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란·말갈과의 관계와 요서 경영
5. 거란·말갈과의 관계와 요서 경영
6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또 하나 살펴봐야 할 상대가 있다. 거란과 말갈이 그들인데, 이들은 외교적 교섭의 상대라기보다는 복속이나 부용(附傭)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그 관계가 중국의 남북조나 돌궐, 왜국과의 관계와 성격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고구려와 이들의 관계를 이 시기 국제관계와 함께 살펴봐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양자 간의 관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향배를 둘러싸고 고구려가 북중국 왕조나 돌궐과 같은 북방유목세력을 상대해야만 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요서라는 지역공간을 통해 북조나 북방유목세력과 고구려 사이에 개재(介在)해 있어, 이들의 향방이 고구려의 서변, 즉 요서 일대에서의 역관계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요서는 대흥안령(大興安嶺) 방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북방유목세력과, 하북(河北)에서 동북진해온 중국세력이 만나는 합류지점이자 다른 방면으로 진출해 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日野開三郞, 1949; 盧泰敦, 1984). 북위 이래 북조는 여기에 영주를 설치하여 교두보로 삼았고, 고구려는 이미 전연과 후연 그리고 북위를 상대하며 요서의 전략적 중요성을 경험해왔다. 『위서(魏書)』 권100 거란전에는 479년 고구려가 유연과 함께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하려 모의했던 사건이 전하는데, 이러한 연결이 가능할 수 있었던 통로가 바로 요서였다. 시라무렌하와 송막(松漠) 지방을 거쳐 몽골 초원지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李成制, 2005). 이는 서방에 대한 고구려의 대외전략이 요서의 지역공간을 통해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세기 무렵 요서에 자리잡고 있던 종족 가운데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인 세력이 거란이었다. 만단부(萬丹部)·하대하부(何大何部)·북불욱부(伏弗郁部)·필려부(匹黎部) 등 여러 부(『위서』권100)로 구성된 거란은 시라무렌하 유역에서 서요하 일대까지 거주하여(노태돈, 1999), 그 분포지역에 따라 고구려나 북조 혹은 북방유목세력과 관계를 맺어왔다.
북위시대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거란의] 부락 1만여 구가 내부(內附)를 청해오니, [북위는 이들을] 백랑하(白狼河)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 뒤에 돌궐의 핍박을 받아 다시 [거란의] 1만 가가 고구려에 기거(寄居)하였다. _ 『수서』권84
고구려는 광개토왕대 패려 공략을 통해 거란의 일부 세력을 복속한 바 있었다. 그러던 양자 관계가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확대되어 있었음을 위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본거지에서 쫓겨난 거란 1만여 구가 백랑하(현재의 조양 서남쪽 대릉하 상류)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은 고구려 세력이 서진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거란 1만 가가 고구려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본래의 신속관계에서 벗어나 고구려에 의지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구려는 거란의 일부 세력을 지배 아래 두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란의 다른 세력들은 북조와 돌궐의 통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후자의 사건은 돌궐의 핍박을 받았다는 것에서 돌궐이 몽골초원에서 남하해왔던 6세기 중반의 일로, 이때의 거란 1만 가는 본래 유연의 세력 아래 있었던 이들로 보인다(李在成, 1996; 盧泰敦, 1999). 앞서 보았듯이 고구려는 남진해온 돌궐을 백암성에서 물리친 바 있었다. 고구려가 돌궐의 팽창에 대항하자, 거란 1만 가는 신속의 상대를 바꾸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북조 그리고 돌궐 간의 역관계 변화가 곧바로 거란과 이들 세력 간의 관계에 영향을 주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요서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거란에 대한 분점 양상은 유동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돌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북조 그리고 북방유목세력이 요서를 분점하고 있던 세력관계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세력균형 속에서 고구려와 북조, 돌궐은 거란 세력을 일부씩 통제하고 있었다.
한편 말갈은 6세기 들어서 요서 지역에서 비로소 그 본격적인 활동을 보이는 세력이다. 말갈이 전 시대에 모습을 보였던 물길의 후신인지는 분명치 않다. 7세기 사서 기록은 이 둘을 동일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자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이정빈, 2018). 물길은 속말수(速末水, 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 잡았던 세력으로. 고구려 북쪽에서 요하 이동까지 분포하였다(김락기, 2013; 余昊奎, 2018).
