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후기 정치세력의 형성 및 존재양상
2. 후기 정치세력의 형성 및 존재양상
고구려에서 6세기 중엽부터 정쟁이 잇따르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이 정치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체제 성립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앞 절에서 국내계 귀족세력이 정쟁의 한 축이었음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이들과 갈등한 또다른 한 축의 정치세력, 즉 신진귀족세력의 양상을 살펴보자. 여기서는 주로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과 추이에 초점을 맞추겠다.
그동안의 연구동향을 보면 6세기 이래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국내계 정치세력과 평양계 정치세력의 대립으로 파악한 바 있지만(임기환, 1992; 2004), 귀족연립체제의 성립 배경을 밝히고 있지는 못하다. 6세기 이후 고구려 정치사를 다루는 연구에서도 대체로 왕권 약화 현상만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앞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6세기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 후기 정국 운영의 커다란 변수가 되었음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먼저 이들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 배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4세기 이래 나부체제의 해체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왕권은 크게 신장되었다.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제가세력은 중앙귀족관료로 전화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部) 단위의 결속력이 약화되어 가면서, 귀족세력들은 각 가문별 귀족집단으로 분해되어 갔다. 〈모두루(牟頭婁)묘지명〉과 〈고자묘지명〉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가계(家系)의식은 이러한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모두루 가문와 고자 가문의 가계를 보면, 두 가문이 모두 선조를 주몽(朱蒙)과 연결시키고 있는 한편, 염모(冉牟)와 고밀(高密) 등 고국원왕대 모용씨와의 투쟁에서 활동한 인물을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중시조(中始祖)의 존재는 귀족세력이 가문 단위로 분해된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임기환, 1992; 서영대, 1995).
왕권은 관등·관직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도(王都)로 결집한 중앙귀족을 왕권 아래의 관료체제 내로 편제해갔다. 소수림왕대의 율령 반포와 태학 설립은 관료체제 운영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한 것이었다. 또 〈광개토왕비문〉의 ‘왕당(王幢)’, ‘관군(官軍)’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군사력도 왕권 아래로 흡수되었으며, 종묘·국사(國社)의 설립과 수묘제 정비를 통해 왕실 중심의 제의체계를 확립하였다. 아울러 이념적으로도 왕실의 신성화를 추구하여, 왕실의 시조인 주몽을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天帝之子 母河伯女郞)”로, 〈모두루묘지명〉에서는 “하백의 손자요, 일월의 아들(河伯之孫 日月之子)”이라고 신격화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왕의 초월적 권위가 확보되어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서영대, 1981).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수왕 15년의 평양 천도는 전제적 왕권의 성장과 정치세력 재편성의 일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부터 고구려 왕권은 평양 지역 경영을 통하여 이 지역을 왕권의 직접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임기환, 1995). 따라서 평양 천도는 왕권의 전제화에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국내 지역에 세력기반을 둔 귀족들에게 정치적으로 타격을 주게 되었다. 천도 이후에도 귀족들의 저항은 상당 기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평양 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수왕과 이에 반대하는 입장인 귀족들과의 갈등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장수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압박이 상당하였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지금 연(璉: 장수왕)의 죄로 나라가 어육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이 죽고 죽이는 것이 끝없어 죄악이 가득 쌓였다”고 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비록 고구려를 비난하는 백제 측 문서이기 때문에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수왕이 기존 정치세력 재편을 시도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천도를 계기로 장수왕이 왕권의 기반으로서 자신의 측근 세력 외에도 새로운 정치세력을 대거 기용하였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천도를 전후하여 등장한 이들 신진정치세력은 장수왕의 지속적인 뒷받침 속에서 국내시대 이래 전통적인 구귀족세력과 겨룰 만큼 성장해갔을 것이고, 따라서 이후 정세는 장수왕과 신진귀족세력이 손잡고 전통적인 국내계 귀족세력과 대립구도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평양 천도 이후 국내계 구귀족세력이 위축되면서 평양 지역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세력이 대거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이들 신진세력은 왕권의 뒷받침을 받으며 장수왕·문자왕대를 통해 구귀족세력과 대립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세력권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5세기 고분벽화의 연꽃 표현이 집안 계열과 평양 계열로 나누어진다는 견해가 주목된다(전호태, 1990). 이러한 차이는 양 지역의 문화적 전통 차이뿐만 아니라, 당대 문화를 향유한 귀족세력집단의 차별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평양 천도 이후에는 국내시대 이래의 구귀족세력과 구별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큰데, 현 사료상으로는 장수왕-양원왕대에서 이러한 신진정치세력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국내계 구귀족과 성격을 달리하는 몇몇 인물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 시기 신진귀족세력의 일면과 그 추이를 짐작해보도록 하겠다.
