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구려의 대왜외교 추진과 대외전략
4. 고구려의 대왜외교 추진과 대외전략
570년(평원왕 12년) 고구려가 보낸 사자가 바다를 건너 왜국의 서해안에 상륙하였고, 572년 왜국 조정에 국서를 전달하고 귀국하였다(『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20). 평원왕대에 이르러 고구려는 왜국과의 외교관계를 열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서기』에는 516년 9월조와 540년 8월조 기록에서 고구려가 왜국에 사절을 보냈다는 내용이 보인다. 전자는 백제를 매개로 하여 고구려가 왜와 통교한 것으로 대왜외교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해도 있다(三品彰英, 2002; 徐甫京, 2008). 그러나 이 시기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적대관계였으므로, 양국 관계의 개선을 전제로 한 이 기록은 신뢰할 수 없으며(井上直樹, 2013), 후자의 경우 역시 의심스러운 기사에 해당한다(坂本太郞, 1965; 井上直樹, 2013).
기록에 따르면 첫 사행 이후 고구려는 574년까지 두 차례 더 사절을 왜국에 보냈다. 5년 동안 세 차례 사절을 보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왜국이 중요한 상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왜외교가 진으로의 사절 파견(570, 571, 574년)과 함께 전개되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한편, 574년의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가 왜국에 보낸 사절은 6세기 말까지 보이지를 않는다. 이후 사절 파견 기록이 없다는 점에 주목한 연구들은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가 왜국에 들어가는 595년까지주 003 2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중단되었다고 본다(李成市, 1990; 井上直樹, 2008; 이영재, 2012). 어렵게 추진된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세 차례의 사절 파견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 없이 일단락되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 점에서 먼저 고구려의 대왜외교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보자.
이때의 외교와 관련하여, 그간의 관심은 이른바 까마귀 깃털에 쓴 고구려의 국서 내용을 한반도계 관인 왕진이(王辰爾)가 해독했다는 일화에 모아져 왔다. 고구려가 처음으로 대왜외교에 나섰다는 징표이며(李弘稷, 1954), 국서가 고구려의 독특한 한문으로 기술되어 발생한 문제(李成市, 1990) 등의 이해가 그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은 상당 분량으로, 그 내용은 570년 4월에 고구려 사절단이 왜국 서해안에 도착하여 겪은 고초, 이들에 대한 왜국 조정의 영접과 대우, 국서와 예물의 증정(572년 5월), 그리고 귀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 사절이 도착지의 군사(郡司)를 왜왕(倭王)으로 오인하였다거나 고구려 사절단 내부에서 분규가 발생하여 대사가 살해되었다는 등 다소 이해하기 곤란한 내용도 보인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의 사절 파견부터 왜국 조정의 대응과 입장 등 외교 교섭의 경과를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우선 관심을 끄는 것은, 고구려 사절이 현재의 북륙(北陸)지방 월(越)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의 관리가 왜왕을 사칭하고 예물을 접수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도착지 월국이란 현재 일본의 혼슈 서북부지역으로 이시카와현(石川縣) 가나자와시(金澤市) 인근 지역으로 비정된다(李弘稷, 1954; 小嶋芳孝, 2008). 고대 일본에게 있어서 한반도와의 대외교통이란 주로 한반도 남부를 거쳐 서해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그 기점이 되는 곳은 훗날 대재부(大宰府)가 설치되는 북큐슈(北九州)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 한반도 남부에서 서해로 이어지는 항로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신라와 백제였다. 이들 국가와의 관계로 보아, 고구려가 이 항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점에서 570년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통상의 교통로가 아닌 별도의 경로를 이용한 것이었다(李成制, 2009).
그런데 이 해상교통로는 이때까지 국가 차원에서 운용된 적이 없었다. 다만 이 경로와 관련해서는 『삼국지(三國志)』 기록에 조위(曹魏)의 군대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을 뒤쫓아 동해안에 이르렀을 때 바다 저편에 ‘이면지인(異面之人)’이 살고 있으며 해가 뜨는 곳 가까이 산다는 말을 얻어들었다는 내용이 보인다(『삼국지』 권30). 한반도 동해안과 일본 열도 간의 해상 교류는 이미 3세기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570년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공식적인 통로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민간 차원의 교류에 의지하여 시도되었다고 보인다. 고구려 사절이 월 지역의 관리에게 농락당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사실은 왜왕이 보낸 사자가 등장하고 나서야 고구려 사절은 현지 관리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고구려 사절은 그를 왜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왕이 받아야 할 예물을 그에게 건넸을 정도로 커다란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고구려 사절이 왜국의 사정에 대해 무지하였음을 알려준다. 나아가 당시 고구려가 왜국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의 수준을 짐작케 해준다.
