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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고구려의 한강 유역 일대 지배방식과 관련된 논점

1. 고구려의 한강 유역 일대 지배방식과 관련된 논점

1) 문제의 소재
『삼국사기』 지리지 권35와 권37에는, 신라의 9주 중에서 각각 한주(漢州, 漢山州), 삭주(朔州, 牛首州), 명주(溟洲, 何瑟羅州)가 ‘옛날에 고구려의 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소위 ‘고구려고지(高句麗故地)’라고 부른다. 고구려고지의 소속 현을 오늘날 지명에 대비하면, 고구려는 한때 강원도와 경기도 전역을 아우르고 충남 천안에서 충북 진천-음성-괴산-충주-단양 지역과 소백산맥 이남의 경북 영주-봉화-안동 동북부-울진-청송-영덕-포항까지 영역 범위에 포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남방으로 이러한 양상의 광범위한 영역 진출을 도모할 수 있었던 시기는 광개토왕대와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한 475년 9월 이후가 될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긴 후 한 달 만에 수도를 웅진(熊津: 충남 공주)으로 천도하였다. 한편 『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命紀) 12년(551년)조에는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이 몸소 군사와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任那)이다) 가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성 땅을 얻었다.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 남평양, 서울시 광진구 일대)을 토벌했는데, 무릇 6군(郡)의 땅이다. 마침내 옛 땅을 회복하였다”고 되어 있다.
475~551년 고구려가 한강 유역 전체를 안정적으로 차지했다는 현재의 ‘통설’은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고지’와 장수왕의 한성 공격 및 그에 따른 백제의 웅진 천도가 함께 고려되어 도출되었다. 여기에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서 551년에 백제가 마침내 옛 땅을 회복했다는 기록까지 조합하였다.
이와 같은 문헌적 정황에 더해, 1990년대 이후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고구려 유물·유적이 지속적으로 발굴되면서 논리를 보완해갔다. 곧 안성 도기동산성과 세종(옛 청원) 남성골(南城谷), 대전 월평동유적에서는 고구려의 목책성(木柵城)이 발굴되었다. 또한 이들 산성과 세종 나성유적에서는 각종 토기와 철제무기 등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 경기도 남부의 성남 판교, 용인 보정, 화성 청계 등에서 고구려 돌방무덤(石室墳)이 발굴되었다. 일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무덤 천장의 구조가 모줄임식(末角藻井)으로 줄어드는 고구려 무덤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무덤 안에서는 소량의 고구려 토기도 출토되었다. 이들 지역의 유물과 유적의 연대는 5세기 후반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충북 충주에서도 1979년 〈중원고구려비〉주 001
각주 001)
〈중원고구려비〉는 문화재청에 의해 2010년 11월 1일자로 〈충주고구려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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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발견된 이후 두정리고분군과 탑평리유적 등에서 주거지와 각종 고구려 유물·유적의 발굴성과가 쌓이고 있다. 특히 두정리고분군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 최대 규모인 6기여서 고구려 남방 진출의 거점지로서 이 지역의 위상을 오롯이 보여준다. 충북 진천의 대모산성과 회죽리에서도 고구려 토기와 금제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심광주, 2001; 안신원, 2010; 양시은, 2010; 2016; 최종택, 2011; 2016; 백종오, 2014; 김진영, 2017; 윤성호, 2019a).
이와 같이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일대에서 고구려 고고자료 성과가 누적됨에 따라 통설은 고구려가 475년 이후 한강 유역을 넘어 금강 유역까지 진출해 백제의 수도를 압박했다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고지’가 고고자료를 통해 시간성이 부여되면서 실증되어가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의 내용과 문면을 존중하면 통설과 다른 입장이 도출될 여지가 생긴다. 우선 475년 9월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하고 개로왕을 아차산 아래로 데려가 살해한 후 포로 8,000명을 데리고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주력군의 귀환일 뿐 고구려군 일부는 여전히 한성에 주둔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최종택, 2004; 2007; 2013). 그러나 기록상에는 문주가 신라에 가서 구원군 1만 명과 함께 한성에 돌아온 후 고구려군과 별다른 교전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문주는 폐허가 된 한성에서 우선 즉위식을 거행하였고, 다음 달에서야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군이 한성에 주둔해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장수왕과 고구려군의 행보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가 절치부심 끝에 힘들게 차지한 한성을 쉽게 방기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개로왕을 살해하고 한성을 파괴함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는 북방의 강자 북위(北魏)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장수왕은 신라로 구원병을 얻으러 간 문주의 동향도 신경 쓰였을 것이 다. 고구려군으로서는 여러모로 속전속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주거지와 도로유구, 목곽집수지 및 토기 등 다량의 고구려 유물을 감안하면, 고구려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남방 진출을 도모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몽촌토성 출토 고고자료의 연대 폭은 5세기 후반으로 비교적 길다. 꼭 475년 직후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단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본기의 문면을 존중한다면, 고구려가 475년 9월 이후 일시적으로 한강 이북으로 물러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장창은, 2010; 2014).
