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551년 나·제 동맹군의 급습과 한강 유역 상실 과정
3. 551년 나·제 동맹군의 급습과 한강 유역 상실 과정
1) 신라의 북진과 고구려의 국원 상실
548년 봄 정월, 고구려 양원왕은 부용세력이었던 예(말갈)를 동원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했지만, 오랜만에 가동된 나·제 동맹군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였다. 그리고 2년이 지난 550년 정월~3월,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둘러싸고 삼국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먼저 백제 성왕이 550년 정월에 장군 달기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고구려는 두 달 후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를 보내 두 성을 급습해 모두 빼앗고 증축한 후 갑사(甲士) 1,000명을 주둔시켰다. 고구려가 다시 금현성을 공격하였지만 도리어 이사부의 추격군에게 대패하였다.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는 단정할 수 없지만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많다. 곧 도살성은 충북 증평군 도안면에 소재한 추성산성(杻城山城: 尼城山城, 二城山城) 내지 진천군 초평면의 두타산성(頭陀山城)으로 비정하였다(민덕식, 1983; 양기석, 1999; 김영관, 2008; 전덕재, 2009a). 다만 이후 추성산성 발굴 결과 축조시기와 운영 주체가 4~5세기대 백제로 밝혀졌다(성정용, 2012; 차용걸, 2014). 현재로서 이곳을 도살성으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금현성도 도살성 인근의 진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거나(윤성호, 2019b), 좀 더 구체적으로 세종시 전의면과 전동면에 걸쳐 있는 금성산성(金城山城)으로 비정하는 연구도 있다(양기석, 1999; 김영관, 2008; 전덕재, 2009a).
고구려가 미호천 유역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하거나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국원(國原: 충북 충주)을 남방 진출의 거점으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지리적인 조건과 교통로를 감안할 때 고구려는 국원에서 군대를 출동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금현성이 도살성과 같이 진천 관내에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세종시 전의·전동면에 있더라도 국원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다. 곧 국원에서 달천 상류 방면으로 거슬러 가다가 서북쪽 증평으로 가면 곧바로 도살성이 나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미호천을 따라 서남진한 후 조치원에서 조천을 경유해 서북 방면으로 가면 금현성에 다다를 수 있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도살성과 금현성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원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진흥왕은 실제로 551년 3월에 낭성(娘城)으로 몸소 순행(巡幸)을 갔다. 낭성은 충주 탄금대에 전하는 우륵(于勒) 관련 전설과, 우륵이 음악을 연주한 하림궁(河臨宮)의 명칭에서 풍기는 입지조건 때문에 충주로 위치를 비정하는 경향이 강하다(양기석, 1999; 박성현, 2010).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청주의 군명으로 분명하게 ‘낭성’이 전한다. 또한 진흥왕이 552년에 충주에서 우륵의 제자 계고·법지·만덕의 연주를 들으면서 “예전 낭성에서 들었던 [우륵의] 음과 다름이 없다”며 포상한 『삼국사기』 진흥왕 13년조를 음미하면, 낭성은 지금의 청주 권역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장창은, 2014·2020).
진흥왕은 낭성에서 국원에 안치했던 대가야의 우륵과 그의 제자를 불러 하림궁에서 악(樂)을 연주하게 했다. 이때의 악은 단순한 유희 차원의 음악이라기보다 정복지에 대한 정치·사회적인 통합을 위한 의례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이정숙, 2003; 양기석, 2006).
결국 550년 정월 도살성과 금현성 장악으로 시작한 신라의 군사적 행보는 궁극적으로 국원의 장악으로 귀결되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국원을 차지한 시기는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한 550년 3월 이후 우륵을 국원에 안치한 551년 3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단양신라적성비〉 내용을 참고하면,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의 적성 지역을 차지한 것이 550년 중·후반이다. 요컨대 신라의 국원·적성 공략은 죽령로뿐만 아니라 추풍령로를 경유한 소백산맥 서쪽 방면 등 전방위적 북방 진출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결국 한강 유역 공략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성격이 짙었다.
