는 더욱 소략한 편이다.
그중 안장왕 3년(521년) 4월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했다는 기사는 고국원왕 2년(332년) 이후 5대 190년 만에 이루어진 시조묘 제사 관련 기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물론 190년 동안 시조묘 제사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료의 누락일 수도 있다(노명호, 1981). 그러나 시조묘 제사 기사의 공백 기간이 소수림왕-문자왕대로서, 이른바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된 시기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구려 전기에는 시조묘 제사라는 행위가 매우 정치적인 행위였음을 고려하면, 소수림왕-문자왕대에는 상대적으로 시조묘 제사가 갖는 정치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조인성, 1991).
그렇다면 장기간의 시조묘 제사 공백 뒤에 다시 등장한 안장왕대의 시조묘 제사 기사는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욱이 안장왕이 졸본에서 시조묘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지나는 주읍(州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1인당 1곡씩 주었다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본기에서 군주의 구휼 행위 자체도 상당히 이례적인 기사이다. 시조묘가 있는 졸본에서 수도 평양성으로 귀환하는 경로가 어디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옛 수도인 국내성(환도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고려된다. 그리하여 안장왕이 졸본으로 시조묘 제사를 간 행위가 갖는 정치적 의미에 여러 연구자가 주목하고 있다.
먼저 안장왕이 졸본 행차 시 국내 지역을 경유하여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중앙정계에서의 세력기반이 위축되어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을 국내성의 정치세력과 일정한 정치적 타협을 모색했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1992).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안장왕의 시해라는 정변은 문자왕대 말-안장왕대에 다시 세력을 만회해가는 국내계 세력의 동향이 하나의 변수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한 안장왕의 졸본 시조묘 친사를 대외정세의 변화 속에서 서북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국내계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행위로 이해하기도 한다(최일례, 2016). 즉 문자왕대까지 북위와의 교섭이 중심을 이루는 양상과 달리, 안장왕대에는 즉위 초부터 양(梁)에 사신을 보낸 이후 남조와 빈번하게 교섭하는 외교관계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는 북위 내부의 혼란을 틈타 요해(遼海) 지역 여러 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고구려의 대외정책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한기(韓曁)묘지명〉에 따르면, 고구려가 안원왕대에 북위의 혼란을 틈타 한때 영주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최일례, 2016). 하지만 이러한 대외정책의 변화에서 고구려 집권세력의 변화 가능성을 추론하고, 더욱이 시조묘 제사라는 이념적·정치적 성격이 두드러진 의례 행위를 대외정책과 직접 연관시키는 견해는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편으로 안장왕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서 『삼국사기』지리지 왕봉현(王逢縣) 및 달을성현(達乙省縣)조에 보이는 안장왕과 한씨(漢氏) 미녀와 관련된 일화에 주목하여, 이를 근거로 정국의 변화 가능성을 설명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노태돈, 1999; 김진한, 2007; 최일례, 2016). 한씨 미녀를 한강 일대를 기반으로 한 지방세력으로 보고,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결합을 한강 유역 지방세력의 중앙정계 진출과 이를 후원하는 안장왕의 정치적 입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는, 당시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세력을 중앙정계에 등용하여 왕권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 정책적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13년조와 이어지는 안원왕 즉위년조 기사에서는 안장왕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비정상적인 면도 찾아볼 수 없다.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안원왕의 즉위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안원왕은 이름이 보연(寶延)이고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었으므로 안장왕은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13년에 죽었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즉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안원왕은 안장왕의 아우로서 안장왕이 후사가 없어서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계체기 25년 12월조에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안원왕이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다’는 식의 풍모가 예사롭게 이해되지 않는다.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일본서기』 기록은 당시 백제 측 정보에 의한 것인데, 여러 정황상 매우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만약 안장왕이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어떤 정치적 요인이 크게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요인 중에 앞서 언급한 지방세력인 한씨 미녀와의 결합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방세력이 왕실과 결합하였을 경우 나타나는 중앙귀족들의 반발은 신라 소지왕의 사례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안장왕의 뒤를 이은 안원왕의 즉위가 귀족들과의 타협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안장왕이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한 채 사망함으로써 귀족회의를 통해 차기 왕위계승권자가 선출되는데, 안장왕의 동생이었던 안원왕이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이때 귀족들과 안원왕 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귀족회의와 그 수장인 대대로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상정하고 있다(정원주, 2018). 그러나 안장왕의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동생인 안원왕이 제1순위 왕위계승권자인데, 과연 이때 즉위를 조건으로 안원왕과 귀족세력 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대대로를 수장으로 하는 귀족회의가 정국 운영의 주체가 되었을지 의문이다.
