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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삼국 간 역관계의 변화

2. 삼국 간 역관계의 변화

1) 6세기 전반 삼국의 역관계와 고구려·백제의 각축
475년 9월 장수왕의 백제 한성 공격으로 고구려 남진의 성과가 가시화된 시기, 백제와 신라는 오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백제 개로왕(455~475년)이 아차산에 끌려가 고구려군에 살해당했지만, 개로왕의 명령을 받아 신라로 간 문주는 구원군 1만 명을 얻어 수도 한성에 돌아왔다. 이미 한성이 파괴되어 문주왕(475~477년)은 결국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지만, 백제의 국가적 위기에 1만 명의 대군을 선뜻 내줄 정도로 당시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 동맹관계는 공고하였다.
고구려는 백제 한성을 함락하고도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에 대하여 압박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는 동시에 5세기 말까지 동해안 일대와 소백산맥 서쪽 방면의 금강 상류 및 그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서 신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청주·진천·증평 등 미호천 유역은 중부지방에서 백제와 신라 간 국경이 맞닿아 있는 접점이었다. 고구려는 이들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군사동맹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웅진 방면으로의 진출을 모색한 것 같다. 그러나 장수왕대에서 문자명왕(491~519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고구려의 남진은 나·제 동맹군의 시의적절한 공조로 인해 번번이 패배로 귀착되었다. 당시 백제와 신라 사이 동맹을 이끈 군주는 동성왕(479~501년)과 소지왕(479~500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 두 왕이 비슷한 시기 자국 내의 정치적 변고에 휩쓸려 사망하면서 삼국 관계는 이전과 다른 변화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곧 백제 무령왕(501~523년)과 신라 지증왕(500~514년)이 즉위한 후, 433~434년부터 우호관계를 맺어 5세기 중반 이후에 군사동맹관계의 절정을 보여준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이전과 다르게 이완되어 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5세기 말부터 싹텄다. 498년 동성왕이 사정성(沙井城: 대전 중구)을 쌓아 한솔 비타로 하여금 지키게 했는데, 이는 신라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동성왕은 재위 23년(501년)에는 탄현(炭峴: 충남 금산 진산)주 005
각주 005)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대전시 동구와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 마도령(馬道嶺)을 탄현으로 비정한 견해가 먼저 제기되었다(池內宏, 1932~1933; 서정석, 2003). 이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에 있는 쑥고개(홍사준, 1967; 정영호, 1972)와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의 숯고개(성주탁, 1990)가 탄현으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금산군 내 같은 진산면 소재이지만 방현리와 행정리 사이에 있는 방현(方峴)을 주목하기도 한다(이판섭, 2015). 이곳은 〈대동여지도〉에도 진산과 연산을 연결해주는 교통로상의 고개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멸망 시 좌평 성충과 흥수가 의자왕에게 간언한 내용을 고려하면, 탄현을 경유하는 교통로가 긴 협곡지대이면서 산 아래에 하천을 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탄현의 별칭이 침현(沈峴)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탄현의 위치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소재의 고개로 파악된다(장창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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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목책을 설치함으로써 드러내 놓고 신라에 대비한 방어체계를 구축해갔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521년에 중국 양나라에 함께 사신을 파견한 것을 제외하면, 548년 독산성전투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전에 신라의 동맹군이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525년(백제 성왕 3년, 신라 법흥왕 12년)과 541년(성왕 19년, 진흥왕 2년)에 사신을 통해 화친을 도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6세기에 들어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군사동맹의 성격이 유명무실해진 채 느슨한 우호관계를 이어가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양상도 변화되었다. 5세기 후반부터 동해안 일대와 소백산맥 서쪽 방면에서 지속된 고구려의 남진이 6세기에 들어 소강상태를 맞았다. 신라 지증왕은 재위 5년(504년) 만에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골화성(骨火城) 등 12성을 수도 경주 외곽의 주요 요충지에 쌓음으로써 대고구려 축성사업을 마무리하였다. 파리성과 미실성은 동해안의 삼척과 흥해에 있었고, 골화성은 경북 영천으로 위치가 비정된다. 나머지 성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증왕이 12성 축조를 통해 동해안로와 내륙의 주요 교통로에 방어체계를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장창은, 2008).