2) 나·제 동맹군의 한강 유역 장악
신라가 고구려 남방 진출의 최대 군사거점이었던 국원을 차지함으로써 한강 유역 북진의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이에 신라는 백제와 함께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강 유역의 공략에 나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고구려본기와 열전 거칠부전, 『일본서기』 흠명기 12년조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551년, 백제가 먼저 한강 하류 방면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그 승기를 이어받아 한강 중·상류로 진격하였다. 신라 공격의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 신라본기에는 551년 3월로, 고구려본기에는 551년 9월로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가 난다. 신라본기의 경우 551년 3월에 진흥왕의 낭성 순수(巡狩) 및 우륵의 소환·귀의 과정이 일괄 정리된 후 부기되었다. 따라서 달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고구려본기는 돌궐의 신성·백암성 침략과 고구려의 대응, 그리고 신라의 10성 공격이 계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가 한강 유역의 고구려를 공격한 시점은 551년 9월로 파악하는 것이 맞겠다. 자연히 백제의 공격은 그 직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관련 기록을 종합하면, 신라와 백제의 한강 유역 공격은 동맹군의 공동작전하에 결행되었다. 백제가 먼저 옛 수도였던 한성을 급습하여 차지했고, 한강을 넘어 평양까지 진격하였다. 여기서의 평양은 대동강 일대의 평양이 아닌 남평양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때에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평양’으로 불렸다. 아차산 서쪽 방면 서울시 광진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제가 마침내 회복한 옛 땅의 범위는 6군(郡)이었다.
신라는 거칠부와 대각간(大角干)주 009 구진 등 8명의 장군을 앞세워 백제의 승기를 이어받아 고구려로부터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고현은 강원도 회양과 고산 사이에 있는 고개인 철령(鐵嶺)으로 비정한다(池內宏, 1960; 박성현, 2010). 신라가 차지한 지역에 대해 신라본기와 거칠부열전은 ‘10郡’으로, 고구려본기는 ‘10城’으로 다르게 표기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할 당시 ‘성’ 단위로 편제해 통치한 것을 신라가 후에 ‘군’으로 불렀거나 다시 편제한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노태돈, 1999).
신라가 10군을 차지했을 때 고구려 혜량법사가 거칠부 군영에 찾아와 신라로의 망명을 청했다. 이에 거칠부가 혜량을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 진흥왕을 뵙게 하니, 왕이 법사를 승통(僧統)으로 삼아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승려로서 고구려에 염탐하러 갔는데, 그때 혜량을 만나 환담을 나눈 적이 있다. 거칠부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승려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사회에서 승려는 종교인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국경을 넘기 수월했고, 그래서 종종 간첩으로서 활약하였다(김복순, 1992; 김영수, 1993; 2018). 혜량이 망명해 올 때 거칠부는 ‘전일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하였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렇게 보면 기록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신라군이 북진해 한강 중·상류의 10군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혜량의 도움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신라와 백제가 차지한 10군과 6군의 범위
나·제 동맹군이 551년 각각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10군과 6군의 범위는 연구자 사이에 다소간의 이해 차가 있다. 우선 신라가 차지한 10군의 범위에 대해 삭주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삭주는 지금의 강원도 영서지방과 경기도 가평, 충북 제천·단양 일대에 해당한다. 다만 10군의 범위를 삭주 관내에 한정하는 견해도 있고, 삭주 내 일부와 한주 내 일부를 함께 파악하기도 한다. 한주 내 일부는 충북 괴산·진천과 경기도 여주·안성 일대이다(이호영, 1984; 임기환, 2002; 전덕재, 2009a; 박성현, 2010; 장창은, 2014).
신라가 차지한 10군의 범위에 한주 동북쪽 일부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삭주 관내에서 철령 이남의 ‘고구려고지’가 11개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 예사롭지 않다. 삭주 관내 중 신라의 북진 경로인 죽령로의 도상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기성군(岐城郡: 강원도 창도)만 제외하면 10개의 군이 남는다. 국원(충주)과 적성(단양)을 장악한 신라가 551년 9월 한강 중·상류 방면의 고구려를 공격한 주요 경로는 죽령로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강 하류 방면을 백제가 전담했기 때문이다.