다음 안장왕의 뒤를 이은 안원왕의 죽음에 대해 『일본서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희생되었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6년조에는 545년 12월 갑오(甲午)에 변란이 있었고 무술(戊戌)에 박곡향강상왕(狛鵠香岡上王)이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의 이름에서 ‘狛’은 맥(貊) 즉 고구려를 뜻하고 ‘香岡上王’은 곧 향원왕(香原王)으로서 안원왕에 비정할 수 있다(이홍직, 1954; 1971). 『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는 박곡향강상왕이라는 왕명 중 ‘곡향(鵠香)’에는 ‘鵠林香火’라고 하는 불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고구려에서 불교식 왕명을 표방했던 국왕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남무희, 2007).
『일본서기』 기사에서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원왕은 세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소생이 없었는지, 둘째 중부인(中夫人)과 셋째 소부인(小夫人) 사이에 후계를 둘러싼 암투가 있었다. 중부인의 아버지는 추군(麤群)이고, 소부인의 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는데, 545년 재위 15년 만에 안원왕이 병들자 후계를 노린 외척 추군과 세군 사이에 3일간에 걸친 치열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안원왕은 죽었고, 싸움은 추군 측의 승리로 끝나 중부인의 소생인 양원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때 패배한 세군 측의 희생자가 2,000여 명이 넘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왕위계승전에는 외척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앙귀족이 참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안원왕 말년의 왕위계승전에서 등장하는 추군과 세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그중 세군을 국내계 정치세력, 추군을 평양계 정치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임기환, 1992). 그런데 ‘추(麤)’와 ‘세(細)’의 어의에 주목해서 이와는 반대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즉 ‘麤’는 멀다는 뜻이 있으므로 평양에서 먼 지역인 국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귀족세력이며, ‘細’는 가깝다는 뜻이 있으므로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던 신진귀족세력이라고 본다(남무희, 2007). 그런데 이 견해는 ‘麤’와 ‘細’라는 어의상 해석이 옳다는 전제가 불분명하며, 또한 추군과 세군을 국내계 세력과 평양계 세력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견해와 정반대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후기의 정치사 흐름을 파악하는 방식도 앞의 견해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어 후기 정치사 맥락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추군과 세군을 정치적 지향이 다른 정치세력으로 파악하여, 추군은 고구려식 욕살(褥薩)체제를 지향하였고, 세군은 한문식의 군주(軍主)체제를 지향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는데(주보돈, 2003), 구체적인 논거가 불분명하다. 안장왕-양원왕대의 정치적 갈등을 국내계 정치세력과 평양계 정치세력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견해에 동의하는 입장(민철희, 2002; 최일례, 2010)이 적지 않으니, 이 글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안원왕 말년의 왕위계승전은 세군계가 2,000여 명이나 죽은 대정쟁이었기 때문에, 사건 후 정국 운영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했을 것이며, 그 분란이 양원왕의 즉위로 쉽게 일단락될 리 만무였다. 『일본서기』 기사에 보이는 왕위계승전의 연장선에서 양원왕대의 정치 동향을 좀 더 살펴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를 보더라도 이후 국내 지역의 정치적 동향이 주목된다. 양원왕 4년(548년) 9월에는 환도(丸都)에서 가화(嘉禾)를 진상하였다. 가화는 농업 생산과 관련하여 왕자(王者)의 성덕(盛德)을 나타내는 상서( 瑞)로 인식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화를 진상한 몇 사례를 보면 복속 의례의 의미도 담겨 있다. 따라서 환도에서의 가화 진상 기사는 환도 지역이 중앙정부에 귀부·복속의 뜻을 표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557년(양원왕 13년)에는 환도성(국내성)에서 간주리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켰다.