그뿐만 아니라 지증왕은 512년에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복속케 하여 동해안 일대의 해상 주도권까지 우위를 점했다. 이로써 신라는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고구려의 군사적 동향을 안정적으로 감시·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실제로 6세기대에 들어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를 통해 신라가 지증왕대에 이르러 동해안 강릉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그 남쪽지역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입장에서 남진의 방향을 다시 백제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고구려의 남진은 여전히 문자명왕이 주도하고 있었다. 백제는 무령왕이 즉위한 직후였다. 이것이 곧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진검 승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먼저 무령왕이 재위 2년(502년) 고구려의 국경을 선제공격하였다. 고구려도 곧바로 다음 해 9월 부용 세력이었던 말갈(靺鞨)을 시켜 마수책(馬首冊: 경기도 포천)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 경기도 연천?)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무령왕이 군사 5,000명을 파견하여 이를 물리쳤다.주 006
각주 006)
『삼국사기』 무령왕본기의 신빙 여부에 따라 6세기 전반 고구려와 백제 간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곧 백제본기를 신뢰하면 무령왕대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가 여전히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 삼국 관계 추이를 살피는 차원에서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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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은 기세를 이어가 두 달이 지난 503년 11월 달솔 우영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수곡성(水谷城: 황해도 신계)을 습격하였다. 이것은 백제가 내륙 방면에서 일시적일지라도 예성강 상류 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경기도 연천과 황해도 신계는 고구려와 백제 간 교통로였던 ‘방원령로’주 007
각주 007)
고구려의 남진 경로는 서영일의 연구에 따른다(서영일, 2007). 서영일이 제시한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세 교통로는 다음과 같다.
• 방원령로 : 평양-대동-연산-방원령-수안-신계-토산-삭녕-연천-양주-서울
• 자비령로 : 평양-황주-자비령-서흥-평산-금천-개성-장단-파주(적성)-양주-서울
• 재령로 : 평양-황주-사리원-재령-신원-해주-개성-파주-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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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방원령로 남방의 일부를 회복한 셈이다. 다만 고구려가 문자명왕 15년(506년) 7월에 말갈을 사주해 고목성을 다시 함락했으므로, 방원령로를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 간 전선은 예성강 상류 지역에서 임진강 상류 지역으로 다시 조정되었다.
문자명왕의 백제에 대한 공세는 계속 이어져 512년 9월에는 백제의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빼앗았다. 그러나 곧바로 무령왕의 반격을 받아 위천(葦川) 북쪽에서 패했다.주 008
각주 008)
가불성·원산성 및 위천은 그 위치를 비정할 만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 원산성을 마한의 중심지였던 천안으로, 위천은 천안과 아산·온양 사이를 흐르는 곡교천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여호규, 2013). 이 견해에 따르면, 문자명왕과 무령왕대의 전선(戰線)이 한강 이남 지역이 된다. 다만 이는 온조왕대의 원산(圓山)과 같은 지명이라는 전제하에 주장된 것이어서 따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온조왕이 36년에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2성을 수축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전북 익산)을 축조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은 후대에 부회된 것으로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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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구려군은 무령왕이 거느린 군사가 3,000명에 불과한 것을 보고 방심하다가, 무령왕의 신묘한 계책에 빠져 크게 패했다. 무령왕은 몸소 출정하여 진두지휘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군령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고구려와의 군사적 대결구도에서도 주도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령왕 재위 중반기까지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대립양상은 무령왕이 집권 초반에 공세를 가해 임진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이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지만 곧바로 반격함으로써 백제가 한강 이북에서 임진강선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고구려에 대한 백제 측의 자신감은 『양서(梁書)』 백제전에 남아 있는 무령왕 21년(521년) 양나라에 보낸 표문에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했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는 문구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외교문서라는 특성상 어느 정도 과장과 꾸밈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역사적 상황이 담보되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2) 안장왕의 남진정책
무령왕 즉위 후 성왕(523~554년) 집권 전반기까지 유지되어 왔던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우위는 고구려 안장왕(519~531년)이 즉위하면서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맏아들로서 재위 7년(498년) 태자에 임명되었다. 그 후 장성하면서 20여 년간 왕위계승 수업을 착실히 받고 519년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안장왕은 즉위 3년(521년) 옛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졸본으로 행차하여 시조 주몽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졸본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州)·읍(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삼국사기』 안장왕 3년).