백제본기에서 통설과 배치되는 기록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475년 이후에도 백제 수도를 지칭하는 ‘한성(漢城)’과 수도 권역임이 분명한 ‘한산성(漢山城)’이 백제의 통치범위임을 시사해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곧 483년 봄 동성왕(479~501년)은 한산성에 가서 10일 동안 사냥을 하고 군사와 백성을 위로하였다. 무령왕(501~523년)은 507년에 한성을 쳐들어온 고구려와 말갈군을 횡악(橫岳: 북한산) 아래에서 격퇴하였다. 그리고 523년에는 한성에 행차하였다. 무령왕은 그곳에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을 내려 한북(漢北) 주·군의 백성 중 15세 이상을 징발해 쌍현성을 축조한 후 한 달 만에 한성으로부터 돌아왔다. 한편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말갈이 무령왕대에 지속적으로 공격한 백제의 거점성이 고목성(高木城)이었다. 고목성의 위치는 경기도 연천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천관우, 1976; 1989). 고목성의 위치 비정에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는 데 반해, 503년 무령왕이 달솔 우영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공격하게 한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은 황해도 신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 성왕과 교전한 오곡원(五谷原) 역시 황해도 서흥 지역임이 명확하다.
요컨대 475~551년 사이 고구려와 백제가 영역 쟁탈전을 벌였던 지역은 시대에 따른 변화 폭을 감안해도 한강 이북을 넘어 황해도 지방까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백제본기에 전하는 기록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475~551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공고하게 차지했다는 통설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결국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그대로 믿을 것인지 아니면 비판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이 시기 한강 유역 영유권 주체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셈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대한 신빙성 논의에서 시작된 475~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 논쟁은 학계의 첨예한 쟁점 사안으로 부각되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백제본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통설은 475~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해 ‘고구려 영유설’로 보는 입장이고, 백제본기를 토대로 신설을 제기하는 입장은 ‘백제 영유설’을 지지하고 있다.
 
2) 통설로 자리매김한 고구려 영유설
475~551년 고구려가 지속적이면서 안정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통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이 기간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이들의 논리는 크게 나누어 보면, 기록상 오류로 보는 ‘두찬설’, 백제 지배층의 의도적인 ‘조작설’, 당대에 한성시대의 지명을 웅진시대로 옮겨왔다는 ‘지명이동설’, 후대에 사료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역사가에 의해 연대가 잘못 정리된 ‘기년조정설’로 나눌 수 있다.
두찬설은 이병도가 제기한 후 노태돈이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이들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격 및 백제의 웅진 천도와 『일본서기』 흠명기에 기록된 ‘성왕의 551년 한강 유역 회복’을 이 시기 한강 유역 영유권의 시작과 끝으로 파악하였다. 노태돈은 성왕이 고구려에게 빼앗은 한성과 평양(남평양)이 각각 한강 이남과 이북에 해당하기 때문에, 백제가 5세기 말~6세기 전반에 한성 일대를 다시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노태돈은 백제본기의 기록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이후 기년조정설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이병도, 1959; 노태돈, 2005).
조작설은 백제가 의도적으로 웅진시대의 한강 유역 상실을 은폐시켰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곧 백제 지배층이 웅진시대 왕실의 실추된 권위 회복을 위해 웅진시대 지명에 한성시대의 지명을 대입시키는 조작을 했다는 것이다(이도학, 1984; 2009).
