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세기 전반 북위·양과의 관계
1. 6세기 전반 북위·양과의 관계
462년 장수왕이 대북위 외교를 재개한 이후 고구려는 남북 왕조와 모두 교섭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북위와의 교섭 밀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높았다(임기환, 2003). 이 무렵 고구려가 북위뿐 아니라 남조의 송 그리고 남제를 상대로 한 외교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분열된 국제관계를 이용한 양단외교(兩端外交)로 보기도 하지만(徐榮洙, 1981; 김진한, 2006),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는 어디까지나 북위였다.
이러한 경향은 6세기에 들어서도 동일하였다. 500~523년까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년 북위에의 조공이 이어졌고, 1년에 2, 3회인 경우도 여러 해 보인다. 그러다가 518년의 3회에 걸친 조공을 끝으로 531년까지는 겨우 한 차례의 조공 기록만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교섭의 중단현상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사서에 전하지 않고 있으나, 북위에 내란이 일어나자 고구려가 요서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井上直樹, 2001; 李成制, 2001). 이 경우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사서에 양국 간의 교섭 사실이 보이질 않는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기간에 고구려가 북위와 빈번히 교섭해야 했던 연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와 북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502년 소연(蕭衍)이 남제(南齊)를 무너뜨리고 양을 건국하였고, 양나라는 그의 치세(502~549년) 전반기 동안 남조의 여러 왕조 가운데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金鍾完, 2002). 남북조의 대결상황에서 양이 등장하여 한창 세력을 떨쳤다는 것은 동아시아 세계의 국제관계에 변수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고구려가 양에 보낸 사절은 모두 10차례에 불과하였다.주 001 이것은 고구려의 대북위 교섭과 양에 대한 교섭이 서로 연동하여 전개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물론 520년대부터 북위가 동·서위로 나뉜 534~535년까지 고구려의 남북조에 대한 외교는 거의 양 일변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종전에 볼 수 없었던 경향이라는 점에서 친북위 외교에서 양으로의 접근이라는 외교전략의 변화로 이해할 수도 있다(井上直樹, 2001; 金鍾完, 2002). 그 원인으로 안원왕이 재위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하여 안장왕(安臧王) 피살에 따른 내정 문제로 대외전략이 침체되었다거나(徐永洙, 1981), 〈한기묘지〉의 “효창(孝昌) 연간(525~528년)에 [변경 방어에] 실패하여 고구려가 침입해와 [한상을] 요동으로 끌고 갔다(孝昌失馭, 高麗爲寇, 被擁遼東)”는 언급을 근거로 이 시기 북위에 적대하였던 고구려는 이를 보완할 외교전략으로 대양외교를 전개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520년대는 북위 전역이 내란에 휩싸여 있었던 상황이고, 고구려의 요서 진출이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이 기간에 북위와의 교섭(523년 조공)이 거의 전무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고구려 사절이 양에 이른 것은 520년(2회)과 522년, 527년의 네 차례뿐이다.주 002 이렇게 볼 때 혼란을 수습한 북위와 그 뒤의 동위에 대해, 고구려가 매년 한 차례씩 사절을 보낸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행은 거의 정례화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金鍾完, 2002). 이 무렵 양에의 견사는 541년 단 한 차례에 그쳤던 것과는 대조적인 양상이다. 즉 북위의 사정에 따라 고구려는 양에 견사한 것이지 외교전략의 주요 대상을 바꾼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주시했던 상대는 역시 북위였던 것이다. 양에의 견사 역시 북위에서 일어나고 있던 혼란의 추이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북위의 내란 시기에 고구려가 요서 방면으로 군사행동에 나섰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상(韓詳) 등을 데려왔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고구려의 군사행동이 북위를 상대로 한 적대행위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떻게 북위의 내란에 개입하게 되었던 것일까. 북위에서는 519년 우림(羽林)의 난을 거쳐, 523년(안장왕 5) 파락우발릉(破落于拔陵)이 옥야진(沃野鎭)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6진의 난이라고 불리는 내란이 전개되었다. 이 난은 525년 초 무렵까지 동으로는 요서에서 서로는 감숙(甘肅) 남북부에서 섬서(陝西)에 걸친 일대까지 확산되었다(谷川道雄, 1971). 반란은 530년 7월 무렵에 가서야 평정되었다(『자치통감(資治通鑑)』 권154). 그렇지만 난을 토벌한 것은 북위 조정이 아니라 사병(私兵) 집단을 기반으로 한 이주씨(尒朱氏) 등의 세력이었다. 이에 이주씨 세력과 북위 조정 사이의 대결이라는 또 다른 내란이 벌어졌고, 그 결과 북위는 534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반란의 여파는 요서 지역에도 미쳤다. 524년 영주성민(營州城民) 유안정(劉安定)·취덕흥(就德興) 등이 난을 일으켜 자사(刺史)를 잡고 성에 웅거하였다. 이 반란세력은 526년 평주(平州)를 함락하고 자사를 살해하는 등 기세를 떨치다가 529년에 북위 조정에 항복하였다(『자치통감』 권150·151·153). 영주의 서쪽인 안주(安州)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한상처럼 고구려로 들어왔던 강과(江果)는 520년대 말 반란군에 맞서 안주부성(安州府城)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방이 반란군으로 둘러싸이게 되었지만, 북위 조정의 구원은 안주에 이르지 못하였다. 북위 방면으로의 탈출도 불가능하였다(『위서(魏書)』 권74). 524년 무렵부터 이미 요서 일대에는 북위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李成制, 2001).