물길은 475년 사자 을력지를 북위에 보내 조공한 이래(『위서』권100), 북위 멸망기까지 여러 차례 조공을 이어나갔다(日野開三郞, 1949).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북위의 지원을 바랐던 것이다. 이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송화강 유역에서 출발한 을력지가 동서 횡단 경로를 이용하지 않고 고구려 영역을 크게 우회하여 현재의 요령성 조양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고구려는 물길과 북위의 교섭을 가로막으려 하였다(日野開三郞, 1949). 그리고 이러한 적대관계는 6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송화강 유역의 말갈이 고구려를 자주 침략하였고, 수 양제 시기에 이르러 이들은 고구려에게 크게 패해 거수 돌지계(突地稽)가 부중을 이끌고 수에 귀부하게 되었던 것이다(『수서』권81).
6세기 요서 지역에서 모습을 보인 말갈은, 북주가 북제를 무너뜨리자 이에 저항했던 영주자사 고보녕 관련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북제의 영주자사였던 고보녕은 북주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였는데, 거란·말갈이 그 군사력의 일부로서 모습을 보인다(『북사』 권73). 여기에 보이는 말갈이 어떤 세력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와 관련하여 553년 북제 문선제가 거란을 공략하여 포로 10만 구를 얻어 이들을 제주(諸州)에 분치했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이러한 공백상황에서 속말수 유역의 말갈이 요서로 들어갔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이정빈, 2018). 돌궐의 비호 아래 요서 지역에 말갈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거란을 격파하고 이들을 분산시켜 요서 일대의 세력관계를 재편한 쪽은 북제였다는 점에서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고보녕이 북제 말부터 영주자사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북주에 반기를 들 수 있었다고 보면, 그 휘하의 말갈을 반드시 요서 경내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공을 통해 영주와 교섭하던 말갈이 이때에는 군사적 지원에 나섰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세기 말 고구려에 패한 돌지계의 속말말갈(粟末靺鞨) 세력이 부여성(扶餘城) 서북에서 요서로 옮겨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연고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이렇게 요서에 등장한 말갈과 고구려 등 여러 세력의 관계는 거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말갈 역시 여러 부로 구성되어 고보녕을 지원한 세력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군의 일부를 구성하며 고구려와 운명을 함께한 이들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말갈을 거란과 함께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 시기에 이들이 요서라는 공간에 들어와 고구려와 북조 그리고 북방유목세력 간에 끼인 세력의 하나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편 고보녕 세력은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주가 북제를 무너뜨린 뒤 고구려가 직접 상대하게 된 세력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에는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군대를 보내 요동을 공격해오니, [평원]왕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배산(拜山)의 들판에서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내용 그대로 이해하면 북주의 침공에 고구려가 맞선 것이 된다(韓昇, 1995; 박경철, 2005; 김택민, 2014). 그러나 고보녕이 요서에서 웅거하여 북주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고보녕 세력권을 지나 북주군이 고구려에 침입할 수는 없었다고 보인다. 온달전에 보이는 후주군은 고보녕 세력이라고 이해하는 것(여호규, 2002)이 타당하다. 북주가 처음에는 그의 영주자사직을 그대로 두었다는 점에서 고구려는 그의 군대를 북주 즉 후주군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이정빈, 2017). 고보녕이 북주에 대항하고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갈·거란 세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라고 보면, 이들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온달전 기록은 거란·말갈의 분할을 놓고 고구려가 서방의 다른 세력과 대립했음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나중의 일이지만 고보녕 세력을 평정한 수가 요서 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취한 조치는 영주총관부(營州總管府) 설치라는 관부의 복구와 함께 거란·말갈 세력을 포섭하는 것이었다(李成制, 2000). 그러면 여기에 대응하여 고구려는 어떻게 요서 지역에서 거란·말갈을 통제 혹은 관리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가 요서에 마련한 거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612년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나서서 실패했음을 전하는 기록에는 이때 수군의 전과가 요하 서쪽의 무려라(武厲邏) 한 곳에 불과했음을 특필하고 있다(『수서』 권81). 그리고 같은 기사에 대해 『자치통감』 호삼성(胡三省) 주(注)는 “고구려는 요수 서쪽에 라(邏)를 두고 요수를 건너는 자를 경계하고 감시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어(『자치통감』 권181), 무려라가 요하 서변에 설치된 고구려 군사시설임을 보여준다.