환도는 평양 천도 이전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고구려 후기 3경의 하나로서 중앙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지역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9년 정도 시차를 두고 벌어진 가화를 바친 사건과 간주리의 반란, 두 사건은 단지 환도세력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이들과 연계된 중앙정치세력의 동향과 관련있다고 판단된다(임기환, 1992; 2004). 이런 사례를 통해 양원왕대에는 왕권 내지 중앙정권과 국내(환도) 지역 정치세력 간에 심각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있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양원왕은 외척세력의 후원 속에서 즉위하였다. 따라서 양원왕 초기의 정국 운영은 양원왕의 즉위를 지원하였던 외척, 즉 추군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양원왕 4년에 가화를 헌상하기까지 양원왕 내지 중앙정권과 대립·갈등하거나, 양원왕 13년에 반란을 일으킨 환도 지역 세력은 적어도 추군계 세력은 아니다. 양원왕 즉위 시에 추군·세군 사이에 왕위계승전이 치열했음을 상기하면, 왕권과 대립하였던 환도 세력은 오히려 양원왕의 즉위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세군 세력과 동일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세군 세력을 지지하고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던 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양원왕대에 정치 변동의 한 축이었던 환도(국내) 세력을 안원왕 말년에 중앙에서 왕위계승전에 참여하였던 세군계와 관련지을 수 있다면, 이 국내 지역 정치세력은 단순히 지방세력으로서가 아니라, 국내성과 연고를 맺고 있는 중앙귀족까지 모두 포괄한 하나의 정치세력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임기환, 1992; 2004).
그러면 국내 지역의 정치세력과 연결될 수 있는 이들 중앙정치세력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국내 지역이 고구려의 이전 왕도임을 고려하면, 평양 천도 이전에 성장한 전통적인 귀족세력으로 볼 수 있다. 평양 천도 이후에도 이들 구귀족의 국내 지역 기반은 쉽사리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서영대, 1981; 임기환, 1987). 물론 이들의 세력기반은 국내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중앙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평양 지역 일대에도 상당한 세력기반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고자료를 통해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현재 평안도·황해도 일대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다. 귀족들이 자기 세력기반에 분묘를 축조했다고 고려하면, 이들 벽화고분의 분포지는 이 시기 귀족들의 세력기반과 밀접히 관련된다. 그런데 이러한 벽화고분의 분포지역이 모두 천도 이후 등장한, 본래 평안도·황해도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신귀족세력의 지역기반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에는 천도 이후 평양 지역으로 진출한 구귀족들의 세력기반도 상당수 존재하였을 것이다. 예컨대 평양 지역에 소재한 연화총과 천왕지신총은 5세기로 편년되는데, 이들 고분벽화의 연꽃 형태가 집안(국내) 계열로 분류되고 있다(전호태, 1990). 따라서 이들 고분은 국내계 세력과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평양 일대 고분군의 분포에서 대성산고분군 동쪽에 위치한 광대산고분군의 경우 그 입지와 자연환경이 국내성의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보고, 이 지역 고분의 주인공이 국내계 출신일 가능성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다(강현숙, 2019).
이처럼 국내계 정치세력들이 수도 평양에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중앙정계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을 경우 개별적인 세력기반을 벗어나서 본래 공통된 세력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국내 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양원왕대에 국내(환도) 지역 정치세력 동향을 곧 국내계 귀족세력의 정치적 추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여기서 국내계 귀족세력이란 지방 세력으로서가 아니라, 국내 지역에 일정한 세력기반을 두고 있는 중앙정치세력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임기환, 1992).