결국 551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 중·상류의 10군은 북진 경로를 감안할 때 ① 나성군(奈城郡, 奈生郡: 강원 영월), ② 나제군(奈隄郡, 奈吐郡: 충북 제천), ③북원(北原, 平原郡: 강원 원주) ④가평군(嘉平郡, 斤平郡: 경기 가평), ⑤삭주(朔州, 牛頭州: 강원 춘천), ⑥낭천군(狼川郡, 狌川郡: 강원 화천), ⑦양록군(楊麓郡, 楊口郡: 강원 양구), ⑧익성군(益城郡, 母城郡: 강원 김화), ⑨대양군(大楊郡, 大楊菅郡: 강원 금강), ⑩연성군(連城郡, 各連城郡: 강원 회양)으로 추정할 수 있다.주 010 군의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속현(屬縣)까지 고려해 551년 9월 신라의 북진 길을 복원해 보면, 단양 → 제천 → 원주 → 홍천(또는 양평 → 가평) → 춘천 →화천(또는 양구·인제) → 김화 → 금강 → 회양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아닐까 한다(장창은, 2014; 그림4 참조).

그림4 | 551년 신라와 백제가 차지한 10군과 6군 추정지(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한국학중앙연구원, 889쪽 지도 활용)
백제가 차지한 6군의 범위는 『일본서기』 흠명기 12년조의 “百濟聖明王…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凡六郡之地遂復故地”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곧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凡六郡之地 遂復故地”로 하면 “백제 성왕이…고구려를 정벌해 한성의 땅을 얻었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다. 무릇 6군의 땅으로 마침내 옛 땅을 회복하였다”라고 해석된다. 이 경우 6군에 한성과 평양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입장이다.
이와 달리 중간을 끊지 않고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凡六郡之地遂復故地”로 하면, “백제 성왕이…고구려를 정벌해 한성의 땅을 얻었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했는데 무릇 6군의 땅이다. 마침내 옛 땅을 회복하였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이 경우는 6군에 한성이 포함되지 않은, 곧 백제가 회복한 옛 땅을 ‘한성+6군’으로 해석할 수 있다(노중국, 2006; 2012).
신라가 차지한 10군과 다르게 6군은 북방과 남방의 한계범위를 추적할 만한 단서가 적다. 그렇다 보니 기존 학계의 주장도 엇갈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강 이남 지역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6군의 위치를 한산군(漢山郡)과 북한산군(北漢山郡) 외에 율진군(栗津郡, 栗木郡: 경기 과천), 장제군(長堤郡, 主夫吐郡: 경기 부천), 개산군(介山郡, 皆次山郡: 경기 안성 죽산), 소천군(泝川郡, 述川郡: 경기 여주), 수성군(水城郡, 買忽郡: 경기 수원)과 당은군(唐恩郡, 唐城郡: 경기 화성)으로 비정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군현의 수에 얽매이지 않고 그보다 폭넓게 파악한 것이다(임기환, 2002).
둘째, 한강 이북 지역으로 국한해 6군의 위치를 비정한 연구가 있다. 먼저 황해도 관내의 오관군(五關郡, 五谷郡: 서흥), 서암군(栖嵒郡, 鵂巖郡: 봉산), 중반군(重盤郡, 漢城郡: 재령), 장새현(獐塞縣: 수안), 폭지군(瀑池郡, 內米忽郡: 해주), 진단현(鎭湍縣, 十谷縣: 곡산)으로 추정한 연구가 있다(양기석, 2005).
이와 다르게 경기도 중심으로 황해도를 포괄하는 견해도 있다. 곧 경기도의 교하군(交河郡, 泉井口縣: 파주), 내소군(來蘇郡, 買省郡: 양주), 견성군(堅城郡, 臂城郡: 포천), 개성군(開城郡, 冬比忽: 개풍), 송악군(松岳郡,扶蘇岬: 개성)과 황해도의 우봉군(牛峯郡, 牛岑郡: 금천)을 6군으로 비정하였다. 백제가 회복한 옛 땅을 ‘한성+6군’으로 해석한 데서 이끌어낸 결론이다(노중국, 2006; 2012).