안장왕의 시조묘 제사는 고국원왕 2년(332년)에 실시된 후 190여 년만에 행해진 것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 이후 처음이었다. 국왕이 즉위 초반에 수도를 비운 채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안장왕의 졸본 시조묘 제사는 단순한 즉위의례의 차원을 넘어서서 국정을 안정시키고 통합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철저한 계획하에 시행되었을 것이다.
안장왕은 재위 5년(523년)부터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략하는 남진 정책을 본격화했다. 그렇다면 안장왕의 시조묘 제사와 수도로 귀환하면서 주·읍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곡식은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백성을 위무하기 위한 경제적 조처였을 것이다. 또한 안장왕이 국내성 및 오고 가는 지역의 유력세력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들과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고 지지세력의 결집을 도모했을 가능성도 있다(최일례, 2016). 이 밖에도 남방 진출을 앞두고 옛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에서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정치적 변란을 막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후대의 일이지만 양원왕 13년(557년)에 환도성에서 반역을 일으킨 사례는 평양 천도 후 국내성 세력이 언제든지 정치적 부담을 줄 수 있는 반대세력으로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6세기 전반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양상에서 백제 우위로 이어져 온 국면은 안장왕 즉위 11년(529년)에 이르러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안장왕은 출정에 앞선 529년 봄 3월에 황성(黃城)의 동쪽에서 사냥을 실시하였다. 고구려사에서 사냥은 단순한 놀이 내지 유희 행위가 아니었다. 사냥은 군사훈련과 국가제사에 바치는 희생동물을 잡는 일석이조의 군사적 의례 차원에서 시행하였다(김영하, 2002). 황성은 평양 일대에 있었던 것이 유력하다. 고국원왕도 재위 13년(343년)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적이 있었다. 요컨대 안장왕은 본격적인 출정을 앞두고 전쟁의 사전 점검과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던 것이다.
529년 10월, 안장왕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쪽 변경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혈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혈성은 강화도의 고구려 당시 이름이 ‘혈구군(穴口郡)’이어서 이곳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김병남, 2003a; 양기석, 2005; 문안식, 2006). 다만 안장왕이 이때 수군(水軍)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고, 이어지는 오곡원전투까지 감안해 위치 비정에 주저하는 견해도 있다(김영관, 2020). 성왕은 안장왕의 혈성 함락에 대한 반격 차원에서 좌평 연모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주어 오곡의 벌판에서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오곡원전투는 백제 측 2,000명의 군사가 전사하여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백제는 무령왕 23년(523년) 2월에 한강 북쪽 주·군의 백성을 차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축조하였다. 쌍현성의 위치는 임진강 이북 마식령산맥의 교통로상에 있었음이 유력하다(장창은, 2010; 여호규, 2012). 이후 무령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는 혼란의 와중인 523년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렀다. 성왕은 1만 명의 군사를 보내 패수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곧 백제는 성왕 즉위 후 529년까지 예성강과 임진강 상류 지역을 관통하는 방원령로와 자비령로를 통한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해 주요 거점지역에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셈이다. 혈성이 강화도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안장왕이 이들 내륙지방의 교통로를 우회하여 재령로를 경유해 혈성을 기습적으로 점거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37 지리지 한산주조에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에 해당하는 왕봉현(王逢縣, 皆伯縣이라고도 함)과 달을성현(達乙省縣)에서 한씨(漢氏) 미녀(美女)가 고구려 안장왕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왕봉(王逢)’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은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었기 때문이며, 달을성현에서는 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고봉(高峰)’으로 불렀다는 내용이다.
