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구려의 한강 유역 상실 배경과 역사적 의미
4. 고구려의 한강 유역 상실 배경과 역사적 의미
551년 9월,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에게 북한강과 남한강 유역 전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까닭은 우선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나·제 동맹군의 적절한 공조에서 기인한 바가 가장 컸다. 곧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강 하류와 중·상류 방면으로 나누어 동시에 진격해옴으로써 고구려 입장에서는 방어전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한정된 군사력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이미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안원왕이 죽은 후 545년 12월에 발생한 추군과 세군 세력 사이의 다툼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갈등 국면이 양원왕 즉위 후에도 한동안 해소되지 않았다. 양원왕 4년(548년)에 상서로운 벼(嘉禾)를 평양 중앙정부에 바친 환도(丸都: 국내성)세력이 557년에 반란을 일으켜 진압되었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은 이를 시사한다. 551년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로 망명을 요청하면서 거칠부에게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政亂)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발언은 당시 고구려 내부의 정치동향을 생생하게 알려준다. 이것이 추군·세군 같은 외척세력 간의 다툼인지, 기존 연구 주장대로 국내성계와 평양성계 귀족세력의 갈등인지(임기환, 1992)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구려 내부 정치세력 사이의 혼란과 분열은 대외항쟁력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히 6세기 중반 고구려 내부의 동향은 일찍이 한강 유역 상실의 주요 배경으로 설명되었다(노태돈, 1976).
대외적으로 북방에서의 동향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550년 이후 고구려는 돌궐 및 북제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다. 특히 돌궐의 압박은 고구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돌궐은 551년 9월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해왔다(『삼국사기』 양원왕 7년). 고구려 장군 고흘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돌궐의 군사 1,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지 않는 규모의 침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곧 나·제 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해온 시점이었다. 백제와 신라가 한강 하류와 중·상류로 군대를 나누어 공격해옴으로써 고구려로서는 군사력을 집중시켜 대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돌궐의 침략에 이미 주력군의 일부가 동원되는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던 셈이다. 돌궐은 555년 유연을 멸망시킨 후에는 고구려에 대한 압박 강도를 한층 더 높여왔다.
북제(北齊: 550~577년)와의 관계 역시 시작부터 우호적이지 않았다. 552년 북제 문선제(文宣帝: 550~559년)가 영주(營州: 요령성 조양)에 왔는데, 최류(崔柳)를 사신으로 보내 양원왕을 겁박해 북위 말에 고구려로 흘러들어간 유인(流人) 5,000호를 데리고 돌아갔다(『북사(北史)』 권94 고구려). 한 호를 5명으로 산정하면 고구려는 2만 5,000명의 인적 손실을 입은 셈이다. 군사력 내지 노동력의 가용 측면에서 고구려가 막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비록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직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북제의 동향은 그 이전부터 고구려의 감시권에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북제의 관계가 개선되는 평원왕 2년(560년)까지 돌궐·북제와의 긴장국면이 고구려로 하여금 한강 유역 상실 전후 남방전선보다 북방의 방어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대외적인 조건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한강 유역 상실의 역사적 의미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고구려 입장에서 그것은 곧 한강 유역이 가지는 군사적·외교적·경제적 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더욱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동안 누려왔던 혜택이 적대국인 신라에게 넘어갔다. 고구려로서는 단순 손실을 넘어 자국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소지가 컸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590년대에 당대 최고의 장군 온달은 신라의 아단성(阿旦城)으로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삼국사기』 온달전). 642년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빼앗긴 후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고구려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러 갔다. 이때 보장왕도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보내줄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웠다(『삼국사기』 선덕왕 11년). 이들이 말한 ‘계립현과 죽령 서북쪽의 땅’이란 곧 한강 유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강 유역 상실 후 9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지배세력의 한강 유역에 대한 연고의식과 신라로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고자 했던 간절한 염원이 잘 드러나는 기록이다.
신라는 한강 하류를 장악함으로써 중국으로 배를 띄울 수 있는 항구를 확보하였다. 이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와 백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단독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564년 북제의 무성제(武成帝: 561~565년)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다음 해에는 책봉까지 받았다(『북제서(北齊書)』 권7; 『삼국사기』 진흥왕 25년·26년). 이후 신라는 남북조와 수·당대에 중국 여러 국가와 빈번한 관계를 이어갔다. 신라와 중국의 교섭·교류는 문화적·경제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언제든 군사동맹과 원조로의 발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러한 점이 가장 뼈아팠다. 이전까지 고구려가 중국을 상대로 한 주요 전략은 방어 위주의 장기농성전을 유도함으로써 중국 원정군의 피로를 증대시키고 보급품을 소모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라가 중국 국가들과 교류하여 그들을 한반도의 전쟁에 끌어들일 경우 문제의 소지가 컸다. 고구려로서는 중국 측의 대규모 군사력도 부담이겠지만, 신라가 중국군의 보급을 조달할 여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그동안 추구해왔던 지연전술의 구사가 무력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648년 나·당 동맹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을 살피면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결국 신라 삼국 통일의 원동력도 한강 유역 차지에서 비롯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한강 유역 상실이 고구려 멸망의 단초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상실함으로써 물길교통로이자 여러 지류를 수렴하는 장대한 한강 유역의 경제적 가치를 신라에게 고스란히 내주었다. 한반도는 동쪽과 서쪽 지역 간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내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육상교통로가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통시대에는 한강의 물길이 동-서 간 유통로 기능을 담당하였다. 수운(水運)은 육상교통로에 비해 느렸지만 여러 대의 배를 동시에 이용할 경우 대량 수송이 가능한 장점이 컸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한반도 중부지역의 물길유통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소백산맥 고갯길로 인해 신라가 한반도 중부를 잇는 완전한 수운교통로를 개통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한강의 물길을 통해 중국 선진문물을 수도 경주에까지 효과적으로 수입하였고, 한반도 중부 내륙의 유통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한강 본류와 지류 인근의 비옥한 농경지로부터 얻은 농업생산력 증대는 당연한 경제적 덤이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 상실 후 모든 영역에서 신라와 국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곧 고구려와 백제가 바닷길을 통해야만 서로 교류·교섭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연맹을 자연스럽게 차단하는 효과를 누리게 된 셈이다. 삼국 관계의 흐름을 살피면, 한 나라의 국력이 강해질 때 다른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근구수왕 부자의 전성기에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관계를 맺었고, 5세기 광개토왕-장수왕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군사적 협력관계하에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6세기 중반 나·제 동맹군의 한강 유역 장악은 그것이 극대화된 결과물이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육상교통로를 통한 고구려와 백제의 접촉은 쉽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와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동시에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라는 이후 그러한 상황을 종종 맞닥뜨렸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국면이 도리어 신라로 하여금 수·당과의 군사동맹을 촉발시키는 역설적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전의 양면 같은 삼국시대 외교와 전쟁양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