셋째, 한강 이남과 이북을 망라하여 6군의 위치를 파악하는 연구인데, 현재까지 학계의 다수설이다. 대체로 6군의 범위를 임진강 이남에서 한강 하류를 포함하는 경기 남부지역까지로 파악하였다. 다만 구체적인 위치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곧 한강 이남 경기도 남부의 개산군(介山郡: 안성 죽산), 소천군(泝川郡: 여주), 율진군(栗津郡: 과천), 한주(漢州, 漢山郡: 하남·광주), 장제군(長堤郡: 부천)과 한강 이북의 한양군(漢陽郡, 북한산군: 서울 광진), 비성군(臂城郡: 경기 포천), 부평군(富平郡, 夫如郡: 강원 철원), 그리고 해구군(海口郡, 穴口郡: 강화)으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의 군현상으로는 9개 군에 해당한다(이호영, 1984).
이와 달리 한산군과 북한산군을 기본으로 수성군(水城郡: 경기 수원), 율진군(栗津郡: 과천), 장제군(長堤郡: 부천), 견성군(堅城郡: 포천)을 백제가 차지한 6군으로 파악한 연구도 있다(전덕재, 2009a). 한편 북한산 이남의 남평양과 함께 백제가 551년에 천안 일대에서 현재의 경부고속도로(용인까지)와 탄천을 따라 서울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차지한 경기 남부를 6군으로 보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당은군(남양 : 경기 화성), 개산군(안성 죽산), 백성군(안성), 수성군(수원), 율진군(과천), 한주 주치(하남·광주)로 비정하였다(여호규, 2013).
요컨대 한강 하류 유역 양안(兩岸)을 모두 백제의 6군으로 분석한 연구는 백제가 차지한 한성(한산군)과 평양(북한산군) 지역을 중심으로 그 인근의 군을 주목한 것이었다. 551년 당시 백제가 차지한 한강 유역의 전체범위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삼국사기』 지리지를 살펴보면, 한강 이북-임진강 이남의 군이 모두 6개라는 것이다. 이를 백제의 북진과 교통로를 감안하면, 한양군(서울 광진), 내소군(경기 양주), 교하군(경기 파주), 견성군(경기 포천), 철성군(강원 철원), 부평군(강원 김화)으로 정리할 수 있다(그림4 참조).
그렇다면 백제가 551년에 차지한 6군의 범위는 한강 이북-임진강 이남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6군과 별개로 당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은 사료상 분명하게 나타난 한성 일대를 포함해 경기 남부 일대를 망라했음이 분명하다.
4) 신라의 한강 유역 탈취와 백제의 대응
고구려는 551년 백제와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인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두 나라 간의 애초 약속처럼 백제는 6군을 포함한 한강 하류 유역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중·상류의 10군을 새롭게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한강 유역 영유의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 었다.
『일본서기』 흠명기 13년(552년)조에는 “이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그로 인해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 지금 신라의 우두방(牛頭方)과 니비방(尼彌方)이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진흥왕 14년(553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의 군주는 광역주를 통치하는 지방관이자 군사지휘관의 성격을 겸했다. 신주의 위치는 경기도 이천(강봉룡, 1994; 전덕재, 2009a)과 충북 충주(임기환, 2002)로 비정한 바 있다. 이성산성 등의 발굴성과를 감안하면 경기도 하남과 광주 일대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황보경, 1999; 윤성호, 2017).
『일본서기』에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성과 평양을 스스로 포기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가 553년 7월에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신라의 침탈에 대한 백제의 대응이 전혀 전하지 않아 『일본서기』가 전하는 문면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백제 성왕이 그토록 염원했고 힘들게 획득했던 한강 유역을 신라에 쉽게 내주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성왕이 전투도 치르지 않고 힘들게 확보한 고토(故土)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든가(이도학, 2009), 백제에 우호적이었던 『일본서기』의 서술 태도가 백제의 패배를 언급하지 않았던 배경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운용, 200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유역을 신라가 침탈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발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만약 두 나라 간에 전투가 발발했다면, 신라 입장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의 이름이 반드시 기록에 남았을 법하다. 551년 9월에 신라가 10군을 공략할 때 거칠부와 8명 장군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해 둔 것을 봐도 그렇다. 결국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관계 파기를 감수하며 급습했고, 백제가 격렬한 저항 없이 방조 내지 묵인한 결과 신라에 귀속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렇게 보면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늦어도 553년 9월 이전에 파탄이 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백제 성왕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내준 그해 10월에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보내 소비(小妃)로 삼게 했다(『삼국사기』 진흥왕 14년).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553년 10월까지도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성왕의 의지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었던 셈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성왕은 도대체 왜 이러한 행보를 보여야 했을까?