지명이동설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지명을 함께 옮겨왔다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 언급하였다(今西龍, 1934). 한국 연구자로는 이기백이 한성에 한정해 지명 이동을 주장하였다. 곧 충남 천안 직산에 소재한 위례성을 웅진시대에 옮겨진 한성으로 이해하였다(이기백, 1978). 노중국은 그 범위를 확장해 웅진시대 지명과 한성시대 지명이 다수 일치하는 현상을 모두 지명 이동의 결과로 파악하였다. 여기에 2000년대 이후 누적되고 있는 남한 지역의 고구려 고고자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통설의 논리와 궤를 같이했다(노중국, 2006; 2012).
지명이동설의 관점이지만 이를 동성왕대로 국한해서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김현숙은 백제의 수도가 동성왕대에는 ‘한산성’으로, 무령왕대에는 ‘한성’으로 다르게 나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동성왕대의 ‘한산’은 천안 직산 지역으로, 무령왕대의 ‘한성’은 한강 유역 백제의 도읍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양기석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동성왕대의 한산성을 차령산맥 이남 고구려와의 접경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이들은 지명이동설을 주장하면서도 백제가 무령왕대 이후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입장이어서 통설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김현숙, 2003; 양기석, 2008).
기년조정설은 백제본기가 후대에 정리되는 과정에서 역사가의 무지와 오해로 인해 다른 시기의 사건이 잘못 삽입되어 편찬되었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강종훈은 백제가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4세기 후반의 사실이 5세기 말~6세기 전반으로 잘못 실린 것으로 파악하였다. 김영심도 백제가 가지고 있는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의식을 국권을 회복한 무령왕대로 가져다 붙인 결과로 보았다. 임기환과 여호규도 4세기대의 지명과 전투양상이 475~551년과 비슷하다면서, 한성시대의 사실이 기년 인하되어 웅진시대로 분산 기술되면서 결과적으로 중복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였다(강종훈, 2006; 2014; 김영심, 2003; 임기환, 2007; 여호규, 2013).
고고학적 관점에서 통설의 논리를 보완한 연구도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강 유역과 그 이남인 경기도·충청도 일대에서 고구려 유물·유적의 발굴성과가 지속적으로 쌓였다. 먼저 한성시대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건물터와 각종 토기가 발굴되었다. 당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15개 기종 340여 개체에 달한다. 이는 고구려가 475년 이후 몽촌토성을 거점 삼아 주둔한 채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를 압박했다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이후 한성백제박물관이 2013년부터 몽촌토성 북문지 권역을 조사한 결과 고구려 도로유구, 건물지, 목곽집수지와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발굴됨으로써 기존 주장의 설득력이 더욱 배가되었다. 곧 고구려는 백제가 사용하던 도로를 폐기하지 않고 확장·보수해 사용하였고, 14×14m의 대형 목곽집수지를 축조하였다. 이들 유구에서 고구려의 원통모양 세발토기, 동이, 항아리 등 의례와 생활용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박중균·이혁희, 2018; 최충기, 2020; 이혁희, 2020; 한성백제박물관, 2020b).
2000년대 이후 세종 남성골과 대전 월평동 유적, 안성 도기동산성에서 고구려 관방유적인 목책성이 발굴되었으며, 세종 나성에서 각종 고구려 토기와 화살촉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강에서 탄천을 경유해 경기 남부로 이어지는 교통로인 성남 판교와 용인 보정, 화성 청계 등에서 고구려 돌방무덤이 연속 발굴되었다. 이들 유적은 무덤 수가 각각 2기 내외이며 출토유물이 빈약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진 경로와 범위를 시사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발굴성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고고학 성과를 기반으로 백제가 웅진시대에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통설의 논리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최종택, 1998; 2004; 2006; 2007; 2008; 2011; 2016; 2018; 양시은, 2010; 윤대준, 2010).
 
3) 계속되는 신설, 백제 영유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대한 선입견이나 사료 비판 없이 475~551년 한강 유역의 영유권을 조명한 것은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안정복은 동성왕-무령왕의 한성 행차와 고구려와 백제가 한북(漢北) 독산성 및 패수(浿水: 예성강)에서 교전한 점을 감안해 두 나라가 서로 번갈아가며 침탈한 것으로 이해하였다(『동사강목(東史綱目)』 지리고). 정약용은 무령왕 즉위 후 고구려가 잠시 한강을 차지했지만 475년 이후 50여 년간 한성과 한강 이북의 주·군이 모두 백제의 영유하에 있었다고 보았다(『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6집 3권). 한진서도 고구려가 비록 한성을 공략했더라도 한강 이남으로 넘어오지는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무령왕-성왕대 고구려·백제의 교전기록을 그대로 인정한 결과 백제가 553년까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하였다(『해동역사속집(海東繹史續集)』권8).
