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의 대북제외교와 북제의 진흥왕 책봉
3. 신라의 대북제외교와 북제의 진흥왕 책봉
서방의 위기는 일단락되었지만, 남쪽에서의 위협은 여전하였다. 특히 신라의 눈부신 성장세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551년 고구려의 한강 유역 상실부터 554년 관산성(管山城)전투, 562년 신라의 대가야(大伽倻) 병합으로 이어지는 정세 변동은 어느새 신라가 강국으로 성장하였음을 알려주는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비약적인 신라의 영역 확장으로 인해 고구려가 느꼈을 위기감은 상당하였다(李弘稙, 1954; 李成市, 1990; 延敏洙, 2007; 鄭孝雲, 2006; 이영식, 2006).
이에 고구려의 관심은 신라의 배후에 위치한 왜국(倭國)에 자연스럽게 모아지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신라의 성장이 몰고 온 위기라는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그 대응은 한참 뒤에야 나온 것이라는 점에 관심이 간다. 고구려는 570년(평원왕 12년)에 가서야 대왜외교에 나선 것이다(李成制, 2009).
신라의 성장세는 고구려와 중국 남북조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북제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진에 사절을 보낸 것이다. 대중국 관계에서 보이는 신라의 외교적 약진 역시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나서게 된 원인의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井上直樹, 2008). 신라가 북제에 조공한 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제와 연대하려는 것이었으며, 북제의 책봉은 북제가 신라를 중시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고구려가 북제에 대해 갖고 있던 경계심은 한층 강화되었고, 양국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여기에 더해 신라가 진에 입조함으로써 양국이 제휴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외교적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564년 신라가 북제에 조공하자, 565년 북제 무성제(武成帝)는 신라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낙랑군공(樂浪郡公)·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북제서』 권7). 양국이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북위가 왕조를 연 이래 565년에 이르기까지 북조의 어느 왕조도 고구려 외의 다른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북제의 신라왕 책봉으로 일변하였다. 더욱이 북제는 고구려왕의 책봉호에 포함되던 ‘동이교위’ 관을 신라왕의 책봉호에 포함시켜 고구려를 더 이상 주된 교섭 상대로 여기지 않게 되었음을 드러냈다(盧泰敦, 1976). 이는 고구려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음에 분명하다(井上直樹, 2008).
그러면 북제가 신라왕을 책봉한 이후, 양국 관계에는 어떤 양상이 나타났을까. 이를 살피는 것은 고구려가 대중국 관계에서 직면했던 위기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구려는 564년과 565년에 연이어 북제에 사절을 보냈다. 이 가운데 적어도 565년의 사절 파견은 신라의 조공에 대해 북제가 책봉해준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신라의 외교가 고구려와 북제의 관계에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사실은, 북제의 책봉 이후 진흥왕이 보낸 사절이 북제에 이른 것은 572년 단 한 차례에 불과하며, 북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책봉·조공관계의 성립으로 양국은 고구려를 상대로 한 현안에서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북제의 입장에서 신라의 접근은 고구려를 뒤흔들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을 법하다. 이에 북제는 진흥왕을 책봉함으로써 신라와 고구려의 대결관계에서 신라 쪽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반면 신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북제와의 연계는 고구려를 상대로 한 대외전략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진흥왕이 북제에 사절을 보내 조공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후 양국이 어떤 형태로든 유대를 돈독히 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북제의 후원을 필요로 했을 신라는 물론이고 북제조차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신라의 외교는 진에 집중되었다. 566년의 조공 이후 567·568·570·571년 연이어 사절을 진에 보냈다. 이에 대해 신라가 진과 제휴함으로써 북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곤경에 빠뜨렸다고 이해하기도 한다(井上直樹, 2008). 그렇지만 신라의 사절 파견은 신라의 진에 대한 접근을 알려줄 뿐이어서 그것만으로 양국이 제휴했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신라의 조공에도 불구하고 진의 책봉은 없었다. 이처럼 고대 동아시아세계 국가 간의 외교관계에서 조공에 짝하여 책봉이 없는 경우는 제도적 외교관계를 갖지 못한 예물의 증여와 통사(通使)에 불과하였다(金翰奎, 1999). 반면 고구려 평원왕은 562년 진의 책봉을 받은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568년에 이르면 신라의 외교는 진에 국한되었고, 그 내용도 일방적인 사절의 파견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시기 고구려와 신라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 주목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로 보아, 신라와 남북조 간의 외교관계로 인해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나서게 되었다고 보는 이해는 따르기 어렵다.