상대국에 대한 이해는 외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예를 들어 통치체제에 대한 이해는 왜국의 국가적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누가 결정하는지를 알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 된다. 양국이 통교하기를 바란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대왜외교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31년조에 전하는 고구려 사절과 왜국의 첫 대면 장면은 고구려가 왜국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구려 사절은 왜왕을 사칭한 월의 관리에게 농락당하여 표물(表物)을 건넸고, 왜국 조정이 보낸 사자를 보고 나서야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국의 중심지가 월에서 동남(東南)으로 한참 떨어진 야마토분지(大和盆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570년 무렵까지 고구려가 왜국에 대해 알고 있던 사전 정보는 불충분하거나 왜곡된 것이었다. 이런 사정에서 고구려가 왜국에 처음으로 보낸 사절의 임무는 막중하였다. 이들은 왜국을 방문하여 실정을 살피게 된 최초의 고구려 관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608년 수 양제가 왜국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배세청(裵世淸)을 파견했던 것처럼(『수서(隋書)』 권81), 고구려 평원왕 역시 이들 사절을 통해 왜국의 실정을 파악하고자 했다고 여기는 것이 온당하다. 이 점에서 고구려의 대왜외교 목표 역시 이때까지는 구체적이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왜국과의 연계 내용, 즉 왜국이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관계에서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고구려가 왜국의 실정을 알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고구려의 접근에 대해 왜국 조정은 어떠한 입장을 보였을까. 고구려 사절이 월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왜국 조정은 곧바로 사자를 보내 이들을 영접하고 기내(畿內)로 맞아들였다. 영접사의 인도로 고구려 사절단은 근강(近江)을 거쳐 산성국(山城國)에 이르렀고 여기에 마련된 상락관(相樂館)에 머물렀다.
통상의 의례에 따르면 왜국 조정은 조만간 고구려 사절을 왕경으로 불러들이고 고구려 국왕이 보낸 국서를 접수하는 절차를 진행해야 하였다.주 004 그런데 후속 조치는 통상 의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고구려의 국서가 왜국 조정에 전해진 것은 572년 5월의 일이었다. 왜국 조정은 고구려 사절의 도착을 인지한 때부터 국서를 접수하기까지 무려 25개월의 시간을 소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외교에 대해 왜국 조정 내의 논의가 필요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金恩淑, 1994; 平野卓治, 2004). 왜국은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던 백제를 매개로 하여 고구려를 상대해왔고, 당시 왜국 조정에는 백제계 관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고구려 사절의 입국은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그동안의 양국 관계로 보아 대응 시간이 왜국 조정에게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위해 2년여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 사절을 맞이하면서 보인 왜국 조정의 조치는 특별하였다. 월에 급파한 사절 외에도 왜국 조정은 산성국에 사절이 머물 시설을 새로 마련하였으며, 별도 사자를 보내 사절의 이동과 영접에 차질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난파로부터 식선(飾船)을 끌어와 비파호(琵琶湖)에 띄워 사절단을 맞이하는 등 극진한 환대와 예우로써 대하였다. 이 점에서 왜국 조정은 고구려가 사절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왜국 조정은 2년여의 시간을 끌고 나서야 국서를 접수하였다. 이로 보아 국서에 담겼을 고구려 국왕의 뜻은 왜국 조정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즉 양국 관계에 대해 왜국은 ‘통사(通使)’ 수준 이상의 외교관계 구축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왜국 조정이 571년 신라에 사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왜국 조정의 입장을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571년 3월 왜국 조정은 신라에 사자를 보냈고, 8월에는 신라 사절이 왜국에 도착하였다(『일본서기』 권19). 이때의 사행은 고구려의 대왜외교와 연계한 것이었고(金恩淑, 1994), 그 의도는 고구려 사절의 도착을 기회로 삼아 신라를 압박하는 데 있었다고 여겨진다. 곧이어 신라가 사절을 왜국에 보내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6세기 후반에 나타난 국제정세의 변화는 비단 고구려와 신라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친백제적 입장을 견지해오던 왜국의 대외정책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예컨대 왜국이 고구려와 연대하여 신라를 적대한다면, 이미 고구려·백제와 적대하고 있던 신라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70년 이후 왜국이 고구려와의 군사적 유대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반면 왜국과 신라의 교류는 빈번해졌다. 571년의 사절 교환을 계기로, 574년(신라 → 왜국), 575년(왜국 → 신라·백제, 신라 → 왜국), 579년(신라 → 왜국)의 교류가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왜국이 고구려 사절의 방문을 환영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결코 고구려와 연대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李成制, 2009).