실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통설에 묻힌 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 박찬규가 통설을 비판하고 실학자들의 견해를 계승하면서 백제본기 신빙론을 근거로 한 475~551년 백제의 한강 유역 영유설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찬규는 백제본기의 문면을 그대로 존중하였다. 그에 따라 475년 9월에 고구려가 한성을 차지한 후 신라의 구원병을 의식해 일단 회군했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 고구려가 다시 한성을 지배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동성왕의 한산성 행차와 무령왕대 한강 이북에서 벌어진 고구려와의 전쟁기록을 믿었다. 그 결과 백제가 동성왕대 이미 한강 유역에 다시 진출했고, 무령왕대에는 지속적으로 경영한 것으로 파악하였다(박찬규, 1991).
2000년대 들어서 통설에 대한 반론 차원에서 백제가 475~551년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우선 김영관은 백제본기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고구려가 529년 혈성(穴城)과 오곡원전투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지속적으로 차지했다고 생각하였다. 고구려는 529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한강 이남을 지나 청주 지역까지 진출했는데, 경기 남부의 고구려 고분과 세종 남성골, 대전 월평동 유적 등을 그러한 결과물로 해석하였다. 다만 이들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역지배는 광역의 면지배가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와 교통로 중심의 거점지배임을 강조하였다. 심광주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538년 백제의 사비(충남 부여) 천도 배경을 529년 이후 고구려의 남진과 연관지었다(김영관, 2000; 2006; 2015; 2020; 심광주, 2001; 2008).
김병남도 백제본기를 긍정하는 관점에서 동성왕대 한강 유역 영유권은 백제에 있었고, 성왕대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가 예성강 이남과 한강 이북 사이에서 국경을 유지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성왕이 551년에 되찾은 한성과 평양을 모두 고구려 때 한성군(漢城郡)으로 불렸던 황해도 재령으로 비정한 것은 독특한 주장이었다. 박현숙·임범식 등도 유사한 입장에서 백제의 한강 유역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다만 문헌자료에 의존한 채 고구려 유물·유적의 고고학 성과는 고려하지 않았다(김병남, 2003a; 2003b; 박현숙, 2001; 2010; 임범식, 2002).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 고고자료를 함께 고려하면서 475년 이후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지배를 ‘군사적 거점지배’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곧 서영일은 동성왕-무령왕대 한강 유역이 백제의 영유하에 있었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한강 이남의 고구려 유물·유적을 영역지배와 직결시키는 데 신중해야 함을 환기하였다. 서영일은 충청도의 금강 유역에서 출토된 세종 남성골산성 같은 관방유적을 고구려가 충북 충주 내지 진천에서 웅진 방면으로 진출한 결과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백제가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았다(서영일, 2005; 2008).
정운용도 5세기 후반 고구려가 남한강 물길을 이용해 금강 상류 방면으로 진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백제가 동성왕대에는 한강 이남 지역을, 무령왕대에 이르러서는 한강 이북 지역까지 차지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만 529년 오곡원전투 이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재탈환했다고 보면서도 그 지역은 한강 이북으로 제한하고 있다(정운용, 2007; 2013). 이 밖에 안신원·신광철·이정범 등도 한강 이남에 분포한 고구려 산성이 목책성 단계의 소규모라는 점 등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를 ‘군사적 거점지배’의 제한적 형태로 파악하였다(안신원, 2010; 신광철, 2011; 이정범, 2015).
