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귀족연립체제의 정치 운영방식
3. 귀족연립체제의 정치 운영방식
지금까지 연구동향을 보면, 6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왕권 약화와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현상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이를 귀족연립정권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타당한지를 중점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 정치 운영에 대해서는 충분히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관련 자료가 소략한 점이 주된 요인이었다. 다행히 최근에 발견되고 있는 고구려 유민 묘지명에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있어서 이를 포함하여 귀족연립체제의 정치 운영방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료상으로 나타나는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현상을 정리해보자. 첫째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인 대대로를 놓고 귀족세력 사이에 선임이 이루어지고 때로는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이다. 『주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상쟁을 벌여 이긴 자가 스스로 취임하는데, 왕이 임명하지 못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 고려전에 의하면, “대대로는 … 임기는 3년이며, 그 직을 잘 수행한 자(稱職者)가 있으면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데, 교체하는 날에 혹 승복하지 않으면 서로 군사를 동원하여 정쟁을 벌여 이긴 자가 취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두 기록은 그 내용으로 보아 『주서』 기사 내용이 『구당서』 기사 내용보다 이른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구당서』 기사의 ‘임기는 3년이며, 그 직을 잘 수행한 자가 있으면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상황은 귀족연립정권 초기와는 달리 귀족층 내에서 대대로를 선임하는 일이 관례화되어 그에 관한 준칙이 마련되었고, 현실적으로도 주도적인 귀족세력이 형성되어 상당히 안정된 기반을 확보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노태돈, 1999). 물론 이 기사대로 대대로 선임이 반드시 무력 대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으며, 보통은 귀족 간의 세력 조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화적인 교체이든 무력 충돌이든 대대로 선임 과정에 국왕권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국의 주도권이 귀족세력에게 있다고 파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가 대대로로 대표되는 귀족세력과 국왕권의 관계가 어떠했냐를 보여주는 기사는 아니다. 따라서 양자의 역관계에 따라 시기별로 정국 운영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둘째, 집권적 관직으로서 막리지의 등장이다. 막리지는 연개소문 집권 당시의 강렬한 이미지로 인하여 그 실체와 정치적 위상에 관해 논란이 있어 왔다. 문헌상으로 막리지는 연개소문의 집권을 계기로 중국 사서에 갑자기 돌출하였으며, 따라서 그동안의 막리지에 대한 이해는 주로 연개소문 집권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다수의 묘지명 자료를 통해 볼 때 막리지의 출현이 대체로 고구려 후기 정치 변화와 시기를 같이하고, 또 집권적 성격을 갖는 관(官)임을 고려할 때, 막리지의 성격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당시의 전반적인 정치운영체제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연개소문 가문과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 혼란이 있는 막리지와 대대로의 관계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근자에 발견된 고구려 유민 묘지명에 보이는 대로(對盧)라는 관의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
셋째,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는 대대로, 태대형(太大兄), 울절(鬱折), 태대사자(太大使者),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位頭大兄)이란 상위 5개 관이 기밀을 관장하고 정사를 도모하며, 군사를 징발하고 사람을 뽑아 관작을 수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이들 5개 관등의 인사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국가의 중요 정무를 결정한다는 이른바 ‘귀족회의체’로 이해함이 보통이며(노태돈, 1999), 이 회의체를 ‘오관회의’라고 규정하기도 한다(이문기, 2003). 