물론 고구려를 수세로 몰아넣은 신라의 성장은, 중국 남북조 모두가 관심을 가질 만한 국제적 변화였음에 틀림없다. 북제와 별개로 남조의 진조차 565년 신라에 사절과 승려를 보내고 경전을 전했다는 사실(『삼국사기』 권4)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북제가 보인 이후의 행동은 그것이 관심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북제가 신라왕을 책봉함으로써 고구려의 독점적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은 주목되어야 하지만, 그 의미의 적용은 제한적인 차원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조가 신라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라의 군사적 승리가 계속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반격에 나서면서 상황은 일변하였다(이에 대해서는 후술). 이에 북제는 신라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북제가 신라를 대신하여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 나갔다는 사실은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무렵 백제가 북제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였고(567년), 북제는 571년 백제왕을 ‘사지절(使持節)·시중(侍中)·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대방군공(帶方郡公)’에 책봉하였다. 이것은 백제가 북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최초의 일이었고, 이를 계기로 양국 간에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을 가능성이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 용흥사지(龍興寺址) 출토 반가상(半跏像) 등의 물질자료를 통해 엿보인다(田中俊明, 2002). 570년을 전후한 시기 북제의 관심은 백제로 옮겨가 있었고, 양국의 교류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572년 신라의 북제 견사는 긴밀해지고 있던 북제와 백제의 관계에 자극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북제가 신라에 보였던 관심은 어째서 이어지지 못하였던 것일까. 570년에 가서야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나서게 되었던 것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가 당면했다고 하는 신라의 위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은 어느 시점까지 이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磨雲嶺碑)〉는 과거 고구려령이었던 함경남도 일원을 신라가 차지한 뒤 만든 비로, 고구려가 왜국에 사절을 보낸 시점에서 불과 2년 전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이 두 비는 고구려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던 신라의 군사적 위협이 어떤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로 여겨 왔다(李弘稙, 1954; 盧泰敦, 1976; 李成市, 1990; 金恩淑, 1994; 延敏洙, 2007; 이영식, 2006; 井上直樹, 2008).
특히 두 비의 “ … 사방을 탁경(託境)하고 널리 백성과 땅을 획득하였으며, 이웃나라가 신의를 서약하여 평화의 사절이 서로 통하였다. … 이에 무자년(戊子年: 568년) 8월 관할하게 된 곳을 순수하여 널리 민심을 살펴 위로하고 상을 내려주고자 한다”라는 구절은 이 무렵 고구려와 신라가 화평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라 보아왔다(盧泰敦, 1976). 즉 비문의 ‘이웃나라’는 고구려이며, ‘평화의 사절이 서로 통하고 있었기’에 왕이 개마고원 동쪽 사면에 위치한 이 지역까지 순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551년 이후 일련의 긴박한 상황에 몰린 고구려가 일단 상실한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신라와 타협한 뒤, 내부 정비와 서북방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비에는 다른 순수비에선 보기 어려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강조하는 문구가 유달리 많이 확인된다. 이 점에서 빼앗긴 지역을 되찾으려는 고구려의 거센 반격이 있었기 때문에 통치의 자신감보다는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화친을 강조함으로써 그 기세를 반감시키려 했다는 지적(盧鏞弼, 1996; 徐榮一, 2001)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두 비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하기천면(下岐川面) 황초령과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마운령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그만큼 신라가 고구려 영역 깊숙한 곳까지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비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같은 해 10월조 기사가 전하는 사실(『삼국사기』 권4)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진흥왕이 이 지역을 순수하고 비를 세웠던 바로 그달인 568년 10월, 신라는 이들 지역을 관할하던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비열홀주의 치소가 오늘날의 안변(安邊)이며, 달홀주의 치소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조치의 의미는 ‘퇴각’의 일환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를 함흥 일대의 불리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후퇴라고 보는 이해도 있지만(張彰恩, 2014), 비열홀주만이 아니라 북한산주의 폐지도 함께 시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진흥왕이 이 두 비를 세운 직후, 신라군은 함남 지역에서 퇴각하여 강원도 북부로 남하하였던 것이다(李成制, 2009).
이러한 사실은 이 무렵 고구려가 함경도 방면을 잠식해오던 신라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고, 잃었던 영토의 일부마저 회복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신라군의 퇴각은 한반도 동부 방면에 그치지 않았다. 신라는 비열홀주를 폐지하면서 북한산주도 폐하고 경기 남부의 이천(利川)에 새로이 남천주를 두었다. 북한산주의 설치가 신라의 한강 유역 확보와 관련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남천주의 설치는 신라군이 한반도 서부에서도 퇴각하였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즉 신라군은 전 전선에서 퇴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신라의 군사적 위협은 더 이상 고구려에게 위기감을 줄 수 없었다. 고구려를 위기로 몰아가던 전황은 568년에 들어서 반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560년대 말의 정세를 파악함에 있어, 고구려가 위기에 몰려 있었다는 이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550년대 이래의 위기 국면이란 이미 과거의 일이었고, 고구려는 충격에서 벗어나 원상 회복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군이 전 전선에서 퇴각한 사실은 그 회복의 추세가 전면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李成制, 2009).