한편, 귀국한 사절의 보고주 005를 통해 고구려 조정도 왜국의 입장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여기에는 불분명했던 왜국의 실정에 대한 파악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왜국이 보인 반응이 실망스러운 것이었기에 고구려가 왜를 상대로 한 외교를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왜국에 두 차례 더 사절을 보냈다(573, 574년). 이러한 결정은 고구려가 왜국의 입장과 실정을 충분히 파악했을 상황에서 내려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즉 573년에 이르러 고구려는 왜를 상대로 한 외교전략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573년 고구려가 파견한 사절단은 선박의 파손으로 인명 피해를 입고 가까스로 왜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왜국 조정은 사절의 입국 자체를 불허하였다. 그런 가운데 왜국 조정은 고구려 사절의 귀국을 위해 송사(送使)를 파견하였다. 이 왜국 송사는 고구려 사절과 함께 고구려로 들어갔다가 574년 고구려가 보낸 세 번째 사절단과 동행하여 귀국하였다(『일본서기』권20).
사절의 입국을 불허했던 조치로 보아, 이때까지도 왜국 조정은 고구려를 교섭 상대국으로 인정하기를 망설였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변화의 조짐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고구려 사절의 귀국길에 왜국의 송사가 동행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엿볼 수 있겠다. 한편 고구려에 도착한 왜국 송사 일행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고구려는 정식 외교사절이 아닌 송사를 사자의 예에 준하여 영접하는 것(이영식, 2006)에 그치지 않고 별도로 국왕까지 나서서 중후한 예우를 베풀었다. 이러한 우대는 고구려가 왜국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574년 왜국에 파견된 고구려 사절이 이 사실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 사절이 왜국에 머물면서 체득한 견문이 고구려가 대왜외교를 전개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그 반대 경우는 어떠했을까. 상대를 모르기는 왜국도 매한가지였다. 그런 처지에서 고구려 왕도를 방문하고 돌아간 왜국 송사는 무엇을 견문하고 어떤 내용을 조정에 보고했을까. 그가 한반도 동해안에 상륙하여 평양까지의 경로에서 견문했을 고구려의 정경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왜국이 알고 있었을 기왕의 정보와 다른 상황을 보았을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신라의 공세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또한 고구려 왕도에서는 새로운 왕성인 장안성의 거대한 성곽도시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송사의 견문 내용은 그가 귀국한 뒤 왜국 조정에 보고되었을 것이고, 왜국이 고구려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李成制, 2012).