물론 대대로의 선임 및 3년 임기제를 고려하면 귀족세력으로 구성되는 합의기구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고, 『고려기』의 기사 내용을 귀족회의체를 뜻하는 것으로 연결지어 볼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지만, 이 기사에서 직접적으로 귀족회의체를 거론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 관등체계에서 상위 5등급인 위두대형 이상 관등이 중앙정부의 장관직 등 중요 관직을 차지하여 권력 행사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기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상 세 측면을 고려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의 운영체제를 살피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임기환은 귀족연립정권의 안정적인 정치운영체제를 대대로-막리지체제로 파악하였는데(임기환, 1992), 이 견해는 막리지를 2품인 태대형의 이칭(異稱)으로 보면서 대대로와 막리지를 서로 오르내리는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관등체계의 위계상 성립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았다(이문기, 2000). 또한, 임기환의 견해는 5관회의라는 귀족회의체를 인정하지 않고 이른바 대대로-막리지 회의체만 전제하고 있다는 점, 귀족세력과 왕권의 관계를 밝히지 못했다는 점 등 정치운영체제 전반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 뒤 노태돈이 자설인 ‘귀족연립정권의 존재와 그 운영방식’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증명을 시도하였다. 노태돈은 자율성을 가진 대대로가 중심이 된 귀족회의 중심의 권력 운영을 귀족연립정권의 특징으로 보면서, 일급 귀족인 상위 5관등 소지자의 회의체를 주목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귀족연립정권에서도 고구려 왕실이 유지되었던 배경으로 왕실의 신성성, 고씨 왕족의 유대감과 정치적 비중, 왕실을 압도할 정도의 권력을 갖는 귀족세력의 부재, 왕이 갖는 권위가 귀족연립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귀족연립정권을 권력 운영의 파행적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 운영의 안정성을 갖고 있었음을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노태돈, 1999).
귀족연립체제의 정치 운영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대로의 선임이라는 방식과 더불어 권력을 분점하면서 대대로의 취임에 도전하는 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후보로는 관의 서열로 볼 때 제2위 태대형이 유력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1992). 그 근거로 이 시기의 관등은 각 귀족들의 세력기반 비중에 따라 획득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고위 관등에 오른 자는 그만큼 큰 세력기반을 가졌을 것이며, 관등 획득이 각 가문의 세력기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부직(父職) 세습’이라는 연개소문 가문의 사례 등을 들고 있다. 즉 제1위 대대로에 도전하는 관이 제2위 태대형이라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태대형이 막리지와 동일한 관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대대로와 막리지는 정국 운영의 중심체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귀족회의체를 구성하며, 대대로는 이 귀족회의체의 의장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본다.
귀족회의체의 참여층으로서, 또 대대로의 선임에 도전하는 관으로서 ‘대인(大人)’을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윤성환, 2015). 대인과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 연개소문전에서 연개소문의 아버지를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라고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연개소문이 승습하는 부직을 ‘대인’으로 보고 이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인을 부(部)의 대표자로 보거나(정원주, 2011), 부를 관장하는 특정 관직으로서 욕살에 비정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또 연개소문과 그의 아버지의 사례를 통해, 대인이 공식적인 지위이며, 부병(部兵)을 동원하거나 천리장성 감역의 임무를 받을 수 있고, 또한 부직의 승습 대상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대인을 관등으로서의 대대로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즉 대대로를 관등과 관직으로 나누어보고, 관직으로서의 대대로는 1인이지만, 관등으로서의 대대로는 복수라고 보고 있으며, 이 복수의 대인과 대대로로 구성된 귀족회의체로서 ‘대인회의’를 상정하고 있다(윤성환, 2015).
이와 같이 귀족연립체제의 주요한 운영기구로서 귀족회의체의 존재를 대부분 상정하고 있지만, 그 귀족회의체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아직 어느 하나로 의견이 수렴되고 있지 못하다. 이는 고구려 후기 정치운영체제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변화 중 하나인 막리지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막리지의 정치적 위상에 대해서는 연개소문 정변 당시의 집권적 성격으로 인하여 그 실체와 정치적 위상에 관하여 견해가 다양하다. 최고위직인 대대로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이홍직, 1956, 1971 재수록; 請田正幸, 1979), 제2위인 태대형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78; 임기환, 1992), 최고의 집권적 관직으로 보는 견해(이승혁, 1985), 관등제 운영에서 중리제 관등의 하나인 중리태대형(中裏太大兄)으로 보는 견해(이문기, 2000) 등이 있다.