당시 새로 등장한 신진귀족으로는 낙랑군 이래 평양 일대에서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지방세력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제2상(第二相)을 지낸 왕산악(王山岳)이나 대승상(大丞相) 왕고덕(王高德) 등과 같은 인물을 들 수 있다. 왕산악은 『삼국사기』 권32 악지에 보이는데, 장수왕대의 인물로 추정되며 현학금(玄鶴琴)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왕고덕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의연(義淵)조에 보이는데, 양원왕·평원왕대에 북제(北齊)에 승려 의연을 파견하였던 인물이다. 이들은 낙랑군 이래의 지방세력인 왕씨계 인물로 추정된다(서영대, 1981). 낙랑·대방 지역에서 발견되는 인장(印章), 명문칠기(銘文漆器), 명문전(銘文塼), 봉니명(封泥銘) 등에 기록된 성씨를 검토해볼 때 왕씨가 이 지역의 가장 유력한 토착호족세력임을 알 수 있다(三上次男, 1964; 1966; 공석구, 1988).
왕산악은 중국 음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학금을 제작하였고, 왕고덕은 당시 중국 불교계 동향에 대한 이해에서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의 고승인 북제의 법상(法上)에게 의연을 파견하였다. 당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았던 낙랑·대방 지역 세력의 활동을 짐작케 하는 사례이다.
또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고구려계 인물을 찾아 보면 고씨(高氏), 이리씨(伊利氏), 왕씨(王氏)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고씨는 고구려 왕족의 성이며, 이리씨는 후기 집권가문인 연씨(淵氏)이다. 왕씨로는 상부(上部) 왕충마려(王蟲麻呂), 왕중문(王仲文), 왕주(王周) 등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 후기 귀족사회에서 고씨, 연씨와 더불어 왕씨 역시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신찬성씨록』 미정잡성조(未定雜姓條)에 “조명사(朝明史)는 고려대방국주(高麗帶方國主)이며 성씨가 한(韓)인 법사(法史)의 후예이다”란 기록이 보이는데, 이 역시 왕씨와 더불어 대방 지역의 유력한 토착호족세력인 한씨계 인물로 생각된다. 낙랑·대방 지역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으로 보아 한씨는 왕씨 다음으로 유력한 호족세력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三上次男, 1966; 공석구, 1988).
이러한 왕씨·한씨를 비롯한 낙랑·대방계 지방호족세력의 중앙정계 진출은 고구려의 평양 경영이 적극화되는 광개토왕대부터 시작되었겠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평양 천도 이후 장수왕의 적극적인 신진정치세력 등용과 때를 같이했을 것이다. 특히, 왕고덕·왕산악 등이 대승상, 제2상 등의 재상직을 역임한 것을 보면, 이 시기 평양 일대를 근거지로 한 정치세력은 중·후기 정계를 주도할 정도의 위상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계 정치세력의 등장과 관련하여 북중국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고구려로 들어온 중국계 망명인의 활동 또한 주목된다. 북중국에서 망명해온 대표적인 인물을 들어보면, 319년에 망명한 진(晉) 평주자사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 336년에 망명한 전연(前燕)의 동수(冬壽)와 곽충(郭充), 338년에 망명한 전연의 동이교위 봉추(封抽), 호군(護軍) 송황(宋晃), 거취령(居就令) 유홍(游泓), 345년에 망명한 선비 우문씨(宇文氏)의 국왕 일두귀(逸豆歸), 370년에 망명한 전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 등이다. 그리고 장수왕 24년(436년)에는 북연(北燕)의 화룡성으로 출정하여 북연 지배층을 대거 고구려로 이끌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들 일부도 앞서 망명객들과 유사한 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이들 북중국 출신 이주민들은 고구려 왕권의 지원 아래 낙랑·대방 지역에 세력기반을 마련하거나, 고구려의 평양 지역 지배와 관련하여 활동하였다. 안악3호분의 동수와 덕흥리고분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임기환, 2004). 이러한 낙랑·대방계 지방세력이나 중국계 망명·이주세력은 고구려의 평양 경영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고구려 왕권과 연결되어 있었고, 따라서 평양 천도 이후에는 보다 용이하게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장수왕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신진정치세력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송서』에 보이는 장수왕대 대중 외교사절인 장사(長史) 마루(馬婁), 동등(董騰)이나 풍홍(馮弘)을 살해한 장군 손수(孫漱) 등은 한화(漢化)된 성씨로 미루어 보아 중국계 망명인이나 낙랑계 호족세력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장수왕대의 막부(幕府) 관료조직을 구성하는 중심인물로서 대중국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장수왕대의 대중국 외교관계가 갖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들은 고구려 정계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세력으로서 중앙정계에서 정치적 진출을 꾀한 사례로는 앞서도 언급한 안장왕대 등장하는 한강 유역 지방세력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왕봉현 및 달을성현조에는 안장왕과 한씨 미녀와 관련된 일화가 전하는데, 이 기사는 통일신라 성덕왕대의 명문장가 김대문(金大問)이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역임하던 시절에 지은 『한산기(漢山記)』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봉현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과 그 주변 일대, 달을성현 또는 고봉현은 고양시 관산동과 고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왕봉현 즉 행주산성 앞의 한강을 삼국시대에는 ‘왕봉하(王逢河)’라고 불렀는데, 673년(문무왕 13년)에 신라와 당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즉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왕봉현, 고봉산 일대는 한강 하류의 요충지라는 점에서 백제에 대한 안장왕의 군사활동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즉 529년 10월에 안장왕은 친정으로 백제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고, 백제가 3만 명 군사를 동원한 오곡원(五谷原)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안장왕의 군사활동을 한강 유역의 ‘한씨 미녀와 안장왕 전승’과 연관지어 보면, 한강 유역 재지 세력이 안장왕에게 군사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정치적 성장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최일례, 2016; 정원주, 2013).