그림1 | 『삼국사기』 지리지 왕봉현・달을성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양 지역 설화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곧 한씨 미녀 구슬(韓珠)과 고구려의 태자 흥안(나중의 안장왕)이 백제 땅이었던 이곳에 몰래 왔다가 만나서 혼인을 맺었다고 한다. 흥안은 자신이 나중에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인데 그때 봉화를 올려 맞이해달라고 부탁하면서 고구려로 떠났다. 세월이 흘러 흥안은 왕이 되었다. 구슬은 흥안의 약속을 굳게 믿은 채 새로 부임한 태수의 혼인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 대가로 구슬은 누명을 썼고 감옥에 갇히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구슬은 마침내 안장왕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구슬은 고봉에 올라가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이하였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고양 지역의 설화가 『삼국사기』 지리지와 그것을 모티브로 하여 더욱 각색된 형태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이야기는 안장왕의 남진이 한강 유역 토착재지세력과의 협조 내지 정치적 제휴하에 추진되었음을 시사한다(노태돈, 1999; 강진원, 2016; 김진한, 2020). 그뿐만 아니라 안장왕이 남쪽으로 진출한 경로까지도 오롯이 알려준다. 고구려의 주요 남진 경로였던 예성강과 임진강 상류 쪽이 아닌 하류 방면의 재령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결국 안장왕은 자비령로의 요충지였던 오곡(황해도 서흥) 벌판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완승하였다. 특히 이들 전투에서 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대백제 전쟁을 수행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직접 공략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군에 맞대응하는 백제군의 규모도 3만 명의 대군이었으며, 그중 2,000명이 전사하였다. 곧 529년의 전투가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전 양상이었으므로 두 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컸을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다시 남진해 백제를 압박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당연히 백제로서는 고구려의 파상적인 공세를 막고 한강 유역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475~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한 학계의 논란은 분분하다. 『삼국사기』 기록을 신뢰하는 입장의 연구자들은 529년 안장왕이 오곡원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 고구려 남방 진출범위에 대해 연구자 간 견해차가 큰 것도 사실이다. 곧 이때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금강 유역과 청주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심광주 2001; 김영관, 2006; 2008), 고구려의 영유권을 한강 이북으로 제한하기도 한다(정운용, 2007; 장창은, 2014).
고대 서울 분지의 중심지는 조선시대와 달리 한강 북쪽의 중랑천과 남쪽의 탄천이 합류하는 지역이었다. 아차산 일대는 중랑천과 탄천이 합류하는 지역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좋은 지점이었다. 아차산의 동쪽으로는 왕숙천을 따라 북쪽으로 길이 뻗어 있다. 곧 중랑천로를 통해서는 경기도 의정부-동두천 방면으로 북쪽과 연결되고, 왕숙천로를 통해서는 포천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도 3번 국도와 47번 국도가 이곳을 따라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간선도로로 기능하고 있다. 아차산 남쪽에 있는 광진(廣津)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강을 건너는 주요 나루였다.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면 남쪽의 탄천로와 연결된다. 탄천로를 통해서 남쪽으로 가면 경기 동남부인 성남-용인을 경유해 충청도와 경상도의 각 지역으로 갈 수 있다. 요컨대 아차산 일대는 고대부터 남-북 육상교통로와 동-서 한강 물길교통로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 간 각축지역으로 부각되었고, 그에 따른 관방유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서영일, 2014).
아차산고구려보루군의 연대에 대해 연구자 사이에 다소 견해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상한선이 6세기 이후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최종택, 2004; 2013). 그렇다면 아차산에 소재한 20여 개의 보루들은 고구려가 한강 이남 백제의 북진을 감시·통제하기 위해서 축조한 것으로 이해함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아차산 일대의 한강이 고구려와 백제 간 국경 기능을 했거나 적어도 고구려의 한강 유역 영유에서 배후거점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안장왕의 남방 진출을 감안할 때, 아차산고구려보루는 늦어도 529년 무렵에는 축조되어 그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장창은, 2014).