안장왕-양원왕대의 왕위계승전을 비롯한 귀족세력 간의 분열·대립 과정에서 국내계 구귀족세력이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이와는 다른 한편의 정치세력, 예컨대 세군 세력과 대립하였던 추군 세력 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한편 중앙정계에서 전개된 내분은 지방사회에도 상당한 파급을 미치고 있었다. 『삼국사기』 권44 거칠부전에 의하면, 551년에 백제와 손잡은 신라가 한강 상류지역을 공격하였을 때, 고구려의 고승 혜량법사가 제자들을 이끌고 신라군 사령관 거칠부를 맞이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정국이 혼란하여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지방세력이 고구려를 이탈하거나 또는 고구려의 옛 도성이었던 환도성(국내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 귀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동시에 지방에서는 여전히 중앙정권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이 상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노태돈, 1976).
이처럼 양원왕 즉위 시에 노정된 정치적 갈등은 이후 정국 운영의 주된 변동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안장왕-양원왕대에 귀족세력 간 정국 운영의 주도권 싸움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 정쟁 과정에서 왕권이 상당히 약화되었을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평원왕 이후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기까지 80여 년 동안 아무런 정쟁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 기간에 상당히 안정된 정국이 유지되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정국 안정은 어떠한 정치적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었을까? 먼저 이 시기 왕권의 위상을 검토해보자.
양원왕대에서 이어지는 평원왕대의 정국을 살펴보자. 평원왕 재위 7년(565년)에 장자인 원(元)을 태자로 삼았는데, 이가 곧 장차 영양왕이 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원이 태자로 25년 동안 있었다는 점은 태자 원의 지위가 안정되었고, 평원왕의 왕권 역시 비교적 강력했다는 반증으로 파악한다. 또한 평원왕대에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기사가 다수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최호원, 2012).
즉 평원왕은 재위 2년에 졸본에 있는 시조묘에 친사를 가고, 돌아오는 길에 주군(州郡)의 사형죄를 제외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풀어주는 조처를 취하였다. 재위 5년에는 크게 가물어 왕이 반찬을 줄이고 산천에 기도를 드렸으며, 13년에는 궁실을 중수하다가 누리와 가뭄 재해가 있자 공사를 중지하였다. 23년에는 백성들이 굶주리자 나라 안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25년에는 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고 군읍에 사신을 보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왕자(王者)로서의 왕도적 풍모를 드러내는 평원왕의 이러한 행적이 왕권의 안정과 관련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현재 고구려본기에 남아 있는 이러한 기사는 『신집』과 같은 사서 편찬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임기환, 1992).
평원왕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이도(移都)한 사실도 평원왕권의 위상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우선 장안성 외성은 리방제(里坊制)를 적용한 도시를 구성하였는데, 리방제가 갖는 도시 주민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라는 기능이 고려된다. 당 장안성의 리방제나 일본 고대의 리방제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신라 경주도성에서 리방제의 시행 목적도 진골 귀족과 주민의 통제 강화와 연결되었다고 파악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장안성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장안성 이도가 갖는 정치적 의미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장안성의 축조 시점이 한강 유역을 상실한 직후이고, 또 이전과 달리 방어용 나성(羅城)을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축성 배경으로 한강 유역 상실에 따른 도성 방어력의 강화를 주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도 충분히 고려되지만, 리방제의 시행은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도 연결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안원왕 말년에 도성 한가운데에서 격렬한 왕위계승전을 치르고 양원왕이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세력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그러나 신라가 성장하고 요동 지역에서 대외적인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정치적·사회적 안정에 대한 왕실 및 귀족의 공감대 역시 높아져 갔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로운 도시 계획을 추구하면서 주민들의 통제와 치안을 확보하기에 용이한 리방제를 수용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장안성의 축조와 리방제의 시행이 반드시 왕권의 강화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귀족연립정권 내부에서 왕권의 위상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추정케 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임기환, 2007).
장안성 축조와 천도를 계기로 6세기 후반 이후 평양도성이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졌으리라 예상된다. 예컨대 황해도 안악 지역 벽화고분의 존재는 5세기 전반 복사리벽화분, 5세기 후반 안악2호분, 6세기 평정리벽화분으로 이어지지만 그 밀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이는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지방의 귀족세력이 이주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평원왕 이후 정국 운영에서는 아무래도 평양도성으로 결집하는 귀족세력의 동향이 중요해졌을 것이다(임기환, 2007).