현 사료상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막리지는 〈고자묘지명〉에 보이는 고자의 증조 고식(高式)과 〈천남생묘지명〉에 보이는 연개소문의 조부 자유(子遊)이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략 평원왕대로 추정된다. 이들 묘지명에서는 막리지의 위상을 “국정을 다스렸다(知國政)”, “국권을 오로지 장악하였다(咸專國柄)”, “나랏일을 전제하였다(專制國事)”라고 기술하여 정치적으로 강력한 실권을 장악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구당서』 고려전에는 막리지를 당의 병부상서겸중서령(兵部尙書兼中書令)에 비교하고 있다. 중서령에 비견함은 최고위 관직임을 뜻하며, 병부상서에 비견함은 막리지의 주요 직능 중에 군사권의 장악이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 〈천남생묘지명〉 및 〈천남산(泉男産)묘지명〉에 연개소문의 조부가 막리지로서 ‘양야양궁(良冶良弓)’하였다는 기술은 군권을 장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며,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막리지겸삼국대장군(莫離支兼三軍大將軍)을, 남건(男建)이 막리지겸지내외병마사(莫離支兼知內外兵馬使)를 역임하였다는 점도 막리지의 권한 중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막리지의 정치적 위상을 뒷받침하는 기능이 군사권의 장악이라고 본다면, 대대로 취임 시에 무력 충돌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군사권을 장악한 막리지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막리지를 대대로의 선임에 도전하는 유력한 후보로 볼 수 있다는 견해(임기환, 1992)는 이러한 근거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 집권과 관련하여 기술된 막리지의 위상과 성격이 과연 막리지가 등장하는 평원왕대에도 비슷했을까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고자의 증조 및 연개소문의 조, 부가 역임한 막리지에 대한 기술에 후대의 인식이 소급 투영되거나 과장되게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 기사들을 제한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이문기, 2000).
그런 점에서 막리지를 중리태대형에 비정하고, 이 중리제의 운영이 귀족연립정권의 정치 운영을 견제, 극복하려는 국왕 측의 제도적 장치에서 비롯한다고 파악하는 견해가 주목된다. 앞서 1절에서도 검토한 바와 같이, 왕위계승전이 치열했던 양원왕 초기를 지나 평원왕, 영양왕대에 왕권의 위상을 확보하는 장치로서 국왕의 근시조직인 중리직과 관등을 설치하고 운영했고, 이러한 중리제를 기반으로 구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신진정치세력의 진출을 지원하였다고 파악하였다(이문기, 2000). 다만 고구려 중기에 중앙집권적 관료조직과 관등제를 정비하면서 국왕과의 관계에서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형계(兄系) 관등과 사자계(使者系) 관등의 분화가 이루어져 구성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형계 관등에서 국왕의 근시조직으로서 중리제가 성립하였다고 한다면 그 배경을 설명해야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일단 막리지와 대대로가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관이라는 점은 취임 방법이 다르다는 점에서도 방증될 수 있다. 즉 대대로는 3년을 임기로 귀족들이 상쟁하여 취임한 것에 반하여, 연개소문가의 예를 보면 막리지는 세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막리지는 대대로일 수 없다. 또 〈천남생묘지명〉에 태대대로(太大對盧)와 막리지(莫離支)·태막리지(太莫離支)를 구별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보면 대대로와 막리지는 결코 같은 관일 수 없다. 막리지의 성격을 태대형과 동일한 관이라고 보든지 혹은 중리태대형으로 보든지 간에 막리지의 성격 자체도 고구려 후기 정치 운영 과정에서 그 위상과 기능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한편, 귀족회의 구성원으로서 대로의 존재에 주목하고, 대로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 대대로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후기 관등제에서 최고위 관등인 대대로를 제외하면, 대로가 관등으로 사용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몇몇 단편적인 자료에 보이는 후기의 대로를 관직으로 보기도 하고(임기환, 2004; 윤성환, 2015), 귀족회의의 구성원으로 보기도 한다(윤성룡, 1997; 노태돈, 1999; 정원주, 2013). 최근에 〈고을덕(高乙德)묘지명〉에서 고을덕의 조부인 고잠(高岑)이 “교(敎)를 받들어 대로관(對盧官)을 받고, 본래대로 상사(垧事)를 맡고 평대(評臺)의 직을 담당했다”라는 기술에 근거하여, 고잠은 대로관을 받고, 평대라는 합좌기구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해석하여, 대로를 최고 귀족회의 구성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여호규, 2016). 그리고 〈천남산묘지명〉의 “조부와 부친이 대로의 대명(大名)을 전했다”라는 구절은, 그의 가문이 대대로 최고위 귀족회의의 구성원 자격을 승습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이해하였다. 즉 귀족연립체제의 핵심적인 기능을 갖는 귀족회의는 곧 대로로 구성된 대로회의이고, 대대로는 이러한 대로회의를 주재하던 최고 실권자로 파악하였다.