여기에서 신라의 대중국외교가 일시적인 성과를 얻는 데 머물렀고, 북제가 신라에 대해 보인 관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갔던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고구려가 직면하고 있던 과제를 ‘신라의 성장이 몰고 온 대내외적 위기에서의 탈출’로 볼 수는 없겠다. 위기가 극복되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가 그것을 현안으로 삼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현안을 고구려가 얼마 전에 겪었던 위기와 관련지어 보면, 그 위협의 심각성으로 보아 문제의 소재를 따져보고 재발 방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신라가 어느덧 성장하여 위협을 가해왔다는 것이나 고구려가 북조와의 타협적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기 곤란해졌다는 것은 고구려를 둘러싸고 있던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새로운 시대적 변화는 그것이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라라는 적대세력이 서방의 중국세력과 연계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일이었고, 재발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북제의 신라왕 책봉이 그 실례였다. 더욱이 고구려가 신라의 군사적 위협을 일단 잠재울 수는 있었지만, 그 위협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북제와의 관계도 고구려가 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인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북제에의 사절 파견을 중단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570년 북제가 고구려에 사절을 보냈음을 기재한 〈배유업묘지(裴遺業墓誌)〉는 문헌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양국의 교섭 사실을 알려준다(王其褘·周曉薇, 2012). 특히 묘지는 배유업의 관력(官歷)을 기술하며 고구려 사행을 강조하고 그것을 전한(前漢)의 육가(陸賈)와 장건(張蹇)이 남월과 서역에서 거둔 성과에 비견하고 있다. 이는 당시 북제와 고구려의 관계가 양호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사료라고 보인다(井上直樹, 2013). 이때 배유업이 거둔 성과와 관련해서는 묘지가 육가와 장건을 언급한 뒤 “어찌 [공이] 만리 밖까지 나아가 국위를 떨치고, 구이를 억눌러 굴복시킨 것과 같을 수 있으리요. 현도에서의 공을 세웠음에도 노룡의 칭송을 뽐내지 않았네(豈如申威萬里, 剋服九夷. 旣有玄菟之功, 不賣盧龍之賞)”라는 구절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용으로 미루어 배유업의 사행 동안 양국 관계에서 북제가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570년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나선 배경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가 사절을 왜에 보낸 연유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적어도 이것이 어떤 취지에서 나온 외교전략이었는지를 짐작하여 볼 수는 있다. 고구려가 552년부터 평양(平壤)에 축조하고 있던 장안성을 통해 그 취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은 장대한 석벽(石壁)으로 평양 시가지를 에워싼 총길이 23km의 평산성(平山城)이었다. 이 성은 내성(內城)부터 쌓기 시작하여 외성(外城)을 거쳐 593년 북성(北城)의 조영으로 완성되었다. 장안성 축조를 위해 고구려는 장장 42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였다(東潮·田中俊明, 1995). 여기에서 장안성의 축조가 결정된 해가 552년이어서 고구려가 직면하고 있던 대외적 위기와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위기의 국면이 나타나고서도 한참을 지난 566년이었다. 이때부터 내성의 성벽을 쌓았던 것이다. 또한 불과 2년 뒤인 568년에 이르면 대신라 전선의 전황이 반전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성벽 축조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장안성의 축조는 국방상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수동적으로 마련한 대책이라기보다, 고구려가 위기를 계기로 좀 더 기능적이고 체계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내성부터 차근차근 구획을 나누어 쌓았던 것으로 보아 장기적인 복안 아래 축조 계획을 입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일을 소요한 뒤에야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장안성 축조가 지향하는 바는 현재가 아닌 미래였다. 즉 고구려는 얼마 전 경험했던 위기를 되새겨 그 재발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장안성을 쌓아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래 지향 대책이 장안성 축조 하나였을 리는 만무하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방어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축성이나 군사력 육성도 필요하겠지만, 인접한 국가들과의 연계를 통해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전쟁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대외관계를 만들어두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의 축성이 한창이던 570년에 고구려가 왜국에 사절을 보낸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고구려는 남조의 진에도 566년과 570·571년 그리고 574년에 사절을 보냈다. 특히 570년의 사절 파견은 왜국에의 파견에 후속했다는 점에서 양자 간의 관련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절을 거듭 보내기 전까지 고구려의 대진 관계는 비교적 소원한 편이었다. 고구려는 진이 나라를 세우고 3년이 되던 해(561년)에서야 비로소 진에 사절을 보냈다. 진의 책봉은 이듬해에 있었지만, 고구려 사절이 다시 진에 나아간 것은 566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양국 관계는 왜국과의 적대적 관계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이로 보아 고구려의 대외전략은 대왜 외교뿐만 아니라 진과의 외교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외전략에서 왜국과의 연계만이 고구려가 직면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거나 대외전략의 전부였던 양 여겨서는 곤란하다. 고구려의 의도는 두 나라와의 우호관계를 구축하여 대외관계를 다원화하는 데 있었고, 이들이 신라와 북제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고구려가 장래의 국제관계 변화에 대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李成制, 2009).
고구려가 대왜외교를 추진한 의도는 직면한 위기상황에서의 탈출에 있지 않았다. 이에 왜국을 상대로 한 교섭 내용도 달리 파악되어야 할 것이고, 그 성패 역시 새롭게 판단해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