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제 운영에 나타난 신분제 구조
4. 관제 운영에 나타난 신분제 구조
전술했듯이 고대 관등제는 단순히 관직의 서열을 표시하는 관품이 아니라 다양한 지배세력의 정치적 위상이나 신분 등급을 표시하는 위계로 기능했다. 고대는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에 관등제도 신분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진골, 육두품 등 신분 등급에 따라 관등의 승진 상한이 규정된 신라 골품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백제의 16관등제도 크게 6좌평(佐平)과 달솔(達率) 이하 다섯의 솔(率)류 관등, 7~11위의 덕(德)류 관등, 그 이하 12~16위의 하위 관등 등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색(紫色), 비색(緋色), 청색(靑色) 등의 관복제에 상응했다. 백제 관등제도 신분제에 상응하여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의 관등제도 신분제에 상응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신분 등급에 따라 관등 승진이나 각종 관직 취임에 제한이 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해 제5위 관등인 조의두대형(위두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국가의 기밀을 관장했다는 『고려기』 기사가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고려기』에 따르면 국자박사, 대박사, 사인통사, 전객 등의 관직은 소형(小兄) 이상 관등 소지자가 취임했다고 한다. 무관직 가운데 대당주(大幢主)라고 불린 상급 지휘관인 대모달에는 제5위인 조의두대형 이상 관등 소지자가 취임했고, 천 명 단위의 독립부대인 당을 지휘했던 말객에는 제7위인 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취임했다. 6세기 후반의 〈평양성각자성석〉에는 각 성벽 구간의 축성 책임자가 나오는데, 총 5개 가운데 소형이 4명, 상위사자가 1명이다. 각급 관직 취임에 일정한 관등상의 제약이 존재했고, 관등은 관직 취임의 기준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또한 표4에서 보듯이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과 남산은 거의 동일한 연령에 관등 승진이 이루어졌다. 9세에 일종의 입사직인 선인을 받은 다음, 15세에 소형(중리소형), 18세에 대형(중리대형), 23세에 위두대형(중리위두대형) 등으로 승진한 것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 후기 관등제 운영에서도 관직 취임과 관련한 관등의 상한이나 하한 규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4 | 남생과 남산의 관등 승진표
| 연령 | 남생 | 남산 |
| 9 | 先人 | |
| 15 | 中裏小兄 | 小兄 |
| 18 | 中裏大兄 | 大兄 |
| 21 | 中裏大活 | |
| 23 | 中裏位頭大兄 | 位頭大兄 |
| 24 | 將軍 兼任 | |
| 中軍主活 | ||
| 28 | 莫離支, 三軍大將軍 兼任 | |
| 30 | 太大莫離支 | |
| 32 | 太莫離支 |
*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도 9세에 선인이 됨.
이에 다케다 유키오는 『고려기』 기사와 남생·남산의 관등 승진 기사를 종합하여 13등급 관등제가 제11위 소형, 제7위 대형, 제5위 위두대형 등을 하한으로 하는 네 계층 구조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파악했다(武田幸男, 1978; 1989). 이에 대해 임기환은 고구려 후기의 관제(冠制)를 청라관(靑羅冠), 비라관(緋羅冠), 절풍·조우관(折風·鳥羽冠) 등 세 그룹으로 복원한 다음, 관등제도 세 계층 구조로 운영되었다고 추정했다. 즉 고구려 후기의 12등급 관등제가 각각 대사자와 대형, 상위사자와 소형 등을 경계로 하는 세 계층 구조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임기환, 1999; 2004).
두 견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고려기』 기사나 남생·남산의 관등 승진 기사에 나타난 제10(11)위 소형과 제7위 대형을 관직 취임의 하한으로 볼 것인지 상한으로 볼 것인지에 있다. 다케다 유키오가 이들을 각 관직 취임의 하한 관등으로 보았다면, 임기환은 상한 관등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후기 관등제는 실제 몇 그룹으로 구성되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후기 관등제가 3세기 후반 이래 형계와 사자계 관등이 여러 차례 분화하며 성립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고구려 중기 관등제의 기본 구조는 2세기 말 이후 사자가 (대)사자와 (소)사자로 분화하고, 대형과 소형이 성립하면서 마련되었다. 그런데 6세기로 편년되는 〈농오리산성마애석각〉에 ‘소대사자(小大使者)’가 나온다(김례환·류택규, 1958). 『삼국사기』 직관지의 고구려 관명 가운데 대상(大相)은 태대사자, 종대상(從大相)은 대사자에 대응되므로, 소대사자의 ‘소(小)’는 대상에 비해 한 단계 낮은 종대상의 ‘종(從)’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된다. 사자가 (대)사자와 (소)사자로 분화한 다음, 대사자가 다시 (태)대사자와 (소)대사자로 분화하면서 소대사자가 성립했던 것이다.