한편 평원왕대에 활동한 인물인 온달의 사례도 주목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은 설화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신진귀족의 한 예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겠지만, 적어도 당시에 이와 같은 설화가 형성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으로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 활발하였음은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온달전의 기록만으로는 온달의 출신이 평민인지(이기백·이기동, 1982), 아니면 하급 귀족신분(이기백, 1967)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온달이 대형(大兄) 관등을 받고 중앙귀족으로 진출하는 데에는 가문이나 신분적 배경이 아니라 ‘전택·노비·우마·기물’을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과 대외전쟁에서 세운 무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온달과 같은 유형의 신진정치세력들은 조상 대대로 확고한 경제기반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이 시기에 새로이 경제기반을 확보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고구려 후기에 형문사양지가(衡門斯養之家)의 자제들이 독서와 습사(習射)를 연마한 경당(扃堂)에는 상층 부민의 자제도 포함되었고(이정빈, 2012), 이들은 경당에서 쌓은 무예와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정치적 진출을 적극화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영양왕대 이후 신라의 북진, 돌궐(突厥)의 위협, 수(隋)의 출현 등 대외적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군사체제가 확대되고, 이 과정에서 무력기반을 제공하고 대외전쟁에서 공을 세우면서 이들의 정치적 진출이 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당시 어느 정도의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는지는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온달은 특수한 예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대형에 오르고 왕의 사위가 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온달과 같은 신진귀족의 정치적 진출도 일찍부터 시작되어 평원왕대에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양왕대 수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의 총지휘관으로 활약한 을지문덕(乙支文德)도 『삼국사기』에서 그 세계(世係)를 알 수 없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하는 신진귀족에 속하는 세력이 아닌가 추측된다. 을지문덕의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우중문(宇仲文)에게 보낸 오언시에서 엿보이는 그의 한문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고려하면, 앞서 살펴본 왕산악·왕고덕이 중국 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점과 관련시켜 볼 때, 혹 이들 세력과 그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임기환, 1992; 2004).
다음으로 현존하는 사료상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인 연개소문 가문도 신진귀족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자 가문와 연개소문 가문을 비교해보자. 두 가문은 양원왕·평원왕 이래 막리지·위두대형(位頭大兄) 등 최고위급 관등을 누대에 걸쳐 역임한 명문가이나 출신기반은 달랐다.
〈고자묘지명〉에 의하면, 고자 가문의 시조는 주몽과 더불어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20대조 고밀은 모용씨와의 전쟁에서 무공을 세워 식읍 3,000호를 받은 인물이다. 이 모용씨와의 전쟁은 고국원왕 12년 전연의 침략으로 짐작되는바, 고밀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고국원왕대일 것이다. 이러한 고자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모두루 가문의 내력과 유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모두루묘지명〉에 의하면, 모두루의 선조 역시 주몽과 더불어 남하한 고구려 건국주체세력이며, 조(祖) 염모는 고국원왕 때 선비 모용씨와의 투쟁에서 큰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武田幸男, 1989). 〈모두루묘지명〉과 〈고자묘지명〉은 작성 시기상 큰 차이가 있고, 또 묘지명의 방식이 전혀 다른 배경에서 기술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이 지닌 가계의식이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첫째, 두 가문이 모두 선조를 주몽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주몽은 본래 계루부 왕실의 시조신에 불과하였으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동명(東明) 전승과 결합되어 전체 고구려족의 시조신으로, 나아가 5세기에는 초종족적인 고구려 국가의 신으로 확대되어 갔다(노태돈, 1988). 특히, 이 과정에서 동일한 동명 전승을 가지고 있는 5부 여러 집단의 개별적인 시조 전승은 부정되고, 동명 전승으로 확대된 주몽 전승의 체계 속에 흡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결과 고자 가문과 모두루 가문의 예에서 보듯이 각 귀족가문의 시조가 주몽과 관련을 맺는 형태가 되었다.
