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돌궐의 침입과 북제 문선제의 유인 송환 요구
2. 돌궐의 침입과 북제 문선제의 유인 송환 요구
6세기 후반기에는 북위가 6진의 난을 거쳐 동위와 서위로 양분됨에 따라 종래의 남북 대립에 동서 대립이 더해졌다. 동위와 서위는 얼마 가지 못하고 북제와 북주로 교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막북(漠北)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한때 내분으로 가한(可汗)이 북위에 망명하기도 했던 유연(柔然)은 북위 말의 혼란을 틈타 다시 강성해져 동·서위를 위압하였다. 그러나 곧 그 지배 아래 있던 돌궐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가한 아나괴(阿那瑰)가 자살하였다(552년). 유연은 곧 양분되어 각각 가한을 세웠으나 모두 돌궐에 패하여 지리멸렬하였다. 돌궐이 유연을 공멸하고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자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金鍾完, 2002).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유연이 약해지고 새로운 세력 돌궐이 한창 등장하고 있던 무렵, 고구려의 서변에도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552년 북제 문선제가 고구려의 서쪽 경계와 맞닿은 영주(營州)까지 와서 북위 말에 고구려로 들어온 유인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천보(天保) 3년(552)에 문선제가 영주에 이르러 박릉(博陵) 사람 최류(崔柳)를 고구려에 사절로 보내 북위 말에 [들어간] 유인(流人)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에게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만약 [고구려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거든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하였다. [최유가 고구려에]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며 성(成:고구려 양원왕)을 주먹으로 쳐서 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성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고, 이에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최유는 5,000호를 이끌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_ 『북사(北史)』권94
이러한 북제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양국 관계가 악화될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고구려는 바로 전해인 551년(양원왕 7년)에 나·제 동맹군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잃었을 뿐 아니라(『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4)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침공해온 유목세력 돌궐의 공세를 물리쳐야 하였다(『삼국사기』 권19). 그러므로 북제와의 관계마저 악화된다는 것은 북방과 남방의 위협에 더하여 서쪽 방면에서까지 고구려가 위기를 맞이하게 됨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북제와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것은 피해야 하였다. 북제 측도 고구려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짐작된다(盧泰敦, 1976).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북제의 요구에 따르려 하지 않았는데, 그 연유는 무엇일까. 그러던 고구려는 거부의 입장을 바꾸어 유인을 돌려보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강경한 거부의 입장을 바꾸게 되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북제의 유인 송환 요구로 불거진 서쪽 방면의 문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고구려의 서북방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사료에 따르면 “(551년) 9월에 돌궐이 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옮겨서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병력 1만 명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한다. 문선제가 유인의 송환을 요구하기 한 해 전에, 유목세력의 하나인 돌궐이 고구려의 서북 중진(重鎭)인 신성(현재의 요령성 무순시 고이산성)을 침공해왔고, 백암성(현재의 요령성 등탑시 연주성)까지 이른 돌궐군을 상대하기 위해 고구려는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돌궐 침입 기사의 사실성 여부에 의문을 품고, 북제의 유인 송환 문제에 더 무게를 둔 견해가 있다(盧泰敦, 1976). 돌궐이 유연을 격파한 것은 552년으로, 그 1년 전에는 유연 세력이 존재하고 있어 돌궐이 요하 이동의 신성까지 침공해올 수는 없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돌궐의 침입 기사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여겨, 요서 방면에서의 긴장감은 유인 송환을 요구하며 거란·고막해(庫莫奚) 원정에 나서고 있던 북제의 군사적 움직임에 한정하였다.
그런데 금산(金山: 알타이산) 남록에 거주하던 돌궐이 성장의 기회를 잡은 것은 487년이었다. 유연 가한 두륜(豆侖)이 고차(高車) 제부(諸部)를 동원, 북위를 공격하려다가 반발을 샀고 양측의 대결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520년 가한 아나괴가 북위에 투항하면서 돌궐은 유연의 통제에서 벗어나 동진하기 시작하였다. 오르도스 이북의 몽골고원으로 진출한 뒤, 돌궐은 철륵(鐵勒) 제부를 공격하여 이들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돌궐은 서위에 구혼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고, 551년 가한 토문(土門)이 서위 장락공주(長樂公主)와 혼인하였다(『북사(北史)』 권99). 돌궐의 급성장은 이미 551년 이전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돌궐 침입 기사는 사료 그대로 인정해도 좋다고 여겨진다. 그 침입 경로도 다른 사례에서 유추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영락(永樂) 5년조의 공략 대상인 패려(稗麗)는 거란(契丹)의 일부로 고구려군은 이들을 요하 상류를 거치는 경로를 통해 공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으로 이 경로를 이용하여 후연군(後燕軍)의 고구려 침공도 가능하였다(임기환, 2013). 645년 당이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 그 선봉을 이끈 이세적(李世勣)은 요하 상류를 건너 무순(撫順)의 현도성(玄菟城)을 급습하였는데, 이때 당군이 이용한 경로도 요하 상류로 우회하는 노선이었다(『책부원구(冊府元龜)』 권117). 따라서 유연을 무너뜨리고 초원지대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고 있던 돌궐 세력의 일부가 동쪽의 거란을 지나쳐 요하선까지 오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돌궐의 신성 침입이라는 서북방의 갑작스러운 소요가 채 가시기도 전에 북제가 유인의 송환을 요구해왔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게다가 북제가 유인 송환을 요구해온 것은 문선제가 고막해를 친정하고(552년 3월, 『북제서(北齊書)』 권4) 영주에 이른 뒤였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고구려의 국경 일대에 비상한 위기감을 일으킨 채, 북제는 사신 최류를 고구려에 보냈던 것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직면해 있던 서북방의 위기상황은 돌궐의 침입까지 더해져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북제의 유인 송환 요구는 그 동북방에 대한 군사원정과 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또다시 친정하여 거란을 크게 격파하였다(『자치통감』 권165). 북제는 동북방 일대에 군사행동을 거듭하였고, 그것도 황제의 친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북제의 동북방 경영이라고 불릴 만한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그러면 북제의 동북방 경영은 어떤 의도에서 추진되었을까. 북위 말부터 이어져 오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바꾸려 했던 이유를 여기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배경과 관련하여, 이 무렵 벌어지고 있던 북방 세계의 정세 변화가 무관할 수 없다. 유연의 가한을 자살하게 할 정도로 돌궐의 승리는 대단한 것이었고, 돌궐 토문은 이리가한(伊利可汗)으로 자립하였다(『자치통감』 권164). 그리고 유연의 붕괴에 따른 영향은 곧바로 막남(漠南)으로 밀려왔다. 유연의 남은 무리가 도망쳐왔던 것이다(『자치통감』 권165). 이에 북제는 돌궐의 직접적인 위협에 대비해야만 하였다. 554년부터 장성(長城)의 축조에 나섰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여 준다(李在成, 1996).