그런데 574년의 사절 파견을 끝으로, 고구려가 왜국에 사자를 보냈다는 기록은 595년까지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가 더 이상 왜를 상대로 한 외교에 나서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세 차례의 사절 파견에서 드러난 고구려의 관심으로 보아, 왜국이 미온적으로 반응한다고 하여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도리어 고구려의 대왜외교에 대해 왜국이 미온적이고 때론 비우호적이기까지 한 만큼, 고구려는 왜국의 입장을 돌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대왜외교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42년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던 장안성 축조와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장차의 정세 변화에 대비한 대외전략이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새로운 대외전략의 성패는 왜와의 긴밀한 관계가 구축되는지에 달려 있었던 만큼 이 20여 년의 기간은 대왜외교 성립에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된다.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할 근거자료를 현재로서는 제시할 수 없지만, 고구려 승려 혜자의 도왜와 그 활동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혜자는 왜국에 가서 왜국 조정의 실력자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 승려이다. 혜자가 왜국에 갔던 것은 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坂元義種, 1979). 그런 만큼 혜자는 고구려의 대왜외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혜자가 왜국에 갈 수 있었던 경위이다. 왜국 조정의 최고 실력자였던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단지 그가 저명한 고승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혜자는 쇼토쿠태자의 배후에서 수를 상대로 한 왜국의 외교에 관여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佐伯有淸, 1986). 그렇다면 혜자가 외국인으로서 왕국의 실력자 곁에 머물면서 일국의 외교에 관여할 수 있었던 배경은 어디에 있었을까. 더욱이 고구려 국왕이 그를 보냈다고 본다면, 왜국에서 혜자가 보인 활동상은 고구려와 왜국 간의 긴밀한 관계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아가 그 관계는 왜국이 전통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백제와의 관계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혜자가 백제승 혜총(惠聰)과 함께 왜국 불교의 동량이 되었다는 『일본서기』 기록 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이렇게 놓고 보면, 574년 이후 595년에 이르는 동안 왜국은 573년 고구려 사절의 입국을 불허했던 비우호적 태도를 뒤로 하고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이 가져온 결과라고 여겨진다.
570년대에 들어서 고구려가 남조의 진과 동해 건너의 왜국에 적극적으로 외교를 전개하였던 것과 달리 북제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573년이 되어 사절 파견 기록이 보이는데, 그 전의 사행은 565년이었다는 점에서 6세기 전반기에 북조를 상대로 보였던 잦은 사절 파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서 고구려가 북제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북조 중심의 대외관계만으로는 새로운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변화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 대응이 장안성 축조의 방어체제 정비와 함께 진·왜국과의 연계라는 새로운 대외전략이었던 것이다. 백제가 북제에 조공하고 북제의 백제왕 책봉이 이어졌던 사실(『북제서』 권8)에서 드러나듯이, 북제가 새로운 연결 상대로 백제를 중시하게 되었던 것 역시 이 시기 고구려를 둘러싼 대외관계에서 보이는 새로운 변화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 속에서 595년 고구려 승려 혜자가 왜국으로 건너가 백제 승려 혜총과 나란히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구려와 왜의 관계가 어느덧 왜와 백제의 관계에 버금갈 위치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570년 이래 전개된 고구려의 대왜외교가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살피는 데 유의할 대목이다.
북제는 서쪽의 북주에 대해 한때 우세를 점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내정 혼란이 이어지다가 577년 북주에 멸망하였다. 북제를 무너뜨림으로써 북주는 북중국 전체를 차지하였고, 고구려와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북중국의 정세 변화에 대해, 고구려는 곧바로 북주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았다(『주서(周書)』 권49). 한편 북제와 연결을 꾀하던 백제의 외교도 이어졌다. 577년과 이듬해에 백제 사절이 북주를 방문했던 것이다(『주서』 권49). 578년에는 신라가 북주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사행으로 보아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 모두가 새로운 세력 북주의 등장에 주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북주는 581년 수로 교체됨으로써 고구려의 서방에 변화를 몰고 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구려의 서변과 접한 영주에 북제의 유신(遺臣) 고보녕(高寶寧)이 잔존해 있다가 수가 들어서고 3년이 되어서야 평정되었다(『북사(北史)』권75)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남조는 후경(侯景)의 난(548~552년)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서변은 현재의 사천(四川)·운남(雲南)·귀주(貴州) 등지를 북주에게 빼앗겼고, 장강 이북은 북제의 차지가 되었다. 진(陳)이 수에게 멸망했을 때의 호구는 50만 호 200만 구에 불과하였다. 약세의 남조에 대해 주변 국가의 사행 역시 크게 감소하였다. 진에 견사한 국가가 고작 12개국이었고, 그 횟수는 30여 회에 불과하였다(金鍾完, 2002). 이 가운데 고구려·신라의 사절 파견은 각각 6회로 진과 통교한 나라 가운데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이 시기 고구려는 새로운 대외전략의 일환으로 남조와의 관계 구축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조 간의 대결관계가 종식되어 가는 추세에 비춰볼 때 진의 국가적 역량은 고구려의 의도에 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영주의 고보녕 세력을 평정한 수의 세력이 고구려의 서변에 이르자, 고구려가 수와 우호하려 했던 연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