무려라의 위치는 현재의 요령성 신민시(新民市) 고대자산성(高臺子山城) 일대로 추정된다(松井等, 1913). 이곳은 현재도 요하를 건너는 주요 경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6세기 당시에도 고구려의 군사시설이 배치될 만한 곳이었다. 다만 요하의 도하 경로는 최소 세 곳 이상이라는 점에서 이들 도하 지점 부근에도 무려라와 같은 ‘라’ 시설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노태돈, 1999; 李成制, 2005).
그런데 고대자산성은 요하 서안(西岸)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지나치게 요하에 근접해 있다. 이 점에서 무려라와 같은 요하선상의 라는 요하 도하의 통로를 관장하는 기능은 다할 수 있겠지만, 그 저편의 요서평원에 대해서는 조망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곳이다. 북조가 영주를 두어 요서 지배와 함께 거란·말갈 세력을 통제해 나갔음을 염두에 두면, 무려라와 같은 요하선상의 라만으로는 이를 상대하기에 부족해 보인다(李成制, 2005).
여기에서 612년의 전쟁에 앞서 수의 장수 이경(李景)이 고구려 무려성(武厲城)을 공격하여 함락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수서』 권65). 무려성은 무려라와 같은 곳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이정빈, 2017). 하지만 ‘요수를 건너는 자들을 경계하고 감시하였다’는 기능으로 보아 라는 관진(關津) 정도의 군사시설로, 요동성 등에서 연상되는 군사·행정 거점으로서의 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이러한 거점에 걸맞는 곳으로 한대에는 요동군 서부도위(西部都尉) 치소 무려현(無慮縣)이 있었고,주 006 그 후신으로 당대의 무려수착(巫閭守捉)이 보인다. 그 위치는 요령성 북진시(北鎭市) 요둔향(寥屯鄕) 대량갑촌(大亮甲村) 일대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요서 서부에 위치한 영주를 상대하며 귀부와 이탈을 일삼는 거란·말갈을 관리할 고구려의 전진기지가 세워질 만한 곳이었다. 즉 이경열전에 보이는 무려성은 요하선상의 라 시설과는 별개의 성곽으로, 수가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확보해야 했던 고구려의 요서 거점이었다고 이해된다(李成制, 2013).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가 수·당과 대결하던 시기에 이르면, 거란은 주로 수·당군의 일원으로, 말갈은 고구려군의 일부로 모습을 보인다. 군사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거란과 말갈의 향배는 고구려와 수·당의 대결관계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末松保和, 1931;李龍範, 1959; 韓昇, 1995). 하지만 6세기에도 고구려가 군사적 필요에서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고는 여길 수 없다. 6세기 거란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특징은 고구려와 북조, 돌궐이 거란을 분할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고구려가 그 세력 아래 들어온 거란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군사적 역량이란 그리 대단한 것일 수 없다. 반면 거란이 요서의 현지세력이라는 사실은 고구려의 대외전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요서를 통해 고구려는 북방 유목세력과 연결을 꾀할 수 있었는데, 거란은 두 세력 사이에 개재해 있다는 점에서 양측의 연결을 가능케 해주는 매개였다. 그 세력의 일부만으로도 고구려의 대외전략에서 필요한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요서는 요동의 전면에 위치하여 고구려가 북조와 북방 유목세력을 상대하는 공간이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서는 고구려의 서변 방어와 안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방벽이자 전진기지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서변을 보호하는 울타리를 제거하고 고구려를 외부와 단절시키고자 하는 세력은 우선 고구려와 거란을 떼어놓는 작업부터 시작해야만 하였다. 수의 요서 진출은 그 시작을 의미하였다(李成制,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