한강 이남의 ‘탄천로’에 위치한 경기도 성남 판교, 용인 보정, 화성 청계 등의 고구려 돌방무덤과 안성 도기동산성을 교통로상 계기적으로 파악한다면, 475년 이후 고구려 남방 진출의 경로를 한강 하류 방면으로 이해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 다만 이들 유적의 존속 연대를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여전히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475년 이후 웅진 방면으로 백제를 추적·압박한 경로를 굳이 한강 하류로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한강 하류와 ‘죽령로’주 002
각주 002)
죽령(竹嶺)은 고대로부터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기에 교섭·교류했던 핵심 교통로였다. 또 두 나라의 갈등기에는 고구려의 남진 길이자 신라의 북진 길이기도 했다. 이 길을 ‘죽령로’라고 호칭한다. 평양에서 경주 간 ‘죽령로’의 경로는 서흥-신계-평강-김화-화천-춘천-홍천-횡성-원주-제천-단양-죽령-영주-안동-의성-영천-경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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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거점지역인 충주 방면에서 동시에 전방위적으로 압박했을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백제가 동성왕-무령왕대에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고 주장한 연구자들은 백제본기를 그대로 믿는 ‘전면 긍정론자’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백제본기의 일부만을 신뢰하는 ‘부분 긍정론자’도 있으니 양기석과 김현숙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동성왕대의 ‘한산’· ‘한성’ 행차 관련 기록은 지명이동설의 관점에서 믿지 않았다. 그 결과 동성왕대 한강 유역 영유권은 고구려에 귀속된 것으로 보았고, 한강 이남의 고구려 유물·유적도 그때의 산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무령왕대의 백제본기를 신뢰하며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연구방법이나 결과 면에서 통설과 신설의 중간 정도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김현숙, 2003; 양기석, 2005).
 
4) 합리적인 이해 방향의 모색
475~551년 고구려와 백제 간 한강 유역 영유권을 둘러싼 학계의 논의는 여전히 첨예하다. 고구려가 이 시기 한강 유역을 공고하게 차지했다는 통설은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고지’를 바탕에 깔고 475년 장수왕의 한성 함락과 백제의 웅진 천도, 그리고 『일본서기』 흠명기에 전하는 551년 성왕의 한성 회복을 조합해 구축되었다. 이와 달리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을 가해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신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한산’·‘한성’ 관련 기록과 한강 이북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기록을 신뢰하는 입장에서 도출되었다. 다만 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 시기를 동성왕대부터로 볼 것인지 무령왕대 이후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 간 견해 차이가 있다.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금강 유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고구려 유물·유적은 분명 통설의 논리를 보완해주는 고고자료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고구려 관방유적이 목책성이라는 점과 출토유물의 규모·양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고구려가 전면적으로 영역지배를 했는지 아니면 교통로 중심의 군사적 거점지배에 그쳤는지 이해의 편차가 큰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475~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통설의 연구자들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 옛 수도에 소재했던 ‘한산’· ‘한성’ 지명과 한강 이북의 고구려·백제 간 전쟁 기사를 사료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검토 대상으로 삼은 것은 타당하게 생각된다. 다만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에 같은 지명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지명이 이동했다고 보거나, 착간(錯簡)에 따른 기년 조정 내지 중복 게재로 판단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전쟁 관련 기록은 백제만의 단독 사안이 아니라 고구려·신라 등 다른 나라와 인과관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5~6세기대 백제본기를 부분적으로 떼내어 불신하는 것은 백제본기 전체의 사료적 신빙성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게 하므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 12년(551년)조도 백제본기와 상충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한강 남쪽의 고구려 관방유적과 고분 분포가 고구려 남진의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략과 시간적 틈이 없는 계기적 산물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사실 한강 유역과 그 이남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유물·유적의 연대 비정은 고구려가 475~551년 한강을 차지했다는 문헌자료에서 도출한 것이다. 주로 토기의 연대관에서 추출된 고구려 유물·유적의 존속 연대는 지역에 따른 선후관계와 대체적인 추정 연대를 알려주는 정도이다.
고구려 고고학 성과가 통설에만 부합하는 것이고, 백제본기의 내용과 배치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현재 출토되는 한강 이남 고구려 유물·유적의 분포양상은 군사적 거점지배 형태인 교통로 위주의 고구려 남진 양상을 살피는 데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만한 근거가 여전히 부족하고, 고구려가 해당 지역을 광범위하게 장기간 영역지배 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검토의 여지가 있다.
한편 475~551년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면 과거 도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이 시기의 백제 유물이 확인될 법한데 현재까지 그렇지 못하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475년 이후 고구려가 몽촌토성에 주둔했던 흔적이 분명한 각종 유적과 유물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최근 몽촌토성 북문지 일대의 발굴조사 결과 성왕이 한성을 회복했을 때의 정황을 시사하는 유물이 출토되어 주목받았다. 곧 고구려 생활단층에 조성된 백제의 벽주(壁柱) 건물지와 세발토기편 등 사비기 토기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몽촌토성에는 475년 이후 고구려군이 주둔해 있었고, 백제는 551년에서야 이곳을 수복했다는 것이다(최충기, 2020; 이혁희, 2020; 한성백제박물관, 2020b).