그림2 | 아차산의 지리적 조건(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대동여지도〉)
그림3 | 아차산4보루에서 본 한강
 
3) 안원왕-양원왕대 국내정치의 혼란과 남진의 답보
안장왕은 백제와의 오곡원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 2년 만인 재위 13년(531년) 5월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은 원인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일본서기』 계체기(繼體紀) 25년(531년) 12월조에는 안장왕이 시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장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그의 동생 보연(안원왕: 531~545년)이 이어받았다. 안장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연사라기보다는 정치적 변고였다고 파악함이 옳을 듯하다. 구체적인 시해 배경이나 주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하다. 다만 안장왕이 남진을 위해 결탁했던 한씨 미녀로 대표되는 세력의 동향과 관련될 개연성은 있다. 예컨대 안장왕이 남진 과정에서 협조했던 재지세력의 등용을 둘러싸고 기존세력과 암투하는 과정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다(정원주, 2018). 안장왕 죽음의 수혜자가 결국 안원왕이므로 그가 형의 죽음과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적어도 안장왕을 시해한 세력에 의해 안원왕이 옹립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이 동생을 사랑했다면서 형제 간의 우애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오히려 안원왕의 즉위를 합리화해주는 명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안원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편치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재해와 재난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안원왕 재위 5년(535년) 여름에 홍수로 200여 명이 죽었고, 겨울에는 지진과 전염병이 이어졌다. 이듬해에도 가뭄과 황충(누리)의 피해로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안원왕은 재위 6~7년 재해현장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상황으로 인해 안원왕은 안장왕이 추구한 남진정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안원왕대 고구려가 백제를 선제공격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안원왕 10년(540년)에는 백제의 침략을 받아 우산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안원왕이 날랜 기병 5,000명을 보내 백제군을 물리침으로써 호각지세의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원왕은 별다른 업적 없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죽고 말았다. 왕의 자리는 안원왕 3년(533년)에 태자로 책봉된 맏아들 평성(양원왕: 545~559년)이 이어받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안원왕의 죽음과 양원왕 즉위가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6~7년(545~546년)조에는 전혀 다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인용된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따르면, 안장왕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둘째 중부인(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셋째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으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그런데 안장왕은 질병을 앓고 있었고 말년에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결국 545년 12월에 추군과 세군 세력은 왕위를 둘러싸고 궁궐 앞에서 3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추군 측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때 세군 세력 2,000명이 몰살당했다. 양원왕은 중부인의 아들로서 추군세력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졌다.
『일본서기』는 천황 중심적으로 윤색되었고, 설화성 짙은 내용이 많아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 다만 이 기록은 『백제본기』를 인용한 것이어서 믿을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곧 안원왕 재위기간에 고구려는 사회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외척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도 점차 심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안장왕대와 다르게 백제를 상대로 한 대외전쟁을 적극적으로 치를 수 없었던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양원왕은 즉위 후 3년(547년)까지 매년 동위(東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북방 전선의 안정화를 꾀했다. 동시에 요동 지방에 있는 백암성(白巖城: 요령성 등탑 연주성)을 고쳐 쌓고 신성(新城: 요령성 무순 고이산성)을 수리함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북방에서의 소요와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재위 4년(548년) 한동안 주춤했던 대백제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이른바 ‘독산성(獨山城)전투’였다. 이 전투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백제·신라본기에 모두 실려 있어 삼국 모두에게 중요한 전투로 인식,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명 등 세부적으로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같다. 이를 종합해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548년 봄 정월, 양원왕은 부용세력이었던 예(濊: 말갈)의 군사 6,000명을 동원해 한북(漢北)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진흥왕은 장군 주진(또는 주령)에게 갑옷을 입은 군사(甲卒) 3,000명을 내주어 백제를 구원하게 했다. 주진의 군대는 독산성 아래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 군사와 싸워 크게 이겼다. 사실 5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495년 이후 동맹군의 활동이 없었다. 541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하면서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복원되었는데, 이때 그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고구려의 남방 진출이 나·제 동맹군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독산성의 위치를 놓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충남 예산에 소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김태식, 1993; 양기석, 2005; 여호규, 2013). 이들은 『일본서기』 흠명기 9년(548년) 4월조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한 마진성(馬津城)을 독산성과 같은 곳으로 보았다. 실제로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668년 백제 멸망 후 당이 웅진도독부에 설치한 현 중에서 마진현(馬津縣)의 본래 이름이 고산(孤山)이라고 되어 있다. ‘고산(孤山)’과 ‘독산(獨山)’은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산’이라는 의미상 서로 통하는데, 충남 예산의 옛 이름이 고산현(孤山縣)이었다. 문헌고증적인 면에서 독산성의 위치를 충남 예산으로 비정할 만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산 일대에서 독산성으로 비정할 만한 산성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독산성 앞에 ‘한강 이북(漢北)’을 병기하고 있어 한강 이남의 충남 예산으로 비정하는 데 근본적인 의문이 따르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한북(漢北)’이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한강 유역을 지속적으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강조했다고 본 견해도 있다(전덕재, 2016). 다만 이와 같은 부회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오히려 후대에 신라 측에 의해서 그러한 자료가 개찬되지 않고 전승될 수 있었는지 의문의 여지도 있다.