둘째, 두 가문 모두 선비 모용씨와의 투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가문을 일으킨 중시조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고구려 국가 발전 과정에서 모용씨 연(燕)과의 투쟁은 매우 중요한 전기를 이루고 있다.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한 고구려가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할 때 이를 가로막은 세력이 전연이었으며, 고국원왕대에는 전연과의 전쟁 과정에서 수도 국내성이 함락당하는 패배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전연과의 전쟁은 고구려 지배세력으로서 가장 힘든 역사적 경험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그만큼 전연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은 가계에서도 두드러지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전연과의 전쟁에서의 활동과 성과에 따라 각 가문의 정치적 위상이 보장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각 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그만큼 뚜렷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자 가문과 모두루 가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성격은 국내성시기 이래 전통적인 구귀족세력의 가계의식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 가문은 고자 가문과 일정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천남생묘지명〉을 보면 연개소문 가문은 시조를 주몽과 연결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독자적인 시조 출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또 전연과의 전쟁에서 활동한 인물도 보이지 않으며, 단지 증조(曾祖) 이래의 가계와 행적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로 보아 연개소문 가문은 국내성시기의 경험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연개소문 가문을 평양 천도 이후에 등장한 신진귀족세력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특히, 양원왕·평원왕 이후 막리지 등 최고위 관을 역임하는 것을 보면 연개소문 가문의 중앙정계 진출은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까지도 소급해볼 수 있고, 그렇다면 본래 평안·황해 지역 일대 지방호족세력으로서의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와 같이 볼 때 고자 가문과 연개소문 가문은 각각 6~7세기 국내계 귀족세력과 평양 천도 이후 등장한 평양계 귀족세력을 상징하는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임기환, 1992; 2004). 물론 연개소문 가문의 출신을 동부여 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노태돈, 1999), 이를 따르더라도 대략 광개토왕 이후에 고구려 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통적인 구귀족세력과는 차이가 있다.
평양 천도와 신진귀족세력의 등장은 귀족관료 전체의 존재방식에도 일정한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중앙집권력의 증대 과정에서 보다 확대되고 세분화된 관료기구와 관등·관직제를 운영하는 기반이 지배귀족층의 양적 확대와 맞물리게 되었다. 왕권의 후원 아래 등장한 신진귀족들이 왕권 중심의 관료체제를 뒷받침한 것은 물론, 본래의 세력기반인 국내 지역에서 유리된 국내계 귀족들도 평양 천도 후 새로운 자기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관료체제 내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야 했다. 장수왕은 이러한 관료체제 운영을 바탕으로 전제적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권의 위상은 〈모두루묘지명〉에 왕과 귀족의 관계를 성왕(聖王)·태왕(太王)과 노객(奴客)의 관계로 표현한 데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장수왕대의 정치세력 재편 과정은 귀족관료 내부에 갈등구조를 잉태케 하는 측면도 있었다. 국내계 구귀족세력과 새로 성장하는 신진귀족의 대립구도를 조성할 가능성도 있었고, 다양한 기반을 갖는 귀족세력의 혼재, 귀족가문의 분화 등은 권력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의 경쟁을 초래할 수 있었다. 사료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지만, 장수왕의 왕권강화책은 근본적인 집권체제의 정비를 통한 왕권 기반의 강화 방향보다는 신진귀족의 등용과 이를 통한 구귀족세력에 대한 견제라는 측면에 주력한 듯하다. 따라서 왕권이 귀족세력을 적절히 통제·조절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전제적 지위를 잃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장왕·안원왕대에 걸친 거듭된 왕의 시해와 왕위계승전을 겪는 과정에서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왕권은 약화되었다. 다만 이때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왕위 계승을 통해 전개되는 것은 곧 이제까지 왕권 중심의 권력 행사가 이루어져 왔던 결과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던 왕권이 6세기에 들어 약화되는 또 다른 배경으로는 대외정복활동의 침체를 들 수 있다. 사실 광개토왕·장수왕대에 전제적 왕권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두 왕대에 활발하게 전개된 대외정복활동이 있다.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은 당대 고구려인이 그 시호에 ‘광개토경(廣開土境)’을 붙여 칭송할 정도였다. 