『삼국유사』기이편 진흥왕조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곧 “백제가 신라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 말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고구려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라와 통호(通好)하였다”는 것이다.

그림5 | 『삼국유사』 진흥왕조의 ‘여・라 통호’ 기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백제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했다는 것은 551년 9월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이후의 추가적인 작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라가 백제 측의 의도대로 협조해주지 않은 채, 도리어 고구려와 ‘통호’한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통호의 배경과 과정은 그대로 믿기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나·제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후 긴밀하게 신라와 우호관계를 도모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를 ‘고구려와 신라가 은밀하게 맺은 약속’이라는 의미의 ‘여·라 밀약’으로 부른다(노태돈, 1999). 다만 국가 간의 비밀약속은 늘 있으므로 기록 그대로 ‘통호’ 내지 ‘화호(和好)’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노중국, 2006; 박윤선, 2010).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의 통호를 원망해 554년 9월에 신라의 진성(珍城)에 쳐들어와서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는 내용이 진흥왕의 발언 앞에 있으므로 고구려와 신라 간의 통호 시점은 554년 9월 이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 13년(552년) 5월조에 따르면, 백제가 이미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을 눈치채고 이를 일본에 알리면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곧 여·라 밀약은 나·제 동맹군이 551년 9월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552년 5월 이전에 체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일본서기』 기사가 기년상 착란이 많은 점을 감안해 552년 전후 정도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노중국, 2006; 주보돈, 2006; 전덕재, 2009b).
신라와 고구려의 통호는 백제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삼국 간 역학관계에서 두 나라의 동맹이 다른 한 나라에 가하는 압력이 배가되는 것은 당연하다. 백제는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겨 웅진으로 천도했고,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맛봤다. 이에 숙적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신라와 주도적으로 동맹을 맺고 그 관계를 120여 년 동안이나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절치부심의 결과 비로소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구도가 한순간에 역전된 것이다. 백제는 이를 타개하고자 552년 5월~554년 정월까지 네 차례나 왜국(倭國)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일본서기』의 관련 내용에는 왜병을 끌어들이기 위한 과장과 외교적 수사가 있기는 하지만,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을 인식한 백제의 불안과 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결국 553년 7월 신라의 한강 유역 탈취에 대해 백제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까닭은 여·라 밀약과 연관지어 해석하면 궁금증이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곧 여·라 밀약을 사전에 알아챈 백제로서는 고구려의 개입을 두려워했을 법하다.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채 신라에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신라와의 동맹을 표면적으로 유지한 상태에서 은밀하게 왜에 네 차례의 군사원조를 요청했던 것이다.
성왕이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지 불과 3개월 만인 553년 10월에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보낸 까닭도 이러한 연장선상이라면 해석이 가능하다. 기존에는 이에 대하여 백제가 신라와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한 바 있다(노중국, 1981; 김주성, 2000; 정운용, 2007). 또한 백제가 신라로부터 한강 하류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도 보았다(김병주, 1984). 그러나 『일본서기』흠명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의 해석은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성왕도 이미 마음속으로는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청산했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와 신라를 동시에 상대하기에 군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굳이 신라에 반감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듯하다. 따라서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낸 것은 신라를 안심시키면서 군비증강에 시간을 벌어보려는 전술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종의 기만전술 내지 위장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성왕이 554년 5월 왜국으로부터 1,000명의 군사와 무기 등 군비를 지원받은 직후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그러한 계기적 결과물일 것이다. 두 나라의 동맹관계가 공식적으로 파탄 난 후 충돌했던 최고 분수령이 바로 554년 7월에 발생한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전투였다.
관산성전투는 성왕이 전사하고 좌평 4명과 3만여 군이 전사하는 백제의 참패로 끝났다. 관산성전투를 주도했던 백제 왕자 여창(餘昌: 위덕왕)은 왕위에 오른 후 한동안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면서 내부통치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신라에게는 백제와의 관계에 신경을 덜 쓰고 기존에 장악했던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완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진흥왕의 순수와 순수비 건립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