사자계 관등이 (대)사자와 (소)사자로 분화한 다음, 다시 대사자가 (태)대사자와 (소)대사자로 2차 분화한 것인데, 2차 분화 이후 (태)대사자는 계속 태대사자라는 관등명으로 불렸지만, (소)대사자는 사용상의 불편함 때문에 앞의 ‘소’자를 생략하고 대사자로 약칭했다. 그런데 이러한 2차 분화양상은 형계 관등에서도 관찰된다. 408년에 작성된 〈덕흥리고분묵서명〉에는 ‘소대형’이라는 관등명이 보이는데, ‘태대형’의 존재를 고려하면, 소대형 역시 대형이 (태)대형과 (소)대형으로 분화하면서 출현한 관등으로 볼 수 있다. 형계 관등 역시 3세기 후반에 대형과 소형이 대두했다가, 그 후 대형이 다시 (태)대형과 (소)대형으로 2차 분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사자계나 형계 관등은 3세기 후반에는 대사자와 (소)사자, 대형과 소형 등으로 이루어졌다가, 그 이후 대사자가 (태)대사자·(소)대사자, 대형이 (태)대형·(소)대형 등으로 2차 분화하는 과정을 겪었다(임기환, 1995; 2004). 그리고 대사자·대형의 2차 분화로 생성된 관등 가운데 (소)대사자나 (소)대형은 대사자·대형으로 약칭되어 기존의 대사자·대형과 동일한 관등명으로 사용되었다. 외형상 태대사자와 태대형이라는 상위 관등이 새롭게 생성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대사자·대형의 2차 분화는 상향 분화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5세기 후반 〈충주고구려비〉의 ‘발위사자’와 6세기 후반 〈평양성각자성석〉의 ‘상위사(上位使)’ 등은 명칭의 유사성과 관등제상의 서열로 보아 사자에서 분화한 (대)사자·(소)사자 가운데 하위의 (소)사자가 ‘발위’와 ‘상위’로 2차 분화한 결과로 파악된다. (소)사자가 2차 분화할 때, 대사자의 2차 분화와 달리 대·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기존 관등명과의 혼동이나 사용상의 불편함 등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령 (소)사자라는 관등의 앞에 대·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대)소사자, (소)소사자 등이 될 텐데, (대)소사자라는 명칭은 (소)대사자라는 관등명과 혼동될 우려가 있고, (소)소사자는 사용하기 불편했을 것이다. 또한 (소)사자의 약칭인 사자의 앞에 대·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대)사자, (소)사자 등이 될 텐데, 역시 (소)대사자의 약칭인 대사자와 혼동된다. 이에 따라 (소)사자의 2차 분화 시에는 대·소 대신 발위·상위라는 용어를 관칭하여 분화시켰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소)사자에서 발위사자나 상위사자가 분화했다면, 후기 관등제에서 (소)사자는 발위사자·상위사자와 별개의 관등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둘 중 어느 하나와 동일한 관등명으로 사용되거나 분화와 동시에 소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형(小兄)과 제형(諸兄, 翳屬)도 하위 그룹에 속했다는 점에서 (소)사자가 2차 분화할 무렵 소형이 재차 분화한 결과로 추정된다. 소형이 2차 분화할 때도 (소)사자의 경우처럼 대·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소)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존 관등명과의 혼동이나 사용상의 불편함 등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령 소형이라는 관등명에 대·소라는 용어를 관칭한다면 (대)소형, (소)소형 등이 될 텐데 (대)소형이라는 명칭은 기존의 (소)대형이라는 관등명과 혼동될 우려가 있고, (소)소형은 사용하기 불편했을 것이다.