장수왕 역시 요동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남진책을 추진함으로써 백제를 공파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대외정복활동에서의 성공은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외군사활동은 고구려 사회 내 긴장감을 높여 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을 결속시켰을 것이며, 군사력도 왕권 아래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에서 왕이 직접 전쟁에 나서는 친정(親征)이 주목된다.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총 7회의 외정에서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주도한 경우가 4회나 된다. 또 장수왕도 475년 백제 한성 공격 시에 직접 3만 군을 지휘하였다. 이러한 친정의 성공을 통하여 왕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으며,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듯 관념적으로도 고구려 왕은 위엄을 사방에 떨치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주인공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또 전쟁의 전리품을 왕권 강화의 기반으로 삼거나, 성과물의 분배를 통하여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한편, 문자왕대까지도 백제나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계속되었으나, 백제가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나제동맹을 맺으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안장왕대에 들어서는 그나마 대외전쟁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자왕대에는 백제와의 전쟁이 7회, 신라와의 전쟁이 3회임에 반하여, 안장왕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2회의 전쟁 기사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 대외정복활동의 침체가 왕권의 약화를 초래한 요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또 신진귀족의 정치적 진출에 따라 지배층의 저변이 확대된 상황에서 외정에서의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지배층 내부의 권력 분배를 둘러싼 귀족사회의 분열과 동요가 나타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정치 변화가 요인으로 작용하여 안장왕-양원왕대에 거듭된 왕위계승전을 겪으면서 왕권이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이때 각 가문 단위로 결집한 유력 귀족집단들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6세기 이후 귀족세력의 분열과 대립 과정을 국내계 귀족세력과 신진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평양계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구조로 이해하는 견해(임기환, 1992; 2004)가 타당성이 있다면, 지역적 기반을 달리하는 귀족세력의 존재방식과 관련하여 3경(京)제도 눈길을 끈다. 평양 천도 이전 오랫동안 도성이었던 국내성이 평양도성과 더불어 귀족세력의 거주지로서 부도(副都)로 기능하고 있었음은 당연하지만, 새롭게 한성(漢城)이 귀족세력의 거주지로서 부도로 등장한 점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과 관련 있을 것이다. 한성의 위치는 현 황해도 재령 일대인데, 부도로서 한성의 설치는 이 지역 일대에 대한 지방 통치의 목적과 더불어 이 일대에 퍼져 있는 기존 정치세력을 효율적으로 편제하고, 지배층의 저변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임기환, 2007).
한성이 부도가 되는 시기와 관련해서 『주서』에서 3경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성 자체가 설치된 시점은 그 이전이겠지만, 부도로서 위상을 갖는 시기는 안장왕-양원왕대의 정치적 대립상을 고려하면 6세기 초 안장왕대일 개연성이 높다. 즉 중앙정계에서 평양계 귀족세력과 국내계 귀족세력의 갈등은 국내성과 한성이라는 배후의 정치적 기반을 배경으로 더욱 심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는 앞서 언급한 안장왕이 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또 한씨 미녀와의 로맨스를 통해 한강 하류 유역으로 순수한 흔적을 보이는 기사도 참고할 수 있다. 즉 안장왕대 한강 유역 일대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 배후기지로서 한성을 중시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동시에 왕권과 결합하여 중앙정계에 등장하려는 이 지역 지방세력의 움직임도 한성이 부도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후 정국의 운영 과정에서 한성은 단지 국왕권의 기반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배후기지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이 3경제의 시행은 수도인 평양도성을 제외하고 부도인 국내성과 한성이 지역적 기반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을 편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평양도성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는 하지만, 중앙정치세력의 기반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 완결성에 한계가 있다.
귀족연립정권은 안장왕 이후 정변이나, 안원왕 말년의 왕위계승전, 양원왕대 환도성 반란 등 정국의 불안정을 불러왔으나, 이후 연개소문 정변이 있기까지 80여 년 동안, 그 이전과 같은 치열한 정쟁이 없이 일정하게 안정된 정국이 유지된 점은 큰 관심을 끈다. 여기에는 물론 신라의 성장, 돌궐의 동쪽 진출, 수·당제국의 출현이라는 대외적 위기상황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조건만으로 장기간 정국 안정이 유지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안정적인 귀족연립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운영체제의 변화가 예상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절을 달리하여 살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