다음 영양왕대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즉위년조에 보이는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기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以濟世安民自任)”라는 영양왕에 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그는 598년(영양왕 9년)에 말갈군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하여, 긴장되어 가는 수와의 관계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감행하였다. 그의 친정(親征)은 사료상으로는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격 및 529년 안장왕의 오곡(五谷)전투 이후 처음으로 보이는 국왕의 친정이다. 대외정복활동에 있어서 왕의 친정이란 형태가 왕권 강화와 밀접히 관련되는 점을 고려하면, 대외관계를 일정하게 주도할 수 있는 왕권의 면모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간취할 수 있다.
또 영양왕 11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고사(古史)를 줄여 『신집』을 편찬케 한 사실도 주목된다. 『신집』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학이나 중국 사서의 영향을 받으면서 왕정(王政)의 득실을 논하는 입장에서 편찬되었다고 볼 수 있다(김두진, 1978). 이는 같은 시기에 편찬된 신라의 역사서 『국사(國史)』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도 방증된다(이기동, 1979). 특히 『일본서기』 등에 전하는 왕위계승전 기사가 고구려본기에서 탈락한 것을 보면 그 후 일정한 역사서 개편이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고, 『신집』의 성격과 편찬 의도도 짐작할 수 있겠다. 그것은 곧 왕권의 안정과 관련될 터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서 편찬을 가능케 하는 왕권 강화 양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영양왕의 전왕(前王)인 평원왕대의 본기 기사에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의 왕도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기사가 두드러져 나타남을 보면, 『신집』 편찬의 기준이 우선 전왕대의 정리에 적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양왕대에는 수의 침공에 국운을 걸고 대결하는 국가적 위기가 지속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수전쟁을 지휘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영양왕이나 왕제 건무(建武) 등 왕실의 권한이 이전 시기에 비하여 강화되거나 정국의 안정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물론 이러한 면과는 다른 상황을 전하는 사료도 있다.
〈천남생(泉男生)묘지명〉과 〈고자(高慈)묘지명〉에서 “나라의 권력을 오로지 관장(咸專國柄, 知國政)”하는 막리지(莫離支)의 존재에 대한 기술이나, 수 양제의 조서에서 당시 고구려의 국내 사정을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나랏일을 손에 쥐고 붕당끼리 결탁하는 것이 풍속이 되니”라고 지적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앞서 살펴본 영양왕대 왕권의 면모에 의구심이 든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왕권의 위상이 높았던 영양왕대에도 정국 운영의 주도권은 여전히 귀족세력이 장악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앞에서 살펴본 영양왕대 왕권의 강화와 안정의 면모도 계속된 대수전쟁의 대외적 위기에서 나타난 현상이지, 왕권의 독자적인 기반이 마련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평원왕 이후 정국 안정도 결국 귀족세력 간 역관계의 안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임기환, 1992; 2004).
안장왕 이후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귀족연립체제로 운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왕실이 유지되면서 정치 운영에서 국왕권의 영역도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한 배경에 대해 노태돈은, 여전히 왕권의 신성성(神聖性)이 여러 귀족세력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 고씨(高氏) 왕족들의 유대감과 정치적 비중이 적지 않았다는 점, 왕실을 대체할 정도로 권력을 일원화할 수 있는 유력 귀족세력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면서, 고구려 국왕이 귀족세력의 권력 분점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국왕이 갖는 본래의 권위가 귀족연립정권을 안정, 유지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노태돈, 1999).
요컨대, 왕권의 강화와 안정이 반드시 귀족연립체제의 운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왕권과 귀족권의 공존방식이 이 시기 귀족연립체제의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검토하겠지만, 귀족연립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은 관료제도 아래에서 귀족세력의 지위와 관직의 세습이다. 본래 관료제도는 국왕의 정치적 위상과 통제력을 확보하는 제도인데, 이 시기 귀족연립체제에서는 관료제도 운영에서 임명권자로서 왕권이 상당 부분 제약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