그렇다면 요서 방면으로 고구려가 군사행동에 나섰던 것은 북위를 상대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북위의 내란이라는 정세 변동에 따른 대응이라고 보아야 온당하다. 결코 북위를 상대로 적대하겠다거나 양과 연결하여 북위에 맞서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북위의 내란을 계기로 요서 지방에 거점을 마련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가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고 보인다(李成制, 2001). 어디까지나 제한적 의미에서의 군사행동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요서 진출 목적이 북위를 상대로 한 적대행위였다기보다는 요서 지역에서의 우위 확보에 있었다는 점은 이후 양국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532년 안원왕은 북위의 책봉을 받았다. 이에 고구려는 523년 이후 처음으로 조공을 보냈다. 여기서 고구려의 요서 진출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가 재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양국의 책봉·조공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고구려는 유인을 송환하지 않았다.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북위의 요구도 없었다. 이로 미루어 북위 측이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양국 관계의 회복은 520년 이전 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당시 현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李成制, 2001).
이제 앞서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6세기에 들어서 남조 양의 약진, 북위의 내란이라는 변수가 나타났음에도 고구려는 북위 위주의 대외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빈번한 견사를 통해 대북위 외교를 전개해 나가야 했던 연유는 양국 관계에 무언가 현안이 걸려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 491년 문자왕의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양국 간의 분쟁일 것이다. 장수왕이 사망하자 북위는 문자왕을 책봉하면서 태자의 입조(入朝)를 요구해왔고, 고구려가 종숙(從叔)을 보냄으로써 분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한 그간의 이해는, 북위의 태자 입조 요구를 장수왕의 죽음을 틈타 고구려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의도로 보거나(노태돈, 1999) 고구려가 끝내 북위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종숙의 입조로 대신했다는 점에서 북위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견지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보아왔다(朱甫墩, 1992). 이러한 이해는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북위가 고구려에 요구하는 번신(藩臣)으로서의 태도와 독자성을 전제로 한 고구려의 대응 사이에 분란의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하고 그 세력권 내에서의 패자임을 확인해주었던 실례는 찾기 어렵다. 적어도 504년(문자왕 13)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과 북위 선무제(宣武帝) 간의 대화에서 “고구려는 대를 이어 상장(上將)이 되어 해외를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를 정벌해왔다. … 힘써 위압과 회유의 책략을 다하여 해악을 끼치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동쪽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 하라”는 북위 황제의 발언(『위서』 권100)이 있기까지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는 인정되지 못하였다(李成制, 2015). 그 전까지 북위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북위에 순종해야 할 동방 제국의 하나였을 뿐이다. 475년 물길(勿吉)이 사자 을력지(乙力支)를 보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도모할 계획임을 밝혔을 때 북위 측이 “삼국은 같은 번부(藩附)로서 마땅히 화평할 것이며, 서로 침입하여 어지럽히지 말라”고 한 답변 내용(『위서』권100)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북위 효문제(孝文帝)는 장수왕의 죽음 소식에 북위 역사상 최초로 거애례(擧哀禮)를 거행하였다. 이 행사의 의미에 대해 그간의 연구는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보는 입장에서 이해해왔다. 하지만 이 의례의 정치적 의미를 살핀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박승범, 2017). 황제의 거애례는 양자 간의 예적 지배관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북위는 고구려 국왕을 다른 나라의 군주가 아닌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신하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분란이 수습되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질 않는다. 그보다는 이 같은 인식과 함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고 밝힌 북위의 입장이 고구려와 그 주변 세력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북위는 472년 백제 개로왕이 보낸 청병사에 대해 군사적 제휴의 가능성을 비추며 백제를 부추긴 적도 있었다(『위서』 권100). 북위는 고구려와 그 주변 국가 간의 관계에도 간섭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의 간섭을 차단하고 백제와 같은 또 다른 도전세력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북위를 중심으로 한 대외전략을 유지해나가야 했다. 그리고 504년 고구려는 북위로부터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그토록 고대하던 서방관계의 안정을 이루고 이를 토대로 백제·신라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는 양국 간 우호관계가 유지되어야 했다. 6세기 전반에 보이는 북위 위주의 교섭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위의 내란을 수습하고 들어선 동위에 대해 고구려가 정례화된 듯한 사절 파견을 계속했던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북위의 혼란 속에서 고구려가 새롭게 확보한 요서 일대에서의 세력 우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양국 간의 우호는 필수적이었다.
한편 504년 북위 선무제가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했던 것과 관련하여 당시 북위는 잦은 반란과 양과의 전쟁으로 전대에 비해 약세에 있었기에, 고구려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김진한, 2006). 그러나 백제의 청병외교와 북위의 대응에서 보듯이, 북위가 군사행동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간섭전략만으로도 충분히 고구려와 주변 제국 간의 관계를 뒤흔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북위가 기존의 입장을 포기하고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중단 없이 전개했던 결과이자 성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