독산성전투 관련 기록은 백제본기가 가장 자세하므로 원전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독산성의 위치로 전제된 ‘한강 이북’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에 근거해 독산성의 위치를 한강 이북으로 보는 주장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경기도 포천(김병남, 2003b), 경기도 동북부 또는 강원도 철원(장창은, 2014), 고양 행주산성(윤성호, 2017) 등 구체적인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독산성의 위치가 한강 이남의 충남 예산 일대인지 아니면 한강 이북 지역인지에 따라서 548년 무렵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진다. 나아가 551년 나·제 동맹군의 한강 유역 공략에 대한 계기적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독산성이 예산에 있었다면 548년 당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영유권은 안정적이었고, 한강을 넘어 남진해 백제의 수도를 계속 압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함락한 475년부터 나·제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551년까지 고구려가 시종일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통설과도 부합한다.
반면에 독산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다면 백제가 529년 오곡원전투 패배 이후 548년 이전 어느 시기엔가 다시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그 이북의 거점지역에 독산성을 축조했음을 시사한다. 이 경우라면 6세기대 고구려와 백제 간 한강 유역 영유권은 유동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 각주 005)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대전시 동구와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 마도령(馬道嶺)을 탄현으로 비정한 견해가 먼저 제기되었다(池內宏, 1932~1933; 서정석, 2003). 이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에 있는 쑥고개(홍사준, 1967; 정영호, 1972)와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의 숯고개(성주탁, 1990)가 탄현으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금산군 내 같은 진산면 소재이지만 방현리와 행정리 사이에 있는 방현(方峴)을 주목하기도 한다(이판섭, 2015). 이곳은 〈대동여지도〉에도 진산과 연산을 연결해주는 교통로상의 고개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멸망 시 좌평 성충과 흥수가 의자왕에게 간언한 내용을 고려하면, 탄현을 경유하는 교통로가 긴 협곡지대이면서 산 아래에 하천을 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탄현의 별칭이 침현(沈峴)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탄현의 위치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소재의 고개로 파악된다(장창은, 2020). 바로가기
  • 각주 006)
    『삼국사기』 무령왕본기의 신빙 여부에 따라 6세기 전반 고구려와 백제 간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곧 백제본기를 신뢰하면 무령왕대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가 여전히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 삼국 관계 추이를 살피는 차원에서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활용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고구려의 남진 경로는 서영일의 연구에 따른다(서영일, 2007). 서영일이 제시한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세 교통로는 다음과 같다.
    • 방원령로 : 평양-대동-연산-방원령-수안-신계-토산-삭녕-연천-양주-서울
    • 자비령로 : 평양-황주-자비령-서흥-평산-금천-개성-장단-파주(적성)-양주-서울
    • 재령로 : 평양-황주-사리원-재령-신원-해주-개성-파주-서울 바로가기
  • 각주 008)
    가불성·원산성 및 위천은 그 위치를 비정할 만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 원산성을 마한의 중심지였던 천안으로, 위천은 천안과 아산·온양 사이를 흐르는 곡교천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여호규, 2013). 이 견해에 따르면, 문자명왕과 무령왕대의 전선(戰線)이 한강 이남 지역이 된다. 다만 이는 온조왕대의 원산(圓山)과 같은 지명이라는 전제하에 주장된 것이어서 따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온조왕이 36년에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2성을 수축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전북 익산)을 축조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은 후대에 부회된 것으로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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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 간 역관계의 변화 자료번호 : gt.d_0005_001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