그러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의 연대가 475년 이후임은 분명하지만 존속시기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발굴성과를 가지고 고구려가 70여 년간 몽촌토성을 점유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476년 2월에 한강 이북(漢北)의 민호(民戶)를 대두산성으로 이주시켰다. 대두산성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문맥상 한강 북쪽의 백제 주민을 한강 이남 지역으로 옮김으로써 고구려로부터 보호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고구려가 당시 몽촌토성에 주둔해 있던 상황이라면 문주왕의 백제민 이주정책은 실패했을 것이다.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물러간 틈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476년 무렵 일시적으로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 일부를 차지했더라도 그 범위는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476년 3월 문주왕이 송에 사신을 보냈을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좌절되었는데, 이는 경기만 일대의 제해권이 여전히 고구려의 수중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삼근왕대인 478년에 좌평 해구와 함께 대두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이 경기 남부 내지 충청 북부였음을 알 수 있다. 482~483년 무렵 백제가 한산성을 차지했다는 백제본기를 신뢰한다면, 문주왕이 한북의 민호를 이주시킨 476년 2월 이후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장악해 적어도 482년까지 주둔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경기 남부와 충청도 일대의 고구려 유물·유적이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삼아 백제의 수도 웅진을 압박했던 5세기 후반 고구려 남진의 결과물이라는 통설과 부합하는 접점이 존재하는 것이다.주 003
각주 003)
풍납토성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격 때 소실되어 백제가 무령왕대 이후 한강 유역을 탈환했을 시기에도 재활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군이 물러간 몽촌토성에 백제의 유물·유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해당 시기 강 건너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 간 국경의 기능을 했던 시기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남방의 최전선이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하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필자는 아차산보루군이 백제의 동향을 감시하는 기능으로써 본격적으로 조성·활용된 시기는 안장왕이 남진한 529년 전후 무렵에서 고구려가 성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551년까지로 생각한다. 몽촌토성 북문지에서 출토된 성왕의 몽촌토성 수복 관련 유물도 이러한 추정과 어긋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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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자료를 활용한 고구려의 남진 시기와 경로 연구는 향후 발굴과 연구성과를 통해 보완이 필요하다. 우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대한 선입관은 배제한 채, 고고자료와의 비교·검토를 통한 진전된 연구방법이 필요하다. 문헌과 고고자료를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좀 더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해 낼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곧 475~551년 한강 유역 영역 변천의 양상을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온당한 태도이자 이해 방향이다.주 004
각주 004)
결론적으로 필자는 475~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을 ‘백제 영유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하 2절은 이러한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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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중원고구려비〉는 문화재청에 의해 2010년 11월 1일자로 〈충주고구려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죽령(竹嶺)은 고대로부터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기에 교섭·교류했던 핵심 교통로였다. 또 두 나라의 갈등기에는 고구려의 남진 길이자 신라의 북진 길이기도 했다. 이 길을 ‘죽령로’라고 호칭한다. 평양에서 경주 간 ‘죽령로’의 경로는 서흥-신계-평강-김화-화천-춘천-홍천-횡성-원주-제천-단양-죽령-영주-안동-의성-영천-경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풍납토성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격 때 소실되어 백제가 무령왕대 이후 한강 유역을 탈환했을 시기에도 재활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군이 물러간 몽촌토성에 백제의 유물·유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해당 시기 강 건너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 간 국경의 기능을 했던 시기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남방의 최전선이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하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필자는 아차산보루군이 백제의 동향을 감시하는 기능으로써 본격적으로 조성·활용된 시기는 안장왕이 남진한 529년 전후 무렵에서 고구려가 성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551년까지로 생각한다. 몽촌토성 북문지에서 출토된 성왕의 몽촌토성 수복 관련 유물도 이러한 추정과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가기
  • 각주 004)
    결론적으로 필자는 475~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을 ‘백제 영유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하 2절은 이러한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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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의 한강 유역 일대 지배방식과 관련된 논점 자료번호 : gt.d_0005_001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