이에 소형이라는 관등명은 그대로 둔 채 소형보다 하위 관등으로 ‘제형’을 설정하는 형태로 2차 분화시켰다고 추정된다. 후기 관등제에서 하위 그룹에 속한 소형의 2차 분화는 하향 분화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소)사자의 2차 분화도 하향 분화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즉 (소)사자는 2차 분화 이후 생성된 발위사자와 상위사자 가운데 상위인 발위사자와 동일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임기환, 1995; 2004).
이처럼 중기 관등제는 단계적인 분화를 거쳐 성립했는데, 3세기 후반에 대형·소형, 대사자·사자 등의 형태로 기본 골격을 갖춘 다음, 4세기 후반에는 대형과 대사자 등 상위 관등이 태대형·소대형과 태대사자·소대사자 등으로 2차 분화했다. 그리고 5세기 후반 이전에는 (소)사자가 발위사자(소사자)·상위사자로 2차 분화했고, 소형도 소형·제형으로 분화했다. 이러한 2차 분화 과정에서 상위 관등인 대형·대사자는 상향 분화한 반면, 하위 관등인 (소)사자·소형은 하향 분화했다.
후기의 형계 관등 5종 가운데 태대형·대형은 대형의 2차 분화, 소형·제형은 소형의 2차 분화로 중기에 성립했던 것이다. 또한 후기의 사자계 관등 4종 가운데 태대사자·대사자는 대사자의 2차 분화, 발위사자(소사자)·상위사자는 (소)사자의 2차 분화로 중기에 이미 성립했던 것이다. 이는 형계와 사자계 관등 가운데 위두대형이 가장 늦게 성립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위두대형을 제외한 후기의 형계나 사자계 관등은 거의 대부분 중기에 성립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은 형계와 사자계 관등의 단계적인 분화는 관등제의 계층화로 이어졌다. 모두루가의 관등 승습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모두루가는 염모 이래 모두루까지 3대(또는 4대)에 걸쳐 대형~대사자라는 관등을 승습했다. 4세기 후반에 대형과 대사자가 태대형·소대형 및 태대사자·소대사자로 분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상기하면, 모두루가는 대형·대사자가 2차 분화한 관등 가운데 하위 관등인 (소)대사자-(소)대형을 승습하던 중급 귀족으로 추정된다(武田幸男, 1989).
한편 전술했듯이 『한원』 소인 『고려기』에 따르면 고구려 후기에 제5위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국가기밀과 군사징발 등을 관장했고, 최고 무관직인 대모달(大模達, 大幢主)에도 위두대형 이상이 임명되었다. 후기 관등제에서 제5위인 위두대형은 최상층 관등의 하한선을 이루었던 것이다(武田幸男, 1978; 1989). 그런데 후기 관등제의 구조상 위두대형은 대형·대사자의 2차 분화로 형성된 태대형(2위)·태대사자(4위) 및 대사자(6위)·대형(7위)의 경계선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4~5세기 모두루가의 사례와 연관지어 보면, 위두대형은 대사자·대형의 상향 분화로 성립된 관등군을 태대형·태대사자 및 소대사자·소대형 등의 두 계층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고 짐작된다. 그리고 대사자·대형과 사자·소형이 본래 서로 다른 등급의 관등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사자·대형과 그 이하의 관등은 중기 이래 별도의 그룹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자·소형의 2차 분화와 함께 하위 관직이 다수로 늘어났다는 점에서 별도의 그룹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국자박사, 대박사, 사인통사, 전객 등 하위 실무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직의 하한선인 소형이 경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종합하면 고구려 후기의 12관등제는 크게 제1위 대대로에서 제5위 위두대형까지의 최상위 그룹, 제6위 대사자와 제7위 대형까지의 중상위 그룹, 제8위 발위사자에서 제10위 소형까지의 중하위 그룹, 제11위 제형과 제12위 선인까지의 최하위 그룹 등 4개 그룹으로 나뉘어졌을 것으로 파악된다. 표4에서 보듯이 남생과 남산은 각 관등 그룹의 최하위 관등인 선인, 소형, 대형, 위두대형 등을 수여받는 형태로 초고속으로 승진했던 것이다. 고구려 관등제도 신라나 백제처럼 기본적으로 고대 신분제에 의해 운영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 후기의 귀족연립체제도 고대 신분제에 기초하여 최고위 귀족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점한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