최고 귀족회의가 어떻게 구성되었든 간에 그 의장인 대대로가 임기 3년이며, 선임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대대로 선임 과정 자체가 지속적인 권력 독점이 초래할 수 있는 치열한 정쟁을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다. 물론 세력의 우세 여하에 따라 계속 역임할 수도 있고, 세력관계 조정에 실패할 경우에는 군사를 동원한 정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기적인 대대로 선임 과정에서 각 귀족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조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과거 양원왕 즉위 과정에서 나타난 왕위계승전과 같은 극한적인 정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임기환, 1992; 2004).
이러한 대대로 선임 장치가 평원왕대 이후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기까지 80여 년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국을 유지했던 배경이었다고 이해된다. 여기에 평원왕 이후 왕권이 보다 안정된 기반을 재확립하려고 시도하면서, 왕권 및 각 귀족집단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보다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왕권의 영역과 귀족회의의 영역이 구분되면서 양자의 역관계에서도 일정하게 균형이 이루어지는 정치 운영이 모색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체제의 정치 운영은 현전하는 사료상으로는 대대로, 막리지, 대인, 대로 등의 성격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 관 역시 후기의 권력구조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대대로 선임을 통한 귀족연립체제의 운영도 점차 그 기능에 한계가 나타났다. 국왕권을 견제하면서 귀족연립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제도의 하나가 가문 단위의 관등·관직 세습이었다고 이해된다. 즉 관료조직의 운영에서 국왕의 인사권이 상당 부분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직의 승습이 어느 범위에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특정 가문이 획득한 최고 관등이 그 가문 내에서 계속 세습되었던 사례는 몇몇 묘지명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귀족연립체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리라 예상된다. 예컨대 여러 대에 걸쳐 막리지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권력을 집중시켜 갔던 연개소문 가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대로의 선임을 통해 세력 균형을 도모하는 정치 운영구조에서 연개소문 가문의 독주 가능성이 커졌다. 귀족 간의 합의를 통한 귀족연립체제에서 한 가문의 독주는 귀족들 전체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되었다(전미희, 1994). 그래서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대대로 태조(太祚)의 사망을 계기로 귀족들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부직을 계승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영류왕의 입장에서도 연개소문 가문의 독주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개소문의 정변을 귀족연립체제에서 대대로가 누리던 권한을 유지하려는 연개소문과 왕권을 확립하려는 영류왕과의 대결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기흥, 1992). 귀족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진 왕권의 위상을 통해 적절히 조정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가능성이 있지만, 한 가문이 다른 귀족들을 압도할 경우 오히려 왕권의 지위마저 불안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류왕과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 가문을 견제하려는 데에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자신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연개소문의 반격을 받아 영류왕과 많은 귀족들이 살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 집권 이후의 정치운영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논란이 있다. 귀족연립체제가 유지된 것으로 보는 견해, 보장왕의 왕권과 연개소문의 권력이 양분된 이원집정제로 보는 견해, 연개소문의 독재적 권력이 행사되는 체제로 보는 견해 등등이다. 어느 견해에 따르든 연개소문 집권기의 권력 운영이 그 이전 귀족연립체제 운영과 상당한 거리가 있음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