이처럼 북방에서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제는 동북방 경영을 추진하였다. 시기나 지역적 관련성으로 보아 북제의 북방 대책과 동북방 경영은 무관할 수 없다. 북제는 고막해와 거란을 격파함으로써 동북방에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이들 세력은 북방의 정세 변화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세력이었다. 북제의 동북방 경영도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북방의 돌궐이 조만간 세력을 동쪽으로 진출시킬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에 북제는 동북방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정비해두어야 했다. 북제가 552년 갑작스럽게 고구려에 유인 송환을 요구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여겨진다(李成制, 2001).
유인은 북제의 동북방 경영에도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을 통해 북제는 통치력을 영주 일대에서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돌려보내야 했던 유인은 일부가 아니었다. ‘북위 말 유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전면적인 송환을 의미하였다. 5,000호에 이르는 유인을 돌려보냄으로써 고구려는 유인을 매개로 한 정책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북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대응은 과거에 비해 소극적이었다. 그만큼 예전만 못한 국력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대외적 위기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 고구려가 직면했던 대내외적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입장(盧泰敦, 1976)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북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된다. 이 같은 입장에 따르면 고구려는 문제가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사태를 마무리했다고도 볼 수 있다(김진한, 2007).
그렇지만 양원왕 8년 고구려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 먼저 북제의 위협은 단기적 위기였다는 점이다. 북제의 무력시위는 실제로 고구려와 대결하겠다는 것이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위협 정도에 비해 고구려가 내놓아야 했던 대가는 너무 컸다. 두 번째는 서방의 위협에 대해 고구려가 소극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돌궐이 침입하자,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격파한 일은 이를 보여준다. 고구려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대응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고구려는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도 고려하여 유인을 돌려보냈다고 여겨진다.
552년 고막해가 공격받을 무렵부터 고구려는 북제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에 북제의 동북방 경영이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고 보인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돌궐의 존재는 고구려의 서방도 위협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고구려는 바로 1년 전에 이미 그러한 충격에 맞선 적이 있었다. 이를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그 세력이 또다시 고구려로 밀려들어올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즉 강력한 위협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북제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없었다. 돌궐의 성장이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양국은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북제와의 우호적 관계는 고구려가 남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점을 고려한 결과, 고구려는 유인을 돌려보냈다고 생각한다(李成制, 2001).
이제 유인을 북제에 넘겨주는 대신 고구려가 얻어낸 성과를 정리해볼 차례이다. 이와 관련하여 560년 북제 폐제(廢帝)가 평원왕을 ‘사지절(使持節)·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요동군공(遼東郡公)·고구려왕(高句麗王)’에 책봉한 사실이 중요하다. 동이교위 관이 포함된 책봉호는 북제가 고구려를 동방의 패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동방 세계에서 패권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상태에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의 성장과 고구려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북제는 고구려의 적대세력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李成制, 2001).
고구려가 얻은 성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서북방의 위험요소를 덜어낸 고구려가 남방의 위협에 대해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554년 고구려가 대규모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했던 일(『삼국사기』 권27)은 이를 말해준다. 아울러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국내 통치체제 재정비를 선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552년부터 장안성(長安城)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이에 대해서는 후술)은 그 한 예로 방비체제를 정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李成市, 1990; 東潮·田中俊明, 1995). 즉 유인 송환을 계기로 고구려는 위기에서 수습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의 하나인 내정의 혼란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칠부(居柒夫)가 신라군을 이끌고 충주(忠州) 지역으로 진군해오자 혜량법사(惠亮法師)가 ‘지금 우리나라에는 정란(政亂)이 벌어지고 있어 멸망이 멀지 않았다’라며 귀순을 청했다는 일화(『삼국사기』 권44)는 551년 무렵 고구려의 국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널리 알려져 왔다.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내부 문제가 대외적 위기를 불러왔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만 이 정치적 혼란이 대외적 위기상황에 직면해서도 여전했을까 하는 의문도 필요하다고 본다. 장안성 축조를 포함하여 551년 이후 고구려가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개한 여러 조치는 결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나오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충주가 신라와 접경지대에 있어 양국의 역관계 변화에 민감한 지역이었음(李成制, 2020)을 염두에 두고 위 일화의 의미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